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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④] 바보화가 한인현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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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의 한국문화원 전시장에서 44년 만에 다시 만난 화가 한인현(左)과 박태준 회장


ㅡ“힘들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라. 열심히 사는데도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꼭 알려라” (박태준 회장과의 인연)


월남한 청년 한인현은 간첩 누명을 벗고 국군에 문관으로 비공식 종군했다. 국군 제5사단 36연대에 배속된 그의 임무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의 막사, 포대, 보급소, 차량 등을 스케치해 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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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참으로 긴박하고 스릴 넘치는 임무였습니다. 총이나 무전기가 아닌 연필과 스케치북을 들고 목숨을 거는 임무였습니다. 적진 가까이 숨어들어가 은폐물에 몸을 숨기고 적군의 동태와 은폐물을 빠르게 스케치했습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스케치해 온 그것을 대대장. 작전 참모에게 전달하면 스케치북을 놓고 작전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포탄 사격과 보병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나는 지금도 내 그림 실력이 적을 물리치는 소도구로 전락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더구나 포신이 향했던 곳은 바로 내가 월남하기 전의 고향 쪽이었으니 말입니다 .”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 한인현> 중에서)


실측보다도 정확했던 그의 스케치는 아군의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일등 공신이었고 그는 지휘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미술을 하기 위해 배운 스케치가 가족이 있는 곳을 향한 포탄으로 바뀌는 것은 갓 스물이 넘은 화가에게 너무나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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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사단 35연대 1대대장 김용환, 부대대장 정영수, 그리고 그와 함께 5사단 하사관 교육대를 창설했던 초대 교육대장 최진종은 당시 그가 모셨던 강건하고 패기가 넘쳤던 청년 장교들이다.


초대 포항제철 회장이자 32대 국무총리를 지낸 박태준 회장과의 인연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국군 제5사단 사령부 사단 인사참모였던 ‘박태준 중령‘으로.


그 보다 고작 네 살 많은 박태준 중령은 아무 기댈 곳 없는 한인현에게 든든한 형이 되고자 하였다.


박태준 회장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4 후퇴 직후 나는 강릉에 주둔하고 있다가 5사단 사령부로 이동됐다. 여기서 네 살 밑의 특별한 청년 문관을 만났다. 한인현. 1.4후퇴 때 할아버지를 모시러 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혼자 배를 탔다는 함경도 청년. 거제도까지 실려갔다 뽑혀 나온 그는 차트 만드는 솜씨부터 남달랐다. 나는 첫눈에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봤다. 파리로 유학이나 보냈으면 딱 좋았을 청년. 나는 그가 쓴 시(詩)의 유일한 독자였고, 그를 친동생처럼 돌보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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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현의 재주를 눈여겨본 박태준 회장은 그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고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의 나라에서 나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작가로서의 진정성이라 여기는 한화백의 완고한 고집을 꺽지 못했다.


“휴전 직후 그와 소식이 두절 됐다가 일본 유랑생활의 막바지 무렵인 97년 1월 중순 다시 연락이 닿았다. 한인현이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열리는 자신의 전시회를 보러 오라고 연락을 띄운 것이다. 무려 44년 만의 상봉이었다. 그는 "(당신이) 너무 유명해져서 보고 싶어도 참고 또 참았다가 야인으로 돌아온 뒤에야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휴전 직후 순천의 어느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 소식이 끊어졌던 그였다.


그림을 안 파는 재야 화가 한인현. 그의 그림에는 육친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도쿄에서 우리는 '만남'이란 그림을 배경으로 상봉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의 인생은 마침 그 무렵에 방송인 이계진(현 국회의원)이 쓴 '바보 화가 한인현 이야기'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었다.“


(박태준 회장의 <회고록> 중에서)


당시 국세청의 포항제철 세무조사로 인해 1995년부터 1997년 5월 귀국 전까지 일본에 머물고 있던 박태준 회장에게 한인현 화백이 전시 소식을 알린 것이다.


44년 전 20대 전우들은 60대 노신사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포항제철 사보의 삽화를 십수 년째 그리면서도 혹시 그분 길에 누가 될까 하여 박태준 회장에게 연락하지 않은 그였기 때문이다.


박태준 회장이 국무총리로 있던 2000년, 총리는 한인현 화백의 고희 기념전에 초대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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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유명해진' 나에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나는 신문에서 보고 내 발로 찾아갔다. 그를 이계진씨와 함께 총리 공관에 초대해 한턱도 냈다.”


(박태준 회장의 <회고록> 중에서)


지독히도 신세지기 싫어하는 한인현을 아는 까닭이었다.


한화백과의 연락이 다시 끊어지는것이 싫었던 박태준 회장은 꾀를 내었다. 휴대전화를 가입해 그에게 주고 사용료도 내준 것이다.


박태준 회장은 돌아가셨지만 그의 비서는 여전히 한인현 화백의 휴대폰 사용료를 내주고 있다. 이제 그의 전화를 받을 수 없음에도...


말년에 박태준 회장은 한인현 화백의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병으로 앓고 있던 폐질환이 악화되어 2011년 12월 갑작스럽게 별세하게 되면서 이 소원은 끝내 마무리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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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중령님의 각별한 격려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월남하여 의지할 곳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 외로움에만 갇혀 있을 때 그분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라. 열심히 사는데도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꼭 알려라‘ 하시더군요.”


(<화가 한인현의 행복한 그림일기 꿈 ; 한인현> 중에서)


“힘들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라. 열심히 사는데도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꼭 알려라”라고 이야기해주는 형. 그리고 형에게 힘겨운 일이 생기고서야 연락해 그를 위로하는 아우.


박태준 회장과 한인현 화백의 우정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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