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중인 강영안 교수
데일리아트가 창간 1주년(4월 1일)을 맞았다. 창간을 하면서 내세운 슬로건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문화공동체'다. 예술로 아름다운 세상을 한 번 꿈 꾸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일 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 데일리아트를 읽는 독자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삶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실현해 보자는 것. 살면서 그 이상의 가치가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모호하기도 하지만 워낙 포괄적인 명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도 다 다르고, 어떤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인지 생각하는 것이 다양하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대해 철학적 규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아름다움과는 점점 멀어져, 끝 모를 추함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름다움의 가치에 대해 더 천착하는 지도 모르겠다.
평생 철학과 성경적 시선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에 고민하는 강영안 교수를 모시고 '아름다움'의 정의와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강영안 교수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임 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신대학교 이사장을 거쳐, 미국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등등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3월 30일 김포에 있는 주님의 보배 교회에서 강영안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편의상 두 번으로 나눠 싣는다.(편집자 주)
교수님 안녕하세요? 데일리아트의 창간 1주년을 맞았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줌으로 미국의 대학에 강의도 하시고, 한동대 석좌 교수로도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텐데요. 혹시 교수님은 공부 외에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시는지요? 혹 그림을 그린다든지? 음악을 듣는 다든지 예술과 관련된 것들도 하시나요? 아니면 다른 취미 생활은?
서강대에서 철학과 교수로 퇴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미국 칼빈대와 한동대에서 여전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위를 받고 네덜란드 레이든 대학에서 일주일에 6시간씩 강의하기 시작한 1982년 부터 따지면 올 해가 강단에 선지 43년이 됩니다. 거의 대부분을 종교 철학 역사를 가르치는 데 시간을 쏟아서, 낚시 미술 등 그런 류의 취미 생활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20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철학자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라 한다면, 영미쪽에서는 캠브릿지에서 강의했던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동생이 유명한 작곡가이고 피아니스트여서 집안이 음악적 재능이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책을 읽을 때, 아래층에서 피아노 소리가 나면 그 소리 때문에 집중을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시끄러워서 집중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수에게 잠재된 음악적 탁월성 때문이죠.
책을 읽으려해도 그 교수는 들려오는 음악에 대한 몰입으로 다른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지는 않아요. 모차르트를 좋아해서 음악을 들으며 책도 읽고 집필도 하다가 지금은 바하로 옮겨갔습니다. 그림을 그리지는 못하지만 보는 것은 참 좋아합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꼭 미술관은 빼놓지 않고 가 봅니다. 주로 네덜란드 17세기 화가들 렘브란트의 작품도 좋아하고요, 19세기 반 고흐나 몬드리안도 좋아합니다.
나는 삶에서 음악이든 미술이든 예술의 중요성에 대해서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술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그러나 예술은 잉여적인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다 충족되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죠. 서양에서 19세기 낭만주의 이후, 좀 이상하게 방향이 흘렀습니다. 예술을 포함한 모든 영역이 분업화 전문화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영역으로 넘나들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그러나 예술은 총체적으로 삶에 직접 연결된다고 봐요. 고대부터 축제를 하면 무용이나 춤이나 시를 사용하지 않았나요? 예술은 삶에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삶 속의 기쁨과 슬픔의 요소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술이 삶을 바쳐줍니다. 예술은 오히려 삶을 가능하고 견디게 하는 힘이라고 봅니다.
현대에서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분야로 분화되었지만 결국 아름다운 것, 참된 것, 정의로운 것,성스러운 것들이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을 통합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정치에도 예술의 요소, 문화에도 정치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구별은 되지만 모든 요소가 연계되어 있죠. 서로가 서로를 가능케 해주고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는 방식, 파편화된 삶을 연계하고 모든 사람이 연대하는 그런 삶이어야 합니다. 나누어진 것을 붙이고, 지배와 종속적인 것을 평준화시키고, 높고 낮은 것을 고르게 하는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예술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죠.
강영안 교수의 '생각한다는 것'
교수님은 '생각한다는 것'이라는 책을 쓰셨는데, 우리의 삶에서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떤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요?
