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과 우수가 지났는데 전북특별자치도에는 춘설이 내렸다. 전북특별자치도에서 설경이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대둔산, 덕유산, 마이산을 꼽을 수 있다. 눈이 많이 온 다음날 설경이 아름다운 마이산에서 겨울의 마지막 정취를 즐기고 왔다.
진안 지명 유래
7, 80년대만 해도 진안은 무주, 장수와 함께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 오지였다. 진안은 백제때의 난진아현(難珍阿縣), 마돌현(馬突縣), 물거현(勿居縣)이 합쳐져서 지금의 진안군이 되었다. 이러한 지명은 오래된 것이기에 한자의 의미보다는 한자를 빌어 우리말 소리를 표현한 이두(吏讀) 문자로 보고 있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진아현을 진안현(鎭安縣)이라고 이름을 고치는데, 진안(鎭安)은 보통명사로 “난리를 일으킨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어루만져 달램”이라는 뜻이다. 백성들이 어떤 난리를 일으켰는지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정조때의 학자 신경준(申景濬)은 저서 산경표(山經表)에서 마이산은 호남을 관류하여 전남 광양의 백운산에 이르는 정맥의 시작점이고,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금남호남정맥이 마이산을 거쳐 운장산에 이르고, 금남정맥은 마이산에서 시작하여 계룡산에 이른다고 했다. 신경준의 관점에서 본다면 마이산은 호남지방의 중심지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백제계 백성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고 민심은 늘 불안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라 입장에서는 백제 땅의 주맥(主脈)인 마이산을 진안(鎭安)하여 백제 유민의 마음을 진안(鎭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염원을 담은 지명이 진안이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눈 덮인 마이산
마이산에 내려오는 전설
마이산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기 위한 행복한 발걸음은 진안만남쉼터에서 시작되었다. 진안 고원길이며 전북특별자치도 천리길이기도 한 마이산길은 진안만남쉼터에서 시작하여 마이산 북부주차장, 연인의 길, 천왕문, 은수사와 탑사를 거쳐 마령면 행정복지센터에서 끝난다. 이번 마이산길 답사는 진안만남쉼터부터 남부주차장까지 약 7km를 3시간 정도 걸었다.
현재의 남부주차장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마이산 탑사에 가기 위해서는 북부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끝도 없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산을 넘어서 갔었다. 당시 등산이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남부주차장이 만들어진 후로는 거의 북부주차장엔 가지 않았다. 맘을 단단히 먹고 출발하였는데 걷는 내내 마이산의 두 봉우리를 마주할 수 있었고, 끝없는 계단길은 연인의 길로 조성되어 전기차와 사람들이 왕래하기 좋은 길로 변모해 있었다. 마이산 두 봉우리 사이를 지나는 마이산길이야말로 진안의 '고갱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마이산에는 아주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마이산에는 신선 부부가 두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살고 있었다. 마침내 인간계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천계로 올라갈 때가 되어 언제 승천하면 좋을지 부부가 상의 하였다. 남편은 “사람들이 승천하는 장면을 보면 부정을 타서 안 되니 한밤중에 떠나자”고 하였고, 부인은 "밤에 떠나기는 무서우니 새벽에 떠나자"고 하였다. 부인을 사랑하는 남편이 양보하여 새벽에 하늘로 출발해서 올라가기로 하였다. 마침내 승천하는 날 아침, 신선부부는 아이들을 안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물 뜨러 나온 아낙이 이 모습을 보고 “어머나 산이 하늘로 올라가네!” 하고 소리를 쳤다. 이에 부정을 타 승천이 어렵다고 판단한 남편은 부인이 데리고 있던 아이 둘을 빼앗아 주저 앉으며 바위산이 되었고, 부인은 가족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떨군채 바위산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이산을 부부봉이라고도 하고 암마이봉, 숫마이봉이라고도 한다.
