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문화사- 아파트 이야기
산이 전 국토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우리나라는 동네 뒷산에 올라가기만 해도 경관이 참 보기 좋았다. 조선 말기 우리나라에 온 코쟁이 선교사들도 높은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며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했다. 기와집의 처마는 여인들의 버선코 모양으로 지어져 곡선의 극한미를 연출했다. 멀리에서 보이는 초가집은 둥그스런 주발을 엎어놓은 듯한 모습으로 자연 친화적 아름다움이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가공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각 동네마다 연출되었다. 물론 기와집이나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온돌이 있다고 해도 창호지 조각으로 붙인 문과 틈 사이의 황소바람이 사람들을 괴롭혔고 초가지붕에는 예쁜 박덩어리가 있기도 하지만 오래된 구렁이도 살았다.
지금은 어떠한가? 겨울에도 러닝차림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파트이다. 여름에는 시원하다 못해 추운 에어컨 바람으로 감기에 걸릴 정도이다. 이러한 편리함은 도시의 외관을 많이도 망가트렸다. 실제로 십여 년 전,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이 가장 가고 싶지 않은 도시로 서울이 꼽히기도 했다. 여행 분야에서 손꼽히는 영향력을 가진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이란 잡지 조사 결과이다.
"형편없이 반복적으로 뻗은 도로들과 소련식의 콘크리트 아파트 건물들, 그곳은 심각한 환경오염 속에 마음도 없고 영혼도 없다. 숨막힐 정도로 특징이 없는 이곳이 사람들을 알코올 중독자로 몰아가고 있다.“ 최악의 혹평이다. 외관이 그렇다쳐도 알콜중독이라니...
여행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도시 체코 프라하나 유럽의 오래된 도시와 비교해 보자. 그들은 도시 미관을 살리기 위해 생활의 편리함을 희생한 것이다. 우리는 편리함을 택해 미관과 도시의 낭만을 내 주었다. 아파트에 붙는 이름도 다양하고 어렵다. 시골에서 올라온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름을 외울래야 외울 수도 없다. 아파트는 우리의 모습도 규격화시킨다. 규격화된 아파트는 개성 없는 사람들을 배출한다. 개성 없는 사람들이 개성을 지키기 위해서 개인정보를 보호한다. 생존을 위해서 치매가 걸리더라도 꼭 알아야 할 것이 아파트 비밀번호이다. 노인들은 아파트 이름만이 아니라 비밀번호도 외워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충정아파트
우리나라에 이런 아파트가 들어선 것은 언제일까? 가장 오래된 아파트는 1930년에 지어진 충정아파트이다.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맞은편의 허름한 녹색건물이 충정아파트이다. 이 아파트의 원래 이름은 「도요타아파트」. 한문으로는 풍전(豊田,도요타)이다. 설계자 도요타다네오(豊田種雄)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서울, 아니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다. 1930년, 그런데 건축 대장에는 늦게 등재돼 1937년으로 돼있다. 몇 년 후면 곧 백년이 된다. 이 아파트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험난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사무실로 사용하여 지하에서는 무고한 양민 학살이 있었다. 전세가 바뀐 뒤에는 유엔군의 숙소로 활용되었다. 1979년 충정로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엘리베이터가 없어지고 아파트의 측면이 잘려나가 입주민들이 복도나 옥상을 증축하여 살았다. 그래서 입주민간에 지분 문제로 재건축에 합의가 안 되었기 때문에 재건축이 힘들었다. 역사가 깊은 아파트인 만큼 이 아파트에 살았던 입주민이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 그림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도 잠시 이곳에 기거하였다.
1940년 5월 22일 도교의 우에노 공원에서 열린 ‘제 4회 자유미술가전’에 참여한 김환기는 전시 도록에 주소를 ’경성부 죽첨정 도요타 아파트‘로 올렸다. 그의 고향은 알려진대로 신안군 안좌도라는 섬이다. 이곳에 살았다는 흔적은 1940년 4월에 발간된 문학잡지 '문장'에도 보인다.
