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줄거리는 너무도 간단하다. 일상에 지친 주인공이 자신이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무진을 다시 찾지만 그곳에서 또 다르게 자아를 상실한 인간 군상을 발견하고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국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들이다.
어디를 가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과거의 '나'와 줄곧 이야기를 나눈다.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잊고 살았을 뿐이다. 과거는 과거의 미래인 현재를 향해 줄곧 달려왔다. 그러나 과거의 미래였던 현재의 나도 안개 속에서 부유할 뿐이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나'를 용서할 수 있는가? 아니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병치하며 끝없이 자신을 괴롭힌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가 나누는 영화 속 대화를 들어보자!
"이봐 대답 좀 해봐. 난 이제는 감상과 연민으로 세상을 볼 나이는 지났단 말이야. 조한수의 말마따나 백이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론 잘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과거의 나에게 이야기를 하면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째려본다.
김승옥이 접수한 1960년대 중반 우리의 문화계
영화에는 김승옥이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뒤쪽의 좌측 모자 쓰고 있는 사람이 원작과 시나리오를 맡은 김승옥이다.
영화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를 쓴 김승옥은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5년 해방되던 해에 귀국해서 어머니 고향인 전남 순천에 정착한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어릴적 귀국한 탓에 학교에서는 한글을 배우며 자랐다. 일제강점기 일본어를 국어로 배웠던 그 이전의 세대와는 다르게 한글이 자유롭다. 김승옥 이전의 세대는 한국에서 태어났어도 한글이 아닌 일본어를 어릴 적부터 배운 탓에 한글이 낯설었다. 국민학교에서부터 한글을 배워, 한국어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 익숙한 김승옥과 같은 해방 이후 세대를 진정한 의미의 ‘한글세대’라 부른다.
학생회장등으로 화려한 청소년기를 보낸 김승옥은 4·19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0년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에 입학했다. 문학비평가로 활동한 김현, 김치수가 같은 과 동기다. 같은 해 입학한 서울대 독문과에는 소설가 이청준, 문학평론가 염무웅이 있었고 영문과에는 소설가 박태순, 나중에 중앙일보 기자가 된 정규웅 등이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 한 학번 위 1959년 입학생에는 미학과에 김지하가 있었고, 한 학번 뒤 1961년 입학생에는 불문과에는 불문학자가 된 김화영, 영화감독이 된 하길종, 국문과에는 소설가가 된 오세영 등이 있었다.
1960년 전후 서울대 문리대에 들어온 사람들은 문학, 영화, 평론, 학계는 물론 민주화 운동까지 우리나라의 문화적 지평을 넓힌 사람들이다. 그 중심에 김승옥이 있었다.
영화 '안개' 시나리오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2022년 작고한 대표적 지성, 이어령 선생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 강사로 출강했다. 그는 김승옥 글의 참신성을 인정했다. 그 전 1950년대 문인 세대들인 「잉여인간」의 손창섭, 「요한시집」의 장용학 등은 전쟁의 참혹과 풀 수 없는 인간의 처참함에 매우 경도되어 있었다.
그 이전 일제강점기 문인 세대들은 어떠한가? 김동리와 나도향으로 대표되는 '향토성'과 이광수, 심훈 등의 계몽 문학의 한계를 탈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김승옥은 선배들의 이런 문학적 풍토에서 과감하게 탈피해, 매우 감각적이고 순수한 한글 어법을 구사했다.
이어령은 김승옥의 글을 알아보고 당시로서는 최신인 남산에 있는 반도호텔의 방을 빌려 글만 쓰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옆방에 감시인을 붙여 김승옥이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얼마나 그의 글에 매료되었는지 알게 되는 대목이다.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인 문인 김광주는 김승옥의 출현을 보고 우리시대는 끝났다는 자조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무렵에 나온 김승옥의 작품이 「무진기행」(1964), 「서울, 1964년 겨울」 (1965) 등이다. 김승옥 하면 떠오르는 수식어, '감수성의 혁명'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그는 시사만화가로도 유명했다. 『한국일보』의 자매지 『서울경제신문』이 1964년 창간됐다. 김승옥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성북동에서 입주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그 집이 넉넉하지 않아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에 다른 일을 알아보았다. 마침 『서울경제신문』의 창간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그린 연재만화 샘플과 함께 '본인에게 그리도록 해달라'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편집국에서 합격통지를 받고 시사만화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창간 당시 4쪽 만화 <파고다 영감>을 김승옥이 연재하기 시작했다. 만화 연재 시 필명이 '김이구'다. 본인의 순천 고향의 주소 29번지를 필명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는 영화에도 진출하여 <장군의 수염>으로 대종영화상 각본상을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동인의 동명 소설 <감자>를 직접 감독하기도 했으니 정식 영화판에 뛰어든 것이다.
