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 김상조 작가/번역가]
대학에서 경영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일반 직장을 다니다 신학교에 갔다. 아무도 안 읽는 책을 두 권 썼고, 그에 비해 그럭저럭 잘 나가는 책을 몇 권 번역했다. “지나간 신음소린 빛나기 위함!”이라는 송욱의 싯구를 좋아한다. 지금도 여전히 좀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좀더 생각이 온전해지고 정신에 밸런스와 풍성함을 갖추기 위해 애쓰고 있다.
[칼럼 : “고래의 등처럼 나타나는 고전” ]
고전 텍스트와 예술 작품 읽기에 집중해서 생각의 초점을 모아보려 한다. 살아가면서 자꾸 외롭고 허전한 것은 “깊이”를 찾아야 한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텍스트와 그림이 그 깊은 곳에 이르는 문이라고 믿는다. 그 깊은 곳에서 그 작가를 만날지, 그 작가를 만나러 찾아온 이들을 만날지, 신을 만날지, 모두 다 만날지 모르지만, 예비된 만남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고전 교육classical education”이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형용사 “클래시컬classical”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나왔다. 이 말은 “하나의 클레스class”에 속한다는 단순한 의미이지만 애초에는 로마가 자국민을 재산 수준에 따라 다섯 개의 클래스로 나누었을 때 그중에서도 으뜸되는 클래스, 다시 말해 가장 부유하고 세금도 많이 내는 최상위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랬기에 그 이후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사정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라틴어가 사용될 당시에는 뛰어난 학생, 뛰어난 작가, 확실히 신뢰할 수 있는 증인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중세 때 사라졌으나, 르네상스 시기에 다시 사용되면서 탁월하고, 권위가 있고, 모델로 삼을 만하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와 라틴 작가를 대체로 권위 있게 받아들였지만, “클라시쿠스”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클래시컬한” 고대의 작가에게 한정해서 사용했다. 그리스나 로마 제국 당시의 작가와 작품이라면 전부 고전 취급을 받은 게 아니라, 일급의 작가만 추려서 고전으로 따로 분류한 것이다.
안젤름 포이어바흐가 그린 플라톤의 심포지움. 1869-1873/74년. 출처: 위키피디아
서양은 그리스-로마 문화와 유대-기독교 진리라는 이질적인 세계를 같이 흡수하고 조화를 시도했다. 비유하자면 그리스-로마 문화가 주인인 집의 안마당에 유대-기독교 진리라는 커다란 돌이 날아와 박혔다. 역사 속에서 로마 제국과 교회라는 두 개의 권위가 공존한 데다가, 그리스어권과 라틴어 사용권의 차이까지 작동하면서 조화를 추구한 역사는 의외로 복잡하게 흘러갔다
중세를 지배한 스콜라주의와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고전 연구 분야에서 지향하는 바 목적과 방향이 달랐다. 스콜라주의는 고전 교육을 결국 신학이라는 정점으로 나아가는 준비과정으로 봤으나, 인문주의는 고전을 통한 교양과 교육을 목표로 삼았다.
애초에는 신학 공부를 위한 예비 과정으로 진행되던 고전어 학습과 고전 교육은 18세기 신新인문주의자 이후에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이내 고전 교육 무용론이 대두되고, 고전이 아니라 현실적인 학문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예전에는 학문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지식이 우리 삶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쓸모”가 강조되었다. 그 결과, 현실 학문을 하는 이들은 고전 연구를 멸시하고, 고전 연구가들은 실용적인 학문을 하는 이들을 내려다보는 지경에 이른다.
키루스 실린더, 기원전 539년World History Encyclopedia 제공
이런 사상 변화 속에서 독일에서는 오늘날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에 대한 논쟁도 일어났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김나지움과 직업인을 양성하는 고등 공립학교의 교육 내용을 첫해와 둘째해까지는 동일하게 하자거나, 김나지움 내에도 대학에 진학해 인문학을 전공하려는 A 디비전 학생에게는 자연과학을 면제해 주고, 자연과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B 디비전 학생에게는 고전어 교육을 면제해주자는 식의 세부 논의가 대두된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고등학교 문과 이과 과목 조정 같은 이런 일이 가장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무엇보다 고전 교육의 본질, 방법, 목적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 고전이 왜 필요한가부터 물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금 우리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예술 작품을 창조했고, 지금 이 시대도 여전히 씨름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고자 분투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수준에 도달했는가? 여기에 대해 네덜란드의 빼어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1854-1921)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들(고대 그리스인들)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민속 종교를 초월하여 예술과 학문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요소로부터 예술과 학문을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이데아와 규범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주의理想主義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수적이어서, 문명의 역사나 새로운 문학 등으로 대체되거나 보완될 수 없다.” 그러니까 개별 작품을 감상하고 음미하는 수준이 아니라, 미학적인 삶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과 목적을 정하는 일이 먼저 필요하다.
