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 발레단 <지젤>을 보고
벚꽃 흩날리는 4월 저녁, 지젤의 개막 공연을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찾았다. 전민철 발레리노의 마린스키 발레단 입단 소식이 알려지며 그가 출연하는 공연은 3분 만에 매진되었다고 했다. 무대 위에는 두터운 붉은색 커튼이 내려져 있었고, 공연에 대한 발레 팬들의 관심을 반영하듯 객석은 4층까지 가득 메워져 있었다. 공연의 막이 오르기 전, 문훈숙 단장으로부터 낭만 발레에서 폴드브라(Port de Bras, 팔의 움직임)의 특징과 함께 팬터마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유니버설 발레단의 지젤은 한국 발레사에 있어 예술적 가치가 높다. 1985년 초연 이후, 1989년 동양인 최초로 마린스키 발레단의 전신인 키로프 발레단에 초청받은 문훈숙 단장은 일곱 차례의 커튼콜과 함께 ‘영원한 지젤’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발레 한류의 물꼬를 튼 것이다. 이후 유니버설 발레단의 지젤은 세계 무대에서 예술성과 작품성으로 꾸준히 호평을 받아왔다. 그 때문인지 문훈숙 단장의 해설에는 발레와 지젤 공연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1막
ⓒ Universal Ballet_Photo by Lyeowon Kim
대지의 풍요로움을 떠오르게 하는 황토색의 무대 배경은 중세의 평화롭고 한적한 시골 농가로 데려다 놓았다. 잘생긴 귀족 청년 알브레히트는 순수하고 발랄한 시골 처녀 지젤에게 반해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오두막에 몰래 숨겨놓는다. 그렇게 자신의 신분을 속인 채로 지젤에게 사랑의 맹세를 한 알브레히트는 지젤과 연인 사이가 된다.
지젤은 데이지 꽃잎으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세어가며 꽃점을 쳐본다.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와 실망한 지젤에게 알브레히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꽃점을 조작하여 지젤을 위로한다. 1막에서 전민철 발레리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지만, 뒷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철없는 귀족 알브레히트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리고 데이지 꽃점은 이후 일어나는 일들의 복선이 되어 그들의 사랑이 순탄치 않게 흘러감을 암시한다.
ⓒ Universal Ballet_ Photo by Kyoungjin Kim
포도 수확을 마친 마을 처녀들과 지젤은 흥겨운 춤을 춘다. 지젤의 어머니는 심장이 약한 지젤이 행여나 잘못될까 춤을 추지 못하게 한다. 1막은 그야말로 팬터마임으로 모든 대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금이 가버린 꽃병처럼 그 균열이 어김없이 시작된다. 오랜 시간 지젤을 흠모해 온 사냥꾼 힐라리온은 두 사람 사이를 질투하며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귀족 일행이 마을을 방문하는데 그들 중에는 알브레히트의 약혼녀인 바틸드도 포함되어 있다.
지젤과 바틸드는 서로의 약혼자가 같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약혼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가까워진다. 한편, 사냥꾼 힐라리온은 귀족의 검을 증거로 내보이며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폭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젤은 힐라리온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알브레히트 또한 이를 발뺌하며 부인한다. 이에 격분한 힐라리온은 귀족을 소집하는 뿔피리를 불어 바틸드를 무대 위로 다시 불러낸다. 결국 알브레히트는 약혼녀 바틸드를 선택하며 지젤을 외면하기에 이른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지젤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점점 미쳐가는, 1막의 하이라이트인 ‘매드 신(Mad Scene)’을 보여준다. 데이지 신에서 흘렀던 선율의 변주는 지젤의 눈빛 속에 아직 알브레히트와의 행복했던 순간이 맺혀있음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알브레히트는 미쳐가는 지젤의 모습에 당황해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결국 비통함 속에서 춤을 추다 심장마비로 쓰러진 지젤을 알브레히트가 다가가 끌어안으며 1막의 막이 내린다.
인터미션, 2막을 기다리며
지젤은 낭만 발레의 대표작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죽음도 뛰어넘는 사랑의 영원성과 숭고함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낭만주의 시인인 고티에(Gautier)는 사랑의 배반으로 죽은 처녀 귀신들이 밤이 되면 무덤에서 나와 달빛에서 춤을 춘다는 ‘윌리’라는 처녀 귀신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지젤의 대본을 완성했다. 또한 낭만 발레 시대의 최고 작곡가 아돌프 아당(Adolphe Adam)의 음악과 함께 당대 최고의 안무가 장 코랄리(Jean Coralli)와 쥘 페로(Jules Perro)가 만나 1841년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초연한 이래로 지젤은 미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낭만 발레는 현실보다는 환상과 신비의 가치를 추구하는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루게 되고 이러한 영향을 받아 토슈즈와 로맨틱 튀튀(Romantic Tutu, 무릎 아래 길이의 발레복), 파드되(pas de deux, 남녀 2인무), 발레 블랑(Ballet Blanc, 순백의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군무) 등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낭만 발레의 가장 큰 특징이 지젤의 2막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2막
ⓒ Universal Ballet_ Photo by Kyoungjin Kim
2막의 시작을 알리는 오케스트라 연주는 1막과는 전혀 다른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무대 위는 푸른 달빛 아래 스산함이 감도는 숲속의 무덤가로 변해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윌리(처녀 영혼)들의 숲이었다. 로맨틱 튀튀를 입은 윌리들의 군무는 마치 공기 속을 부유하는 듯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달빛 아래, 윌리들이 아라베스크로 교차하는 장면은 정교한 가운데 몽환적인 아름다움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정중동 혹은 동중정의 움직임 속에 묻어나는 특유의 서정성은 그 사연들이 궁금해질 만큼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윌리의 여왕인 미르타의 등장은 공중에 떠서 이동하는 듯한 브레브레 스텝과 함께 섬뜩하고 오싹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Universal Ballet_Photo by Lyeowon Kim
비탄에 잠긴 알브레히트가 백합꽃을 한아름 안고 지젤의 무덤을 찾아온다. 지젤의 영혼은 한 줄기 빛과 함께 나타나 두 사람은 무덤가에서 재회의 기쁨을 파드되(pas de deux)로 표현한다. 한편, 지젤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힐라리온도 지젤의 무덤을 찾아온다. 이에 윌리들은 그에게 저주를 걸어 그가 멈추지 않고 춤을 추다가 연못가에 빠져 죽게 만드는 복수를 한다.
