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들어가며
아주 오래전부터 존 레논의 「Imagine」의 가사에 매료되어 그 가사 내용으로 철학적 탐구 형식의 세상 읽기를 글로 써보자고 다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매번 마음뿐이었지 쉽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 이유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존 레논의 전기적 사실들이 평화와 인류애를 노래하는 가사내용과는 달리 너무도 폭력적인 과거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평화의 전도사처럼 행동하며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무정부주의자 존 레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격적인 측면에서 결격사유가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었다. 오노 요코라는 일본 여성인 행위예술가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설의 비틀즈 멤버로만 기억될 뿐, 탐구의 대상이 아닌 존재로 남을 뻔했다. 그리고 레논의 전기적인 사실들은 인터넷 위키피디아에 링크해서 보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 글의 목적은 한 개인의 서사적 삶을 평가하는 평전을 쓰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기록에 의하면 젊은 시절 존 레논은 폭력을 일삼고 심지어는 남의 돈을 빼앗는 절도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은 비판의 대상이지만, 그러나 그가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우한 가정환경의 비행청소년으로 범죄까지 저지른 사실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불법적인 행위 이외에도 치명적인 흠이 많다. 여성 혐오자에 가까운 마초였고, 또 잦은 외도도 일삼았으며, 영혼의 동반자였던 행위예술가 오노 요코와의 관계 역시 불륜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존 레논을 사랑과 평화의 전도사로 명명하기에는 너무도 큰 결격 사유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존 레논의 청년기와 한 시대의 문화 아이콘으로 성장한 비틀스 전성기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 행위예술가인 오노 요코와의 만남 이후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사랑과 평화를 노래한 「Imagine」의 가사 내용에 나타난 의미를 21세기의 사회 현실에 비추어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보고자 하는 하나의 실험적인 도전이다.
사실 존 레논의 사람 됨됨이로 고려해 볼 때 일고의 가치도 없는 모순된 작업처럼 보이지만, 따라서 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짓거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Imagine」의 가사내용은 존 레논의 모든 결격사유를 덮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있다. 아니 존 레논의 그것은 좌파 이데올로기가 무기력하게 소멸해 버린 이 시대에 바쿠닌이나 그람시는 물론 안토니오 네그리와 박노해의 저작들을 다시 읽고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ChatGPT를 비롯한 디지털 이념이 보편화된 알고리즘 만능의 금융자본시대에 혹은 자본의 생산력이 진리처럼 간주되는 불평등의 시대에 사랑과 인류애를 노래하는 존 레논의 「Imagine」은 엄혹한 이 시대를 길항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영웅으로 평가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담겨져 있는 영상을 보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마치 지젝이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매트릭스』를 가지고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저서를 만들어 가상현실과 실재세계 사이의 거리를 심도 있게 논의했던 것처럼, 존 레논의 「Imagine」은 이 시대가 거부한 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우리 시대, 즉 21세기의 진리와 정의의 문제를 완곡하게 비판·성찰하게 만드는 위대한 역작이다.
우리 시대의 평등은 어떤 문양을 만들어야 하는가? 21세기를 관통하는 자본의 윤리는 어떤 인간학을 구비할 때 참된 자유를 실천하는가? 사랑과 평화와 인간애가 실현된 상상의 세계는 과연 우리 눈앞에 현전의 형식으로 전유할 수 있는가?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고, 누구나 다 마음의 길을 열면 조만간 가까운 미래에 아름다운 인륜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요청되고, 진실에 관한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참구 된다. 다시 말해서 존 레논의 「Imagine」은 ‘제발please’라는 감탄형의 요청이 생략된 채 이 세계를 향해 진실의 전언들을 토로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성의 이념을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예리한 역설의 칼날이다. 우리는 왜 사랑하지 않는가? 왜 인간학은 이데올로기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늘 자기 합리화를 일삼는 불평등의 굴레 속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가? 존 레논은 제발 현실을 제대로 보고 더불어 함께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존 레논의 「Imagine」은 상상의 세계 속에서 사랑과 평화가 가능하며 그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물론 노랫말에 언표 된 일련의 서사적 행위가 그리 쉽게 실천될 수 있는 구성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따라서 존 레논의 그것은 말과 실천 사이에 채울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 절망의 심연에 당도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어찌 그것을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전망이라고만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함께 실천하면 곧 이룰 수 있는 이 세계의 진실이다. 따라서 존 레논이 꿈꾸며 상상하는 세계는 실현 불가능한 몽상의 세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간직해야 할 이 시대의 마지막 소망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내일의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선언한 스피노자처럼, 존 레논의 그것은 우리 모두가 상상해야 할 이 세계의 필연적 삶의 실제적인 형상이자, 반드시 실현시켜야 할 당위의 세계, 즉 상상력이 직조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의 모습이다.
