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은 치료받기 위해 서울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이중섭의 발병은 그가 죽기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5년 명동의 미도파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촌에 사는 친구 정치열의 집에서 하숙하며 전시회를 준비했다. 그는 작품을 팔아 일본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러 갈 계획이었다. 45점 중에 절반이나 팔렸지만 외상 손님이 많았다. 받은 돈도 이중섭의 손에 들어가면 친구 술값으로 사라졌다. 미도파화랑 전시 이후 대구의 전시회에서도 일본에 갈 여비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중섭은 실망이 극에 달해 거식증과 자학 증세까지 보였다. 자신을 파멸시켜 현실의 고달픔을 잊으려 했을까? 간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잘 견뎌 왔던 몸의 장기들이 서서히 고장나기 시작한 것이다. 피란 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냈던 박고석과 그의 친구들은 그를 서울로 불러 올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국군수도병원(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이어 유석진 박사가 운영하는 성베드로신경정신과에서 정성스런 치료를 받으니,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
1955년 성탄을 하루 앞둔 겨울, 함박눈이 내려 북한산이 하얀색으로 채색될 때 화가 박고석은 그를 정릉 자신의 집 근처로 데리고 왔다. 정릉에는 이중섭이 들어오기 한 달 전에 부산에서 함께 우정을 쌓았던 화가 한묵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옆방이 비어 이중섭도 그와 한 지붕 가족이 되었다. 북한산의 삭풍이 살을 에는 곳, 얼음 밑으로 냇물이 흐르는 정릉천 상류, 지금은 북한산 탐방안내소로 변한 청수장 언덕의 집이다. 이중섭이 들어오자 정릉은 예술가들의 훈훈한 정이 피어오르는 동네가 되었다.
"묵과 중섭과 같이 살면서부터 더욱 그 주변에는 두터운 정과 따뜻한 기가 오고가는 친구들이 적지 않게 정릉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구상, 치근호, 김이석, 이기련, 황염수, 오영진, 김병기 등 많은 친구들과 김충선, 이영진, 김영환 등 많은 후배들이 꼬리를 물었다." (박고석의 회고)
중섭을 아끼는 친구, 선배, 후배 예술인들이 산골짜기 정릉으로 모여들었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이중섭은 친구들을 따라 명동의 다방에도 드나들었다. 1956년 봄이다. 이중섭으로 인해 명동이 또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그는 명동에서 수많은 문인, 화가와 어울렸다. 모르는 사람들과 시비 끝에 주먹다짐도 할 만큼 건강도 좋아졌다. 이진섭에게 베니어 합판을 얻어 와 그림을 그렸다. 절친 김환기, 댄디 보이 박인환, 명동 백작 이봉구 등과 어울리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살랐다. 당시의 명동은 인간이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벨에포크'라 부른다.
벨에포크는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를 일컫는다. 문학과 회화, 철학, 음악, 모든 예술 장르가 화려하게 피어난 시기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모든 예술 사조가 이 시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아름다움은 종말을 고한다. 2차 세계대전 후 인간 굴종의 무서운 야만의 시대가 끝났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가 '인간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기를 '벨 에포크 (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절)'라 부른다.
우리 문화사에서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1956년 봄, 이중섭이 명동을 드나들 무렵이다.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지금의 유네스코회관 맞은편 '은성'에서 막걸리집을 운영할 때다. 박인환이 메모지에 시를 쓰면 이진섭이 곡을 만들고 가수 나애심이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다. <세월이 가면>이다. 1980년대 가수 박인희의 목소리로 거리마다 울려 퍼졌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으로 시작되는 노래. 문인들이 다방에서 낙서를 하면 그것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시대였다. 이중섭이 베니어 합판이나 은박지에 그린 그림이 다방 이곳 저곳에 흩어져 다니고 나중에 최고의 여배우가 되는 김지미가 다방 ‘휘가로’에서 커피를 나르던 시절이다. 이 무렵 중랑교 부근 오두막집에 살던 박인환은 못 먹는 술을 밤새워 마시고 술병으로 죽었다. 죽음마저도 아름답게 빛나던 시절, 헐벗고 가난했으나 함께 있으므로 즐거웠던 시대에 이중섭이 있었다.
