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누가 뭐래도 봄이다.
오늘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춘분(春分 ; march equinox)이다. 봄은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태양과 지구가 벌이는 힘의 균형이자 그 힘의 싸움을 벌이느라 내놓는 뜨거운 에너지의 결과물이다.
이름하여 봄이 오고야 말았다.
춘삼월에 폭설이 내려도, 흰색에 덮여있는 산하에 고개를 내민 노란색을 더욱 돋보이게 할 뿐이다. 봄 햇살에 게눈 감추듯 사라진 잔설 너머로, 색들이 더 뚜렷해질 뿐이다. 그것이 봄의 본질이자 속살이다.
냇가의 버드나무가 물이 올라 연초록 잎으로 갈아입고 양지바른 담벼락 밑의 산수유와 생강나무의 노란색조차, 골 깊은 산골마을에도 봄이 건너왔음을 알리는 전령이 된다. 가을의 단풍은 산꼭대기에서 마을로 내려오지만 봄꽃소식은 마을 초입에서 뒷마당을 거쳐 산으로 산으로 올라간다. 곧 산허리에도 연분홍 진달래가 휘어감을 것이다.
봄은 그렇게 색으로 온다.
봄은 혼자 오는 게 아니고 색의 떼로 온다. 유채꽃이 그렇고 산수유가 그렇고 매화가 그렇고 벚꽃이 그렇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 "유채꽃이 혼자 피나 떼로 피지. 혼자 피었으면 다 꺾였어!"라는 대사가 나온다. 제주의 거친 자연을 살아내고 이겨낸 애환이 녹아 있다. 더불어 살아야 겨우 버텨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온기다.
그래서 봄의 색은 화사함으로 치장된 것만이 아니다. 살아내야 하고 살아야 하는 방법을 경고하는 생존의 색이다.
같은 시기에 피어나는 노란색 복수초도 있고 흰색의 노루귀와 변산바람꽃도 있고 무덤 옆의 할미꽃도 있다. 홀로 피는 야생화들이다. 각자 고귀한 자태를 뽐내며 홀연히 봄의 전령 속에 발을 디밀지만 강렬하지는 않다. 봄이 오긴 왔는데 살얼음 낀 차가움을 같이 품고 있는 형상이다. 햇살은 따뜻한데 색의 농도를 더 하지는 못한다.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이 무리를 이뤄 떼로 피었다면, 들판 한가득 노란색과 흰색으로 덮었더라면, 유채꽃처럼 눈을 사로잡는 색의 존재로 자리 잡았을까?
같은 색이라도 본연의, 본질의 바탕 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은 홀로 피었을 때 그 색의 강렬함이 더 강하다. 무리 지어 떼로 피어나지 못할 고고함으로 무장한 자객이다.
세상의 색은 딱 3개로 만들어질 뿐이다. 빛의 색이다. 빨강(Red), 초록(Green), 파랑(Blue)이다. 이름하여 RGB다. 이 세 가지 색의 조합이 세상의 모든 색이다. 세상의 색은 합쳐질수록 밝아져 궁극에는 흰색이 되고 밝아지지 않으면 검은색이 본질이다. 인공으로 만들어내는 색의 삼원색은 조금 다르다. 청록색(시안 Cyan), 자홍색(마젠타 Magenta), 노란색(옐로 Yellow)으로 이른바 CMYK다. 색의 삼원색이 섞이면 점점 어두워져 결국 검은색이 된다. 세상 빛의 본질은 검은색이었고 존재의 종착점도 검은색이다. 나머지 색은 처음과 끝의 중간 어느 지점에 있는 순간을 보여줄 뿐이다.
떼로 모여 한 가지 색만을 보여주는 군집의 힘과 홀로 외로이 자태를 드러내 고독의 색으로 존재하는 힘, 모두 세상을 구성하는 다양성이다. 칙칙하고 삭막했던 겨울의 음습에서 색깔이 주는 강렬함이다. 무채색의 시간을 지나오느라 색의 강렬함에 마취되듯 더 집착하게 된다. 무리의 힘이자 떼의 장엄함이다.
그렇게 봄은 춘분을 넘어 콧바람으로 들어왔다. 제길 바람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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