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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문학자의 인문학 공간] "너의 약함에서 힘을 얻으라

by 데일리아트

약함과 악함, 또는 완전성이라는 환상의 결말


도구의 기능이 중단될 때, 도구는 비로소 인식의 대상이 된다. 컴퓨터의 기능이 갑자기 중단될 때, 컴퓨터와 관련된 온갖 일들이 비로소 사용자에게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적, 사회적, 물리적, 미적 기능이 중단되는 경우에도, 인간은 비로소 스스로에게 자체로서 인식의 대상이 된다. 기능에 문제가 없을 때, 인간의 시각은 외부, 특히 외부의 ‘이용’을 지향한다. 일상적 기능에 문제가 생길 때, 또는 일상적 기능과 관련된 문제가 의식적으로 중단될 때, 비로소 인간의 의식은 내면적 존재, 또는 존재 자체를 향한다(후설, 하이데거). 괴테의 파우스트가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11580행)는 희망을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실현한다고 ‘착각’했던 순간에도, 육체의 눈이 멀고서야 비로소 “내면에 밝은 빛이 비추이는”(11500행)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모두 ‘약점’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그것은 외부적 기능에 관련된 것일까, 아니면 내면적 인식과 관련된 것일까? 또는 그것은 외부적 ‘이용’의 측면에서 규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내면적 존재의 한 가지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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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카호테 동상


‘약점’과 관련된 오랜 격언으로 “너의 약점에서 힘을 얻으라”는 말이 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1605)에서 산초가 자신들의 불행이 죽어서야 끝나는 것 아니냐며 한탄하자,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건네는 조언이다. 이 말은 독일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자로 꼽히는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1862-1946)이 즐겨 쓰던 말이기도 하다. 그는 학교 수업 중에도 ‘꿈의 세계’를 헤매느라 선생님께 야단만 맞았고, 공부를 못해 농사를 배우러 갔지만 몸이 약해 그것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꿈꾸는 작가’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기에 그럴 만도 했다.


또한 ‘너의 약점에서 힘을 얻으라’는 말은 독일의 문화, 특히 1800년을 전후해 발생하고 융성한 독일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1776년 영국에서 나왔고, 1789년에는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났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당시 독일에서 시민계급은, 소위 (역사의) 진보에 대한 불신과 함께 허무감에 빠져있었다. 고위 관료는 귀족들 차지였고, 시민은 하위직에서 일했으며, 상층부는 프랑스어 쓰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사회의 ‘지식인층’을 형성한 것은 시민계급이었다.


정치와 경제에서 소외된 시민층은 독일어를 쓰는 학문과 독일적 정서의 예술에 몰입하고, ‘지성’과 ‘감성’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유’, 또는 정신적 우월감을 발견하려 했다. 그래서 그 시대 독일은 ‘비자립적 행동 속 자립적 사유’의 시대로 요약되기도 한다. 이 ‘자립적 사유’는 일상적 근면성에 무관심했던 독일 낭만주의뿐 아니라, 독일 교양의 표준을 수립하려 한 고전주의, 그리고 그 이전 시기 ‘질풍노도’ 문학과 예술의 힘의 원천이었다. 괴테의 소설 속 인물 베르터의 자살도, 노년의 괴테가 ”베르터는 죽고 나는 살았다”고 표현했듯 ‘비자립적 행동 속 자립적 사유’라는 상황의 소설적 묘사였다. 말하자면, 당시 독일의 시민층, 지성인들이 추구하고 수행한 ‘정신적 자유’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자유에서 피어난, 또는 피어날 수밖에 없었던 궁여지책이기도 했다. 그 자유가 정신적 차원에 국한되었다는 ‘한계’도 지적되지만, 최소한 그것이 독일 문학과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독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고유성, 독창성 형성의 원천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약점을 힘의 원천으로 삼는 것’ 대신 주어진 ‘약점’을 없애기 위한 외적(경제적, 정치적) 상황 변화 시도를 할 수도 물론 있다. 이것이 의미가 없지 않은 만큼, ‘약점’을 존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바탕 위에서 고유성을 발전시키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괴테와 그 시대 독일의 지성이 시도했던 것 역시 (할 수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변화, 혹은 인간의 변화를 통한 상황의 변화였다. 이것은 ’사회가 좋아지면 개인도 좋아진다’고 믿는 사회주의와, ‘개인이 좋아지면 사회도 좋아진다’고 믿는 개인주의의 차이와 유사한 점이 있다. 하지만 이 신념이 갈등과 싸움의 이데올로기일 수 없다. 둘의 차이는 비중의 차이일 뿐, 실제에서는 언제나 서로 뒤섞여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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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괴테, 출처: 나무위키


