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
국립현대미술관은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을 4월 17일(목)부터 7월 6일(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연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는 인간 정신을 구속하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꿈꾼 혁명적인 운동으로 1920년대 말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한국 미술계에서는 1930년대 말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 일본 유학생들을 통해 시도되었으나 식민과 전쟁, 분단으로 인해 이후 적극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다.
전시는 총 2부로 구성되며 6명의 작가를 소개하기에 앞서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초현실주의’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초현실주의가 한국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전개되었는지 문화번역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20세기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미술평론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초현실주의 선언」의 마지막 문장에서 제목을 따온 1부 ‘삶은 다른 곳에 있다’(1전시실)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 현실의 다양한 차원을 경험하게 하는 작품과 자동기술, 전치, 콜라주, 이중영상, 왜곡 등 초현실주의의 주요 기법을 사용해 우연과 경이, 혁명의 가능성을 꾀한 작품들을 살펴본다.
2전시실부터 4전시실까지 이어지는 2부에서는 6명의 작가를 본격적으로 조명한다.
1930년대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하며 당시 추상과 함께 최고의 첨단미술로 간주되었던 초현실주의를 직접 체험했던 김종남과 김욱규를 소개한다. 경남 산청 출신의 김종남은 일본미술학교 졸업 이후 줄곧 일본에서 작업하며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겪은 내적 갈등을 작품 속 ‘숨은그림 찾기’ 같은 기묘한 표현법으로 그려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김욱규는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畫學校)에서 공부했다. 1.4후퇴 때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월남했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는 이산의 트라우마가 짙게 배어있다.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1970년대부터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채 작업에만 전념하여 절대고독 속에서 꿈과 현실,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을 오가는 자신만의 초현실주의적 세계를 완성했다.
3전시실에서는 한국근현대미술에서 중시했던 전통의 현대화, 민족 정체성 탐구에 구속되지 않고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나 에로틱한 환상을 그려낸 김종하와 박광호를 소개한다. 이들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거나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등 다른 네 명의 작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술계와 교류를 가졌다.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김종하는 1956년 도불 이후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를 탐구했다. 그는 사실주의 기법으로 관능적, 신화적 세계를 구축했다. 박광호는 〈결(結)〉, 〈향(響)〉, 〈음양(陰陽)〉, 〈요철(凹凸)〉, <군집(群集)〉등 연작을 통해 억압된 정념과 물신숭배적 욕망을 드러낸다. 그는 초현실주의 오브제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자신의 작업에 적용했다.
4전시실에서는 김영환과 신영헌을 소개한다. 이들의 작품은 도상이나 공간구성, 기법 등에 있어 조르조 데 키리코나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과 같은 유럽 초현실주의의 특징과 함께 해방 후 세워진 국내 미술대학 1세대로서 한국 근대사 및 미술사의 토대 위에 형성된 독특한 초현실주의적 세계를 보여준다.
김영환은 함경남도 안변 출신으로 홍익대를 졸업하고 반(反)국전을 내세운 현대미술운동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지만 곧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문학성, 환상성 강한 구상과 기하학적 추상, 애니미즘적 세계를 그렸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인 신영헌은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수학했다. 주로 실향민화가, 종교화가로 알려진 그는 전쟁과 분단으로 고통 받는 조국 산천과 자본주의로 비인간화된 도시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과 결합한 기이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전시 기간 중인 5월 17일(토)에는 현대미술사학회와 공동주최로 초현실주의를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한국근대미술에서 초현실주의의 태동과 위치짓기에 대한 미술계의 심도있는 토론이 예정돼있다. 자세한 내용과 참가 신청은 향후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mmca.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발굴, 소개하여 미술사를 보다 다채롭게 바라보고자 기획된 전시”라며, “초현실주의를 매개로 한국근대미술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새로운 미적 경험과 시각, 풍성한 영감을 얻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작가와 작품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김종남(金鐘湳, 마나베 히데오(眞鍋英雄), 1914-1986)은 경상남도 산청군 출신으로, 15세에 홀로 교토(京都)로 건너갔다. 1934년 일본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일본에 처음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을 소개하고 지도자 역할을 했던 후쿠자와 이치로(福澤一郞, 1898-1992)가 운영한 ‘후쿠자와 이치로 회화연구소’에서 수학했다. 김종남은 1940년 후쿠자와가 주도하여 결성한 전위미술 단체 ‘미술문화협회’가 주관한 공모전에 꾸준히 참여했다. 전쟁의 불길이 거세질 무렵 그는 육군항공정비부대에 징용되어 항공병을 위한 교육 자료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고, 전후에는 미군부대에서 영자신문 디자인과 편집 일을 하면서 퇴근 후 작업을 병행했다. 평생을 초현실주의로 일관한 그의 작업은 일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다. 김종남은 1950년 마나베 집안의 양자가 되어 성을 바꾸고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일본 사회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야했던 그는 임종을 앞두고서야 두 아들에게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혔다.
