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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문학자의 인문학 공간] 하버마스를 처음 보았을 때

by 데일리아트

관심(interest)이 인식(cognition)을 생성시킨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 이론’의 대가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b.1929)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86년 2월 17일, 그는 독일 뒤셀도르프 하이네 연구소에서 열린, 하이네 사후 100주년 행사에 강연자로 초대된 터였다. 독일로 유학을 간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은사 교수님의 배려로 초대권을 받아 맨 앞자리에서 그의 강연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하버마스에 대해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세계적 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다.


그가 교실의 교탁 정도 높이의 강단 바로 나의 앞에 섰다. 그가 등장했을 때, 그리고 사회자가 그의 이름을 말할 때까지도, 나는 그를 이름만 들었던 바로 그 사람 하버마스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키가 크고 꾸부정했으며, 무엇보다 구순구개열 장애, 속된 말로 언청이 장애를 갖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뛰어난 사람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 들킨 것 같아 순간 부끄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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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출처: 위키 백과


그의 강연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아직 나의 독일어 실력이 많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그의 말은 입술 사이로 새어 더욱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이네와 그의 시대 작가, 사상가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묶고 풀어내며, 그 시대의 사상적 구조를 풀어나가는 해박함은 감탄과 경외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원고도 보지 않고, 그렇게 많은 19세기 중반의 사상들을 마치 실제로 그들을 만난 듯 설명하는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감동적이었다.


하버마스는 인식(cognition)이 객관적으로 제시되고, 그것이 특정한 관심(interest)에 따라 해석되는 게 아니라, 관심이 인식을 생성시킨다고 한다. 인식과 관심, 그리고 그런 관심의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이용에 집중하는 '기술적 관심'과, 이해에 중심을 두는 '실천적 관심', 그리고 이용과 이해를 넘어서는 '해방적 관심'이다.


이용과 이해가 소유의 문제라면, 해방은 칸트의 정언명령 같은 당위의 문제다. 이용과 이해를 위한 관심이 구분하고 한정하며 다른 것과의 경계를 명확히 하려는 것이라면, 해방적 관심은 구분과 한정을 풀어 경계의 영역을 밖으로 여는 일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관심들은 서로 뒤섞여 작용하지만, 더 주도적이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 관심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주도적 관심에 따라 인식 형식이 생산되고, 인식 내용도 결정된다.


하버마스의 경우 그에게 그토록 해박하고 논리 정연한 인식(지식)을 생산하도록 작용한 주도적 관심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세 가지의 관심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관심은 해방적 관심이라 한다. 이용과 이해는 편익을 가져다 주면서도 차이와 경계를 만들어내지만, 해방적 관심은 차이와 경계의 바탕에 차이 이전의 근본적 동질성을 (재)발견한다. 이용과 이해가 표면적 차원의 경계 짓기라면, 해방적 관심은 보다 깊고 넓은 차원에서의 경계 허물기다. 이용과 이해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부족함을 느끼는 소유의 행위지만, 해방은 적은 것으로도 기쁨과 존엄성의 의식을 준다. 그것은 지식과 깨달음의 차이일 수도 있다.


종교적 인식이 유한을 무한으로 열어가는 과정이라면, 종교기관들은 무한을 유한으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기술적 관심, 이용의 관심이 주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 안에 믿음의 대상인 신을 축소시키고, 그렇게 아집 속에 신을 가두기도 한다. 종교 전쟁을 주도하는 종교인들은 실은 신의 파괴를 주도한다. 경계를 설정하는 종교인의 추종은 신의 무한성, 사랑의 무한성을 부정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경계에 갇혀있으면 자신들의 불의도 정의로 확신할 수 있다. ‘자유케 하는 진리’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사랑의 경계를 부정하는 일, 역설적이게도 그 경계의 부정을 의무로 만들어 사랑의 무한성에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일이다. 스스로가 설정한 경계 안에서 주장되는 정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을 ‘이용’하려는 관심에 의해 주도되는 불의일 뿐이다.


나의 주도적 관심과 관심의 작용을 의식적으로 매 순간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기 성찰은 매번 가능하다. 인식과 행위 이후 그것들을 되짚어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은 어쩌면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공동선을 실현해야 하는 ‘나’에 대한 예의이며 의무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멋진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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