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
1967년 개봉한 영화 <안개>는 소설가 김승옥이 1964년 발표한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한 김수용 감독의 작품이다. 원작을 쓴 김승옥이 영화의 시나리오도 썼다. 소설 <무진 기행>이 영화화하면서 타이틀이<안개>로 바뀐 것은 무진이라는 곳이 안개로 둘러싸인 곳이기 때문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등장하는 '무진'이라는 곳이 어디일까? 나는 '무진'이 우리나라 어디쯤에 있는 지명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지명에 '무안'이라는 곳도 있고 '진안'이라는 곳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지도에서 찾아보아도 '무진'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상의 도시 '무진', 각본과 원작을 쓴 김승옥은 영화 <안개>와 소설 <무진기행>에서 '무진'을 이렇게 설명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무진기행 겉표지에도 등장하는 명문이다
안개가 명산물이 될 수 있겠는가? 늘 부옇게 되어서 앞을 분간 못하는 것이 안개이다. 현실도 아니고 현상도 아닌 밝은 햇빛이 쏟아지면 없어지는 안개가 무진의 명산물이라니. 무진의 불확실성, 무진에 사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암시한다. 그 안개는 밤사이에 진주해서 무진을 포위한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들도 안개에 의해서 마치 유배되어버린 것과 같다는 표현. 김승옥만이 쓸 수 있는, 우리 문학사에서 오래도록 기억되는 명문이다. 그래서 일까? 소설 속 위 문장은 영화 안개에서도 나래이터에 의해 읽혀진다. 안개가 자욱한 무진은 전라남도 순천을 가르킬까?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김승옥이 해방후 순천에서 터 잡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 <안개>, 소설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기준(소설 속 주인공 윤희중)이 활약하는 공간은 순천으로 연상되는 무진이다. 고향 무진은 떠나야 할 곳이지만, 서울생활 힘들고 어려울 때 다시 돌아오는 곳이다.
영화 줄거리
제약회사의 사장의 딸과 결혼한 윤기준(신성일 분)은 아내 덕에 그 회사의 상무가 된다. 그는 회사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있다. 회사뿐만아니라 결혼생활에서도 권태기가 찾아왔다. 아내는 윤기준과 달리 결혼한 경험이 있다. 과부가 되어 혼자 살고 있을때 윤기준이 나타나 결혼한 것이다. 영화의 첫 화면에서 펼쳐지는 바쁜 생활은 지쳐가는 윤기준을 도심의 바쁜 일상으로 표현한다. 줄 담배를 피우며 업무를 처리하다가 어쩌다 보이는 사무실 밖의 풍경, 회사 밖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가는 서울은 도저히 정붙이며 살아갈 수 없는 타향이다.
1960년대 후반의 서울은 근대화의 모든 요소들이 넘쳐나는 장소였다.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와 경적소리.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없어 지쳐간다. 아내는 머리를 식힐 겸 서울을 떠나 고향 무진에 다녀오라고 한다.
오너 사장의 딸인 아내는 남편이 무진에 갔다 올 동안, 남편을 전무로 승진시키겠다고 했다. 윤기준은 바다도 농촌도 아니고, 명산물이라곤 안개밖에 없는 무진에 도착한다. 그는 한 때 무진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복잡한 삶을 대변하는 타향 서울을 떠나 다시 고향 무진으로 돌아왔다. 과거 그가 탈출하려던 무진의 안개는 자신을 가려주는 보호막이었을까? 그가 다시 무진을 찾으려는 것은 과거 속물과 같았던 과거 자신의 삶 속으로 돌어가려는 것일까?
서울로 올라오기 몇년 전, 그는 6.25 전쟁에서 징발되기 싫어, 숨어지내는 병역 기피자였고 폐병환자였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다. 영화에서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자신과 조우한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조우하는 장면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면 연출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앞만 향해 내달렸으나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던 허망함을 무진에서는 과거 허물어진 자신과 교차함을 통해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 반추하게 한다. 그곳에서 음악선생 하인숙(윤정희 분)을 만난 기준은 서서히 깨닫는다. 인숙이 과거의 자신이라는 것을...