"종일 여관방에 드러누워 지내면서 영화 한편 만들거나 자비로 시집 200부 정도를 낸다거나…(중략) 나중에 여관비를 치르고 나갈 일이 은근히 걱정"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 글에 등장하는 ’여관‘은 이 아파트를 두고 한 말이다. 당시에는 ‘여관’과 ‘아파트’를 구별해 사용하지 않았다. 이 아파트에 기거하며 전화로 알고 지낸 사람들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박철수 외, '경성의 아파트' 도서출판 집, 2021년)
경성대화숙 자리에 들어선 미동아파트
「충정 아파트」 건너편에서 서대문사거리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가면 도로 안쪽에 있는 한 동짜리 아파트가 보인다. 「미동 아파트」이다. 1969년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여느 아파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길게 드리워져 많은 세대수를 자랑하지만 이 자리에는 1940년에 지어진 「경성 대화숙」 <京城大和塾, 게이죠 야마토 주쿠>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아파트가 있었다. 산업은행의 전신 식산은행의 독신자 숙소로 쓰였던 아파트이다. 경성대화숙은 월북 작가 김남천이 1941년에 쓴 소설, 「맥」에도 등장하는데 독신자용 방이 36개, 가족용 방이 25개 총 61세대, 130명 정도 되는 사람이 모여 살았다. 이 아파트에서 바라본 서대문의 풍경이 압권이었다. 서대문에서 아현동 고개로 넘어가는 풍경이 소설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맞은편 캄캄한 언덕의 주택지에는 불빛이 빤짝거린다. 하늘에도 까만 허라이즌 위에 뿌려놓은 듯한 별들, 마포로 가는 작은 전차가 레일을 째면서 언덕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 굽어 보인다. 산뜻한 밤공기에 쏘이면서 천천히 가슴의 동계를 세어본다. <황두진. 가장 도시적인 삶, 반비출판사. 61페이지 재인용>”
우리나라 최초의 재건축아파트 개명현대아파트
서대문 철길 위 미동아파트 옆에 1992년에 세워진 「개명현대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재건축 아파트이다. 이 자리에는 1959년에 세워진 6층짜리 「개명아파트」가 있었다. 그전까지는 아파트 최고층이 6층이었다. 6층은 건축법상 엘리베이터 없이 계단으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최고층이다. 6.25전쟁 이후 주택의 파괴, 월남 피난민의 증가, 이농현상, 베이비부머의 증가로 서울에는 주택이 태부족이었다. 당연히 좁은 땅에 높이 올려야 했다.
우리나라의 기술로 지은 최초의 아파트 종암아파트
미국의 원조 자금으로 1957년에 중앙산업이 종암동에 「종암아파트」(현 종암SK아파트)를 지었다. 종암아파트는 우리나라 기술로 지은 최초의 아파트이다. 낙성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할 정도였다. 모든 집들이 ’푸세식‘일 때 실내에 화장실을 넣은 이 아파트를 대통령이 극찬했다. 서대문 「개명아파트」가 노후되자 철거를 했는데 놀라운 것은 철근이 나오지 않고 기차 레일이 나왔다는 것이다. 「개명아파트」는 얼마나 튼튼하게 지은 것인가. 「개명현대아파트」는 재건축 1호 아파트로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경성대화숙 자리에 미동아파트, 그 옆 개명아파트 자리에 「개명현대아파트」가 지어진 것이다. 「충정아파트(1930년)」, 「경성대화숙(1940년)」, 「개명아파트(1959년)」, 「미동아파트(1969년)」, 「현대개명아파트(1992년)」 들이 마치 한 집안의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같이, 같은 동네 서대문 일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들어섰다. 서대문에는 다른 동네에서 볼 수 없는 흔치 않은 아파트 풍경이 연출된다.
최초의 시민아파트 금화시민아파트
그러나 아파트가 시민들에게 본격적으로 공급된 것은 1970년 시민아파트 부터이다. 시민아파트 중 지금 남아있는 것은 남산의 「회현시민아파트」뿐이다. 시민아파트의 원조는 지금 서대문 금화산 자락에는 「금화시민아파트」였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이곳 금화산 110미터 일대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삶의 터전을 일군 판자촌 밀집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땅을 파고 거적으로 지붕을 올려 만둔 토막집 밀집 지역이었다가 해방 후에는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지어 만든 판잣집들이 즐비했다. 서울시는 이들을 몰아내고 아파트를 지었다. 내부에 화장실과 연탄 창고를 들인 최신식이었다. 19평형과 14평형 두 종류. 2천 세대가 넘는 대형 아파트 단지였다. 산에 나무가 별로 없던 때라 시내 어지간한 곳에서도 잘 보였다. 시민아파트 1호인 「금화시민아파트」는 처음에는 서울 시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궁금증 하나. 왜 이런 높은 곳에 아파트를 지어야 했을까?
