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민화는 18세기에 등장하여 20세기 전반까지 민간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채색화로, 길상과 벽사의 의미를 담아 생활공간을 장식하고 감상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조선 후반기 한양의 도시화와 신분 질서의 변화 속에서 궁중 장식화가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도화서가 폐지된 후 궁중 화원들이 민간 화가로 전향하면서 민화의 양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들은 궁중화의 기법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표현을 시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민화는 더욱 다양하고 대중적인 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형록, 백수백복도 10폭 병풍, 19세기, 서울대 박물관
작자미상,백수백복도 4폭 병풍, 19세기 후반,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현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조선민화전》은 민화의 창조성과 다양성을 조망하는 전시다.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제작된 다양한 민화를 통해 당시 민중의 삶과 미의식을 반영한 작품들을 소개하며, 전직 궁중 화원들의 작품과 민간 화가들의 민화를 나란히 제시함으로써 궁중 양식이 민화로 흡수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이자 궁중 화가였던 이형록(이택균)의 작품도 함께 소개되는데, 정제된 궁중화의 형식을 지닌 그의 회화는 민화와 나란히 배치되어 두 양식의 조형성과 감각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작자 미상, 일월부상도, 19세기, 개인소장, ⓒ 원정민
이 밖에도 <일월부상도>는 어좌를 장식하던 일월오봉도의 도상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작품으로, 궁중회화의 상징성과 형식이 민간으로 유통되는 과정에서 독특한 구도와 새로운 소재가 더해져 변형된 사례다. 기존의 장엄한 구성에서 벗어나 보다 친근하고 자유로운 표현이 돋보이며, 궁중 양식이 민화로 흡수되고 재해석된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일부 민화에서는 궁중회화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대담한 색감과 구도를 활용해 민화 특유의 개성을 드러내며, 단순한 모방을 넘어 민화가 독창적인 예술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다.
(좌) 연화도 10폭병풍(19세기후반-20세기 전반, 호림박물관) 속 연꽃과 게. (우) 연화어락도 10폭병풍(19세기후반,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속 연꽃과 게
이번 전시에서는 책가도, 화조도, 어해도, 문자도 등 다양한 주제의 민화를 두루 만나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민화가 단순한 실용적 장식화를 넘어, 시대적 배경 속에서 변화하고 발전해 온 예술 장르임을 실감하게 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감상 포인트는 동일한 주제의 민화를 비교해보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서화점과 서화사의 등장으로 민화의 유통이 활발해졌고, 다양한 경제적 계층이 각자의 취향과 형편에 맞는 그림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제작층과 수용층의 폭이 넓었던 만큼, 같은 소재임에도 각기 다른 형식과 표현이 나타나는 점이 흥미롭다.
제주문자도8폭병풍, 20세기, 종이에 채색, 국립해양박물관
작자 미상, 책거리12폭 병풍(1918, 국립중앙박물관)' 속 담배와 기물들
이러한 다양성은 색채에서도 두드러진다. <제주 문자도 8폭 병풍>의 형광 기도는 푸른 색조, <책거리 12폭 병풍>의 형광 핑크 색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조선의 미감과는 다른 시각적 충격을 준다. 이러한 형광빛 색조는 개항기에 유입된 새로운 안료에서 비롯된 것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인의 새로운 미감이다. 이는 전통적 미감에서 벗어난 감각적 실험이자, 변화하는 시대 정서에 민감하게 반응한 민화의 유연함을 보여준다.
생동감 있는 색채는 당대 민중의 미적 취향과 감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민화가 고정된 양식이 아닌 살아 있는 예술임을 시사한다. 동시에 이는 서양 문물이 점차 유입되던 근대기에, 민화가 어떻게 전통성과 새로움을 융합하며 변화해 갔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형광빛 색조는 단지 시각적 효과에 머무르지 않고, 당대 사회의 감수성과 욕망을 담아낸 색채로도 읽히며, 민화의 미학이 시대와 함께 호흡해 왔음을 증명한다.
작자 미상, 낙화화조도10폭병풍(박계담, 20세기초, 종이에 인두, 천안박물관) 일부
불에 달군 인두나 철필로 종이의 표면을 지져 그림이나 글씨를 표현하는 낙화 기법으로 제작된 <낙화화조도 10폭 병풍>, 한글과 한자가 병기되어 서사적 구성을 보여주는 <춘향전도 10폭 병풍>처럼, 20세기로 갈수록 민화는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해 간다. 전통적인 주제와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재료와 기법, 이야기 구조를 적극 수용하며 시대의 흐름에 유연하게 반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회화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화의 상징성과 이야기, 대중성과 실용성은 공예품과 도자기 등 동시대의 생활미술 영역으로도 확장되며 하나의 시각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작자 미상, 춘향전도10폭병풍(20세기,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일부
마지막으로 전시장 내에 비치된 전시 도록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주요 작품 이미지와 상세한 해설은 물론, 국내 미술사 및 민화 분야의 저명한 전문가들이 집필한 논고가 수록되어 있어 단순한 안내를 넘어 민화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감상의 깊이를 더해준다. 도록을 함께 참고하면 전시를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작품 감상과 더불어 해설과 논고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민화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지고 전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전시 전경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조선민화전》은 민화의 창조성과 다양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다. 민화가 지닌 자유로운 표현 방식과 시대 흐름 속에서 변화해 온 과정은 현대 미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전시는 한국적 미의식과 예술의 확장 가능성을 탐색하는 자리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민화가 단순한 모방을 넘어 독창적인 예술로 자리 잡아 온 여정을 따라가며, 그 매력을 깊이 있게 느껴보기를 기대한다.
일상으로 스며든 예술, 민화의 모든 것 다 볼 수 있다 -《조선민화전》 리뷰 < 리뷰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