그의 작품에는 초기부터 식물과 동물, 곤충 등 자연 생물이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대상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극사실적으로 묘사되고, 다양한 식물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대자연이 근원적으로 지닌 섬뜩함을 전한다. 195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은 식물 사이에 보호색을 한 기이한 생명체들이 숨어있거나 새와 인간, 식물과 인간 등 이종(異種)이 결합된 생명체가 주인공이 되어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여기서 마나베 히데오라는 보호색을 두른 채 일본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으로 살아야했던 작가의 내면 깊이 도사리는 불안이 감지된다. 한편 195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작품에 비행기가 종종 등장해 청년 시절 작가가 경험한 전쟁의 공포와 항공기 도면을 그리던 경험이 세월이 지나 만들어낸 중층의 기억을 보여준다.
일본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중요한 단체인 ‘미술문화협회’ 제2회전 출품작으로, 화면 가득 울창한 원시적 밀림 곳곳에 생물체를 배치한 점에서 막스 에른스트(Max Ernst)나 앙리 루소(Henri Rousseau)의 영향이 엿보인다. 동식물의 사실적인 묘사에 있어서 어떠한 왜곡도 가하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환상성을 더한다. 작가는 다양한 식물들이 빽빽이 들어선 울창한 숲 자체를 표현하는 데 집중했고, 어느 날 깊은 자연 속을 걷다가 조우할 법한 낯선 감각, 즉 대자연이 원래 가지고 있는 기괴함을 표현했다. 후쿠자와 회화연구소 시절 친한 친구였던 쓰이히지(築比地正司)는 마나베(김종남)가 캔버스 왼쪽부터 녹색 숲을 순차적으로 그려나갔으며, 녹색 일색으로 단순했지만 차분한 유현함과 환상의 세계로 끌려들어가는 듯했다고 회상했다. 녹색 한 톤이지만 화면이 지루하지 않도록 미세하게 다른 다양한 녹색들로 화면을 조정하여 유현한 세계를 만들어 낸 점이 인상적이다. 숨이 막힐 듯한 빽빽하고 음울한 풍경 묘사에서는 전화(戰禍)가 깊어지는 암울하고 불길한 시대의 공기가 느껴진다.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수변(水邊)〉, 1941, 캔버스에 유화 물감, 123.5*161cm, 이타바시 구립미술관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나의 풍경(ぼくの風景)〉, 1980, 캔버스에 유화 물감, 73×91.5cm, 유족 소장
마나베(김종남)의 자화상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된 모티프들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는 원래 즐겨 그리던 식물과 곤충들이 화가와 한 몸이 되어 등장하고, 오랫동안 책임져 온 생계 활동을 상징하는 듯한 동전이나 지폐도 그려져 있다. 화가의 머리 위로는 부서진 비행기가 화면 좌우를 가르며 늘어서 있다. 태평양전쟁 때 항공정비부대에서 항공병을 위한 도면을 그리는 일에 동원되었다. 20~30대 시절 그가 경험한 전쟁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항공폭격기, 자신이 그리던 항공기 도면, 그리고 파괴된 비행기 이미지로 남았다. 이 비현실적인 전쟁 경험과 충격은 세월이 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듯, 슬픔과 아름다움으로 각색된 휘발되지 않는 코어 기억으로 달라붙어 자신을 설명하는 그림에서 불쑥 토해진 것으로 보인다.
