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연습 step, 2024, 장지에 먹, 분채, 백묵, approx. 75x105.5cm
김미지 작가는 획을 회화의 가장 작은 단위로 삼고, 한지 위에 반복된 선을 그려 겹겹이 쌓아가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 선들은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 작가가 마주한 시간, 감정, 사유의 기록이며, 어떤 날은 속이 비친 얇은 마음이고, 또 어떤 날은 침묵처럼 무거운 어둠이다. 작가는 이 반복된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설명하고 다잡는다.
작가의 작업은 처음부터 효율이나 결과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무기력에 휩싸였던 어느 날, 무작정 선을 긋는 낙서에서 출발한 작가의 회화는 ‘애써 번거롭기를 자처하는 태도’로 자리 잡았다. 넓은 붓으로 한 번에 칠할 수도 있었던 화면을, 작가는 수많은 획으로 천천히 채우고 있다. 그렇게 조밀하게 쌓아올린 시간의 흔적은 단순한 표면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감정과 선택, 그리고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렇기에 김미지 작가의 그림은 단지 보는 것을 넘어, 천천히 들여다보기를 요구한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획들은 수없이 겹쳐져 깊이감을 만든다. 때로는 글자가, 때로는 풍경처럼 보이는 이 작업은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이 오랜 시간에 걸쳐 화면 위에 새겨진 기록이자 고백이다. 진한 묵향 속에 스며든 작가의 오랜 노력과 태도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고요하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걷는 연습 -밤 강(step -night river), 2024, 켄트지, 먹, 분채, 콘테, 백묵, 알루미늄 프레임, 20.9x29.5x2.2cm
- 간단히 본인과 작품 소개를 해 달라.
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 김미지입니다. 획을 회화의 가장 작은 단위로 설정하여 한지 위에 반복하여 획을 긋고, 이를 여러 겹 쌓아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비교’라는 키워드로 작품의 규격과 관련하여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걷는 연습 step, 2024, 장지에먹, 분채, 백묵, approx. 53x75cm
- 반복되는 선을 중첩해서 쌓아가듯 표현하는 작화 방식에서 마치 박서보의 묘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많은 공력이 필요한 작업에서 작가는 무엇을 느끼나? 더불어 관람객들에게는 그러한 과정들이 어떻게 다가가길 원하는지 궁금하다.
공력은 애써서 들이는 정성과 힘입니다. 저는 애써서 그리는 이 행위가 저라는 사람을 설명하는데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쟁과 효율의 시대를 살면서 늘 제게 잘해야한다는 부담을 내세웠던 것 같습니다. 그 부담이 너무 커져서 무력감이 커졌을 때 우연히 시작한 낙서가 제 작업의 출발이었습니다.
무작정 선을 그어 빽빽하게 채우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넓은 붓으로 칠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 면을 빼곡하게 선으로 채우는 것이 더 저답다고 생각했어요. 이후에는 이런 애써 번거롭기를 자처하는 태도를 제 모티브로 삼아 저를 둘러싼 당연한 것들에 질문하며 작업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간편화 간소화 되는 것이 과연 효율적이고 옳은가?에 대한 질문도 늘 하고요.
가끔은 일부러 길을 돌아가거나, 귀찮고 번거로워도 굳이 해야하는 것들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관람객들은 이러한 제 작업의 과정을 들여다봐주시고, 자신답게 사는 삶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사람이 되고 싶네요.
걷는 연습(step), 2024, 장지에먹, 분채, 백묵, approx.50x105.5cm
- 동양화를 전공하고, 먹과 한지를 주요 소재로 활용하는 작가에게 동양화, 혹은 한국화의 정의는 무엇인가?
동양화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질문이네요. 저는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먹을 처음 썼을 때 그 생경함과 이국적(?)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우리의 것이지만,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은데, 나를 뭐라고 정의해야 하나라는 고민이 굉장히 많았고, 여전히 고민중에 있습니다. 저는 이제 스스로를 설명할 때 동양화를 전공하고 회화를 하고 있는 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서양화를 전공한 다른 작가님들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점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거시적인 담론에서 미시적인 이야기로 접근하는 구조보다, '나'라는 사람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미시에서 거시로 넘어가는 유형의 비중이 더 높지않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잠잠한 걸음 #03(Blue walk #03), 2022-2024, 72x143.6cm, 장지에 먹과 분채, 백묵
- 작가가 생각하는 먹의 매력과 장점은 무엇이며 작가의 작업에서 먹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옛 문인화를 보면 먹의 색 하나로 수십 가지의 색을 표현하는데, 물을 많이 쓰고 적게 쓰느냐에 따라, 붓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쓰느냐에 따라 엄청난 범위의 표현을 함축하는 재료입니다. '블랙'이라는 물감으로는 구현이 안 되는 어떠한 깊이감을 좋아해서 계속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종종 먹을 갈아서 사용할 때도 있는데, 가만히 먹을 가는 그 과정과 먹이 갈리면서 나는 매콤한 냄새를 좋아하는 것도 이유가 되고요. 그리고 글을 쓸 때도 사용하던 재료였기 때문에, 정신적인 의미를 함축한다는 맥락에서 먹이 가진 상징성이 작업에 투영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바람버들 #01, 2024, 실에 구슬, 스테인리스 봉, 가변크기
잠잠한 걸음 -함께, 2022-2024, 장지에 먹, 분채, 백묵, 콘테, 가변크기, 각각 72x143cm
- 현대를 살아가는 동시대 작가로서 동양화의 전통을 넘어선 새로운 요소들은 시대적 당위성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설치나 공간활용적인 전시 방식이 작가의 돌파구로 느껴졌다. 그런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그림을 그리는 것과 전시를 기획하는 것은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작년에 두번의 개인전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작품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과, 전시를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꽤나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다른 지점들이 존재하더군요.
