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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의 영화 한 되] 쉬리 - 쉬리가 어찌 쉬리

by 데일리아트

*본 기사는 영화 <쉬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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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을 쉬었다. 영화 전문 케이블 채널이 생기고, IPTV가 서비스 되고, OTT 전성시대가 됐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영화였다. 강제규 감독의 <쉬리> 얘기다. 그동안 <쉬리>는 마치 소문만 무성한 전설의 포켓몬 같았다.


“야, 쉬리라는 영화가 있대, 정말 굉장하대.”


“한국 영화는 쉬리 전과 후로 나뉜대.”


“한석규, 송강호, 최민식이 한 영화에 나온대.”


1999년 개봉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봤거나 후에 중고 DVD를 구해서 본 사람이 아닌 이상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긍정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쉬리>와 마찬가지로 제작사인 강제규필름의 파산 이후 판권 문제로 온라인 유통이 되지 않던 <태극기 휘날리며>가 판권 문제를 해결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태극기 휘날리며>는 2021년, 4K 리마스터링 돼 극장에서 재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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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인 2023년, 강제규 감독이 직접 “판권 문제가 해결됐다.”고 밝혔고, 드디어 지난 2025년 3월 19일, 정식으로 4K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친 <쉬리>가 극장에서 상영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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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


도시 한 블록(block)을 날려버릴 수 있을(buster) 수준의 폭탄.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드레스덴을 폭격했던 4.5톤 폭탄에서 지금의 블록버스터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블록버스터 영화란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든(그리고 기왕이면 그 돈을 회수하고 이득을 낸), 극장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영화를 말한다. 흔히들 할리우드에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죠스>(1975)나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1977)을 뽑고 한국에선 이견 없이 <쉬리>를 뽑는다.


당시엔 한국 영화계에 지금과 같은 영화가 없었어요. 20개 제작사가 한국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오로지 외화 쿼터를 따기 위해서였죠. 1년에 의무편수 4편을 채우면 쿼터가 나오고, 이 쿼터로 돈을 벌었어요. 그러니 邦畵(방화)는 최소 경비만 들여 한달만에 촬영이 끝나는 졸속 영화들이 양산됐어요. 80년대 한국 영화계가 그런 식으로 침체돼 있었던 겁니다.


(김병석, [인물연구] 野性 있는 영화 「쉬리」의 姜帝圭 감독 『80年代의 절망 속에서 시나리오 쓰기에 매달렸던 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월간조선 뉴스룸,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199904100014)

<쉬리>가 30억이 넘는 제작비로 전국 600만 관객 돌파(최종 전국 695만), 해외 수출(일본 매출 18억 엔)까지 이뤄내면서‘잘 만든 영화 한 편은 충분히 돈이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곧 영화 산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로 이어졌고, 이후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실미도>까지, 사실상 코로나 이전까지 모든 한국 영화의 탄생과 성장엔 <쉬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화는 쉬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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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봐도 재밌을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영화 외부적인 의미는 잘 알겠고, 얼마나 비싸게 만들었던 건지도 알겠는데, 26년 전 영화를 지금 봐도 재미가 있어?"


나는 대답한다.


충분히.


<쉬리>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압도적이었다. 작전을 위해 훈련 받는 북한 공작원들 수십 명이 스크린에 쏟아져 나오고, 서로를 찌르고 총으로 쏘고, 심지어는 몰려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움직이며 총을 쏘기까지. 지금 봐도 그 규모에 압도되는 오프닝 시퀀스였다. 그리고 영화 내내 도심 추격전, 빌딩 폭파, 도심 총격전, 헬기 레펠 등의 규모가 큰 장면들이 이어진다. 정말 돈이 많이 들었다는 티가 났고, 돈 들인 만큼 태가 났다.


