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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문학자의 인문학 공간] 세계는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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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 출처:나무위키


“과학주의란 자신에 대한 과학의 믿음, 즉 우리가 과학을 더 이상은 가능한 인식의 한 가지 형식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식을 과학과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확신을 말한다.”『인식과 관심』(하버마스, 1968)

‘과학주의’라는 용어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은 경제학자 하이에크가 (경제학을 포함해) 사회과학적 현상을 인간적 요소(human factor)를 배제한 자연과학적 접근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비판『과학의 반 혁명』(1952)하면서부터이다. ‘과학주의’란 과학(적 방법)만이 진실에 접근하는 최상의 유일한 방식이라는 생각(믿음)을 말한다.


독일에서 ‘과학주의’가 논의의 중심이 되었던 때는 과거와의 급진적 단절을 외치던 60년대 학생운동 시기 독일 사회학계를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 비판이 주류였던), 소위 '실증주의 논쟁'에서였다.


‘실증주의’는 지식에 해당하는 인식은 실증적(positiv) 즉 사실적이고,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하며, 검증 가능한 것에 대한 인식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고의 한 방식이다. 과학주의는 실증주의의 성격을 지녔다. 전자가 그 영역을 과학에 한정하는 반면, 실증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이 ‘실증적’일 것을 요구하는 차이는 있다.


그런데 ‘안다는 것’은 ‘인식’의 차원인가, 또는 ‘지식’의 차원에 있는가? 일단 ‘안다/알다’는 동사이며 ‘지식’은 명사다. ‘안다’/알다’는 과정(process)의 성격이 강하며, ‘지식’은 과정의 결과(result)인 상태의 성격이 강하다. 인식은 지식을 구성한다. ‘알아보는 것’, 즉 ‘재인식(recognition)’은 이미 지식이다. 재인식이 가능하면 이미 아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은 인식에 영향을 끼친다. 달리 말해 지식이 인식을 구성하며, 지식은 인식의 전제 조건이다. 그래서 전제 없는 ‘순수한 인식’은 없으며, ‘순수한 지식’도 없다.


하버마스가 『인식과 관심』에서 펼치는 과학주의 비판은 60년대 독일 사회학계를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 논쟁의 맥락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 책은 철학 분야를 넘어 일반인들의 폭넓은 관심을 받았다. 하버마스는 인간의 관심과 무관한 인식이란 없으며, 오히려 인식은 관심의 생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의 관심이 무엇인지보라는 말도 있지만, 관심의 차이는 그에게 나타나는 세계의 형식을 정해준다. 관심이 다르면 동일한 공간도 다른 장소가 된다).


하버마스는 ‘이용’을 위한 “기술적 관심”과 소통 행위를 위한 “실천적 관심”, 그리고 “독단(Dogma)에서의 해방”을 지향하는 “해방적 관심”을 구분한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과학이 말하는 객관적 지식이란 “가능한 인식의 한 가지 형식”일 뿐이다. 인식을 과학과, 또는 과학을 인식과 동일시하려는 ‘과학주의적’ 주장은 “독단”이며, 이것은 인식과 지식의 전제에 대한 무시와 무지에서 나온다.


칸트는 ‘지각’을 외적 감각 대상에 대한 상상, ‘자아’를 내적 감각 대상에 대한 상상이라 한다. 지각도 자아도 모두 상상이며, 실체가 아니다. 헤겔은 칸트가 인식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헤겔에 따르면 어떤 인식도 ‘순수할’ 수 없으며, 이전의 지식이 새로운 인식의 형식을 규정한다. 언어 역시 인식의 전제로서 역사를 이미 사용하는 언어 안에 담고 있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현재를 규정하는 전제로서의 과거의 경험에 대한 성찰이다.


과학(만)이 객관적 세계에 대한 인식을 제공하며, 과학(만)이 다양한 세계 인식의 바탕과 기초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는 이제 별로 없는 듯하다. 최소한 공론의 장에서는 그렇다. 비록 스티븐 호킹 같은 물리학자가 “철학은 죽었다”( The Great Design)고 선언하지만, 그의 “우주”도 우주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해석”일 뿐 현재를 설명하는 유일한 ‘인식’일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세계가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과학주의적 객관성의 환상이 현대인의 삶을 깊고 넓게 지배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타자 없이도 자아가 있을 수 있다는 (무의식적) 믿음의 바탕으로도 작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과학 역시 인간의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과학을 지탱하는 숫자도 인간의 고안물이다. 과학의 결과물도, 숫자를 통한 규정도 세계를 보는 한 가지 형식일 뿐,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작동하는 실체일 수 없다.


(특히 ‘과학과 산업이 결합된’ 19세기 이래) 과학이 제시하는 인간들의 유토피아에는 지구상의 한 가지 생물로서의 인간이라는 요소 human factor가 빠져 있다. 인간(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과학은 다른 생물, 무생물뿐 아니라 인간도 ‘배려’하는 과학일 수 없다. 자기(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인식은 자기를 배려하는 인식일 수 없다. 이웃과 자연이 없으면 자신도 인간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생산물이다. 이런 자연스런 당연한 인식, 지식 부재의 결과를 우리는 지구의 파괴와 인간(성)의 파괴, 전쟁, 기아의 모습으로 보고 있다. “눈 먼 자들의 도시“ 속 인간의 열심, 우리의 열심, 나의 열심은 눈 감은 채로 절벽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 나가는 그런 열심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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