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젤 앞에서 작업 중인 자화상은 줄곧 미술가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드러내는 주 소재가 되어 왔다. 15세기 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여성의 세밀화가 전해지며 16세기 이후에도 계속 그려졌다.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이른 사례는 16세기 전반의 카타리나 판 헤메센(Catharina van Hemessen)이 1548년에 그린 자화상이다. 그녀는 팔받침, 팔레트, 여분의 붓들을 왼손에 쥐고 이젤 앞에서 작업 중인 자신을 묘사함으로써 화가로서의 전문성과 함께 정숙한 태도, 단정한 벨벳 의상을 통해 점잖은 여성임을 전달한다.
카타리나 판 헤메센, 자화상(Self-portrait), 1548, 나무에 템페라, 31.1×24.4cm, 바젤미술관(Kunst Museum Basel)
로코코 시대 프랑스의 저명한 초상화가인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Elizabeth Louise Vigée-Le Brun, 1755-1842)의 1802년 회고록에는 당시 여성 미술가들이 어떤 상태에서 작업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런던의 집에서 방문객을 기다리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방문객의 시선에 대비해 작업복 밑에 멋진 흰색 드레스를 입고 예쁜 가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문객인 귀부인들이 들어올 때 재빨리 가발을 썼는데 그들은 좀 놀란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보니 가발 밑으로 취침용 모자가 튀어나와 있었고 여전히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이러한 일화를 통해 당시에는 여성이라면 비록 전문 화가라 할지라도 여성성을 갖춘 태도와 복장이 계속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여성에게 가해지는 이러한 아름다움의 압제를 거부하는 작품이 제작되기도 했다. 프로이센의 성공한 화가인 안나 도로테아 테르부슈(Anna Dorothea Therbusch, 1721-1782)는 여성 미술가에게 편견이 심했던 18세기 보수적인 미술계에서 <단안경을 쓴 자화상>을 그렸다.
안나 도로테아 테르부슈, 단안경을 쓴 자화상(Self-portrait with monocle), 1776, 캔버스에 유채, 151×115cm, 베를린국립회화관(Gemäldegalerie, Berlin)
이 자화상은 56세에 그린 것으로 외알 안경을 쓴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외적인 미를 갖추고 있지 않고, 의상이나 소품 등을 통해 사회의 취향을 맞춰 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면을 잘 표현한다는 평을 받는 초상 화가답게 외모보다는 자신의 내적 세계 묘사에 더 주력한 작품이다.
18세기에 이어 19세기에도 장식한 머리에 드레스를 입은 채 작업 중인 화가의 자화상들은 물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는 이전 시기보다는 좀 더 다양한 형식, 자유로운 태도로 자신의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는 자화상들이 나타난다.
19세기 전반의 미술 작업을 하는 자화상 중에는 당시 여성 미술가들이 자화상을 그리거나 그림을 연습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다. 알렉산드라 프로스테루스 솔틴(Alexandra Frosterus-Såltin, 1837-1916)은 핀란드의 풍속화가이자 삽화가였으며 후기에는 제단화를 제작한 작가다.
알렉산드라 프로스테루스 솔틴, 아틀리에에서(In the Atelier), 1858, 캔버스에 유채, 39.5×29.5cm, 티카노자미술관(Tikanoja Art Museum, Vaasa, Finland)
화가는 빛이 들어오는 창턱 위에 거울을 올려놓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면서 스케치에 채색을 하고 있다. 관람자에게 등을 돌리고 자화상을 그리느라 그의 얼굴은 직접 보이지는 않는다.
한편 스위스 화가로 제네바에 거주하면서 초상화와 풍속화를 주로 그렸던 아밀 우술레 기유보(Amile-Ursule Guillebaud, 1800–1886)는 창문 오른쪽 벽을 등지고 이젤 앞에 앉아서 왼쪽 앞에 있는 의자 위에 비스듬히 놓여 있는 커다란 액자를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밀 우술레 기유보, 이젤 앞에 앉은 화가의 초상(Portrait of the artist, seated at her easel), 1820-45년경, 캔버스에 유채, 68×56cm, 스미스대학교미술관(Smith College Museum of Art, Massachusetts)
그녀는 액자 속의 그림을 모사하고 있는 듯하다. 두 작품은 자화상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얼굴이 그림의 중심 주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면서 모사하고, 거울을 보면서 자화상을 제작하는 과정을 서술적 방식으로 기술하면서 세상에 자신이 미술가로 보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역사화나 성화 속에 화가 자신을 그려 넣는 방식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남성 미술가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이는 여러 사람 앞에서 예의와 품위를 갖춰야 하는 여성에게는 오랫동안 적합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에는 이와 같은 유형의 자화상도 나타난다. 롤린다 샤플스(Rolinda Sharples, 1793-1838)는 영국 브리스톨 지역에서 활동하던 화가로 초상화와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샤플스는 지역 행사를 기록하는 그림의 전문가였다. 1832년에 일어난 브리스톨 폭동과 관련된 현장 장교 브레레턴 중령의 위법 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법정 장면을 작품으로 제작했다.
롤린다 샤플스, 브레레턴 중령의 재판(The Trial of Colonel Brereton), 1832-34, 캔버스에 유채, 101.6×148.6cm, 브리스톨시립미술관(Bristol Museum & Art Gallery). 화가는 좌측 회색 타원형 안에 있는 인물. 타원 표시는 필자가 추가함.
