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날, 용인 호암미술관에서는 《겸재 정선》전이 한창이다.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진경산수화의 거장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의 화가다. 정선의 작품을 거의 망라하는 이번 전시에서 첫 전시실에 걸린 작품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다.
호암미술관에서 ‘금강전도’(우)와 함께 전시되고 있는 ‘인왕제색도’(좌) /사진: 최은규
<인왕제색도>는 1751년, 정선이 76세에 그린 작품으로 국보 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서화 보호를 위해 5월 6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다시 돌아간다. 이후 이건희컬렉션 해외 순회전에 출품되는 등 3년간 국외에 머무르게 된다. 귀한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인왕제색도>는 대담한 필치와 구도로 정선의 완숙한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그림에 많은 서사를 담고 있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다고 했다. 정선의 노년기 걸작에 담긴 내용과 화풍, 철학을 알고 그림 앞에 서 보면 어떠할까. 기왕의 <인왕제색도> 관련 연구들을 종합하여 그림에 얽힌 내러티브를 살펴보자.
정선, 인왕제색도, 1751, 지본수묵, 79.2×138.2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는 세로가 79.2cm, 가로가 138.2cm에 이르는 대작으로 종이에 그린 수묵화다. 정선이 소장했던 이 그림은 18세기 당시 유명 서화 작품을 수집했던 심환지, 일제강점기 경성의 최난식과 개성의 부호이자 고서화 수장가였던 진호섭, 서예가 손재형, 호암미술관 등을 차례로 거치다가, 2020년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로 국가에 기증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진경산수와 정선의 회화
18세기 이전 조선의 선비와 화가들은 현실보다 명분, 사실보다 관념을 중시했다. 그 결과 문예에서도 비현실적 의고주의가 유행하여 관념적 산수화, 상징적 사군자화를 주로 그렸다. 그러나 18세기가 되어 서양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유입되면서 조선인들은 현실에 눈뜨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상적, 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시작되었고 예술에서도 관념과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관심을 두게 된다. 조선 후기 화단에서 진경산수화, 풍속화와 함께 서양화법이 유행한 것은 이러한 흐름을 배경으로 한다. 진경산수화는 실재하는 경치를 직접 보고 그리는 실경산수화의 범주에 속하기는 하나, 단순히 경치를 똑같이 묘사한 그림이 아니라 철학적·문화적 상징, 작가의 관점과 해석을 담은 그림이었다.
조선 후기에 진경산수화가 유행하고 발전한 배경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회적 변동과 의식의 변모가 있다. 당시 소중화 사상(小中華思想,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야만이라 여기고 조선을 한족의 정신 문화의 유일 계승자로 의식한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산천과 문물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비실용적인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실제 생활을 중시하는 실사구시의 학풍인 실학사상도 나타나게 된다.
또한, 18세기는 문인 사대부들 사이에 자연친화적 풍류 의식이 확산되면서 산수 유람 풍조가 성행하여, 금강산과 관동 지방, 한양 근교 일대의 경관 등을 많이 유람하게 된다. 유람 후에는 이를 기록하는 문화가 일상화되어 ‘산수기행문학(山水紀行文學)’이라는 장르가 생길 정도로 글로 쓰이고, 유람하고 사생하면서 기행사경도(紀行寫景圖)가 그려지기도 했다. 기행사경도의 제작 및 감상이 활성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나타나게 된다.
정선은 조선 산천에 대한 관심, 발로 직접 밟아보는 현장답사, 현장에서 그린 밑그림을 토대로 하여 진경산수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실경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해 진경의 면모를 구현했다. 산수를 직접 보고 자신의 화법으로 자유로운 해석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정선의 회화와 경화세족
정선은 지방 관리로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경화세족(京華世族,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이 모여 살던 인왕산, 백악산 주변에 살면서 당대의 저명한 문인, 관료들과 교유했다. 이는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등 장동(壯洞, 서울 종로구 통의동, 효자동, 청운동 등 백악산 계곡에서부터 인왕산 남쪽 기슭까지를 일컫는 옛 지명. 안동 김씨 집안을 비롯해 조선의 명문가가 있던 장소) 김문의 뒷받침이 있어 가능했다. 장동 김씨 가문은 정선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자 역할을 했다. 정선이 예술적 재능을 꽃피울 수 있던 배경에는 이들의 도움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
정선이 살던 곳은 지금도 인왕산, 백악산은 물론 남산, 관악산, 멀리 한강 변의 경치까지 보이며 서울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정선은 그곳에서 보이는 한양의 경치를 자주 그렸다. 이를테면 이번 전시에 나온 간송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이 그러하다. 그 중 <청풍계도(淸風溪圖)>(1739)는 백악산 청풍계에 있던 장동 김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고택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정선, 청풍계도, 1739, 비단에 담채, 239.8×75.6cm, 간송미술문화재단, 보물 제1952호.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여러 번 작품을 남겨 현재 6점이나 전해지고 있다. 정선이 새로운 문인화를 추구하고 실재하는 산천을 그리는 진경산수화를 정립한 배경에는 정선을 후원한 경화세족들의 사상과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왕제색도>의 내용 – 언제, 무엇을 그렸나
<인왕제색도>의 오른쪽 상단에는 ‘인왕제색 겸재 신미윤월상완(仁王霽色 謙齋 辛未潤月上浣)’이라는 관서(款書, 글씨나 그림에 이름, 제작 장소, 제작 연월일 등의 내용을 적어 놓은 기록)가 있다.