빛나던 우리의 벨에포크도 잠시, 이중섭의 병이 도졌다. 1956년 초여름 청량리뇌병원 무료 환자실에 입원했다. 간장병으로 황달 증세가 심해지자 박고석과 친구들이 상의 끝에 내린 조처였다. 한편 대구에 있던 구상이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울부짖는 사람, 태질 치는 사람, 벽을 두드리는 사람, 각양각색의 정신병 환자들이 서로 엉켜 있는데 그는 해골이 되어 있었다.” (구상의 회고)
1956년 7월 구상과 차근호는 거식 증세에 황달이 있는 환자를 정신병원에 보내는 것은 아니다 싶어 서대문에 있는 서울적십자병원에 입원시켰다. 청량리뇌병원을 나오며 이중섭은 일일이 각방의 환자들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현관 접수구에서 나오다가 병원에서 준 성경을 반납하고 외상으로 가져온 슬리퍼 값을 물었다.
"형은 와병 중에도 한 폭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가. 여인이 머리에 무엇을 이고 흰 눈을 맞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창문을 열어 젖힌 난간에 한 사람의 장년이 멀리 문밖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그것은 형이 동도에 남겨둔 권속들을 그리워하는 그림이 분명하였네. 그리고 형은 그 그림 밑에다가 얌전한 글씨로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고 글씨를 붙이고, (중략)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벌써 부터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나는 그때 그림을 침대에 놓고 있는 형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그 화제를 떼어버리고 곧 그림을 빼앗아다가 내 서가 위에 붙여 두었네. 이제 그 그림이 형의 유일한 절필이 되고 말았네." (조영암, 돌아오지 않는 강, 주간희망)
친구들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의 거식증은 재발하고 간도 망가져 갔다. 1956년 9월 6일 오후 11시 45분 지켜보는 이도 없이 이중섭은 서울적십자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병원 측은 간장염으로 사망한 무연고자로 분류해 ‘영생의 집’에 안치했다. 사흘째인 9월 9일 일요일 오전 평양의 공립종로보통학교 선배인 소설가 김이석이 문병 와서야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구상, 박고석, 차근호에게 연락했다. 9월 10일 김광균이 달려와 신문사에 부고를 전하고, 장례비 18만 원 중 조의금 4만 원에 5만 원을 보탰다. 9만 원은 적십자병원답게 가난한 화가의 주머니를 참작해 삭감해 주었다.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적십자병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홍제동에 있는 서울시립장제장에서 화장하고 뼛가루는 망우리공동묘지 고유번호 103535번으로 옮겼다. 박고석이 그 뼛가루를 덜어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행복하게 살았던 정릉 청수장 계곡에 뿌리고 1주기가 되던 1957년 9월 6일, 친구 구상은 뼛가루의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 놓았다가 1년 후 일본의 아내 남덕(야마모토 마사코)에게 전했다.
이 병원에서 죽은 김수영과 이중섭. 생전에 그들의 관계는 어땠을까? 박고석은 그의 저서에서 정릉에 살 때 김수영의 방문을 이렇게 기록했다.
"(김수영이) 한번은 닭 두 마리를 들고 마포에서 정릉 우리 집까지 산을 타고 걸어서 찾아왔다. 부인과 심한 다툼을 하고 화풀이로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고 싶어 찾아왔다."(박고석의 회고)
축 늘어진 닭 두 마리 들고 온 김수영은 이중섭, 박고석, 한묵과 정릉천 변에 앉아 술을 마시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아마도 김수영은 시대의 울분을 토해 냈을 것이다. 이중섭은 말없이 땅바닥에 일본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그렸을 것이다. 산을 좋아하는 과묵한 사내 박고석은 북한산 언저리를 바라보았겠지. 문학과 미술이 만나 빛을 토하는 시기였다. 너무도 아름다운 벨에포크 시대였고 거기에 서울적십자병원도 한몫했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고마운 병원이다.
- 본지 7월 22일자 '성문 밖 첫 동네, 이중섭의 죽음 편' 재구성
60여 년 전 오늘, 북한산이 함박눈으로 채색된 날 이중섭이 정릉으로 들어왔다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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