우리 다 함께 그곳으로 가 사랑과 평화의 주체가 되기를 기원해보자. 존 레논이 「Imagine」에서 ‘It's easy if you try.’말한 것처럼, 그 사랑과 평화의 길은 그리 어렵지 않고 쉬우며 우리 모두 함께하면 지금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제발 우리 함께 그 대열에 들어서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어보자.
1. 상상력의 유토피아적 지평 혹은 그 정반대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의 바둑계를 월등한 실력으로 접수한 이후 알고리즘의 신화는 단지 허구만이 아니라 이 세계를 보다 편리한 방향으로 체계화하여 디지털왕국, 즉 유토피아로 만들 것이라 예견하고 있고 점점 그것을 구체화해 가는 경향이 있다. 조만간 빠른 시일 내에 강인공지능, 즉 AGI가 보편화되어 인간계의 모든 영역을 대리하는 것은 물론 온 세상을 알고리즘의 체계로 완벽하게 재편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밋빛 전망과 달리 정치경제학적인 현실 세계는 극단적인 부익부빈익빈 현상으로 인해 불평등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풍조가 만연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구조적으로 부패한 제도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체·개혁하지 못한 채 자본의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자본은 유토피아를 여는 초석이다. 언론과 광고를 장악한 자본의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데, 이미 물신의 위치를 점유한 자본은 그 자체로 인간학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상징의 체계로 고양되는 것은 물론 이 세계를 기획하고 조정하는 절대 심급으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돈은 불능을 가능으로 만들고 무능을 유능으로 전복하는 실질적인 주체이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키 역할을 하고 있다. 잉여를 탈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추악한 모습을 철저하게 은폐시킨 채 탈법이나 편법을 자행하면서 불평등의 문제를 교묘하게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게 만든다. 가난은 국가가 책임질 수 영역이 아니라고 한다. 더 나아가 가난은 개인의 근검절약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사안이지, 결코 사회 전체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고 호도하고 있다.
모든 것이 전도 왜곡되고 기묘한 참극을 연출한 채 불평등이 사회의 한복판에 자리하게 된다. 왜 그런가? 왜 인간학적 세계는 평등을 제도화하여 아름다운 인륜의 세계를 만들지 못하는가? 왜 이 세계는 반목과 질시를 적대감이라는 감정으로 고양시켜 혁명의 깃발을 올려야만 했는가?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그대 아직도 가까운 미래에 유토피아가 펼쳐지리라 믿고 있는가? 팍스 로마나도 팍스 아메리카나도 한낱 허구일 뿐, 이 세계는 평화라고 선언된 시대에도 늘 전쟁 중이었고, 인민은 가난과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후기산업사회, 특히 21세기 거대자본의 문명사회조차 늘 전쟁의 와중에 있고, 기아와 난민들이 넘쳐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ChatGPT와 AGI가 상용화된 알고리즘 신화의 시대는 불평등이 제도로 완벽하게 정착한 시대이자, 그와 정반대로 불평등이 시대를 정의하는 진리명제로 추앙되는 자본 중심의 체제를 더욱 더 공고하게 만들 것이다. 인정하기 싫고 기분 나쁘지만, 점점 더 그러한 방향으로 현실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고도의 산업사회로 진입한 21세기가 20세기에 비해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 행복과 평화를 제도화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제반 물질적 환경이 더 나아진 것 같기는 하지만, 고도의 자본주의 정책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자본의 전략에 휘말려 점점 사회가 퇴보하여 보수주의적으로 경화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존 레논은 「Love」, 「God」, 「Imagine」이라는 대중가요 세 곡으로 인간학적 현실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반성·고찰하는 것은 물론 진정한 삶의 의미로서의 사랑을 설파하며 무정부주의적인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이들 노래 중에 「Imagine」이 독보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데, 이는 팝의 역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전무후무한 사건성을 내포하는 노래라 하겠다.