김욱규
김욱규(金旭奎, 1911-1990)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1930년대 중반 도일(渡日)하여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서 4년간 서양화를 공부했다. 문화학원에 입학했다고 전해지며 야수주의(fauvism)와 후쿠자와 이치로가 중심이 된 초현실주의의 산실로 간주되는 《독립미술협회전》(1941)에 참여했다. 해방 후 함흥미술연구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함흥미술동맹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4 후퇴 때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둔 채 월남한 김욱규는 북한에서의 전력이 남한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데 장애가 되어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창작에 전념했는데, 그가 남긴 400여 점에 가까운 작품은 제목과 제작년도, 심지어 서명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또는 판매하기 위해 작품을 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술계는 물론 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채 홀로 작업한 그의 첫 개인전은 1991년 작가 사후 장남이 마련한 유작전(遺作展)이었다.
김욱규의 작품은 사실주의, 표현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비정형적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 등 다양한 양식을 넘나든다. 그에게는 골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상실과 모순으로 점철된 현실적, 심리적 삶에서 구원받는 길이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비현실적 공간에 등장하는 날벌레와 새, 식물 사이에 숨은 기이한 생명체, 길게 왜곡되거나 새의 형상과 결합한 그로테스크한 인간의 모습에서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의 중간상태에서 오는 불안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김욱규가 평생 안고 살았던 이산(離散)의 트라우마(이데올로기 대치로 인한 민족 분단, 가족과의 생이별), 절대 고독(세상으로부터의 단절), 가난에 대한 절망은 후기로 가면서 점차 극복의 대상이 되고, 화면은 영혼의 자유를 갈구하는 듯한 에너지로 가득해진다.
저 멀리 인간의 형상과 지평선에 걸친 붉은 태양이 보이는 상류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나뭇잎이 화면 전경을 차지하고 있다. 강인지 아니면 얕은 물줄기인지 음울한 기운을 풍기는 푸른 물은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천천히 흐르고, 나뭇잎 위에는 자신의 몸을 실은 나뭇잎을 갉아먹고 있는 날벌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접은 날개는 닳고 찢어져 날아오르는 게 불가능해 보인다. 김욱규는 존재의 부조리, 즉 내가 속한 사회에서 내가 끊어지는 상황에 절망했고 그 불안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삶과 죽음의 공존, 낯익은 것이 낯설어지는 소외에서 오는 불안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김욱규, 제목 없음, 1960년대 중반- 1970년대 초, 캔버스에 유화 물감, 60×50cm, 유족 소장
1970년대 김욱규의 작품에는 식물, 숲 또는 정원이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낮의 숲을 소재로 한 작품은 이전 시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원초적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만개한 꽃 사이로 새와 나비가 날아다니고 소녀가 춤을 추고, 풍요로움 속에서 인간과 동물, 식물의 구분 또는 위계는 사라진다. 밤이 찾아오면 숲은 더 내밀하고 신비스러운 공간으로 변한다. 풀숲에는 유령처럼 보이기도 하고, 커다란 가면을 쓰기도 하고, 인간인지 식물인지 곤충인지 구분조차 어려운 여러 종의 생명체가 숨바꼭질하듯 숨어있다. 김욱규의 숲은 치유와 평화의 안식처라기보다 날것의 기운과 혼돈으로 가득한 원초적 공간으로 보는 이에게 경외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김종하
김종하(金鐘夏, 1918-2011)는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1932)에 출품한 풍경화가 입선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같은 해 동경으로 건너가 가와바타화학교에서 회화의 기초를 익히고,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제국미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56년 그 시절 화가들에게 근대 서양미술의 원류(原流)로서 동경의 대상이었던 프랑스로 건너간다. 귀국한 그는 이화여대, 숙명여대, 서라벌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79년부터 1990년대까지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작업했으며, 은관문화훈장(2002) 등을 수상했다.