‘인왕제색도’ 부분
정선의 호인 '겸재(謙齋)'가 음각으로 찍힌 백문방인(白文方印, 글씨가 하얗고 바탕이 붉은 사각형의 도장), 정선의 자인 '元伯'이 양각으로 새겨진 주문방인(朱文方印, 글자를 양각으로 새겨 글씨가 붉게 나오는 사각형의 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다. 관서와 인장을 통해 '인왕제색(仁王霽色)'이라는 화제, 겸재라는 작가 명을 확인할 수 있고 1751년(영조 27) 윤5월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화제에서 알 수 있듯이, 신록의 푸르름이 짙게 밴 윤5월 여름비가 갠 인왕산의 생기 있는 모습을 화면에 꽉 채워 표현하고 있다. 화면에 들어찬 인왕산의 봉우리들은 묵직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압도적이다. 76세 노인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활력과 기세가 느껴진다. 인왕산의 실경을 충실하게 표현하여, 주요 봉우리인 범바위와 치마바위, 작은봉우리, 기차바위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주요 골짜기인 수성동, 옥류동, 청풍계, 주요 언덕인 필운대, 세심대를 모두 그렸으며 인왕산 능선의 한양 성곽까지 표시했다. 이태호 교수는 정선의 진경 작품은 대개 실경을 과감히 변형하여 그려졌는데 이 작품은 가장 실경에 가까운 그림이라고 보았다.
고유섭, 최완수 선생에 의하면 <인왕제색도>에는 당시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영의정 만포 심환지(沈煥之, 1730-1802)의 칠언절구로 된 발문이 있었다.
심환지, 인왕제색 제화시, 1802(순조 2), 종이에 먹글씨, 크기 미상, 소장처 미상 /출처: 최완수, 『겸재의 한양 진경』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華岳春雲送雨餘 / 萬松蒼潤帶幽廬 / 主翁定在深帷下 / 獨玩河圖及洛書 / 沈一作垂 壬戌孟夏下澣 晩圃書
삼각산 봄구름 비 보내 넉넉하니 / 만 그루 소나무의 푸른 빛 그윽한 집을 두른다 / 주인옹은 반드시 깊은 장막 아래에 앉아 / 홀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완상하겠지 / 임술(1802) 초여름 하순에 만포가 쓰다.
(최완수, 『겸재의 한양 진경』, 2018, 39-40쪽)
심환지는 정선의 그림을 애호하여 1802년 타계하기 직전 이 작품을 수집하게 되어 발문을 남겼다고 한다. 심환지의 발문은 <인왕제색도>에 별지로 첨부되어 있었고 그의 문집인 『벽산여고(碧山餘藁)』 하권에 '제화산수장(題畵山水障)'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심환지의 발문 원본은 현전 여부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소장자가 바뀌는 과정에서 그림과 분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주석 선생은 심환지의 발문은 <인왕제색도>에 적혀 있었으며 소장자가 바뀌는 과정에서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고, 작품 상단의 인왕산 봉우리가 잘려 나간 것도 그러한 점에서 연유한다고 보고 있다.
‘인왕제색도’ 부분
인왕산 봉우리 끝부분에 대해서는 논의가 될 만하다. 하늘 아래로 인왕산을 그리면 봉우리가 작아 보일 것이나, 봉우리를 자름으로써 산이 더 웅장하게 보이고 화면에 긴장감을 주는 회화적 구성으로 보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대상을 화면 중앙으로 전진 배치하는 선택과 집중의 구도로 인왕산을 전체 화면에 꽉 차게 그리는 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인왕산 정수리 부분을 자르는 절묘한 구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주석 선생은 이러한 점이 작품의 조형 효과를 높이기는 하지만 이는 현대적인 발상이라고 본다. 성리학의 근본 정신이 심상한 것, 중용적인 것, 무리하지 않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점을 고려하면, 원래 <인왕제색도>에서는 주산의 정상이 온전하게 그려지고 하늘에도 다소 여유가 있어 압도적 박력과 함께 차분한 느낌도 갖춘 화격(畫格)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에 더해서 정선의 현존하는 그림 중 산봉우리를 자른 거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 소장처가 여러 번 바뀌면서 다시 표장하는 과정에서 부분적 훼손이 생길 가능성도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인왕산 봉우리 묘사에 대해서는 더 재고가 필요하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