그녀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과 법정 모습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그림의 좌측 끝에 사람들 틈에 앉아 스케치를 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그려 넣었다. 이 작품은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오는 대형 역사화다. 정물화나 풍경화, 초상화, 실내화 등을 그리는 것이 여성 미술가들에게 일반화된 장르였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장르 선택이 진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비록 지역 화가로 활동했지만 자신의 예술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강하고 묘사력도 탁월했다.
19세기 전반에는 집의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화상 유형이 처음 등장한다. 메리 엘렌 베스트(Mary Ellen Best, 1809-1891)는 영국에서 주로 수채화를 그린 화가로 19세기 전반에 왕성하게 활동했다. 가정생활이나 집 내부 등의 실내화를 많이 그려서 작품이 1830-40년대 요크셔와 유럽인의 삶의 기록물로 관심을 끄는 화가다. 그녀는 자신의 집 실내에서 미술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메리 엘렌 베스트, 요크 화실에서의 자화상(Self-portrait in Painting Room, York), 1837-39, 수채, 25.7×35.8cm, 요크박물관(York Museums Trust)
그림 왼쪽의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판화 몇 점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정돈된 집안이다. 그녀는 오른쪽 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있다. 앞에 있는 탁자 위에는 이젤, 수채화 물감, 팔레트, 컵, 자신의 작품을 정리해 넣은 앨범이 있다. 붓을 들고 팔레트에 물감을 섞고 있어 미술 작업 중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자화상의 등장은 제도적인 미술교육이 여성에게 아직 제공되지 않던 시기에 여성 미술가들의 작업이 이루어지던 공간과 환경에 대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19세기 중반에는 실내에서가 아니라 집이나 아틀리에 외부의 야외에서 사생하는 장면을 그린 자화상도 나타난다. 안나 스타이너 니텔(Anna Stainer-Knittel, 1841-1915)은 오스트리아의 초상화가이자 풍경화가다. 그녀는 1편에서도 언급했듯이, 1859년에 뮌헨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본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결혼 후인 1873년에는 여성을 위한 미술학교를 열어 운영하면서 제자들을 키우기도 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 같은 알프스 지역에 살면서 알프스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많이 그려 지역 화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현재 이러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알프스에서의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하이킹 코스(Anna Stainer-Knittel Memorial Trail)가 개발되어 운영되고 있을 정도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 지역의 레흐탈 알프스(Lechtaler Alpen)를 배경으로 한 자화상을 그렸다.
안나 스타이너 니텔, 레흐탈 전통의상을 입은 자화상(Selbstbildnis in Lechtaler Tracht), 1869, 캔버스에 유채, 53.5×42.5cm, 그뤼네하우스뮤지엄(Museum Grünes Haus, Reutte, Austria)
레흐탈 지역의 전통 복장을 입고 알프스에 오른 그녀는 오른손에 팔받침과 팔레트를 들고 왼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며 산을 둘러보고 있다. 원경에 알프스의 험준한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데, 그것을 배경으로 산 중턱에 서 있는 그녀의 왼쪽 앞 화구 박스에 풍경화 한 점이 세워져 있고 그림 밑에는 붓이나 팔레트를 닦는 걸레가 놓여 있다. 이를 통해 그녀가 풍경을 직접 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에는 검은 산양 두 마리가 있고, 양산과 등산 스틱, 밀짚모자, 장갑, 가죽 가방, 망원경 등이 놓여 있다. 화구를 들고 산 위로 직접 올라와서 망원경으로 주위를 살피면서 알프스 풍경화를 그렸음을 보여준다. 아틀리에의 실내 조명보다는 실외의 직접적인 빛을 받으며 그림을 제작하려는 외광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19세기 초반까지도 작업 중인 여성 화가가 겉모습이나 자세가 흐트러진 채로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면 이러한 모습은 예술 창작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자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폴란드 화가인 안나 빌린스카(Anna Bilińska, 1854-1893)는 작업 중에 잠시 쉬고 있는 자신을 그렸다.
안나 빌린스카, 자화상(Self-portrait), 1887, 캔버스에 유채, 117×90cm, 크라쿠프국립미술관(National Museum in Kraków, Poland)
흩어진 머리를 하고 작업용 앞치마를 입은 채 오른손에 붓을 한 다발 들고 왼손에 팔레트를 들고 있다. 모델의 배경으로 쓰이는 커튼 앞에 있는 자신을 그림으로써 자신이 화가인 동시에 모델임을 알리고 있다. 그녀는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앉아서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헬렌 메이블 트레버(Helen Mabel Trevor, 1831-1900)는 아일랜드 화가로 풍경화와 풍속화를 그렸다. 그녀는 1890년경에 그린 자화상에서 푸른색 베레모를 쓰고 있다.
헬렌 메이블 트레버, 모자와 작업복을 착용하고 팔레트를 든 자화상(Self-portrait with Cap, Smock and Palette), 1890년경, 66×55cm, 캔버스에 유채, 아일랜드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Ireland)
2편에서 소개한 오르탕스 오드부르레스코(Hortense Haudebourt-Lescot)는 75년 전인 1825년에 남성 자화상과 흡사하게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검은 배경에 베레모와 의상도 검은색으로 그려서 대중의 보수적인 시선을 교묘하게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세기 말이 되면서 자기 검열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트레버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파리, 브루타뉴 지역 등에서 그림을 그렸고 전시회 활동도 활발히 했다. 이러한 예술적 배경이 그녀의 자화상에 잘 드러나 있다. 트레버는 베레모 쓴 것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정돈되지 않은 작업복을 바라볼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커다란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신감 넘치는 예술가로서의 만년을 자화상에 담고 있다.
[19세기 여성 미술가의 자화상 ③] 자기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다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