사람, 의식이 있는 존재만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생각의 객체 즉 '대상의식'과 생각하는 것의 주체 '자기의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상을 생각하다보면 지식을 얻기도 하고, 삶을 다루는 방식과 유용한 것, 즉 지식을 배웁니다. 생각의 주체인 자신에 대해 생각 한다는 것을 '반성적 사고'라 합니다. 대상의식이 직진 성향이 있다면, 자기의식은 비춰진 빛이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사유의 대상이 나에게 귀결되는 겁니다. 과학을 통해서 우리는 대상에 대한 지식은 축적했지만, 내 자신에 대한 생각에는 많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맹자에 보면 반구저기(反求諸己 : 되돌아와서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행동의 주체인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나는 허물이 없는가? 잘못이 없는가? 문제의 원인을 내 자신에게서 찾는 태도가 필요한데 이것은 다른 동물은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생산한 것인가 생각해 보죠. 음식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가져와 먹음으로 가능합니다. 지식도 남이 쓴 책을 읽거나 다른 것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닌가요? 나를 생각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생깁니다. 나의 존재는 타자로 인해서 가능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단계에서 내 존재에 대한 감사가 생깁니다. 내 월급으로 옷도 집도 샀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자격과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남에 의해 제공된 것입니다. 내가 공급받는 것은 언제나 그 이상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식당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돈만으로 환산할 수는 없습니다. 조리사가 없다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음식을 먹을 수 없죠. 그래서 타인에게서 받은 것은 선물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타인의 노력과 땀으로 된 것, 빚진 마음이죠. 받은 선물을 장롱 속에 썩힐 수 도 있지만 그것을 선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많이 받으면 많이 주어야 합니다. 지식이든 노동이든 돈이든 받았으면 주는 삶. 생각한다는 것은 거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사량 (思量 생각하여 헤아리는 것)의 확산이죠.
곰곰이 생각하면 움크리고 문을 잠그고 들어 앉을 게 아니라 문을 활짝 열고 타인에게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를 보더라도, '스스로 돌이켜(눅 15:17)'라는 말이 나옵니다. 희랍어로 '에이스 헤우톤 엘톤(eis heuton elton)'입니다. 이 말의 뜻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남 원망할 것도 없고 부러워할 것도 없는 자기로의 위결, 자기 반성적 행동이지요. 성경 사도행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사도바울이 인용한 구절에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도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생각한다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타인에게 빚을 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빚을 갚아가는 과정'에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보배교회에서, 강영안 교수
데일리아트의 모토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문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삶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문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미술이나 예술을 다룹니다. 그런데 삶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네요. 철학자의 입장에서 '아름다움' 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 그리고 참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꽃이 아름답다고 할 때 모양이 제일 먼저 떠오르죠. 모양이 비틀어졌거나 훼손되지 않고 균형을 잡고 있을 때, 비례가 정확할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삶이 아름답고, 사회 모습이 아름답다고 할 때의 아름다움은 타인과의 조화로움 입니다. 어울릴 때, 균형이 맞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것과 낮은 것, 큰 것과 작은 것이 밀치고 배격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배치될 때 아름답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영역에서의 아름다움은 뭔가 필요한 곳에 들어가서 잘 어울릴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과의 조화죠. 즉 희생이고 타인의 삶을 이해할 때입니다. 인도의 테레사 수녀의 삶을 보죠. 정의로왔다고 하지만 참 아름다운 삶으로도 평가합니다. 그런데 수녀의 얼굴을 봅시다. 아름다운가요? 얼굴은 검고 주름으로 가득합니다.
이미지출처: 오늘도 행복하세요
그런데 그것이 추하게 보이나요? 테레사 수녀는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주름조차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죠. 아름다운 꽃이나 아름다운 여인, 그런 것은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입니다. 자기 중심이 아니라 타자 중심, 다른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일 때,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적 대상에서만 아름다움을 적용할게 아니라 삶의 방식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빛도 없고 이름도 없다 하더라도 타자를 위해 섬기고 희생하면서 사는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예수님 처럼 '자신을 비우고 죽기까지 복종 하는 삶'입니다. 자기를 죽여 타인을 사랑하는 삶이 가장 큰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요?
(이어서 2편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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