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1994, 찜통 속의 여름
1994년 여름. 백 년 만의 더위라는 말이 뉴스마다 흘러나오던 시절이었다.
교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선풍기 하나. 그 바람은 더위보다 먼지를 먼저 흩날렸다.
연필을 잡은 손등을 타고 땀이 흘렀고, 더위에 지쳐 졸린 눈으로 필기하다 보면
어느새 공책에 글자가 아닌 하나의 추상화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했고,
졸다 흘린 침으로 공책은 금세 눅눅해졌다.
그리고 종이 위에 번져 가는 글씨는 내 마음속 불안을 닮아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누군가는 양동이에 물을 담아 교실 바닥에 뿌렸다.
물을 맞은 시멘트 바닥은 금세 증발하며 하얀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잠깐의 시원함 속에서, 우리는 다시 연필을 잡았고, 다시 칠판을 바라보았다.
남자학교라 가능했던 풍경도 있었다.
선생님의 ‘특별한 배려’라며 교복 바지를 벗고,
반바지나 사각팬티 차림으로 수업을 듣던 여름.
창문 틈으로 드나든 바람 한 줄기에 허벅지가 시원해 오면,
우리는 해방이라도 된 듯 잠깐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금세 사라졌고, 다시 버텨야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더위보다 무거웠던 건,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였다.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되면 교실은 또 다른 여름을 맞았다.
눅눅한 공기와 형광등 불빛 아래 나방과 벌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을 견뎌내어야 하는 심적 부담이 우리의 어깨를 짓눌렀다.
곧 대학, 그리고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
그리고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한 진로의 갈림길이 내 안에서 경쟁하듯 나를 괴롭혔다.
나는 오랫동안 신부가 되는 꿈을 품고 살았었다.
이웃과 평생을 함께하며 헌신하는 삶. 그것은 나를 지탱해 주는 빛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으로 나아가 더 많은 것을 해보고 싶다는 갈망도 컸다.
두 꿈은 서로 충돌하며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내가 이제는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두려웠다.
그럼에도 나와 우리는 숨통을 트는 법을 알고 있었다.
야자시간, 누군가 책상을 두드리며 리듬을 잡으면 곧장 ‘우리들만의 콘서트’가 열렸다.
노래를 좋아하던 친구가 밀대 자루를 잡고 목이 터져라 스틸하트의 「She’s Gone」을 부르면,
교실은 순간 공연장이 되었다.
땀 냄새와 분필 가루가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열광적인 환호로 가득 찼다.
그리고 또하나의 해방구
야간자율학습 짧은 20분 쉬는 시간,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매점에서 먹던 300원짜리 단무지가 고명으로 올라간 우동 한 그릇, 집에서 가져온 양은 도시락 식은밥에 무말랭이 반찬, 컵라면 하나에 우리는 정을 나누며 행복을 느꼈다.
주 5일제가 도입되기 전,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야 겨우 맞이하던 휴일.
(지금은 상상조차 어려운 학교 풍경이다.)
일요일이면 저마다 취미생활이나 종교생활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는데,
나는 성당에서 일요일을 온전히 친구들과 신부님과 함께 신앙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미사를 마친 뒤 또래 이성 친구들과 함께 들르던 패스트푸드점.
시골이라 패스트푸드라 할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달라스 햄버거 매장’은 그 시절 소중한 만남의 장소였다.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들은 음반 가게에서 카세트테이프를 사고, 삼성 마이마이, 아이와, 소니 워크맨으로 음악을 들으며 저마다의 꿈을 키워갔다.
(건전지 아끼려고 테이프 되감기를 볼펜에 꽂아 돌리던 시절^^)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우리에게 학교는 단순히 더위를 피하는 장소도, 공부만 하는 곳도 아니었다.
때로는 공연장이었고, 때로는 작은 휴식처였으며,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무대였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울고 웃으며, 우리는 또 다른 계절과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