정년퇴직한 지 20일째다. 많은 지인들께서 정년퇴직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여기저기 다니고 있다. "주변에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두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나서 가슴 뜨거워진다. 어제 저녁에도 그랬다.
직장에서 홍보실에 35년 있다 보니 업무로 인해 만난 모임이다. 언론사 기자들과 기업체 홍보담당자 8명이 의기투합했다. 15년도 더 된 모임이다. 골프를 치러 다니는 모임으로 봄, 가을로 골프 치러 여기저기를 다녔다. 그래서 8명이다. 제주에도 가고 태안 골든베이에도 가고 서울 근교 내로라 하는 골프장에서 우애를 다졌다. 다들 해당 기업에서 한가닥씩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멤버 중 한 명은 3년 전 퇴직을 해서 자유인으로 살고 계시고 그 뒤를 이어 내가 자유인으로 합류했다. 나이 50대 초중반이어서 아직 기업에 계신 4명은 모두 임원이 되어 맹활약을 하고, 언론사에 계신 분들도 다들 편집국장과 임원을 하고 있다. 서로 일로 만나 이렇게 오랜 세월 같이 모이기 쉽지 않음에도 끈끈한 정으로 뭉쳐 있다. 고맙고 반가운 모임이다.
그렇게 정년퇴직을 한 나를 핑계 삼아 찬바람 부는 겨울 초입에 송년 모임을 겸해 공덕역 근처에서 모였다. "정년퇴직! 부럽습니다. 저희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1년짜리 파리 인생이라 불안불안 연명하고 있어요. 저희 같은 직장인들의 모델이십니다", "퇴직하신 대부분 사람들이 퇴직과 동시에 종적을 감추기도 하는데 형님처럼 당당하고 기꺼이 정년을 맞이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그래서 보기 좋습니다" 등등, 혹시나 퇴직하고 의기소침해 있을까 봐 멤버들의 힘내라는 응원의 멘트들이 이어진다.
그렇게 족발에 막걸리를 한 순배 걸치고 2차로 간 곳이 '올굿' LP바다. 멤버 중 한 명이 단골로 다니는 곳이다. 다들 50대를 넘어선 나이라 올드팝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길거리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카펜터즈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 라디오를 켜 놓고 '별밤'에 엽서 사연을 보내고 언제 나오나 밤마다 기다려도 보고, 소니 워크맨의 스테레오 사운드 이어폰에 화들짝 놀라는 경이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다.
이 '올굿'LP 바에서는 손님이 신청곡을 적어 주인장께 주면 틀어준다. 주인장이 혼자 하시는 관계로 일일이 LP판을 찾아 텐테이블에 올려놓고 곡을 틀어주는 것은 아니고 디지털 검색을 하여 노래를 틀어준다. 카운터 뒤의 LP판은 인테리어용인가? ㅎㅎ 그럼 어떤가? 올드 팝과 가요가 흘러나오는 이 분위기만으로도 추억의 시간으로 끌고 가기에 충분하다.
기네스 생맥주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놓인 신청곡 용지에 각자 듣고 싶은 노래들을 하나씩 적기로 한다. 그런데 아주 묘한 공감대가 있다. 신청곡 하나하나에 모두 사연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럴 수가!!
신청한 팝송이 하나씩 흘러나올 때마다 신청한 사람의 추억과 사연이 하나씩 소환된다. 에디트 피아프의 'La vie en rose'와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도 나오고, 케빈코스트너와 휘트니 휴스턴이 주연한 1992년 영화 '보디가드'의 OST인 'I will always love you'가 스피커를 뚫고 들려온다. 이 노래를 신청한 사람이 이 곡과 이어지는 사연을 털어놓는다. 이 영화를 당시에 두 번이나 영화관에 가서 봤는데 각각 다른 여자친구와 봤다고, 그런데 두 번째 같이 본 여자분이 지금의 아내가 되었다고.
나는 Poco의 'Sea of heartbreak'와 Chicago의 'Hard to say I'm sorry'를 신청했다. 이 곡은 내가 대입학력고사를 치르던 1982년도 12월 겨울 초입의 타임머신을 소환한다. 학력고사를 끝내고 대학 원서를 접수할 때까지 정말 세상 최고의 화양연화 시절을 보낼 때다. 그 당시 DJ가 있는 음악다방이 유행을 했는데 고등학생 신분이라 한 번도 못 가보다가, 학력고사 끝난 어느 날 친구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처음으로 음악다방이라는 곳을 들어섰다. 그때 처음으로 내 귀에 들렸던 노래가 바로 Poco의 'Sea of heartbreak'였다. 그때는 가사도 몰랐다. 두 귀로 들리는 사운드의 음률만이 온몸에 전해졌다. 그때부터 이 곡은 나의 솔메이트곡이 되어버렸다.
연령대마다 같은 세대들이 공감하는 노래들이 있다. 7080이라고 치부되는 세대들이 듣는 올드팝과 가요가 있고 2000년대 넘어 젊은 세대들이 듣는 감각적인 노래들도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한 세대 넘은 노래를 들으면 "뭐라고 하는 거야? 가사가 들리지도 않는데", "그냥 비트에 맞춰 중얼거리는 거야? 요즘 애들은 감성이 없어요", "우리가 듣던 노래들을 봐 봐. 노래가 다 시잖아. 가수는 시인이나 마찬가지잖아!" 등등 신세대들의 노래 취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트로트를 듣는 사람들을 혐오하듯 바라보기도 한다. 각 시대마다 그때를 풍미하던 감성과 가락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걸 노래 공감이라고 한다.
오늘은 기타를 꺼내 추억을 소환할 노래를 불러봐야겠다. 찬바람 부는 겨울초입이라 센티멘탈해지는 걸까? 백수의 시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추억을 소환하고 회상에도 빠져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생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데 많은 추억을 만들어보자. 기쁘고 행복한 추억으로 채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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