김종하는 미술계에 확산된 추상의 물결을 거부하고 구상미술의 발전을 표방하며 설립된 ‘목우회(木友會)’의 창립 창립멤버로 활동하고, 민족기록화, 새마을운동기록화 제작에도 참여하는 등 주로 구상회화를 제작했지만, 그의 작품은 당시 일반적인 구상회화와는 달리 감각적인 현실과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제국미술학교 유학 시절 당시에도 초현실주의에 주목했지만,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를 직접 탐구한 것은 도불(渡佛) 이후였다. 특히 두 번째 도불 이후 그의 작품은 동년배 작가들의 작품에서 찾기 힘든 독특한 에로티즘을 띈다. 어두운 실내 속 비현실적으로 새하얀 피부를 지닌 관능적인 여성 누드가 작가 개인의 내밀한 욕망을 반영한다면, 사막, 숲, 바다 등이 여성의 가슴과 둔부의 곡선으로 변하여 탄생한 신성하고 원시적인 어머니 자연은 집단 무의식에서 생겨나 상징의 형태로 되풀이되는 원형(原型)과 연결된다. 그는 1세대 서양화가들에게 굴레가 되기도 했던 민족적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 진정한 예술에 대해 고민했다.
〈색장갑〉은 김종하가 파리에 도착하고 이듬해 그랑 팔레(Grand Palais)에서 개최된 《르 살롱(Le Salon)》에 출품한 작품으로, 파리의 부티크에 진열된 장갑과 가봉용 마네킹 등 패션 요소들이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당시 프랑스 여성들에게 장갑은 외출 시 착용하는 일상적인 패션 요소로 여성성을 강조한다. 장갑이라는 소재는 초현실주의 영화나 회화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장갑은 신체의 일부처럼 기능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신체가 아닌 물질적 이중성을 지닌 존재로, 여성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동시에 신체 변형과 사회적 규범,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내부가 비어 있음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촉각적 감각을 강조하는 장갑의 형태는 모순적이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하학적인 가봉 표식이 두드러지는 마네킹은 인체의 형상을 띠지만 비인간적 존재로서, 일반적으로 감춰지는 여성의 누드 실루엣을 드러낸다.
김종하, 〈색장갑〉, 1957, 캔버스에 유화 물감, 46.8×62cm, MMCA 소장
사실적으로 묘사된 허공에 뚫려 있는 창문과 그 안의 구름 한 점, 단순한 구성과 선명한 색채는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를 떠올리게 만든다. 선인장은 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로, 외형적으로는 뾰족한 가시와 거친 표면을 지니지만 내부에는 촉촉한 수분을 듬뿍 저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면성을 가진다. 새빨간 열매를 맺은 채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선인장이 지향하는 곳은 현실 세계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 그러나 그 하늘조차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그 이상의 세계로 향하는 하나의 ‘창’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종하의 내면에는 현실 너머의 어떤 세계가 견고하게 실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선인장 둥치의 뾰족함은 살을 찌르듯 강렬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고통과 쾌락이 밀접하게 연결된 이중성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형상과 붉은 열매는 억눌린 욕망이 터져 나오듯 강렬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김종하는 이를 통해 생명의 강인함과 불가항력적인 욕망,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에로틱한 지향성을 대담하게 드러낸다.
