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작가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작품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체화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작가는 자신에게 참 진실된 사람들이다. 작가는 자기와의 분투 속에서 만든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자신의 내면을 내놓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작가는 세상과 소통한한다. 작품은 세상을 보는 창이면서 세상과 승부하려는 무기이다. 그래서 모든 작가는 진실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새롭게 선보이는 기획 기사[Bravo! my art] 는 그런 작가들에게 주목한다. 자기 작품을 작가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작품 탄생의 비화,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려고 하는지, 어떤 의도로 작품을 만들었는지, 어떤 배경 속에서 작품을 구상했는지는지, 작가의 입으로 말하는 나의 인생, 나의 작품. 세상의 모든 작가들에게 '브라보'를 외친다. Bravo! my life, Bravo! my art (편집자 주)
1, 곶자왈에서 마주한 생명의 실체,분홍- 화가 홍일화
홍일화, 곶자왈 풍경
나는 20년 가까이 인물화를 그렸다. 사람의 얼굴 속에 숨은 시간을 읽기 위해, 단 한 줄의 선도 어긋나지 않도록 애썼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은, 점점 내 손끝에 경직된 긴장을 남겼다. 정확함이란 이름의 족쇄가 내 마음을 조여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닮음만으로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화순 곶자왈 ⓒ 한이수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화순 곶자왈을 알게 되었고, 전 제주조각공원 대표님을 통해 그 숲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곶자왈을 산책했을 때, 나는 마치 전혀 새로운 세계의 문턱에 선 기분이었다.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바라보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받아들여지는 공간. 얽히고설킨 덩굴과 자유로운 곡선으로 자란 나무들, 허물어진 경계 위에 고요하게 누운 현무암들. 질서 같지 않은 질서, 그 안에 깃든 깊은 생의 기운에 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직선이 사라진 풍경. 경계 없는 조화. 다름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어울리며 살아가는 모습. 그 숲은 내게 말없이 속삭였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어긋나도 괜찮다고. 나는 그 조용한 위로 속에서 그림을 다시 시작했다.
홍일화, 곶자왈 풍경
홍일화, 곶자왈 풍경
처음엔 빠르게 스케치를 했다. 눈에 담긴 생명감을 잊기 전에, 가장 인상적인 요소들을 하나하나 모아 화폭 위에 펼쳤다. 나뭇잎의 미세한 떨림, 가지 끝의 수줍은 움, 풀잎 사이로 흔들리는 그림자들까지—그 위에 나는 분홍의 띠를 얹었다. 겨울을 이겨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색, 그 고요한 분홍을.
그러나 분홍만으로는 생명이 지닌 긴장감을 다 담아낼 수 없었다. 나는 분홍의 테두리에 가시를 그려 넣었다. 자연의 유일한 방어 체계이자 살아있다는 증표. 가시는 부드러움의 반대가 아니라, 부드러움이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외침이었다.
이 숲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매일 다른 색을 띠고, 매일 다른 숨결로 존재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이 공간은, 변화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진짜 생을 보여준다. 나는 그것을 담기 위해 연구 중이다. 수많은 스케치를 남기고, 수없이 색을 혼합하며, 더 깊은 자연의 얼굴을 좇고 있다.
홍일화, 곶자왈
하지만 그림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연을 하나의 이미지로 옮기기엔 너무나 넓고 깊었다. 나는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숲을 살아낸 나의 언어로, 이 변화의 리듬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림은 숨을 쉬지만, 글은 그 숨결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생태화가라는 이름 아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분주히 살아가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것이 아니며, 그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스승이다. 나는 그 스승에게 배운 것을 그림으로, 글로, 다큐로, 혹은 영화로 풀어내고 싶다. 자연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어울리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에.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 곶자왈을 걷는다. 안개가 낀 날이면 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비 오는 날엔 우산 대신 그늘 아래를 파고든다. 발 아래의 풀잎에 떨어진 빗방울, 고요히 숨을 고르는 거미줄, 줄기 위에 맺힌 이슬… 그 모든 작은 생명들이, 말없이 나를 일깨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분홍을 그린다.
[Bravo! my art ①] 겨울을 이겨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색, 그 고요한 분홍 - 홍일화 < 인터뷰 < 뉴스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