김현옥 서울시장의 대답이다. “야 이놈들아, 그것도 몰라!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 그래서 대부분의 시민아파트는 청와대가 잘 보이는 곳에 지어졌다. 아마도 그린벨트, 군사 보호구역, 국유지에 집을 지으면 철거 및 토지 보상이 필요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산등성이에 아파트를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민아파트에 사고가 발생했다. 1970년 4월8일 새벽 6시 20분, 홍익대학교 뒷산인 와우산에 지은 「와우시민아파트」. 아파트 한 동 전체가 폭삭 내려앉아 32명이 숨지고 38명이 다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아마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는 그 이후에 줄줄이 일어난 대형사고의 효시가 아닐까?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까지 왔을 정도로 서울 시민에게 큰 주목을 받은 와우아파트는 불도저 김현옥(1927~1997) 서울시장의 작품이다. 그가 서울시장 부임 전 부산시장으로 있었는데 공보비서관이 「귀천」의 시인 천상병이다. 천하 부러울 것 없는 느긋한 성격의 천상병이 어떻게 성격 급한 불도저 김현옥 밑에서 비서 일을 했는지 궁금하다.
여의도 윤중제 공사로 재원을 확보한 김현옥은 1973년까지 240억을 들여 아파트 2천 동을 지어 10만 가구에게 공급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시민들은 20만 원만 내면 내 집을 장만할 수 있는 꿈같은 계획이었다. 런데 말이 아파트지 골조 공사만 해서 분양하는 이른바 ‘골조 아파트’, ‘프레임 아파트’였다. 분양후 내부 인테리어, 공용 화장실, 계단 등은 입주민들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일단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것이 큰 문제였다.
경사 45도의 산비탈에 아무리 철근을 넣은 콘크리트 기둥으로 받친다고 한들 그 무게를 지탱하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건축비의 횡령이다. 서울시에서 낙찰받은 대룡건설은 와우아파트 4개 동 13~16동 120가구를 3,002만 7,026원에 낙찰받았다. 이 중에서 관에서 공급하는 시멘트 등 관급 자재비를 떼었는데 그 돈이 932만 7,026원, 즉 2,070만 원으로 공사를 한 것이다. 대룡건설은 500만 원의 커미션을 떼고 무면허업자 박영배에게 하청을 주었다. 그중에서 박영배는 20만 원을 구청 건축과에 뇌물로 줬다. 최종 건축에 들어간 비용은 1,550만 원. 그래서 평당 건축비는 11,742원. 처음부터 할 수 없는 공사였다.
「와우아파트」는 부실 아파트의 대명사가 되고 김현옥은 서울시장에서 경질되었다. 그때까지 지어진 432개 동 1만 7,300가구 중 안전기준에 미달하여 1971~1977까지 101동이 철거되어 건립비용 보다 많은 50억 700만원이 철거비용으로 쓰였다. 「와우아파트」 무너진 이야기는 아파트가 막 보급되기 시작한 개발 시대의 우화이다
우리나라 단지형으로 지은 최초의 아파트는 어디일까? 단지형 아파트로 최초로 지은 아파트는 「마포삼성아파트(14개동 982가구)」자리에 있던 1962년에 준공된 「마포주공아파트」였다. 지금 마포삼성아파트는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 마포주공아파트를 헐고 1994년에 준공되어 현재까지 존재한다.
「마포주공아파트」는 한국 아파트 사상 최초로 엘리베이터와 중앙난방 시스템을 적용할 예정이었고 층수도 6층이 아닌 10층 규모로 건설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엘리베이터가 무엇이냐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엘리베이터 없이 다닐 수 있는 최고 높이로 지었다. 당초 중앙난방 형식에서 개별난방 연탄보일러로 대폭 축소했다. 다만 화장실은 수세식으로 설치했다. 1962년에 450가구, 1964년 주거동 6층 4개동(일자형)이 완공되어 대규모아파트 단지였다. 동 마다 조각 작품이며, 분수대, 놀이터가 설치되었는데 미끄럼틀이 코끼리 모양이라서 '코끼리 아파트'라는 별명이 있었다.
아파트의 홍수 시대에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많은 아파트를 볼 수 있다. 편리함으로 따진다면 아파트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처음에 지었던 아파트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현대식 아파트들이 속속 다시 들어서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충정아파트도 28층의 세련된 건축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서울의 성장은 아파트의 성쇠와 다름없다. 개성이 없고 영혼과 영감이 없는 시대.. 삶은 편리해졌지만 2퍼센트가 부족한 시대이다.
한이수 대표기자 enfpao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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