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아침입니다. 저는 어제 오랜만에 본가에 온 형과 이야기하느라 밤을 꼬박 새워서 늦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때 밖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얼른 일어나서 짐 싸고 시골 갈 준비해라.”
애써 어머니의 말이 안 들리는 척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보지만 "셋 셀 때까지 누워 있으면 두고 간다"라는 엄포에 잽싸게 일어나 머리를 감습니다. 비몽사몽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가족들은 모두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제야 저는 달리는 시늉을 하며 차에 올라탑니다. 아버지는 뒤를 한번 돌아보시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십니다.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까지는 1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귀경길 풍경.(출처 : 크라우드 픽)
사랑을 만나 / 사랑을 나누러 가는 설 귀성길은
편하고 안전하고 / 복된 사랑의 길이 되어
부모님께 세배하고 / 한자리 모여
설음식 나누면서 / 웃음꽃이 활짝 피게 하시고
동네 어른께도 세배하고 / 옛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어 / 끈끈한 정이 강같이 흘러
행복하고 즐거운 /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을
한 아름 안은 / 사랑의 귀성길이 되게 하소서 (김덕성, 「설날엔」)
눈을 감았다 뜨니 벌써 할머니 집에 도착해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할머니가 키우시는 진돗개 한 마리가 목청껏 우리를 반기고 있습니다. 마당에 차들이 많은 걸 보니 벌써 친척들이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제일 먼저 할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우리를 꼭 껴안아 주십니다. “우리 강아지 왔냐?” 나이가 아무리 들었어도 할머니에게는 아직 어린아이인가 봅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십니다.
정겨운 시골집 풍경 /사진 : 김한솔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김종해, 「어머니와 설날」)
「어머니와 설날」이 수록된, 김종해의 시집『어머니, 우리 어머니』/출처 : 문학수첩
그렇게 한 바탕 친지들과 인사를 마치면 할머니가 제일 먼저 물어보시는 것은 당연 "밥은 먹었냐?"라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점심을 못 먹었다는 우리들의 말을 듣자마자 주방으로 들어가 분주히 움직입니다. 저는 형과 창고에 들어가 식탁을 꺼내오고 동생은 행주를 빨아와 능숙하게 식탁을 닦습니다. 금세 식탁엔 먹음직스러운 명절 음식들이 놓입니다.
아버지와 이모부는 마당에 나가 삼촌이 어젯밤 낚아온 우럭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때 큰 삼촌이 들어와 우리에게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지, 졸업하고 취직은 어디로 할 것인지 물어봅니다. 다행히 저는 아직 취직할 시기는 아니라 삼촌의 말이 부담스럽게 들리지는 않지만, 몇 년이 더 지나면 이제는 이런 질문이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 대학에 붙어 / 부모님 효도하고
어떤 이는 / 취직하여 / 부모님 효도하고
어떤 이는 / 시집 장가 들어 / 부모님 효도하고
어떤 이는 / 용돈 두둑 / 부모님 효도하고
이도 저도 아닌 나는 / 가슴으로 / 효도할 수밖에는 (이상례,「설날」)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명절 잔소리 메뉴판'
나중엔 이런 시를 ‘웃프게’ 외우게 될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제 아버지와 삼촌들은 낚시하러 가고 어머니와 이모는 할머니와 귤을 까먹으며 한가로운 오후 시간을 보냅니다. 저는 형과 동생들과 작은 방으로 들어가 휴대폰 게임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벌써 저녁입니다. 아직 배도 꺼지지 않은 것 같은데 할머니는 어서 저녁을 먹자고 모이라고 합니다. 저녁으로는 이모가 사 온 귀하디 귀한 소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할머니표 갈비찜과 먹음직스러운 찌개, 그리고 나물들도 함께 식탁에 놓입니다.
세상일 접어두고 / 고향 집 찾아가서
설빔으로 차려입고 / 옹기종기 둘러앉아
웃음꽃 맛있는 음식 / 배가 절로 부르리
타관서 멍든 상처 / 고향 가서 치료받고
그립던 일가친척 / 만난 곳이 낙원이라
덕담에 훈훈한 인정 / 해 지는 줄 모르리 (오정방, 「고향 집 설날」)
명절 음식 일러스트 /출처 : 무안타임즈
그렇게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할아버지께서 좋아하던 음식, 매일 저녁 텔레비전 앞에서 응원하던 기아 타이거즈의 이야기부터, 삼촌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혼나고 팬티 바람으로 쫓겨 난 이야기, 빵을 준다고 하면서 방귀를 뿡 뀌시던 재미난 이야기가 오고 가니 문득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집니다.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으시던 할머니는 조용히 눈물을 훔칩니다. 그렇게 행복하기도 하고, 이제는 그리워진 풍경이 담긴 이야기들과 함께 설 연휴의 밤은 깊어져 갑니다.
객지 살던 자식들이 / 오랜만에 찾아오는
고향 집 굴뚝에는 / 연실 연기가 오르고
가래떡과 만둣국 / 가득 차린 음식상에
활짝 핀 얼굴들이 / 다정하게 웃는다.
허리 굽은 어머니와 / 주름 깊은 아버지
삼촌 사촌까지 / 살가운 피붙이들이다.
전화 한 번 서로 없던 / 생소한 얼굴에도
어딘가 닮은꼴이 / 영락없는 가족이다.
제 둥지를 찾아온 / 동물들의 본능처럼
고향 집의 설날은 / 더없이 행복하다. (박인걸, 「고향의 설날」)
세배 일러스트
벌써 설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번엔 가족 일정 때문에 설날 아침에 세배만 하고 할머니 집을 떠난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일찍 잠에서 깨 몸을 단정히 하고 세배를 합니다. 할머니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면서 덕담과 함께 세뱃돈을 건네주십니다. 제법 큰 돈입니다. 세뱃돈을 받으며 '내가 아직도 용돈을 받아도 되나?’ 싶었지만, 기쁜 마음은 감출 수 없습니다.
설날 자식들이 돌아간 / 후 떵 빈 거실에 앉아 있노라니
세배를 받으면서 떠올랐던 / 어머니 문득 떠오른다
공간을 뚫고 오시는 어머니 / 나는 두뇌에서 지워지지 않기 위해
자주 하얀 백지장에 / 그 고운 얼굴을 그린다
그 그림은 지금까지도 / 어느 여인에서도찾아보지 못한
잔잔한 호수처럼 사랑을 띄운 미소 / 잘못 투성인
나를 따뜻하게 손잡아 주시며 / 기도해 주시던 인자하신 어머니
너무 그리워 눈물 흘릴 뿐이다 (김덕성, 「설날의 애상」)
이제 가족들과 친척들은 하나, 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김치와 쌀, 직접 기른 채소로 만든 반찬들을 가족들 차에 실어 줍니다. 벌써 떠날 시간이 다 되니까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할머니는 마당까지 나와서 떠나는 우리들의 손을 잡아줍니다. 친지들과 할머니에게 인사를 몇 차례나 하고 시골을 벗어납니다. 할머니는 떠나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한참을 서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풍성한 한가위의 추억이 새해를 환하게 비춥니다. 이런 풍성한 추억들로 올해는 어쩐지 ‘좋은 날’이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좋은 날 하자』의 표지.
오늘도 / 해가 떴으니 / 좋은 날 하자
오늘도 / 꽃이 피고 / 꽃 위로 바람이 지나고
그렇지, / 새들도 울어주니 / 좋은 날 하자
더구나 멀리 / 네가 있으니 / 더욱 좋은 날 하자. (나태주, 「좋은 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