김종하, 〈선인장(생(生)〉, 1977, 캔버스에 유화 물감, 162×112.5cm, MMCA 소장
박광호
향보(鄕步) 박광호(朴光浩, 1932-2000)는 대구 출신으로 10대 시절부터 문학에 큰 관심과 재능을 보여주었다.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대구 계성고, 계명대, 영남대, 효성여대를 거쳐 대구교육대학교에서 30여 년간 미술 교육자로서의 후학을 양성하며 화업을 지속했다. 생전 세 차례 개인전을 개최했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앙가쥬망(Engagement)’, ‘신조회(新潮會)’, ‘송도회(松島會)’, ‘직(直)’ 등 단체에서 활동했는데 오랜 시간 꾸준히 활동한 곳은 앙가쥬망이 유일하다. 미술계와의 교류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미술이론 및 미술교육 관련 논문과 번역본을 다수 남긴 박광호는 서양의 이론을 본인의 작업으로 직접 실천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작업 초기(1950년대 중반~1960년대)에는 전쟁의 상흔과 억압적인 사회에 대한 저항을 담은 표현주의,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에서부터 동서고금의 이미지를 콜라주한 팝아트적 작품, 옵티컬(optical) 또는 기하학적 추상 등 다양한 주제와 양식을 실험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선보인 결(結), 향(響), 음양(陰陽), 요철(凹凸), 군집(群集) 등의 연작은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 보기 드물게 기계적인 일상 속 억압된 정념(情念)과 물신숭배의 욕망을 오브제 형태로 표출한다. 합리성을 벗어난 오브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그리고 전진과 후퇴가 상호작용하는 모호한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작가는 구상과 추상,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연결하고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풍성하게 채우면서 심원한 무의식의 세계를 지금 여기로 끌어온다.
박광호는 초현실주의 오브제, 특히 ‘잠재의식을 상징화’한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상징기능 오브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개념화한 상징기능 오브제는 반드시 성기나 유사기관을 재현하지 않지만 뜻하지 않은 효과에 의해 일상의 의식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성욕을 자극한다. ‘욕망의 문화’와 ‘물체의 문화’가 일치하는 상징기능 오브제는 인간 누구나 지니는 물신숭배를 내포한다. 작가는 물체가 범람하는 가운데 인간마저 물체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오브제를 통해 “각성된 의식과 잠자는 의식의 범출의 중핵을 구체화하는 것”이야말로 현대미술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신체의 일부가 물신화되어 성적인 속성을 지닌 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는 꿈과 현실을 오가며 억압된 욕망을 표출한다.
박광호, 〈반도(半島) 환상〉 1970년대, 캔버스에 유화 물감, 90.9×72.5cm, MMCA 소장
다양한 오브제들이 기하학적 균형을 이루며 화면을 유영(遊泳)하고 있다. 이 오브제들은 여성의 가슴, 입술, 성기, 고대 어패류 화석, 암모나이트, 분열하는 세포, 그리고 무엇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다의적인 비정형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오브제들이 떠다니는 공간은 밖으로 확산하는 것인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인지 전진과 후퇴의 구분이 모호하고, 명암 차이로 만들어낸 공간의 깊이감은 미지의 세계로 연결되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들게 한다. 〈음양(陰陽)〉연작은 각각의 작품이 다시 한 쌍을 이루어서 화폭 안에서뿐만 아니라 각 작품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미지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러한 공간감은 살바도르 달리가 편집증적 비평을 연구하며 탐닉했던 코뿔소 뿔 이미지와 요하네스 베르미어의 〈레이스 뜨는 여인〉을 합쳐 재탄생시킨 작품(구겐하임미술관 소장)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광호, 〈음양(陰陽)Ⅰ〉, 1970년대 중반, 캔버스에 유화 물감, 73×61cm, 유족 소장
