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풍경
청와대 뒷산까지 뚫은 김신조
영화 스틸 컷
1968년은 유난히도 많은 일들이 일어난 해였다. 신년 벽두인 1월 21일, 소위 말하는 '김신조 사건'으로 청와대 뒷산이 뚫렸다. 청와대를 침입해 대통령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것이다. 군경의 작전으로 김신조를 제외한 모든 간첩들은 소탕되었으나, 정초에 벌어진 간담이 서늘한 사건이었다. 이 영향으로 그해 10월 1일, 선유초등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떠난 날은 국군창설 20주년과 맞물려 대대적인 국군의 날 행사가 열렸다. 이러한 군사적 긴장 속에서도 경제적 성장의 발판이 놓여진 해였다. 농사만 짓던 한적한 땅, 구로동에 대대적인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제1회 무역박람회>를 개최했다. 1968년 9월9일부터 10월 20일까지 42일간 열린 이 행사에는 2백 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갔고, 넘쳐나는 관람객의 이송을 위해 간이역이 생겼다. 지금 '가산디지털단지 역'이라 불리는 '가리봉역'이 이때 만들어 졌다. 행사장에는 ‘내일을 위한 번영의 광장’을 주제로 친선 파티, 연예행사, 가요제 등이 펼쳐졌다. 국내 311개 업체에서 상품 2만여 점이 출품됐으며, 해외 10개국·100여개 업체에서 1천 664점이 출품·전시됐다.
행사기념 발행 우표
영화 스틸 컷
5만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3만여 개의 오색풍선과 300여 마리의 비둘기 떼가 하늘을 수놓고 행사장 중앙에는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커다란 주판알로 쌓아올린 55m 높이의 상징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었다. 영화에는 이런 장면들이 마치 기록영화처럼 등장한다. 행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50원짜리 복권 400만 장을 판매해, 박람회장보다 복권 판매점에 길게 줄을 서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섬마을 학생들과 종로국민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박람회장을 둘러보는 모습이 등장한다. 곳곳에 금성전자, 현대 등 수출을 일군 회사들의 로고가 보이고, 이를 보고 학생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보행위반자 지도 계몽소
영화 스틸 컷
1960,70년대에는 무단횡단 같은 보행규칙 위반자에 대한 계몽소가 있었다. 도로 한 복판 2평 남짓한 장소에 사람을 모아두어 반성하게 한 것이지만, 사실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는 의도가 더 크다. 바쁘기에 무단횡단을 했겠지. 그러나 계도소에 모아, 사람들의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도록 하려는 시벌 의미도 많았다. 영화 속에서는 구봉서가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다가 학생의 신발이 버스 아래로 떨어지자 그것을 줍는 사이 버스가 출발했다. 놓친 버스를 타기 위해 서울역 앞 큰 도로에서 무단횡단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온다. 학생들이 탄 버스는 먼저 떠나고 구봉서는 이 계도소에 구류되어 여관에 먼저 도착한 아이들이 애타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런 단속방법은 실효성 여부를 떠나, 시행초기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지나치게 구류하는 방법이 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급기야 '경미한 범법자 보행 위반자 및 부득이한 통금 위반자에 대하여 도에 넘치는 장시간 구류로 국민 인권을 부당하게 유린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고 경찰 당국은 발표했다. 그러면서 '국민에게 친절히 봉사하는 민주경찰이 되어 국민의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같은 담속 방법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당시 장발단속이나 미니스커트 단속과 함께 60년대 70년대 우리 사회의 권위적 풍속도이다.
아듀! 전차
영화 스틸 컷
당시 신문 기사
우리 나라에서 전차는 1898년 서울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1969년 11월 30일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모두 철거되었다. 이유는 심각한 시설 및 열차 노후화, 점점 자동차가 많아져 도로 통행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70년 동안 전차는 서울 시민의 발 노릇을 톡톡히 했다. 서울의 전차는 고종황제 집권 시기인 1898 년 1 월 18 일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 웍이 한미합작으로 총 75 만원을 투자,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발족하면서 시작됐다. 일제 강점기 전부터 서울 시내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탓에 전차는 운영사인 경성전기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었다. 결국 경성전기는 거액 100 만 원을 경성시에 기부했고, 시는 이 돈으로 국립의료원 과 부민관 (서울시의회 의사당)을 지었다. 전차는 서울 시민의 발이었지만 해방 후에는 계속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전차 요금은 함부로 올릴 수가 없었다. 1957년 책정된 보통권 1 회분 25 원 , 회수권 15 회 200 원에서 전혀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노후한 차량과 교통체증이었다. 서울이 근대화가 이뤄지면서 차량이 증가하자, 도로 중앙에 레일을 두고 달리는 전차는 오히려 교통의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 전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처음보는 전차를 신기해하며 타지만 전차 운전사는 곧 사라질 전차를 아쉬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1969년 영화 개봉 후 곧바로 전차는 시민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상전벽해가 된 선유도
현재의 선유도
이 영화는 선유국민학교 배처자 교장선생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교장은 학교에 부임하자 낙후된 섬마을의 환경을 개선하는 한편 학생들의 서울 구경을 성사시켰다. 그만큼 이곳은 낙후된 지역이었다. 선유도 주변은 '한데 모여 있는 산'이라는 군산(群山)의 뜻처럼 산 모양의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무려 63개의 섬 중 사람이 사는 섬은 16개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군산 여객터미널에서 배를 90분 이상 타야 갈 수 있는 섬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선유도를 영화 속 배경처럼 낙후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금은 배가 아닌 차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선유도가 개발된 것은 지금부터 4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1980년도부터 고군산군도 중 하나인 직도에 공군 사격장이 생기며 주민피해지원 차원에서 현재의 고군산 연결도로가 조성됐다. 섬들을 잇는 방식으로 조성된 새만금 방조제가 더해지고 육지에서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가 되자, 매년 수 백만 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관광지가 되었다. 선유도는 고개만 돌리면 영화와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연출된다. 오죽하면 신선이 노닐다 간다는 섬 이름이 생겼을까?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와 기암절벽을 타고 흐르는 망주폭포, 지는 해가 수면에 부딪히는 선유낙조까지. 볼거리가 지천이다. 그리고 먹거리가 풍부하다. 멋진 풍광을 즐기려면 해안을 따라 조성된 트래킹 코스를 돌면 된다. 해안을 따라 조성된 데크길을 따라 연결된 섬을 한 바퀴 돌면 신선이 된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이제는 수학여행을 선유도에서 서울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선유도로 가야하는 상전벽해의 시대가 되었다.
[영화로 시대 읽기 ⑥] 선유국민학교 학생들의 좌충우돌 서울 체험-수학여행2 < 영화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