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토론, 회의 등을 하다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이때의 의구심은 독창적인 발상에 대한 경이와 경외의 찬사가 아니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대한 회의적 반감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야기하는 주제와 대화의 소재에 따라 다양한 반응들을 대하는 본인의 문제일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람들의 기본 심리는 자기와 공감하지 못하는 대화는 경멸하게 되고 바로 싫음을 표시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얼굴 표정에, 제스처에 싫음이 그대로 보인다. '다름'이 '틀림'이 되고 내가 '옳다'라고 생각되면 상대는 옳지 않음이 된다. 갇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토론을 하거나 할 때는 주제에 대한 전제 조건들을 미리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다루고자 하는 내용과 더 나아가 무엇 때문에 이런 토론과 만남의 장이 열렸는지에 대한 개념 정의를 한 다음에 시작해야 토론이 중간에 산으로 가는 것을 그나마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 중구난방으로 자기 의견만 쏟아내면 합의된 결론도 없이 시끄럽게 떠들다 나오고마는 결과가 된다. 정해진 주제가 확실한 학술대회나 발표회 토론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세미나를 빙자한 정책 토론회나 공청회 같은 곳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거의 말싸움 수준인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말싸움이 시작되어 모더레이터가 전전긍긍하게 되고 난처하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 인식의 벽이다. 혼자 사유하는 독백이면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서로 다른 타인들이 모여 어떤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 속에서는 독백을 전하면 안 된다. 독백을 하더라도 전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 타인이 듣고 있기 때문이고 타인을 설득해야 하고 타인을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회적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은 대화와 토론의 가장 기본적인 충분조건이자 필요조건이다.
각자가 다른 인식의 범주를 가지고 있다는 '다름'을 인정해야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다양성에 대한 인식의 벽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만의 성에 갇혀있다. 성문을 열고 내가 나가든, 바깥사람과 정보를 불러들이든 해야 한다. 성문을 열지 않으면 성벽은 무너지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다. 고집불통이 된다.
벽은 공간에 대한 단절이자 한계이자 경계다. 인식의 벽은 실체적 사물은 아니지만 수준의 결을 알아챌 수 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얼마나 많이, 얼마나 정확히,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느냐가 대화를 통해 글을 통해 작품을 통해 행동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식의 벽을 허무는 것은 쉽지 않다. 각자가 평생 경험하고 공부한 결과치의 끝선이기에 그렇다. 그나마 그 벽에 구멍을 내 문을 낸 사람은 융통성이라도 있다. 상대를 받아들이고 새로움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식의 벽에 창을 내는 것 자체가 벽이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쥐구멍처럼 뚫린 구멍조차 진흙을 발라 막아버린다. 자기들만의 성벽을 치고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한다. 자기의 영역 안에 있을 때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이 인식의 벽을 넘지 못하면 생각하는 수준이 딱 거기까지만이다. 인식의 벽까지 만이다. 우물 안에서 바라본 하늘의 크기가 세상의 크기가 된다. 우물밖으로 기어 나오든 힘겹게 올라서보면 전혀 다른 하늘의 세계가 있음에도 말이다.
내가 바라보는 인식의 세상이 다 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다를 수 있음도 안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는데 양비론적 중립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일 때 '다름'을 인정해 줄 수 있느냐는 조건이 붙어 있다. 비상식적 비논리적 궤변을 늘어놓는 것조차 '다른 시선' '다른 인식' '다양성의 인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근저에는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분모가 항상 먼저 존재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바로 공동체의 질서와 안위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를 넘어서는 '다양성'은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가 용납하고 용인할 수 있는 기본 전제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사회를 '낮은 수준의 사회'라고 한다. 각자의 인식의 벽을 인정하고 그 벽에 구멍을 뚫는 일이라도 해야 한다. 그게 소통이고 대화고 공감의 원천이다. 내가 먼저 변하고 내가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열려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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