작년에 진행했던 두 차례의 개인전은 제가 느낀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다루었던 ‘그리기’와 ‘걷기’라는 두가지의 행위를 드러내고자 구상했습니다. 전시라는 ‘공간’을 관람객이 경험할 때, 전시를 통해 작품이 관람객에게 입체적으로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탄천의 둑을 모티브로 만든 구조물 ‘둑’도 좌대로 제작해보고, 제가 걸으며 관찰하고 느낀 감각들을 전시의 요소로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 같습니다.
(좌) 걷는 연습 - 긴 밤과 둑, 2024, 회화와 지지체, 장 지에 먹, 분채, 백묵, 콘테, 가변 크기 (우) 슬픔의 모서리-내일의 말, 시, 장지에 먹, 나무 화판, 26.2x37x2.8cm
- 시가 포함된 작품도 있다. 문인화의 전통인 시서화 일치에서 비롯된 작업인가?
동양화를 전공하다보니,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기는 한 것 같습니다. 서양의 문화는 글은 펜으로 그림은 붓을 사용하며 도구가 분명하게 나뉘어 있었지만, 동양의 문화는 붓으로 글도 그림도 쓰고 그리는 문화라는 것이 제게는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다가도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으면 종이에 바로 그려내곤 했던 것 같고요. 가끔은 그림이 글을 대신할 때가 있기도 하고, 글이 그림을 대신할 때도 있듯이. 글자라는 매체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끼며 작업에 자주 등장시키게 되는 것 같네요. 글자를 회화의 재료로 감각적이게 사용하는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개인전《슬픔의 모서리 》2024.5.22~6.2, 무음산방. 106장의 그림(슬픔의 모서리)과 26편의 시(슬픔의 모서리 - 내일의 말)
슬픔의 모서리 세부
- 개인전 《슬픔의 모서리》에서 106장의 그림과 26편의 시를 모아 벽면에 붙인 작품이 인상깊다. 무엇을 형상화하고 어떤 작업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는지 궁금하다.
슬픔의 모서리는 제가 늘 걷던 탄천에 조그만 언덕을 형상화 한 전시이자 작품입니다. 그 언덕 앞에서 제 작은 크기를 감각하는 것이 그때는 위로가 되어 제 그림으로 전시장에 언덕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시의 이미지를 염두하고 작업을 시작했고, 동시에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조그마한 작업실 벽에 100여장의 그림을 다닥다닥 붙여놓았던 기억이 있네요. 각각의 그림은 5~6겹 정도 쌓아 올렸는데, 3겹까지는 개별로 진행하고 그 이후에는 벽에 그림을 붙여서 각각의 그림이 이어질 수 있도록 작업했습니다.
(좌) 나쁘지 않아, 2021, 순지와 안피지에 먹, 분채, 40x40cm (중) 예비된 1인분, 2021, 순지와 안피지에 먹, 분채, 40x40cm, 2021 (우) 막다른 칸, 순지와 안피지에 먹, 분채, 40x40cm
서투른 용기, 2020-2021, 장지, 순지, 안피지, 화선지, 먹, 가변크기, 각각 151.7x210.3cm
- <서투른 용>, <예비된 1인분>처럼 커다란 화면에 글자를 전면적으로 드러낸 작업들도 있는데, 화면에 드러나는 글자는 어떤 과정과 이유에서 선택되는지 궁금하다.
제가 평소에 상상을 많이 해서 은연 중에 곱씹거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들을 메모해두곤 합니다. 그 중에는 제게 용기를 주는 말도 있고, 제 불안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 있기도 해요. 글자가 클수록 더 크게 외치고 싶었던 말들이었습니다. 제 내면의 상태가 항상 무언가의 크기를 정하는 것 같아요.
걷는 연습 - 눈(step - snow), 2024, 켄트지, 먹, 분채, 콘테, 백묵, 알루미늄 프레임, 20.9x29.5x2.2cm
걷는 연습- 비(step - rain), 2024, 켄트지, 먹, 연필, 분채, 백묵, 알루미늄 프레임, 20.9x29.5x2.2cm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두 차례의 개인전 이후, 작업의 다음 과정에 대해 모색 중에 있습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한차례 지나간 후, 나는 작가로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느끼는 불안에 대해 생각하던 중, ‘비교’라는 행위로 저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최근에 발견하여 이것을 작업의 개념으로 끌어오는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작품으로 많은 분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얼른 오면 좋겠습니다.
걷는 연습 어느 날(step- someday), 2024, 켄트지, 먹, 분채, 콘테, 백묵, 알루미늄 프레임, 20.9x29.5x2.2cm
작가 약력
개인전
2024 《긴 밤 그림자 》, 유영공간, 서울
《슬픔의 모서리 》, 무음산방, 서울
단체전 · 초대전
2024《小品物》, 오온, 서울 (예정)
《BLUE WALK 》, 개관 초대전, 이엘아트갤러리, 경기
2023 《아트경기 업↑ 팝업갤러리 》, 갤러리지지향, 파주
2022 《Green and Gold 》, 픽앤플레이스, 서울
2021 《CANVERSE 2nd EXHIBITION EWHA WOMANS UNIV. 》, 인왕산 초소책방, 서울
2019 《의미있는 중얼거림 》, 복합문화공간 에무, 서울
프로젝트
2023 〈Small scenery 〉
선정
2024
유영공간 작가 공모 선정
무음산방 작가 공모 선정
2023 아트경기, 경기문화재단
예술인자립지원, 경기문화재단
[청년 작가 열전 22 ] 반복과 축척에 대하여 - 김미지 < 청년예술인 < 영아트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