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고영애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 작품보다 아름다운 현대미술관 60곳을 프레임에 담아 소개한다. 뉴욕현대미술관부터 게티센터, 바이에러미술관, 인젤홈브로이히미술관 등 현대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12개국 27개 도시에서 찾은 미술관들을 생생한 사진과 맛깔스런 건축 이야기로 안내한다.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의 갤러리 (사진 고영애)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은 노이스 홀츠하임에 위치한 독특한 개념의 미술관이다. 뒤셀도르프의 위성도시인 노이스 홀츠하임은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뒤셀도르프와 마주하고 있다. 예로부터 라인 강 연안의 교역지로 알려진 노이스는 항구와 상업이 발달했다. 이런 상업도시에 최초로 표시 없는 미술관을 표방하는 숲속의 미술관 인젤 홈브로이히와 푸른 초원 위에 덩그러니 안도 다다오의 유리 박스 건축 랑겐 파운데이션이 세워지고, 그로 인해 홀츠하임은 문화 예술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뒤셀도르프에서 기차로 20여 분 거리에 노이스 홀츠하임이 있다. 이곳은 줄여서 노이스(Neuss)라고도 부른다. 전형적인 목가적 분위기의 시골 기차역에 내리니 인젤 홈브로이히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20분마다 기다리고 있었다. 심플한 벽돌 디자인의 버스 승차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조그맣게 써놓은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 표지판 달랑 하나가 길 안내의 전부였다.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을 처음 방문했을 때 세계 여느 미술관에서도 느낄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누구나 편안해 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숲속의 미술관은 에코 미술관이며 힐링의 공간이었다. 미술 감상과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산책만 하여도 즐거우리라. 이번 여름, 두 번째 방문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숲길 사이사이로 자갈을 깔아놓은 자연 그대로의 주차장부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붉은 벽돌의 자그마한 건물에 들어서면 한 구석에 매표소가 보인다. 그러나 어디에도 푯말은 없었다. 그냥 직감으로 알 수가 있었다. 길을 잃어버려도 전혀 두려움이 없는 공간이며,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찾게 하는 장소다. 예전의 소박했던 그 공간들은 내 심장 속에서 울림과 떨림의 오랜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홈브로이히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의 갤러리 (사진 고영애)
1982년 라인-에르프트 강에 둘러싸인 섬처럼 생긴 이 자리에 뒤셀도르프의 부동산개발업자이자 미술품 컬렉터인 칼 하인리히 뮐러(Karl Heinrich Mueller)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미술관을 짓게 된다. 아무런 푯말도, 작품 설명도, 작가 이름도, 인공조명도, 건물 안을 지키는 사람조차도 없는 자유로운 감상이 가능하고 느림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는 미술관이다.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은 미술 전문지 <아트 뉴스>가 선정한 ‘세계의 숨겨진 미술관 톱 10’에 오를 만큼 일반에게는 덜 알려졌지만 꼭 가봐야 할 미술관이다. 독일어로 인젤은 ‘섬’을 의미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강은 보이지 않았고 하천과 늪지만이 드물게 눈에 띈다. 뮐러는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수많은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약 20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미술관을 조성했다.
공간은 역사적인 지역, 늪지와 공원 지역, 정원으로 구분했고 자연 그대로의 지역과 개발 지역이 서로 공생하며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했다. 조각가인 에빈 헤리히와 건축가인 아나톨 헤르츠펠트, 추상화가인 고트하르트 그라우브너가 공동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의 갤러리 (사진 고영애)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의 갤러리 (사진 고영애)
미술관 개념을 벗어나 미술관 문턱을 헐어버린 16개동의 독립된 건축물
미술관 건물은 조각적인 개념으로 디자인되어 용도에 관계없이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아무런 장식 없이 벽돌만을 사용한 소박한 건물들은 자연을 벗 삼아 마음에 평정을 주었다. 다듬어지지 않는 길가의 들꽃과 수풀로 무성한 자연과 소박한 파벽돌의 갤러리는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환상의 조화였다. 야생의 마른 수풀과 늪지 사이로 듬성듬성 서 있는 16개의 미술관들은 숲속에 감추어져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드넓은 숲속에 숨어 있는 다음 갤러리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팻말만이 유일하게 있을 뿐이었다. 기존의 미술관 개념을 벗어나 미술관이 갖는 문턱을 헐어버렸다. 미술품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이해도가 전혀 필요 없이 자신만의 감각미를 체험케 하는 것이야말로 이 미술관이 갖고 있는 독특한 매력이었다. 작품에 붙어 있는 캡션을 해독하려는 어떠한 수고도 필요치 않은 홀가분한 공간들이 감상자를 기다리고 있다. 고정된 이미지를 헐어버린 자유롭게 나열된 작품들 또한 마음을 편안하게 달래주었다. 그곳은 에코의 공간이며 치유의 공간이었다.