영화감독으로 촬영 중인 김승옥
'영자의 전성시대' 영화 포스터
영화 <감자>는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아 프랑스 르몽드지에 소개될 정도였다. 그런데 아내의 반대가 필사적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는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그만두라고 남편을 설득했다. 그래서 「겨울여자」, 「영자의 전성시대」, 「장군의 수염」 등 시나리오 쓰는 일에만 전념한다.
그러나 원고 쓰는 일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월간잡지 『샘터』의 편집부에서 일했고, 후에는 세종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도 재직했다. 동료 소설가 이문구의 타계 소식에 충격을 받아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했다. 1980년대 초 『동아일보』에 『먼지의 방』을 연재하던 도중 신군부의 검열에 항의하며 연재 15회만에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는 소설가로, 만화가로, 영화감독으로, 시나리오 작가로 종횡무진 활동했으니 '김승옥의 시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 영화 산업과 영화 <안개>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다. 영화는 대중들이 가장 쉽게 문화를 접하는 매체였다. 영화인들의 메카 충무로는 프로듀서와 지방 흥행업자, 감독과 스탭, 그리고 스타와 스타를 꿈꾸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려 우리나라 영화 황금기를 구가 했다.
1960년대 만든 총 영화편수는 무려 1,500편이 넘었다. 1962년에 이미 100편을 훌쩍 넘더니 1968년에는 200편이 넘게 개봉되었다. 국민 1인당 평균 관람 횟수도 1964년 3.8회, 1965년 5.4회, 1968년 5.7회를 기록했다. 서울의 경우는 1964년 13.94회, 1965년 17.22회, 1966년 18.45회에 이르렀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매월 한 편 내지 두 편의 영화를 보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영화 <안개>가 만들어졌다.
<안개>는 김승옥이 시나리오를 맡았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김동수, 황혜미라는 엘리트 커플이 제작을 맡았다. 그래서 영화는 스토리 중심의 전개에서 벗어난 플롯과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병치하는 구조를 통해 영화의 모더니티를 확보했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영상 미학의 시도로 한 공간 속에 두 개의 시간을 흐르게 하는, 당대로서는 신선하고 세련된 연출 기법을 구사했다. 과거로 돌아가는 '플래시백'과 영화에서 주인공의 독백체 형식인 '보이스 오버' 기법이 영화 전편에 흐른다. 김승옥이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만든 작업이지만 그해 13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아 흥행을 견인했다. 1960년대는 내용면에서도 큰 발전을 했다. 유럽을 강타한 영화 사조 '누벨바그'(nouvelle vague, 195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젊은 영화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영화 운동)가 우리나라에도 상륙해 영화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남녀 주인공 - 신성일과 윤정희
영화 '안개'의 포스터
영화 '안개' 스틸 컷
신성일은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미남이자 최고의 인기 배우로, 이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미남 배우였다. 외국 유명 배우가 알랭 들롱이라면 한국에는 신성일이 있었다.
전성기에는 하루에 네 편씩 겹치기로 출연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가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는지는 본인을 포함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대략 524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 추산한다. 1960년대 출연료가 보통 배우가 18,000원이었는데 혼자 45만원을 받을 정도였고, 출연료가 너무 많아 돈을 자루에 담아 집에다 갔다 주었다고 한다. 영화인들 중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냈다.
윤정희는 이 영화로 신인상을 받는다. 윤정희의 본명은 손미자다. 남정임, 문희와 함께 1960년대와 1970년대 대한민국 여자 영화배우 트로이카로 불린다. 젊은 여배우가 맡는 역할은 '청순가련형'과 '요부형' 인데 윤정희는 여기에 백치미까지 능숙하게 소화해서 모든 배역을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초 문희와 남정임이 은퇴한 반면 윤정희는 결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다가 1976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했다. 부부 금슬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66세였던 2010년에는 영화 <시>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두 배우는 전성기 남녀 주인공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들이 남녀 주인공으로 함께한 작품중 마지막이 1992년 영화 <눈꽃>이다. 이 작품은 신성일과 윤정희의 99번째 공연작이다. 이제는 수없이 많은 작품에서 종횡무진했던 두 배우를 볼 수 없다. 영화 <안개>를 통해 풋풋했던 두 배우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성인 등록 후 무료감상 가능하다. 아래는 주제가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