마이산 명려각 부부시비
마이산에는 산신부부 말고 또다른 부부의 이야기도 있다. 마이산 남쪽, 탑영제 건너편에는 시인이었던 부부의 시비와 영정을 모신 명려각이 있다. 남편은 담락당(湛樂堂) 하립이고 부인은 삼의당(三宜堂) 김씨이다. 부부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특별한 인연이 있다. 남편인 하립(河砬, 1769~1830)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재(敬齋) 하연(河演)의 자손으로 립(砬)자는 "셋째 너만은 입신양명 하여라"라는 가문의 염원을 담아 새롭게 만든 글자이다.
하지만 하립은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진안에서 부인과 시를 읊으며 해로 하였다. 그가 남긴 『담락당운집韻集)』이라는 책에 ‘마이산에 탑들이 줄줄이 들어 있다’는 구절이 있어 마이산 탑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하립의 부인 삼의당 김씨는 여성이기에 이름이 전하지 않고 있지만, 총 257편의 시를 남겨 조선시대 여성 중 가장 많은 시를 남겼다.
연인의 길
마이산을 중심으로 부부 이야기가 많아서인지 북쪽 주차장에서 천왕문 입구까지의 길을 연인의 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천왕문 입구까지 전기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가 포장되어 있으며 입구에서부터 차례대로 손잡는 곳, 포옹하는 곳, 뽀뽀하는 곳을 거쳐 마침내 프러포즈 하는 곳까지 연인의 발전 단계에 맞춘 조형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걷는 게 부담스럽다면 전기차를 타고 천왕문 입구인 종점까지 이동할 수 있다.
연인의 길 끝부분에는 천왕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곳에서 전북 천리길 스탬프를 찍을 수 있으니 천리길 스탬프 투어를 진행하시는 분들은 꼭 챙겨서 스탬프를 찍어야 한다. 혹시 스탬프 노트를 준비하지 못했다면 이곳에서 인증샷을 찍거나 걷기 어플인 트랭글을 캡쳐해서 제출해도 된다.
계단을 다 오르면 마이산 두 봉우리 사이에 있는 쉼터인 천왕문에 도착한다. 진행방향 오른쪽은 암마이봉이고 왼쪽은 숫마이봉이다. 천왕문에서 숫마이봉 쪽으로 150m 정도 오르면 화엄굴이 있다. 이곳에서 스님이 연화경과 법화경을 받았기 때문에 화엄굴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암마이봉은 겨울철(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에는 등산로가 위험하여 입산 금지이다. 천왕문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었는데 빗 속에서 덜덜 떨며 먹은 김밥이 꿀맛인 이유를 모르겠다.
은수사
천왕문에서 식사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오르기가 힘들지 내려가기는 수월한데 이날은 눈이 쌓여 있어서 내려가는 길이 더 위험했다. 난간을 붙잡고 엉금엉금 매달려서 겨우 내려와 태조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은수사에 도착하였다. 은수사에는 어마무시하게 큰 법고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법고이다.
마이산은 원래 서다산(西多山)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서쪽에서 가장 이로운 산이라는 뜻이고 해마다 이곳에서 산신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하늘로 용솟음치는 힘찬 기상을 상징한다하여 용출산(湧出山)이라고 했다. 고려 말 이성계는 마이산의 기(金-쇠의기운)가 너무 강해서 나무의 기운을 눌러 이(李)씨가 왕이 될 수 없다 하여 쇠의 기운이 강한 마이산의 정기를 묶는다는 의미로 속금산(束金山)이라고 했다. 이곳 은수사에서 이성계는 나라를 다스리는 상징인 금척을 마이산 산신에게서 받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이후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의 행로를 따라 남행을 하는데 마이산을 보고 ‘이미 이씨가 왕이 되었는데 산의 기운을 묶어둘 필요가 없다’ 라며 ‘산이 말의 귀를 닮았으므로 마이산이라 하라’ 하여 마이산이 되었다.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지명총람>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하여 은수사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은수사에 꼭 봐야하는 천연기념물이 2개는 청실배나무와 줄사철나무이다. 춘향전에서 춘향이를 찾아온 이도령에게 월매가 주안상을 내오는데, 이 주안상에 올라온 '청슬이', '청술레'라는 과일이 바로 청실배나무의 열매이다.
