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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문화사] 다방에서는 커피만 마셨을까?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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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파라 전경


우리나라 다방의 역사는 문화의 역사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프랑스나 서구에서 살롱문화가 예술인 사이에서 유행했듯이 다방은 근대문화를 경험한 이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1929년경 일본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영화배우 김인규가 YMCA근처에 '멕시코'라는 다방을 열었고 193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가 이순석이 소공동에 '낙랑파라'를 열었다. 주로 유학파 문화예술인들이 다방을 개업한 것은 근대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하고 자유로운 토론도하는 유럽의 살롱문화를 다방을 통해서 실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다방에 관한 이야기는 시인 이상과 소설가 박태원을 빼고 말하기 힘들다. 가장 대중에게 알려진 곳이 소설<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는 낙랑파라이다.


"오후 두 시,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소설가구보씨의 일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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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의 소설 속 삽화는' 하융'으로 표기되어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삽화는 이상이 '하융'이라는 필명으로 그렸다. 시인 이상도 아는 바와같이 다방을 개업했다. 이상이 개업한 제비다방의 모습은 박태원의 소설 <방란장 주인>에도 등장한다.


"이 다방의 탄생에는 그 이면에 이러한 유의 가화 미담이 적지 않으나 그러한 것이야 어떻든,미술가는 별로 이 장사에 아무러한 자신도 턱없이, 그저 한 잔 팔아 담배 한갑 사 먹고 술 한잔 팔아 쌀 한 되 사먹고 어떻게 그렇게라도 지낼 수 있었으면하고, 일종의 비장한 생각으로 개업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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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박태원,이상,김소운


박태원 소설에 나오는 다방'방란장'은 제비다방이다. 이상은 현재 서촌 <이상의 집>으로 알려진 큰 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1933년 종로1가에 생부 몰래 집을 저당 잡혀 반도광무소건물 1층에 제비다방을 열었다. 왜 다방의 이름이 제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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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이 1935년 발표한 ‘친구의 초상’.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다방 이름은 이상의 둘도 없는 친구 화가 구본웅의 작품이다. 구본웅은 우연히 효제동에서 일어난 총격전을 지켜보게 된다. 1923년 경성 하늘을 떠들썩하게 만든 종로경찰서 수류탄 투척 사건.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신출귀몰하며 일경들을 농락했다. 결국 일경들의 수배망에 걸려 수 백명의 일경들과 대치한 끝에 마지막 탄환으로 자결한 조선의 아들이었다. 구본웅은 날렵하게 효제동의 지붕을 오르내리며 일경들과 대치하는 김상옥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제비처럼 날렵하다고 했다. 제바다방은 종로구 33번지에 위치했는데 바로 근처에 종로경찰서가 있었다. 절친 이상이 이 종로경찰서 근처에 다방을 개업하는 것을 보고 김상옥열사의 날렵한 모습이 연상되어 다방이름을 제비라 한 것이다.


이상의 동생 김옥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상의 생부 김연필의 가족은 정기적으로 제비다방에 들려 생활비를 타갔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것이 다방은 아버지 몰래 집을 저당잡혀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생 김옥희가 다방에 갈 때마다 이상은 돼지 우리같은 다방에 딸린 방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왔다. 이상은 이곳에서 돈은 벌지 못했지만 생애 최고의 작품인 <오감도>를 썼다. 이상은 다방에 자주들렸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소개로 당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이던 이태준을 소개받아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게재했다. 두사람은 문학적으로도 깊은 관계가 있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하융’이라는 필명으로 이상은 삽화를 그렸다, 제비다방의 설계도 이상이 직접했다고 전해진다. 경성고공 건축과 수석 졸업생인 이상의 입장에서 다방 설계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다방에 들어서면 조선미술전람회 입선한 자신의 자화상이 걸려있었다. 제비디방은 초창기에는 영업이 잘되었으나 이상의 게으름으로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커져가는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제비 다방의 문을 닫고 다시 인사동에 쓰루라는 다방을 개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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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택과 권영희의 결혼 사진


다방 쓰루에서 그는 권영희이라는 여인을 만난다. 도망간 금홍이 대신 다방을 운영해줄 여급이 필요했다. ‘에인절’이라는 다방에서 자신과 말이 잘 통해 눈여겨보았던 권영희를 스카우트했다. 그녀는 고리키 전집을 읽은 매우 지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지(知)적인 매력을 품고 있어. 금홍에게 부족한 것을 권영희에게서 발견했다.


권영희는 이상에게 ‘D. H. 로렌스의 모조품’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상의 창백한 얼굴과 고수머리, 즉흥적이고 무계획한 생활 태도와 천재적인 작품세계가 D. H. 로렌스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상은 친구인 정인택과 박태원에게 권영희를 소개해 줬다.


권영희도 이상이 싫지는 않았지만 이상이 금홍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마음을 접을 수 박에 없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이상의 친구 소설가 정인택이 권영희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사실 정인택은 권영희에게 첫 눈에 반했던 것이다. 이상의 어정쩡한 태도 때문에 새장안의 새가 날아갈 위기에 처했다. 정인택은 그가 다니던 신문사에서 퇴근하기가 바쁘게 쓰루로 매일 출근하며 애정공세를 펼쳤다. 월급을 쓰루에서 다 써버릴 정도였다고하니 그가 얼마나 권영희에게 집착해는지 알만하다.이상은 권영희에게 너만 바라보는 정인택한테로 가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기도 했다. 그때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던 정인택이 괴로운 심경에 자살을 기도했다. 술과 함께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목숨이 경각에 붙어있는 걸 이상이 발견해 들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가까스로 살려냈다. 이 내용이 이상의 소설 <환시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 1935년 8월 25일, 마침내 돈암동 흥천사에서 정인택과 권영희는 결혼식을 올렸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다 모였다. 김동인과 박종화, 조용만, 정지용, 양백화, 박태원, 김소운, 구본웅 등이다. 더욱 웃기는 얘기는 그 결혼식에서 이상은 사회를 봤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다방을 통해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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