인숙의 한마디 "심심해서요". 윤기준이 과거 무안에서 느꼈던 허물어진 삶의 외마디 편린이다.
주인공 신성일과 윤정희
윤기준은 고향친구 박 선생(김정철 분)과 함께 무진에서 가장 성공했다는 세무서장 조한수(이낙훈 분)를 만나러 간다. 조한수의 집에는 세무서 직원들과 무진에서 어울리지 않는 어여쁜 여성이 있다. 서울에서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내려온 동네 중학교의 음악교사 하인숙(윤정희 분)이다. 그녀는 현실의 무료함을 달래려는 듯 세무서 직원들과 화투를 친다. 그리고 성악가답지 않게 유행가 '목포의 눈물'을 부른다. 윤기준은 하인숙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윤기준에게 자신을 서울에 데려가 달라고 조른다. 윤기준이 성악가 출신이 왜 통속가요를 부르냐고 하자 하인숙은 속물같은 그들을 싸잡아 비난한다. 안개에 둘러싸인 무진은 꼭 떠나 도피해야 하는 삶의 은유인가.
영화 전반에는 정훈희의 노래 <안개>가 흐른다.
<안개>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 그래도 애타네 그리운 마음/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 안개 속에 외로이 / 하염없이 나는 간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 다오 /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 안개 속에 눈을 따라 / 눈물을 감추어라
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
김승옥이 쓴 가사에 이봉조가 작곡하고 정훈희가 부른 안개. 2022년 박찬욱 감독이 만들어 개봉한 <헤어질 결심>에서도 이 노래는 주제가가 되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 노래를 듣고 노래에 맞는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정훈희를 찾아가 승락을 얻었다. 정훈희가 주제가를 불러주지 않았다면 영화도 만들지 않았을 거라고 한 인터뷰에서 이야기 했다.
이 노래는 하인숙의 테마곡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안개만 자욱한 무진에서 탈출하고픈 음악교사 인숙은 안개 속에서 과거를 회상한다. 자신을 떠난 옛 사랑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를 따라 가고 싶어도 안개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안개에 휩싸여 있고, 자신의 힘으로는 현실을 타개할 힘이 없다.
시나리오를 쓴 김승옥은 어느 인터뷰에서 왜 사람들은 현실이 괴로울 때 고향을 찾는지 의문이 든다고 술회했다. 고향과 안개, 나를 버리고 떠난 연인, 그리고 현실. 서울과 무진이 서로 교차 되고, 안개와 같은 흐린날과 안개가 걷힌 맑은 날이 서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영화는 세련미를 더한다.
이곳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 속물근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윤기준은 전쟁으로 친구들이 죽어갈 때, 자신만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락방에서 몸을 피했고, 무진의 세무서장 조한수 역시 동창들 중 가장 출세한 사람이지만 마음속에는 더 큰 욕망이 꿈틀거려 출세욕이 요동친다. 이곳을 떠나고 싶어하지만 어쩔 수 없어 살아가는 하인숙은 주변의 인간군상을 속물이라고 비난하지만 그도 무진에서 배회하는 그들과 같은 사람일 뿐이다. 그 속으로 윤기준이 들어왔다. 과거 자신에게로의 회귀다.
윤기준은 하인숙을 만나 과거 자신이 생활했던 하숙집을 찾아가 하인숙을 아내라 속이고 정사를 나눈다.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 전무로 승진하여 주주총회에 참석하라는 전보를 받은 윤기준은 하인숙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서울로 떠난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영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단 성인인증을 해야 함)
(2회에서 계속)
[영화로 시대 읽기⑧ ] 김수용 감독 '안개'1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