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화가 열전 ⑦]한국적 인상주의의 꽃-오지호2

by 데일리아트

예술은 생의 절대 긍정의 세계이며, 생명의 실현(實現)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제국주의적 향토색에서 벗어나 한국적 빛을 담은 그림, 조선의 자연과 조선인의 감정적 요구에 상응할 색채를 연구하기에 개성의 자연과 환경은 더없이 좋았다. 원래는 몇 년간만 있고자 했던 개성에서 평생의 벗 김주경과 함께 근 10여 년을 지낸다. 송도고보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조선의 색을 연구하여 한국적 인상주의의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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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향집, 1939, 캔버스에 유화, 80×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따듯한 겨울날 햇볕이 온 화면을 감싸온다. 황색과 흰 벽면에 떨어지는 환상적인 대추나무의 그림자가 그림의 주인공일까. 햇볕 따스한 오후, 대추나무에 걸려 화면 중앙 가득 펼쳐놓은 그림자는 실제보다 더 선명하게 그려졌다.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남보라, 연보라, 청보라, 붉은빛, 노란빛···. 아름다운 그림자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그림자를 위해 그려진 작품은 빛과 빛의 상반작용으로 생성되는 그림자에도 생명의 환희를 조용하고 격렬하게 표현한 삶의 찬미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유행하며 요구되던 ‘식민사관적 향토색’에서 탈피하여 자신만의 빛의 환희로 생명력 넘치는 창작을 이루어내었다.


자신의 미학을 정립해 나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교사로서 후진양성에도 매진한다. 개성이 일제의 간섭이 덜하였다고는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개성 상황도 열악해졌다. 그 와중에도 1944년 창씨개명 반대, 총독부의 전쟁 기록화 정책 반대 등에 앞장선다.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되자 9월 함경남도 단천군 철산으로 피신한다. 당시 대부분의 명망 있는 작가들이 크든 작든 반민족적 친일행각을 벌이거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역했던 것과는 다르게, 민족미술인의 양심적 태도를 보였다.


해방 후 42세의 화가 오지호는 민족미술의 건립을 위해 화단의 중심부에서 애썼으나 정치이념과 권력 다툼의 혼돈 속에서 귀향을 선택한다. 1948년 고향으로 내려가 전라도 광주에 정착하여 강용운 등과 함께 광주미술연구회를 조직하고 1949년에는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부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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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추, 1948, 캔버스에 유화, 91×7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해방 후 미술계가 정치판과 연결되며 혼란스러워지자 귀향 후 광주미술연구소를 조직한다. 광주미술연구회가 주최한 첫 개인전 '오지호화백 작품전'에 출품한 작품.


그것도 잠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10월엔 빨치산으로 끌려간 후 52년 2월 토벌군에게 생포되어 포로수용소에서 수감된다. 20년 형을 구형받으나 무죄판결을 받고 조선대학교에서 1960년까지 재직하게 된다. 어렵고 아픈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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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광, 1960, 캔버스에 유화, 53.5×60.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의 중요한 또 하나의 활동은 그의 '한국어문' 사랑과 교육열이다. 국한문 혼용에 대한 논의가 분분할 때,한국어문교육연구회 활동을 하며 한자 사용의 중요성을 외친다. 스스로 교과서도 만들어 가며 후대 교육에 전념했다. 빨치산으로 있을 때도 아이들에게 한글과 한문 교육을 했다 하니 교육자적 정신을 보여주는 면모다. 안타까운 것은, 얼마 전 막내딸 오순영의 인터뷰 내용이다. "아버지는 화가로서는 100점, 아버지로서는 0점, 아들과 딸의 교육 방식도 달랐습니다. 딸에게는 한자 공부를 하라고 하지 않으셨고 아들에게만 한자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시대가 시대려니 하지만 씁쓸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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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동아일보 1979년 11월 30일 기사 (우) 1975년 한국어문연구회 전남지회를 조직하고 문교부 교과서와 별도로 국어 교과서(1979)를 발행한다. 초등학교 3학년용 국어, 4학년용 국어 교과서.


