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줄거리
1956년 영화 <서울의 휴일>은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와 일간신문 사회부 기자인 남편을 중심으로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서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아내는 산부인과 의사(남희원), 남편은 신문사 사회부 기자(송재관)다. 아내는 휴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계획을 세우며 들떠있다. 그러나 남편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 막 집을 나서 휴일을 즐기려는 찰라, 이들의 일상은 한 통의 전화로 깨진다.
남편은 '후암동 연쇄살인 사건'을 취재 중이었는데 살인사건 관련 제보를 받은 것이다.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범인의 집으로 향한다. 금방 돌아온다는 남편이 오지 않자, 희원은 혼자서 외출하여 남편의 직장 동료와 어울린다. 범인을 뒤쫓는 남편은 위기도 맞지만, 경찰과 함께 범인을 검거하는 데 일조한다. 아내 희원은 남편 친구들에게 술값을 뜯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고 있는 소녀를 만난다. 엄마가 출산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울고 있는 것이다. 희원은 소녀의 엄마를 무사히 출산하도록 도와준다.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 출산한 여자를 보니 범인의 아내다. 휴일은 망쳤다. 그러나 송기자는 범인을 잡았고 남희원은 곤란에 처한 가족을 도와주었다. 석 달만에 겨우 얻은 휴일, 부부가 즐겁게 보내려던 하루가 저물었지만 의미 있는 날로 생각한다.
시대 읽기
전쟁이 끝난 후 피폐한 시기에 급조된 낭만? 1956년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총 출동된 명동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아름다운 시절)'
전후 우리 경제의 미국 의존도는 40프로에 육박 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쟁이 끝나고 3년이 흐른 1956년, 우리의 경제는 미국의 원조가 감소한 탓에 경제성장률이 0.6%에 불과했다. 2024년 현재 1인당 국민 소득 3만 6624달러와 비교하면 1956년의 경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다. 1인당 국민 소득이 100달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웬 일? 영화에는 아프고 어두운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시종일관 낭만이 흐른다. 파괴된 잿더미 위에 얹혀진 '불안한 낭만'이다. 전쟁에 참가한 미군들이 여가 시간에 즐겼던 사교댄스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퍼져갔다. 직수입된 영화에서 보이는 서양 문화가 점점 사회에 스며들었다. 당장 먹고 살려면 뼈빠지게 고생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 <로마의 휴일>과 같은 외국 멜로 영화를 보면서 위로를 얻었다. 영화관 안에서 선망의 눈으로 바라본 서양문화가 영화관 밖에서는 우리들 방식으로 모방되었다. 한강에서 보트를 타는 장면, 호텔에서 베이비골프를 즐기는 장면 등은 지금 보아도 낯설다.
서울의 휴일이 상영되고 오드리 헵번처럼 짧은 숏커트가 유행했다. 영화 속 주사장의 독백 "다 먹어도 못 먹을 건 나이밖에 없구나"라는 대목이 안타까움을 부른다. 한강에서 보트를 타고 즐기는 남녀의 건배 장면, "자! 우리의 청춘과 행복을 위해서" 는 영화의 주제를 살려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설정 등은 당대의 시대 상황과는 너무 낯설다.
해방공간부터 1950년대 명동거리에 포진한 다방과 술집. 2012년 서울역사박물관의 ‘명동 이야기’ 특별 전시회 때 소개된 50~60년대 시공관 일대 명동 거리
영화가 상영된 1956년,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명동에서는 또다른 낭만이 흘렀다. 예술가들은 우리식 낭만을 펼쳐가고 있었다. 우리 근현대 역사에서 '낭만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기로 꼽아도 무방하다. 전쟁으로 상처 입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명동으로 몰려들었다. 전쟁의 폭격으로 전쟁 이전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명동의 중심 시공관(현 명동 예술극장)부터 명동 입구 큰길까지는 폭격을 면해 전쟁 이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맙게도 진고개의 명동성당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선채 남아 있었다.
페허가 된 건물 사이사이로 다방과 선술집이 문을 열어 고단한 예술가들의 머리를 식혀 주었다. 창신동에 살던 박수근은 반도화랑에 들러, 자신의 그림이 몇 점이라도 팔렸는지 둘러보고 곧장 명동의 다방으로 향했다.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이 이진섭에 의해 곡이 되어, 나애심이 불렀다. 이렇게 탄생한 <세월이 가면>이 명동의 바닥을 적셨다. 이 노래는 1970년대에 리메이크 되었다. 가수 박인희가 불러 또 한번 거리마다 흘러 나왔다. 리어카에서 틀어놓는 카세트는 서울을 낭만의 거리로 만들었다.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세월이 가면」, 1955)
1950년대 명동 /출처: 서울시립대 박물관
전쟁으로 죽고 아파해도 살아있는 사람은 잡초처럼 피어오르는 낭만을 불태워야 했다. 돈을 버는 재주가 전혀 없는 예술가들은 자기들이 가장 잘하는 글과 그림으로 시대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할 김지미가 다방 휘가로에서 일했던 시기, 국민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선술집 은성에서 문인들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던 시절이었다. 명동을 노래한 박인환,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던 이중섭, 프랑스로 떠날 채비를 끝낸 김환기, 창신동에서 전차 타고 온 박수근, 모두 이 시절 명동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956년 명동은 우리나라의 '벨에포크' 였다.
