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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밖 그림 이야기] - 정효웅

by 데일리아트

‘허실(虛實)’은 노자(老子)의 도가사상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비움과 채움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주 만물이 생성된다는 존재론적 관점을 담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 고전 미학의 심미적·정신적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사회는 컴퓨터의 2진법 원리에 기반한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 비물질 기반의 기술은 실재(물질)와 가상(비물질)의 경계를 점차 흐리게 만들고 있으며, 이로 인한 사회적·철학적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다. 실재와 가상의 이원적 분리와 그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정효웅 작가는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 그리고 예술의 관계를 탐구하며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작가이다. 그는 노자의 ‘비움과 채움’의 사상을 현대 매체 기술과 결합시켜,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는 예술적 시도를 지속해 왔다. 특히 ‘뇌-기계 인터페이스’,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 첨단 기술 기반의 사회적 의제를 도가(道家)의 ‘천지인(天地人)’ 사상과 접목하여, 기술과 철학, 인간성에 대한 통합적 고찰을 이끌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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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와 실의 경계


작가는 이러한 맥락에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 창작 방법론을 실험한다. 알고리즘과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전통적인 ‘작가의 손을 통한’ 창작 방식과 구별되는 ‘예술가의 사유’와 ‘기계 학습’ 간의 협업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기술이 인간의 감각과 사유를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미디어는 인간 신체의 확장이다”라는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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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웅, 허실상생


정효웅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허실상생〉은 조각과 디지털 영상을 융합하여 현실과 가상, 고대와 현대, 그리고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심도 있게 탐색한다. 이 작품은 실체로서의 인간 조각과, 디지털 코드로 구성된 가상의 인간 형상이 대화하는 형식을 통해 존재의 이중성과 상호작용을 형상화한다. 이들이 서로 회전하고 얽히는 모습은 마치 태극의 음양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음과 양의 상생(相生)을 통해 우주의 조화와 균형을 표현한다.


작품의 외형적 구조 또한 철학적 상징을 내포한다. 여덟 방향으로 발산하는 회로와 전선의 배열은 『주역』의 팔괘를 연상시키며, 겹겹이 쌓인 입체 구조는 우주의 무한함과 깊이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이는 관람객에게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 공간성과 존재에 대한 심층적 사유를 유도한다.


디지털 가상 요소는 작품의 주제를 한층 명료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실제 인체 조각과 대응되는 디지털 휴먼 데이터를 알고리즘을 통해 해체·재구성하여 가상 인물 영상을 제작하였으며, 이를 금속 회로 구조의 AR 멤브레인 캐리어에 투사하여 디지털 휴먼의 형상을 어두운 공간에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이 형상은 수많은 ‘0’과 ‘1’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숫자들은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얽히며 움직인다.


숫자 원소의 움직임은 도가사상의 순환적 원리에 따라 중심에서 바깥으로, 규칙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확산된다. 이 움직임은 태극의 기운을 연상시키며, 팔괘 도의 회로와 조응하여 ‘숫자 예술’로서의 질서감과 리듬감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이러한 구성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존재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를 더욱 심화시킨다.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허실상생〉의 전체 구조는 하나의 우주적 메타포이다. 알고리즘으로 생성된 무작위 영상은 별똥별처럼 조각과 회로가 어우러진 배경 속에 투영되며, 시간의 흐름을 정교하게 제어한다. 이 리듬은 우주의 숨결과도 같은 빠르기와 느림을 반복하며, 디지털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시간성과 공간성의 확장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정효웅 작가의 작품은 고대 동양 철학과 최첨단 디지털 기술이 예술적 사고 속에서 조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의 예술은 기술이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색하는 매개이자 확장임을 증명하며, ‘비어 있음과 가득 참’이라는 상보적 개념을 통해 예술의 미래적 지평을 열고 있다.


XYZ 축의 방향은 공간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복잡한 차원이기도 하다. 이런 구조로 인해 관객은 3차원 공간의 깊이를 느끼고 시간의 흐름과 연장을 경험할 수 있다. 현실 공간과 가상공간이 여기에서 충돌하고 합쳐지며 우리에게 다차원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작가의 작품에는 대부분 ‘인체’ 형상이 등장하는데, 간혹 전신이 아닌 경우에는 뇌’와 같은 인간의 신체 기관이 출현한다. 본인은 현실이던 가상이던 세상을 이루는 만물은 인간의 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작품 ”허실의 원점“에는 각각 XYZ 축을 의미하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세 개의 화살표가 등장하고 그 중심에는 인간이 앉아 있다. 마치 불좌상(佛坐像)과 같은 자태의 인간상은 설령 오늘의 우리가 허구와 실재가 뒤섞여 분간조차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실존하는 인간이 중심축을 차지고해야 한다는 작가의 신념을 보여준다.


나날이 디지털화되고 기술화되는 시대에 사람은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교량이 되었다. 인류는 이 두 세계를 넘나드는 것을 넘어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는 매체가 되었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인간이라는 역할의 중요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현실 세계에서든 XYZ 축 방향, 빛, 가상요소로 가득 찬 공간에서든 중심은 언제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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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웅, 만물이 서로 연결되다


〈만물이 서로 연결되다〉라는 작품은 독특한 시각적 기호를 통해 디지털 시대의 ‘사람’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일곱 명의 인물은 떠다니는 원형 플랫폼 위에 서 있으며 인물마다 독특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마치다른 인물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인물들 주변의 선은 과학적인 느낌을 주는데 마치 어떤 데이터의 흐름이나 에너지의 형태인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각 인물과 다른 인물 사이의 연결선은 신경망과 같은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어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과 의존성을 강조한다. 이 작품은 각 요소는 다른 요소와 모종의 연결성을 가지며 상호 발전할 수도 있고상호 제한적일 수도 있다는 음양오행학의 ‘상생상극’이라는 철학적 사고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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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웅, 허실의 분리


<허실의 분리>에서는 두 인물의 형태가 나타난다. 한 인물은 상승하고 다른 인물은 추락한다. 상승하는 인물은 투명한수지재로 표현되어 가볍게 흩날리는 느낌을 주며 이는 가상의 존재를 대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추락하는 인물은 검은색 금속재로 구성되어 사람들에게 실체적이고 견고하며 두껍다는 인상을 줌과 동시에 현실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이 두 인물 사이를 연결하는 여러 개의 세밀한 선들은 디지털 시대에서 가상과 현실 사이의 복잡한 관료의 시각적 효과에 대해 살펴보면 금속의 광택과 투명한 재료의 투시 효과는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한편으로는 둘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사이의 밀접한 연결성을 강조한다. 이처럼 작품은 현대 사회 속 현실과 가상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탐구한다.


[강의실 밖 그림 이야기] 비어 있음과 가득 참에 관한 소고-정효웅 < 전시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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