김영환
구로(久路) 김영환(金永煥, 1928-2011)은 함경남도 안변군 출신으로, 1956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던 해 김충선(金忠善), 박서보(朴栖甫), 문우식(文友植)과 함께 반(反)국전을 내세운 《4인전》에 참가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구태의연한 아카데미즘에 저항하는 ‘현대미술가협회’ 창설에도 참여하고, 한국의 바우하우스를 꿈꾸며 1956년 설립된 ‘신조형파’ 3회전에 기하학적 추상이 아닌 문학성, 환상성 강한 개성있는 작품을 다수 출품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화단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했고, 긴 은둔을 깨고 개최한 개인전(1974)을 시작으로 1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작가는 동년배의 오랜 화우(畵友)들과 1988년 설립한, 추상과 구상의 구분에 속박되지 않고 한국적 경험과 감성을 표현하고자한 ‘시현회(始現會)’ 정도 외에는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영환은 대학 시절부터 초현실주의에 매료되었다. 초현실주의를 통해 전쟁과 분단을 겪은 비참한 한국의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현실의 모순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거나 현실에 대한 분노를 외부로 표출하는 대신 화폭에 현실을 재구성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작가는 조르주 데 키리코, 살바도르 달리에게 큰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이들이 대상을 병치하고 공간을 창출하는 방식에 영감을 받았다. 1970년대에는 기하학적 추상이 부분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문학적, 신화적 상상력이 꿈틀거린다. 작가는 점차 황소, 말, 새 등을 주요 모티프로 인간과 자연의 공생하는, 원형적 또는 애니미즘적 사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산중학교 시절에, 그리고 한국전쟁 때 부산에 피난하며 그에게 그림을 가르쳐주었던 이중섭(李中燮, 1916-1956)의 영향이 작가의 예술세계에 있어 근저였음을 알 수 있다.
긴장과 고요가 흐르는 과장된 원근법적 공간은 언제라도 깨어질 수 있는 꿈의 풍경이다. “무한을 함축한 초(超)시간”적 공간은 계속해서 김영환 작품에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이 공간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자아의 변형이 일어나는 무의식의 풍경이자 경이로운 사건 그 자체다. 〈자화상 풍경〉에서 얼굴만 등장하는 거인은 땅에서 솟아 나오거나 땅이 변형된 낯선 존재로 그려졌다. 지질학적, 건축적 환상이 더해져 더욱 이질적인 이 작품에서 초자연적인 인물은 꿈의 세계로 들어가듯 눈을 감고 있다. 잠자리에 들며 “시인은 작업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듯 그의 정신은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자유로이 작동한다. 그의 얼굴은 렌즈 또는 관, 구슬처럼 보이는 기계적 요소가 결합되어 의식과 감각의 확장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직사각형의 구조물과 그루터기, 바다를 가르는 길, 심지어 흐르는 형태의 기체처럼 표현된 구름 등은 이 환상극에 등장하는 또 다른 주인공처럼 보일 정도로 각자 목소리를 내는데, 결국 만들어지는 것은 불협화음이다.
김영환, 〈자화상 풍경〉, 1962, 캔버스에 유화 물감, 66×100cm, 유족 소장
작품의 중심에 인간-기계 또는 생물-비생물의 결합이 등장한다. 여성과 남성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두 형상은 마네킹 또는 낡은 기계처럼 보인다. 한때 사랑 받았지만 이제는 쓸모없어져 버림받은 이 하이브리드적인 존재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여전히 과거에의 미련과 미래에의 소망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상반신만 있는 여성의 오른손은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식물(처럼 보이는 형상)을 잡고 있고, 남성은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지만 잉태가 불가능하다. 이들은 두 팔이 이어져 한 몸을 이루고 있으나 완전한 결합의 욕망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수원(水源)이라고는 이들 사이에 있는 작은 저수지밖에 없는 불모지에서 한물간 기계의 꿈이 생명을 대체한다.