괴테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다. 집안도 부유했지만, 귀족들의 후원이 넘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헤르더도, 동료였던 쉴러도 경제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괴테는 후에 귀족의 작위까지 받지만, 그는 시민계급으로서 지녔던 ‘사유의 자유’를 멈추지 않았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추구하는 자는 곧 방황하는 자”인 것, ‘멈추는 것’이 곧 ‘종말’인 것은 그런 의식의 문학적 표현일 것이다. 현실 속 추구에는 목표 지점도 ‘머무는 지점’도 있을 수 없다. 추구의 현실적 목표가 있을 수 없음을 알면서, 정신적으로 더 높고 깊은, 더 넓은 곳을 향한 추구를 멈추지 않는 것은 어쩌면 모든 (정신적) 인간의 비극이다. 그러나 비극이 불행만은 아니다. 비극은 불행을 통해 위대함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정된 삶과 무수한 약점 속에서도 인간은 언제나 고귀한, 때로는 위대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시간을 넘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추구의 의식이 약점(의 의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역설이지만 사실이다. 궁핍에서 미덕이 만들어지는 것은 개인사뿐 아니라 인류 역사와 문화사가 보여주는 법칙 같은 것이기도 하다.


기능은 존재의 수용을 바탕으로 할 때만, 그 바탕 위에서만 힘을 얻을 수 있다. 약점에서 힘을 얻기 위한 전제는 약점의 존재적 수용이다. 자신의 약점을 고쳐 사회적 기능에 부합하려는 노력의 다른 한편으로, 약점과 약함에 대한 존재적 관용은 자신에게나 타자에게나 언제나 필요한 덕목이다.


존재가 현실적 삶 속에서는 기능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해도, 인간을 기능으로만 보는 관계에서 인간관계는 파탄을 피하기 어렵다.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해도, 그 시간은 지속되는 건 인간관계의 파탄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반인륜적인 개인적, 국가적 차원의 범죄적 행위들은 인간을 기능으로만, 이용의 대상으로만 보는 태도가 낳은 결과물은 아닌가? 또는 나의 약점뿐 아니라 상대의 약점도 수용하지 못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강자가 있으면 약자도 있듯이, 강한 젊음이 약한 노인이 되듯이, 약함과 약한 자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을 수밖에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좋은 의도로 벌인 대규모 간척사업이 실은 착각이고 허상이었듯, 그래서 간척지의 조그만 집 약한 노인들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듯, 오늘날 인간들이 이룩했다는 “좋은 뜻“의 발전도 실은 기계 의존적 인간들 전체를 서로 수단화하면서, 약한 모든 인간의 소멸을 피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 18세기 계몽주의 이래 기획되고 추구되어온 완전성이라는 ‘환상’이 약점과 약함을 꺼리고, 악함과 동일시하는 시각을 키워온 것일 수 있다. 인간이 완전성의 환상을 떨치지 못하는 한, 약점에 대한 관용과 수용의 태도를 회복하지 않는 한 세계의 반인륜화와 자기 파괴는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너의 약점에서 힘을 얻어라.’ 이 시대와 인간이 다시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새겨야 할 오랜 격언이다. 이렇게 변환시켜도 좋겠다. 너의 약점을 수용하라. 타자의 약점을 수용하라. 그것을 인간애와 자연애, 삶 전체의 바탕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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