멕시코 차풀테펙 인류학 박물관에 갖다 놓은 아즈텍의 우신 틀라로크. 무게만 168톤에 이른다.
고전 교육은 고대 로마의 감각처럼 세금을 많이 내는 가장 부유한 계층만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신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놀랍게도, 힘없고 약한 자들이 의외로 영적인 조명을 받아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영원한 세계로 밀고 들어간다! 고전 교육은 이런 목마른 자들에게 건네는 한 바가지 냉수와 같다. 즉 고상해지거나 해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품기 마련인 궁극적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 연구는 투쟁이다. 이런 방향과 목적부터 설정된 후에야 작품의 음미 같은 각론에 들어갈 수 있다.
또 하나, 고전 교육은 지금 우리 세상의 변혁을 위한 힘의 원천으로서 필요하다. 회고적 감상을 넘어서서 한때 선연했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굴함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해야 한다.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은 그 때도 빛났고 지금도 여전히 빛나는 것이며, 세상은 여전히 어두우니까. 그 빛은 내 안의 어두움을 밝히면서 시작되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갈 데 없이 코스모폴리탄이 되어야 하는 시대. 글로벌하게 서로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차별과 분열을 지워야 하며, 온 세상의 하나됨을 추구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관련해서도, 한편에서는 그리스 철학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 쪽에서는 그리스 철학과 문명은 고유성은 없고 그저 다른 데서 가져온 것이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인 역시 자신들이 전수받은 것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고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서로 교류하면서 받아들인 것을 얼마나 독창적으로 한 단계 높이 세련하느냐는 역량의 문제라 하겠다. 그리스인들은 동방에서 받아들인 것을 새롭게 다듬었다. 우리 시대에 코스모폴리탄이 된다는 것 역시 자기만의 생각이 없어진다는 뜻일 수는 없다. 동방과 교류했던 희랍인들이 끝까지 이데아와 규범의 세계를 믿고 추구했듯, 온 세상의 사유를 받아들이는 일은 고유한 사상을 형성하는 방법론에 해당한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 벽화 속의 이사야.
지금도 우리에게 절실한 말을 하는 작품이라야 고전이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작품 중에 내게도 좋은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듯, 내가 좋다고 느낀 작품이 다른 이에게도 그럴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각 사람마다 자신에게 말을 하는 고전이 있다. 각자 ”울림”이 다르니까.
아름다움은 진리나 선과는 구분되며, 그들에게서 내용을 가져오고 그들을 드러낸다. 진리와 선의 계시라 하겠다. 진리는 깨달을 때 기쁨이 있고, 선은 소유할 때 그러니까 내가 선할 때 만족을 주며, 아름다움은 감각을 통해 포착할 때 드러난다. 아퀴나스의 말처럼, 아름다움은 ‘보거나 들었을 때 기쁨을 주는 것’이다.
마르께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넷플릭스에서 마침내 영화화했다.
필자 개인적인 예를 들자면, 십 수년 전에 읽었던 플라톤의 [심포지움]이나 [파이드로스], 삼 년 전에 읽었던 현대의 고전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지금도 그 장면 하나하나가 내 안에서 깊은 바다 수면으로 올라오는 고래의 등처럼 곧잘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키루스 실린더”나 멕시코 차풀테펙 박물관 입구에 갖다 놓은 아즈텍 문명의 우신雨神 틀라로크 상은 놀라울 만큼 신선한 부피감으로 다가오며, 기원전 700년 경의 이스라엘 최고의 예언자 이사야가 남긴 두툼한 선지서는 지금도 나를 새롭게 한다. 이런 울림 속에서 나는 그 힘으로 살아간다.
일단 고전을 즐길 줄 알아야 하되, 그 풍성함 속에서도 추구할 목표와 방향은 정해 놓고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과 진리와 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모두 어떤 식으로든 일급이 되어야 한다는 마땅함도 여전하다.
[고래의 등처럼 나타나는 고전 ①] – 왜 좋은 작품이 필요한가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