ⓒ Universal Ballet_ Photo by Kyoungjin Kim
윌리의 여왕 미르타는 지젤에게 알브레히트를 유혹해 그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함께 춤추라고 로즈메리 가지를 들어 명령한다. 지젤은 알브레히트를 살려달라고 애원해보지만 통하지 않고, 결국 지젤의 춤에 매혹된 알브레히트는 지젤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알브레히트 역을 맡은 전민철 발레리노가 공중에서 두 발을 교차하는 동작인 앙트르샤 시스(entrechat six)를 보여주자 관객석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지젤은 결국 사랑의 힘으로 알브레히트를 죽음으로부터 끝까지 지켜낸다. 새벽 종소리와 함께 윌리들은 홀연히 사라지고, 지젤도 자신의 무덤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춘다. 지젤의 숭고한 사랑과 희생을 깨달은 알브레히트는 깊은 슬픔의 절규 속에서 백합꽃을 흩날리며 무대의 막이 내린다.
ⓒ Universal Ballet_Photo by Lyeowon Kim
음악 그리고 감정연기
지젤의 작곡가인 아돌프 아당(Adolphe Adam)은 발레로서는 최초로 라이트 모티프(Leitmotiv, 주제 선율)를 도입하였다. 작품 속에는 이러한 주제 선율인 라이트 모티프가 반복된다. 예를 들어, 1막에서 데이지 꽃 점을 칠 때 흘러나오던 선율이 1막의 끝 지젤의 ‘매드 신’에서 변주되어 흐른다. 이러한 변주는 사랑했던 한때를 회상하며 미쳐가는 지젤의 감정과 맞물려 비극성이 고조된다. 또한 2막에서 지젤이 춤을 추다 쓰러진 알브레히트를 구원하기 위해 백합꽃을 들고 춤을 추는 신에서도 이 선율이 변주되어 흐른다. 이처럼 라이트 모티프는 서사와 감정에 따라 변화를 주어 작품의 몰입도와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
2막에서는 윌리들이 춤을 출 때 팔꿈치부터 들어 올려 손끝과 팔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축 늘어뜨려진다. 슬프고 낭만적인 극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이러한 팔의 동작은 감정연기에 섬세함을 더한다. 앞쪽으로 기울어진 상체와 함께 물 흐르듯이 연결된 팔의 움직임은 영원 속에 박제된 슬픔을 묘사하듯 처연하기 그지없다.
사실 발레에서 지젤 역만큼 연기력의 진폭이 큰 작품은 없을 것이다. 지젤 역의 발레리나 홍향기는 수줍은 소녀에서 광기 어린 ‘매드 신’을 거쳐, 윌리가 되어서도 연인을 지키려는 숭고한 사랑의 감정연기를 보여주며 지젤의 감정적 서사를 이끌어갔다. 알브레히트 역의 발레리노 전민철은 특유의 아름답고 섬세한 연기로 철없고 유약한 나쁜 남자 알브레히트를 지젤의 사랑과 구원을 통해 한층 성장하는 진정성 있는 인물로 구현해냈다. 백합을 흩뿌리며 절규하는 그의 마지막 장면에는 그 진심이 담겨져 실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커튼콜
다시 막이 오르자, 객석에서는 브라보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환상적인 군무를 보여주었던 윌리들과 모든 무용수가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주역 무용수인 홍향기 발레리나와 전민철 발레리노가 좌측에서 등장해 관객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전체 무용수들이 함께 인사를 한 뒤 유병헌 예술감독의 인사가 이어졌다. 그렇게 총 네 번의 커튼콜이 이어지는 동안 식을 줄 모르는 박수갈채와 함께 객석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세 번째 커튼콜에서는 더 이상 막이 올라가지 않은 채로 멈춰 있자,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전민철 발레리노와 홍향기 발레리나 두 주역이 커튼 사이로 깜짝 등장해 관객의 환호에 응답해주었다. 이쯤이면 ‘지젤도 여한 없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즈음 공연장을 떠나야 하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커튼콜 인 서울 ①] 벚꽃 흩날리는 4월, '지젤'을 만나러 가는 길 < 커튼콜 인 서울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