백미는 단연 영화의 최후반부 잠실 주경기장 시퀀스인데,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동원해서 찍었을지 영화 내내 궁금했다. 이후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니 그건 몰래 찍었던 거라고. 축구협회가 촬영 허가를 안 내줘서 중계 카메라 들어갈 때 몰래 따라 들어가는 식으로 여러 차례 도둑 촬영한 걸 엑스트라 써서 찍은 장면들과 편집한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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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의 재미적인 부분은 앞서 말한 액션이 충분히 채워준다면, 감성적인 부분은 유중원(한석규 분)과 이명현(김윤진 분) 사이의 멜로와 유중원과 이장길(송강호) 사이의 브로맨스가 채워준다. 그렇다, <쉬리>는 액션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랑과 우정까지 있다. 지금 보면 다소 낭만주의적인 시각과 연출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이렇게 묵직한 액션 씬들 사이 사이에 감성을 살살 만져주는 감정 씬들이 없었다면 <쉬리>가 이렇게까지 성공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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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편집의 아쉬움


아무리 그래도 26년 전 영화다 보니 기술력이 뒷받침 되지 않아 아쉬운 장면들이 분명히 있었다. 미니어쳐로 폭파시킨 빌딩은 티가 나고, 석고 모형을 폭파시킨 장면은 확실히 화면이 튄다. CTX의 빨간 구슬이 끓어오르는 장면은 노골적으로 CG티가 난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오히려 당시 기술력을 생각하면 획기적인 시도였고, 지금에서도 그 시절 감성으로 봐주고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다.


편집에서는 박무영(최민식 분)과 유중원이 대치하다 빌딩 유리를 깨고 밑으로 떨어진 후 이어지는 장면이 갑자기 밤으로 바뀌기도 하고, 인물의 입퇴장이 불명확하기도 하다. 이 부분은 감독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런닝타임 때문에 잘렸다고 한다. 그후 이명현이 이방희임을 알게 된 유중원이 타고 나오는 경찰차는 어디서 나온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디테일에서의 아쉬움이 영화의 전체적인 몰입을 크게 해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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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진짜 아쉬운 건 이명현 = 이방희라는 반전이 너무 쉽게 예측 가능하다는 점이다. 주인공들 주변에 여자라고는 이명현 한 명 뿐이고, 대놓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 자길 미워하지 말아달라하고, 박무영은 콕 집어 열대어 애길 하는데, 이 정도면 유중원이 이명현을 끝까지 의심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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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저씨 왜이렇게 잘생겼어요?


최민식은 영화 <파묘> 개봉 당시 무대 인사를 나간 자리에서 팬들이 준 감귤 모자, 과자 가방 따위를 쓰고, 메고 나와 이른바‘할꾸’(할아버지 꾸미기), ‘최꾸’(최민식 꾸미기)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최민식을 배 나온 할아버지, 송강호를 기생충 최우식 아빠로 익숙한 사람들에게 <쉬리>는 “저 잘생긴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그 배우들의 거의 30년 전 얼굴이니 오죽할까. 오히려 지금과 큰 차이 없어 보이는 한석규 배우가 몹시 놀랍다.


위 세 배우 말고도 <쉬리>에는 단역으로 나온 배우들도 그 면면이 화려한데, 스텝롤 올라갈 때 “그 캐릭터가 저 배우였다고?”하는 놀라움을 위해 이 자리에서 다 밝히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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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이 재개봉 영화가 쏟아지는 와중에 <쉬리>는 앞서 말한 판권 문제로 너무 오랜 시간을 쉬었다. 하지만 이제 휴식은 끝났다. 본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차기작이 개봉할 때마다 언급될 것이고, <쉬리> 개봉 몇 주년이 지나갈수록(당장 2029년이 30주년이다.) <쉬리>는 계속해서 다시 극장에 걸릴 것이 분명하다.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강제규 감독이 일본서 <쉬리> 속편 제안이 많고, 2년째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고 밝혔으니, 어쩌면 몇 년 뒤엔 <쉬리2>를 극장에서 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쉬리는 쉴 새 없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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