사라진 벽수산장
남희원과 친구들의 모습, 뒷편에 벽수산장이 보인다/ 출처: 영화 스틸 것
벽수산장에 앉아 있는 윤덕영의 모습
영화 속에는 1956년 서울의 모습이 가감 없이 펼쳐진다. 아내 남희원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프랑스의 궁전과 같은 건물, 벽수산장이 보인다. 원래 '벽수(碧樹)'는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尹德榮,1873-1940)의 호다. 윤덕영은 원래 중학동 한국일보 근처에서 살았는데 그곳에 소나무처럼 푸른 나무들이 많아서 순종이 벽수라는 당호를 하사했다. 윤덕영은 순종 재위시절 시종원경을 지냈으나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10년 즈음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한양에서 제일 풍광이 좋은 옥인동 일대 땅 2만 평을 매입해서 프랑스에서 가져온 설계도대로 베르사이유 궁전 같은 집을 지었다. 이름은 자신의 호를 따 벽수산장이라 했다. 1921년에 공사가 끝이 났지만 건축 자재 문제 등으로 내부 공사가 지연되어 1935년이 되어서야 준공되었다. 바닥 면적이 600평이나 되어 사람들은 '조선의 아방궁'이라 불렀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을 외면만 할 수 없어 자신이 대표로 있던 '세계홍만자회 조선지부'에 임대를 주었다. 1940년 윤덕영이 사망하면서 해방 직전에는 미쓰이광산주식회사로 소유권이 이관되었고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일명 '언커크(UNCURK)'의 본부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1966년 보수 공사 중에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벽수산장의 모습이 영화에 등장한다. 남희원을 비롯한 당시의 유한 마담들에게 배경이 될 만한 건물로 장안에서 벽수산장보다 더 좋은 건물은 없을 것이다. 인터넷을 잘 찾아보면 부주의로 인해 불에 타는 벽수산장을 볼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변한 대법원 건물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변한 대법원 건물
현재 덕수궁 뒤편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쓰이는 건물은 원래 대법원 청사였다. 1928년 일제가 경성재판소로 지은 건물이다. 주변에는 이화여고, 배재고교, 경기여고, 서울고교 등 학교가 많았으나, 1980년대 모두 한강 이남으로 이전하고 이화여고만 남았다. 대법원 청사는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사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것은 앞면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새롭게 지었다.
검찰청 건물들은 서울시 서소문 청사로 쓰이고 있다. 원래 서울시청 이전 예정지였던 서초동에 법조 단지를 조성하면서, 서울시와 법원·검찰이 땅을 맞바꾸었기 때문이다. 덕수궁 돌담길은 시민들이 걷기 좋은 최고의 장소로 선정되는 곳이다. 걷기 좋으라고 인도를 넓히고 차도를 줄였다. <광화문 연가>에 나오듯이 흰 눈이 내릴 때, 이 거리를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시립미술관에 걸린 미술품을 감상하면 금상첨화다. 서울시청사로 사용되는 옛 대검찰청 청사 13층의 ‘정동전망대’에 올라가 확트인 공간에서 덕수궁 관내를 살피고 정동 일대를 볼 수 있다. 사랑은 가도 옛 건물은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위로해 본다.
아서원
아서원 옥상에서 남희원과 남편의 직장 동료
"술맛이란 말할 수도 없이 기가 막히게 우리의 미각을 만족시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니까요. 자, 보십쇼. 이 황금색 액체는 우리의 시각을 만족시키고"
남희원과 남편의 직장동료들이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다. 이들은 맥주의 황금색 액체가 미각뿐만 아니라 시각을 동시에 만족시킨다고 하며 맥주 예찬론을 펼친다. 이들이 지금 맥주를 마시는 곳은 어디일까? 아서원 옥상이다. 아서원은 지금의 명동 조선호텔과 반도호텔 사이에 있던 건물로 1970년 문을 닫을 때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화교 경영 중국집이었다.
1907년 산동성 출신 서광빈에 의해 설립되어 1970년 까지 약 60여 년간 한국의 대표적인 중국 요리점이었다. 명동 중심지 땅 460여 평에 세운 4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로, 총 수용인원은 900여 명이나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조선 공산당 창당 대회가 열린 역사적인 장소이다. 6·25전쟁 직후에는 미군들이 많이 들락 거렸다. 정치가들의 사교의 장, 주요 경영인의 회동장소, 재벌가 며느리의 신부 수업을 받는 장소로도 많이 알려졌다.
영화 <서울의 휴일>은 전쟁후 3년이 지난 서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양의 문화를 엿 볼 수있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의미가 있다.
영화 주요장면 보기
18분: 1950년대 덕수궁 돌담길
25분: 뱀 출현(로마의 휴일 진실의 입?)
27분: 부부가 한강 보트를 타는 모습( 그 시절 한강에서 보트를? )
30분: 연극적 요소가 영화에 대거 등장( 햄릿의 대사와 탱고)
"도미노 도미노 나의 사랑하는 도미노.. " "저와 아름다운 탱고 춤을 쳐줘요"
33분: "왜 오늘이란 휴일은 비애만을 갖다 주는고?"
34분: "다른 건 다먹어도 나이만은 먹지 말지어다"
37분: 한강 변의 모습, 보트 놀이, 클래식 노래 <오솔레미오>
40분: 벽수산장 왼쪽에 보임
47분: 덕수궁 중화전 모습
51분: 조선호텔에서 베이비 골프 즐기는 모습
[영화로 시대 읽기 ⑦] 1956년, 그 시절의 낭만에 대하여- '서울의 휴일' 2 < 영화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