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이다. 이들은 당시 비엔나의 모던아트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두 예술가들의 관계와 빈 예술가들의 활동을 조망하는 전시《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은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대다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두 예술가들에 대한 주요 전시들을 열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멘토-멘티로서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주고받은 작가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작품을 함께 그리며 영향을 주고받은 작가들이다. 이와 같이 클림트는 황금색 화가로서, 그리고 에곤 실레는 표현주의 경향의 누드 화가로 많이 알려져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빈 분리파 첫번째 전시 포스터(Poster for the First Secession Exhibition (censored version) (1. Kunstausstellung Secession))", 1898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벽화(The Hostile Powers, the Titan Typhoeus, the Three Gorgons)", 1902
비엔나의 유명화가 구스타프 클림트(b.1862~1918)는 빈 분리파(1987년 결성)의 초기 회장으로서 단체를 이끌었다. 빈 분리파를 조직한 예술가들은 기존 전통에서 벗어난 반 아카데미즘의 새로운 예술을 비엔나에 가져다주길 원했다. 클림트를 중심으로 형성된 빈 분리파에는 화가만이 아니라 조각가, 사진가, 작가, 디자이너, 건축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변화를 꾀하며 연합했다. 이들은 ‘회화, 건축, 장식 예술을 모두 통합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다. 예술의 자유와 혁신을 주요한 가치로 삼은 것이다. 기존에 있던 오스트리아 예술가 협회에서 탈퇴하고 독립적인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를 위한 포스터도 함께 제작했다. 공간을 디자인하고 일종의 실험의 장으로서 예술 활동을 벌였다. 빈 분리파 화가들은 당대 19세기부터 진행된 자포니즘의 영향으로 일본 판화 그리고 아르누보 양식을 시각적으로 사용한다. 1905년에 클림트는 빈 분리파에서 자신을 따르는 예술가들과 함께 탈퇴하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이후 '황금시기'로 불리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에밀리 플뢰게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모습, 1910
에곤 실레, "독일사람: 파란 옷의 구스타프 클림트(German: Gustav Klimt im blauen Malerkittel)", 1913
당시 에곤 실레(b.1890~1918)는 클림트를 존경하던 10대 소년이었다. 빈 분리파에서 나온 클림트가 조직한 예술그룹에서 주최한 전시회에 참가했다. 전시회를 참가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가 클림트를 만나게 되면서이다. 실레가 클림트를 처음 만났을 때 작품을 교환하자고 했다. 클림트는 실레에게 “왜 그림을 교환하려 하지? 네 그림이 훨씬 더 나은데.”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클림트는 실레의 능력을 알아보고 동료 예술가로서 인정해주었으며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후원해 주었다. 여러 예술계 인사들과 연결시켜 주고 모델을 소개시켜주는 등 실레가 예술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실레와 클림트는 32살의 나이차이가 난다. 실레는 열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도 관계가 멀어졌다. 그래서 훨씬 나이가 많고 유명한 클림트는 우상이자 정서적 안정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에곤 실레, "게르티 실레의 초상화(Portrait of Gerti Schiele)" , 1909 / 에곤 실레,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서 있는 여자(Standing Girl in a Plaid Garment)", 1909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Kiss)", 1907-1908 / 에곤 실레, "추기경과 수녀, 카레스(Caress)", 1912 / 에곤 실레, "후광을 지닌 두 남자( Zwei Männer mit Nimben)", 1909
구스타프 클림트, "프리데리케 마리아 비어(Fredericke Maria Beer)" 1916 / 에곤 실레, " 프리데리케 마리아 비어의 초상화(Portrait of Friederike Maria Beer)", 1914
초기 실레의 작품에는 구불구불한 선의 아르누보적인 클림트의 영향이 드러난다. 클림트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동일한 모델을 함께 그린 결과이다. 초기에 클림트의 영향을 받았던 그는 곧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해 나간다. 그는 표현주의 양식을 통해서 자신의 에로티시즘적인 인간 형태들을 표현했다. 실레가 그린 누드에서는 여동생 게르트루데를 모델로 삼은 작품들도 여럿 있는데, 실레는 여동생에게 집착하며 근친애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는 클림트의 모델이자 자신이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질, 이후 결혼하게 되는 에디트 등 자신의 연인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에곤 실레, "발리 노이질의 초상화(Portrait of Valerie Neuzil)", 1912
그는 누드를 인간의 욕망과 개인의 자아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소재로 생각하고 그림을 그렸다. 자화상도 많이 그렸는데, 여기서 작가의 나르시시즘적인 내면의 심리적 요소들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인물의 기분이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뒤틀린 몸, 들쭉날쭉한 윤곽 등을 표현했고 과감 없이 대상들의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았다. 그의 작품에는 노골적이고 사실적인 인간의 육체에 대한 표현뿐만 아니라 고독과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내밀한 탐구들이 담겨있다. 드로잉을 보면 선과 색채의 표현에서 그만이 가지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실레를 천재화가라 부르는 이유이다. 실레의 드로잉에서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선의 기법은 오귀스트 로댕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에곤 실레, "누워 있는 여성", 1917 / 에곤 실레, "남성의 반신 누드, 뒷모습", 1910 /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 내 작품
클림트가 금색 장식으로 화려하고 숭고하게 죽음과 사랑, 에로틱적인 대상을 표현했다면 실레는 그와 반대되는 가장 날 것의 본능적인 모습으로서 대상을 표현했다. 클림트와 실레의 에로틱적인 작품 속 주제는 같으나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다르다. 두 예술가들이 바라보고 그리고자 했던 시각 차이가 작품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클림트와 실레 모두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을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예술가로서의 태도는 함께 공유된다.
20세기 오스트리아의 모던아트를 이끈 두 예술가들과 빈 분리파의 행적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여러 작가들의 작품과 활동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빈 분리파의 활동을 흐름에 따라 나열하고 그들 간의 관계를 비춰주어 1900년 비엔나 예술가들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된 전시이다.
따로 또 같이, 32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동료. 클림트와 에곤 실레 < 리뷰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