김영환, 〈폐허의 오후〉, 1973, 캔버스에 유화 물감, 97×130cm, MMCA 소장
신영헌
신영헌(申榮憲, 1923-1995)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1939년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해 도화부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광복 직후 서울로 내려와 이쾌대(李快大, 1913-1965)가 설립한 ‘성북회화연구소’에서 수학하고 비슷한 시기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다. 그는 삼선교 부근에 기초를 중시했던 성북회화연구소를 모범으로 한 화실을 세워 미대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작에 전념했다. 1950년~60년대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꾸준히 참여했고 두 차례 개인전을 개최한 것 외에 주로 기독교 미술 단체전에 참여해 그나마 ‘종교(기독교) 화가’로 알려져 있다.
칩거하다시피 세상과 단절된 그였지만 신영헌의 작품에는 20세기 한국인이 겪은 식민, 전쟁, 월남, 분단의 역사가 특정 종교를 넘어 그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시각화되었다. 국전 출품작을 비롯한 196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은 당시 미술계를 풍미한 앵포르멜 경향을 보여주나, 1960년대 말부터는 사실주의 기법으로 살바도르 달리가 즐겨 사용한 이중 영상(double image)을 매개로, 전쟁과 분단으로 만신창이가 된 조국산천과 자본주의로 인해 비인간화된 도시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과 결합한 기이한 이미지로 그려냈다. 작가 본인은 자신의 예술을 특정 ‘주의’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했으나, 그가 인간을 둘러싼 현실의 삶에 단단히 발을 딛고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재인식하게 만드는 예술적 경이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본령에 가깝다.
고대 문명에 대한 신영헌의 관심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반(半)추상적으로 재해석한 1965년 작품 〈기(氣)〉(제1회《신작가협회》 출품)에서부터 출발한다. 〈신라송〉은 관심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제3공화국 당시 국가가 주도적으로 이끈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작가는 개성적인 조형언어로 시각화했다. ‘신라를 칭송하다’는 제목처럼 작품에는 찬란한 신라 문화를 상징하는 도상들이 등장한다. 화면 중앙에는 신라의 위대한 유산 중 하나인 석굴암이 배치되었고, 그 주변에는 말을 타고 달리는 화랑과 신라 건축물, 승려 등의 이미지가 각기 다른 투명도와 크기로 층층이 겹쳐있어 고대국가의 문명 축적 과정을 보여주는 효과를 낸다.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서사를 상징하는 요소들이 층층이 쌓여 장대한 역사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며 ‘시간성’을 부여하고, 앞과 뒤, 안과 밖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여 ‘평면성’을 극복하고 있다.
신영헌, 〈신라송〉, 1968, 캔버스에 유화 물감, 161.7×129.5cm, MMCA 소장
신영헌의 작업세계는 앵포르멜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半(반)추상에서 구체적인 형상이 등장하는 구상으로 변모한다. 이 시기 그로테스크한 형상은 인간과 결합한 땅 또는 바위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전 시기 추상적 형태의 산과 땅이 인간 형상과 융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의 장〉에서는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거대한 바위가 화면 중앙을 차지한다. 이 여인은 바닷가에 앉아 비통한 표정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그 모습은 망부석을 떠올린다. 여인의 신체는 분절되어 상반신은 화면 앞에, 하반신은 섬처럼 뒤로 떨어져 있다. 그녀의 하반신 뒤로 바다 저 너머를 애타게 바라보는 또 한 명의 여인상이 보인다. 원근법을 무시한 화면 구조는 상반신과 하반신의 거리감을 예상하기가 어렵게 만들며, 분단된 한반도의 비극적 현실을 강렬하게 상기시킨다.
신영헌, 〈한(恨)의 장(章)〉, 1969, 캔버스에 유화 물감, 116×91cm, 개인 소장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2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ㅇ 기간 : 2025. 4. 17.(목)~ 7. 6.(일)
ㅇ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ㅇ 주최 : 국립현대미술관
ㅇ 출품 : 김욱규, 김종남, 김종하, 신영헌, 김영환, 박광호 등 작품 및 아카이브 약 300여 점
ㅇ 관람료 : 2,000원(덕수궁 입장료 1,000원 별도)
근대기 초 우리나라의 초현실주의 작품 전시《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 전시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