자연광에만 의존한 전시 공간은 인공조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빛의 변화에 따라 반응하는 작품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컸다. 작품의 이미지를 단정지어주는 작품명과 작가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음으로 인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작품하고만 교감하고 소통할 뿐이다. 조셉 보이스 등 몇몇 거장의 작품들은 여느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을 때보다도 장소의 자유로운 특성으로 인해 작품 메시지가 더 강하게 전달되었다. 어떤 갤러리에서는 한 작가가 성악 발성법을 퍼포먼스하고 있었다. 미술관 안에 잔잔하게 울려 퍼진 소리의 공명은 그 공간을 더욱 편안하게 했다. 방 모퉁이에 서서 따라해봤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런 행위가 나왔다.
동서양 미술과 고미술, 현대미술이 함께 전시된 미술관 내부 (사진 고영애)
어느 건물은 의자만 덩그러니 있을 뿐 텅 비어 있기도 했다. 이 빈 공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밖의 자연을 마냥 바라보는 것이다. 그 건물이 조각이며 예술품이다. 또 다른 전시장에는 조셉 보이스, 슈비터스 등 독일 현대회화 거장들의 작품이 구석구석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 외에 페르시아 조각, 크메르 청동 조각, 아프리카 나무조각과 중국 당나라의 도자기와 토기 등 시대적 연대나 주제와 상관없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수십억을 호가하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마티스와 세잔의 작품, 자코메티의 조각과 드로잉, 렘브란트의 회화 등 진귀한 작품이 감시자도 없이 놓여 있었다. 상당한 값어치의 귀한 작품들이 방치된 듯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경이롭고 부러웠다.
늪지와 수풀 사이로 배치된 조각들 사이로 알렉산더 칼더 특유의 선홍색 조각이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자유분방하게 놓인 조각품들을 감상하며 산책하듯 이 오솔길을 따라 마음이 끌리는 건물에 들어가 편안하게 작품을 음미하며 이 건물, 저 건물을 기웃거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새로 개축한 아담한 카페테리아에 무료로 준비된 오가닉 식사는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이었다. 주변 농가에서 직접 재배한 유기농 야채와 작지만 빨간 사과, 못생긴 고구마와 단호박, 홈메이드의 호밀빵과 요구르트는 엄마의 정성이 담긴 어릴 적 맛보았던 그 맛이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경계를 허문 예술 작품들을 한껏 누렸던 행복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의 갤러리 (사진 고영애)
2007년에 뮐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미술관 개념을 바꾼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은 시간이 흐를수록 골수 예술 애호가로부터 더욱 사랑받는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확실하다. 권위적이고 거대해지는 21세기의 현대미술관과는 전혀 다른 철학이 그곳에 있었다. 디지털이 범람한 이 시대에 가끔은 아날로그가 그립다.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이 바로 그 아날로그다. 난해한 설치 예술이나 현란한 비디오 작품 위주의 전시가 아닌 아프리카 작품부터 현대회화, 조각들을 드넓은 자연 속에 자유분방하게 흩어놓은 작품 전시 기획이야말로 누구나 자유롭게 편안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기획이었고, 그곳이야말로 힐링을 주는 휴식처요, 안식처였다.
고 영 애
오랫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관을 촬영하고 글을 써온 고영애 작가는 서울여대 국문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사진디자인과를 졸업했다. 한국미술관, 토탈미술관 등에서 초대 전시회를 열었고 호주 아트페어, 홍콩 아트페어, 한국화랑 아트페어 등에 초대받아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미술관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에 글과 사진을 실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잡지에 건축 여행기를 썼다.
이 연재물은 그의 책 <내가 사랑한 세계 현대미술관 60>(헤이북스) 중에서 <데일리아트> 창간을 기념하여 특별히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미술 작품보다 아름다운 현대미술관을 골라서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그가 15년 넘도록 전 세계 각지에 있는 현대미술관들을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고 기록한 ‘현대미술관 건축 여행기’다.
고영애 글/사진, '내가 사랑한 세계 현대미술관 60', 헤이북스
[고영애의 건축기행] 독일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 Museum Insel Hombroich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