작품 활동에 열중하면서 국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등도 역임한다. 1973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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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항 풍경, 1978, 캔버스에 유화, 90×64.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74년 유럽 문화여행을 다녀온 후, 1980년에는 아프리카 원시미술 연구 여행을 위해 두 번째 유럽 여행을 떠난다. 1980년 광주는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의 장소이고 그는 광주의 시민이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당시에 그는 유럽 여행 중이었고, 그곳에서 텔레비전 화면으로 광주를 대하며 그 아픔을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귀국하여 절친한 제자들에게 ‘ 그때 너희는 무엇을 했느냐’ 며 질책했다고 한다. 조정권 시인은 애절한 그의 모습을 안타깝게 표현하고 있다.


어디 통곡할 만한 큰방 없소?


조정권



나 일하던 공간 편집실로 찾아온 오지호 화백


수염 모시고 사랑방으로 내려간다.


저 수염, 광주 사람들이 무등처럼 올려다보고 있는 수염


한자 사랑 책 한 권 주시더니


그동안 유럽에서 서너 달 계셨다 한다.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벌써 죽었을 거요,


그 애들과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


어디 혼자 들어가 통곡할 만한 큰방 없소?


수염 부축하며 배웅해 드렸다.


하늘이 살려놓은 저녁해가 인사동 골목길에서


머리 쾅쾅 부딪고 있다.


그는 1982년 5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76세 겨울, 12월 25일에 별세한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화업과 교육, 그것을 지키고자 한 올곧은 지조, 대쪽 같아 쪼개지고 만 부친의 삶도 함께 녹아들어 있다. 화가 이전에 실천적 지식인으로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군부독재 시대를 살아 내며 민족의 스승 역할을 몸으로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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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화실에서 오지호 화백 (우) 늘 자가용 대신 타고 다녔던 화가의 ‘무등’이라는 말이다. 어쩌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평생 삶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화가다. 어떻게 고난과 격동의 시대에 ‘삶의 찬가’만을 그릴 수 있었을까에 대하여 80년대 이후 비평가들은 오지호의 민족미술이 형식에 치중하였을 뿐 농민의 경건한 삶에 대한 애정과, 도시민 애환의 메시지에 대한 진취적인 인식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지호는 일제 강점기 기록화 제작을 거부했듯이 독립적 회화를 추구했다.


구한말 선비 정신을 계승한 부친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의 미학관은 "회화는 태양과 같이 명랑해야 한다. (···) 인간적 고통, 비애, 암흑을 표현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즉,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 수양 덕목으로 그려지던 사군자나 산수화의 개념에 더 합당한 미학으로 보이는 지점이다. 유화로 전통적인 자연관과 미학관을 풀어놓은 것이다. 군국주의 시기 미술이 정치 도구가 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을 가면서 부역을 거부한 점, 해방 후 혼란한 미술계가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자 중심부 화단을 미련 없이 버린 점, 이후 낙향하여 후학을 챙겼던 면모 등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나아갈 때는 어려워하고 물러날 때는 쉽게 한다'는 지조의 실천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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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춘설, 1967, 캔버스에 유화, 100×14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봄에 온 눈은 붓 터치 방향에 하나하나 태양 빛이 떨어져 반사되는 느낌을 준다. 미처 덮이지 않은 노란 연두 풀잎은 아마 한라산이니 조릿대일 수도 있겠다. 노란 연두 풀잎도 황홀한 눈옷을 걸치고 생명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듯하다. 인생 후반부에 작가의 모든 것이 녹아 툭툭 쳐낸 풍경화가 한 폭의 난처럼 다가온다. 힘겨운 시절을 살아 낸 노화가의 해탈한 인생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그의 회화를 현대의 회화 개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100여 년 전의 화가를 오늘의 가치로만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근대기 서양화 2세대로서 일제 강점기 시대의 화풍을 밀어내고 민족미술을 정립했고, 한국의 선비 사상에 서구 인상주의를 소화하여 한국적 인상주의를 꽃피운 화가. 한국 구상 화단의 큰 기둥, 오지호 화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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