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숙 산원 자리를 나와서 오른쪽으로 30미터 정도 가면 '진명여중고교 터'가 나온다. 이 학교의 첫 이름은 '진명여학교'이다. 개교 이래 자리를 지키던 학교는 1989년 목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동에 이화여학교가 있었다면 서촌에는 진명여학교가 있었다. 학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교가이다.
역사 깊은 자핫골 진명의 배움집/ 뒤에는 푸른 백악 옆에는 경무대/ 봄 가을 여름 겨울 이곳에 배워/ 수려한 저 봉우리 우리 기상일세/ 오~ 배달의 딸 진명이거라/ 오~ 배달의 딸 진명이거라 (진명여중고 교가)
교가는 소재한 지역의 자연을 가사에 담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학교 주변의 유명한 산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자주 쓰이는 가사는 '높은 산의 정기를 받는다'는 것과 '**강을 따라 학교의 유구한 역사가 흐른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진명여학교의 교가에서도 어김없이 '백악산'이 들어간다. 진명여학교가 위치한 백악산은 한양의 '진산'이기 때문에 안 들어가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데 다른 학교 교가에는 없는 내용이 있다. 경무대. 청와대라는 이름이 쓰이기 전에는 경무대라 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었던 시절이다. 대통령이 집무하는 곳인 경무대와 가장 가까운 학교가 진명여학교였다.
교가 첫 부분의 '역사 깊은 자핫골'에서 자핫골은 어디를 말할까? 학교가 위치한 창성동에는 자수궁교가 있었다. 자수궁은 이성계의 일곱 번째 아들 무안대군 방번의 집이었는데, 세종 때는 후궁 가운데 비구니가 된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다. 보통 궁궐에서 모시던 왕이 승하하거나, 고변으로 왕이 바뀔 때는 왕을 받들던 여관(궁녀)들도 함께 물러나게 된다. 궁녀는 공인된 '왕의 여자'이기 때문이다. 물러난 궁녀들은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는 것이 관례였다. 자수궁은 그런 비구니가 된 궁녀들이 묵는 곳이었다. 자수궁은 통인동, 옥인동, 효자동, 창성동이 맞닿아 네거리를 이루었고, 그 앞의 다리를 자수궁교라 했다. 이 동네 이름이 자핫골. 자수궁이 있어 잣골로도 불렀다고 한다.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자하문 터널이 나온다. 그래서 자하문 인근의 동네라 자핫골로 불렀다는 설명도 있다.
학교가 목동으로 이사가기 전, 이 학교는 말괄량이 여학생들이 떠드는 소리에 동네가 들썩였다. 아마도 학생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기 위해 경무대로 밀려가는 1960년의 4·19 시위대도 보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1979년에는 지금은 무궁화동산으로 변한 '안가'에서 발사된 10·26 총소리도 들었을지 모른다. 이런 정치적 격변들이 한참 예민한 사춘기 소녀들의 마음을 얼마나 긴장시켰을 것인가. 오래된 학교답게 학교의 상징인 로고도1948년 9월 이순석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등대와 돛단배, 파도 모양이다. '이명래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 선생의 막내 동생 이순석은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인들의 아지트인 '낙랑파라'를 열었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늠름하게 버티고 선 해태상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 학교가 목동으로 이사간 것은 학교의 지리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경무대가 코앞이라 학교의 위치는 더 없이 좋았으나 체육 시간에도 함부로 소리를 지를수 없었다. 낮 시간에는 이승만대통령이 낮잠 자는 시간이라서 학생들이 큰소리로 떠드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떠들썩하던 이 동네는 학교가 이사 간 이후 길도 넓어지고 민가들도 사라지면서 지금은 참 조용한 동네가 되었다.
1929년 4월 22일 이 학교 학생 120명이 탄 전차가 전복되었다. 전차는 효자동 종점을 출발해 적선동 서십자각에서 커브를 틀다가 전복한 것이다. 정원 이상의 승객을 태운 것과 운전사 과속이 문제였다. 사고가 얼마나 컸느냐 하면 학생 120명 중에서 88명이 경성의전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파쇄된 유리창은 우수수하게 차안에 떨어졌으며 전차의 두부는 그렇게 든든한 강철 기둥이 두 가닥으로 깨어져 버린 가운데 여기저기에 아직도 마르지 아니한 선혈이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며 여학생들의 점심밥을 싼 책보는 함부로 흩어졌으며 뒤축 높은 여학생 구두가 거꾸로 세로 굴러다니고 천정에 매어달렸던 전등과 벽에 붙은 거울까지 일일히 몹씨도 파쇄되었고…’(’선혈 임리(淋漓)한 현장’, 조선일보 1929년4월23일)
사고 현장은 참혹했다. 이례적인 대형 참사였다. 차 안에 탄 학생들은 진명여고보 학생들이었다. 8월 1일 입원 치료 중이던 4학년 최계숙이 정신적, 육체적 충격으로 사망했다. 이 사고가 우리나라 대형 교통 사고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학교의 설립자인 엄진원은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헌황귀비(엄 귀비)의 사촌동생으로, 엄 귀비의 하사금으로 명신여학교(숙명여고), 진명여학교, 양정고보를 세웠다. 학생들은 개교기념일만 되면 순헌황귀비의 능에 가서 참배도하고 꽃놀이도하고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4월 22일 개교기념식을 마치고 순헌황귀비릉에 참배를 하러 가기 위해 전차를 타고 가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학교가 이사간 자리에 커다란 표석이 남아있다. 표석에는 진명여학교 1회 졸업생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1908년 1회 졸업생 10명의 사진이다. 운보 김기창을 유명 화가로 키운 어머니 한명윤 여사도 이 학교 1회 졸업생으로 사진에 있을 것이다. 이 근처에서 허영숙 산원을 개업한 허영숙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 나혜석도 1회 졸업생이라 하지만, 이들은 진명여학교에서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바뀐 뒤 1913년 1회로 졸업했다.
이 학교 터에 세워진 표석이 있는 곳은 '삼일당'이라는 진명여고의 강당이 있던 곳이다. 삼일당은 1958년 준공된 지상 3층, 연면적 609평의 건물이다. 6·25 이후 장안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폭격으로 허물어져 있던 상황에서 이 건물은 국제회의를 비롯해서 음악회, 체육대회 등 각종 행사의 단골 장소였다. 삼일당의 휘호는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 10월 27일 낙성식테이프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커팅했다.
비석을 뒤로 하고 청와대 사랑처로 가다가 보니 굉장히 이례적인 암석이 보인다. 처음에는 돌 덩어리들 사이로 시멘트를 버무려 놓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어른 주먹보다 더 큰 돌들이 뭉쳐 더 큰 하나의 암석이 된 것이다. 주인에게 물으니 '석중석', 돌중의 돌이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나라에 이런 돌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암석이 있는 곳을 지나 골목에 들어가니 이제는 정말 보기 어려운 등나무가 뱀처럼 주택을 휘감아 올라간다. 등나무는 성질상 주변의 물체들을 돌고 도는 습성이 있는데 이곳의 등나무는 집의 쇠로 만든 난간을 휘감아 돌아 나온다. 그 모습이 기이하기도 하고 멋지기도 하다. 돌, 나무까지도 서촌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서촌미술인문기행 ⑤] 학생들의 웃음 소리에 대통령이 낮잠을 못 잤다 - 진명여학교 터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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