개량 배나무에 밀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나라 토종 배로 돌배나무 중에서 제일 맛있다. 이 청실배나무는 이성계가 마이산에 찾아와 기도하고 그 증표로 심었다고 하니 대략 600년이 넘은 할아버지 나무이다. 청실배나무 밑둥에는 스텐그릇들이 조르라니 놓여 있다. 은수사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으로 이곳에 물그릇을 놓아두면 역고드름이 생긴다고 한다. 이 신기한 현상을 보기 위해 1월과 2월에 은수사를 찾는 사람이 많이 있다.
탑사
마이산 하면 탑사를 떠 올리는데, 탑사에는 돌을 접착제로 고정한 것도 아니고 홈을 파서 끼워 맞춘 것도 아닌데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않는 돌탑이 있다. 돌탑을 만든 사람은 이갑용 처사이다. 이갑용 처사가 마이산에서 수행하던 때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뒤숭숭했다. 이갑용 처사는 수행 중에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를 받아 30여 년간 108개의 돌탑을 쌓았다. 현재는 약 80여기가 남아 있는데 오방탑, 33신장군탑, 중앙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등 이름도 특이하고, 크기도 다르고, 쌓아올린 모습도 제각각이다. 돌탑들은 삼국지 제갈량의 팔진도법(八陣圖法)에 따라 배치했다고 한다. 대웅전 뒤 가장 높은 곳에 한 쌍의 부부처럼 서 있는 천지탑이 주 탑으로 높이는 13m이다.
출처: 진안군청
탑사에서 돌탑 이외에 꼭 봐야하는 것이 있다면 암마이봉 절벽을 타고 35m까지 자란 능소화이다. 능소화는 관리만 잘 하면 몇 백년을 넘게 자라는 수명이 매우 긴 식물로 탑사의 능소화는 1985년에 심었기 때문에 비교적 어린 나무이다. 능소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구중 궁궐에 소화라는 궁녀가 살고 있었다. 소화는 승은을 입고 빈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후 임금님은 소화를 다시 찾지 않았다. 소화는 임금님이 찾아주길 기다리다 기다림에 지쳐 죽었다. 소화는 자신이 죽으면 궁궐 담장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어느 여름날, 소화를 묻었던 자리에서 꽃이 피었는데 줄기가 담장을 타고 올라 담장 위에 꽃을 피웠다. 마치 소화가 임금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소화의 이름을 따서 이 꽃을 능소화라고 불렀다.
능소화는 장마를 알리는 식물로 7월부터 9월까지 한여름에 꽃이 핀다. 꽃이 질 때는 송이째 뚝뚝 떨어지기 때문에 옛 선비들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여겼으며,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이 쓰던 관모를 장식하는 어사화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양반꽃'이라 불리며 평민들은 능소화를 함부로 키울 수 없었다. 꽃말은 명예, 영광, 그리움, 기다림이다.
진안에서 마이산 외에 가 볼 만한 곳은 메타세콰이어길과 용담댐이 있다. 메타세콰이어길 인근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육군이 의미 있는 첫 승리를 거두었던 웅치전적지가 있다. 메타세콰이어길은 세동마을, 웅치고개, 두목마을, 화심으로 이어지는 웅치전투순례길의 시작점이다. 풀이 무성해지기 전 웅치전투순례길을 걸으며 풍전등화의 국가 위기에 목숨 받쳐 나라를 구한 무명용사와 만나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용담댐은 감동벼룻길의 시작점이다. 꽃이 피는 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야생화 천국인 이길을 천천히 걸어봐도 좋겠다.
[이맘때 가면 딱 좋은 곳 ⑥] 부부와 연인이 가면 딱 좋은 곳- 진안 마이산 길 < 답사 < 아트체험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