「Imagine」은 무심하게 흘려듣는 그렇고 그런 낭만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를 향한 잔잔한 외침이자, 이 세계가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설교한 하나의 정언명령이다. 노래의 시작은 Imagine, 즉 ‘상상해보자’라는 완곡한 청유형의 명령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리듬은 그리 강렬하지도 않고, 존 레논 역시 가사 말 외에는 임팩트가 거의 없이 담담한 어조로 읊조리듯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가롭다 못해 평화롭기까지 했고,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몽상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대저 상상력의 유토피아적 전망은 무엇을 지시하며 우리는 왜 유토피아라는 환상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아니 존 레논이 상상해 보자라고 요청하면서 그려낸 상상의 세계상은 과연 이 세계 속에서 실현 가능한 서사적 국면인가? 실천 가능한 것 같기도 하고, 영원히 불가능한 인류의 오래된 간절한 소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존 레논이 열망한 유토피아적 전망은 인간은 무엇으로 살 때, 혹은 평화와 행복을 어떠한 방식으로 제도화할 때, 우리 인류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맞닿아있는 것 같다. 따라서 문제는 삶이 지향하는 의미와 그것의 목적인 것 같은데, 과연 21세기 디지털 천국의 세계 속에서 존 레논이 열망했던 담론적 사유는 어떤 이념적 현실을 지시하는가? 존재의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모든 길이 참된 평화와 평등의 길로 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Imagine」이 추구하는 최고의 지향 가치가 무엇인지 좌표계를 설정하는 것은 물론 그것이 21세기 현실에서도 유효한지를 묻는 지적 행위라 하겠다.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자본주의가 정당한지 상상해 보자. 아니 우리는 자본의 길이 정당한지 반드시 물어야 하고, 그것이 인간학을 위한 최적의 함수인지 진단 평가를 내려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간학은 자본과 욕망의 길을 따라서 전쟁을 서슴없이 저질렀으며, 마침내 이 세계는 분열의 극단에 이르게 만든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피맺힌 미사일 융단폭격이 자행된다. 아마 악의 제국의 형상이 있다면 저와 같을 것이다. 전자는 지배와 예속을 위한 전쟁이고, 후자는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인류 역사 이래 최악의 살육 현장이다.
지구 한편에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 즉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고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패권분쟁, 즉 욕망하는 자아의 국수주의적 이기심을 서사화하는 두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대립에 분열을 더해 이 세계는 이해관계로 얼기설기 얽혀 한시도 편할 날이 없다. 물론 상상의 세계는 현재 사실의 반대를 지시하거나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을 서사화하는 것이겠지만, 따라서 존 레논이 언표한 상상의 유토피아적 지평은 한 번도 실천된 적이 없는 인간학적 소망을 서사화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그것이 도저히 갈 수 없거나 실천이 불가능한 세계라 말할 수 있겠는가?
엄밀하게 말해서 상상의 유토피아적 지평은 환멸의 세계상을 반조하는 알레고리적 사태를 반어적으로 그려낸 이상세계에 대한 전망이겠지만, 이는 미학적 이념, 즉 새로운 미적 형식을 창조하는 가장 아름다운 의식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여 비실재를 실재의 영역으로 고양시키는 곳에 상상의 유토피아적 지평이 비로소 현전의 모습으로 새롭게 개현 된다. 이는 광기의 나날들을 보낸 천재 예술가의 비극적 삶을 승화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후에 비로소 가능한 미적 경지이자, 이 세계 전체를 아름다움의 서사로 묘사하는 신세계의 울림이다. 특히 존 레논이 「Imagine」에서 전개한 일련의 서사가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데, 그것은 불우한 유년시절의 고통을 아름다운 이념으로 고양시켜 유토피아적 전망을 구체화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Imagine」의 가사를 떠올리며 유토피아가 실현된 사회를 상상해 본다.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꿈과 이상을 꿈꾸는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한다. 아름다운 몽상이었고, 이 세계가 인륜성이 실현되는 숭고의 장소임을 확인하게 된다. 천장이 이루어지는 티베트의 어디쯤을 떠올리다, 문득 갠지스강의 바라나시 화장터에 당도해 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묻는다. 어떤 삶이 이 세계에 와있는 동안 최적의 상태인가? 대저 인간학이란 어떤 의미를 추구할 때 평화를 제도화할 수 있는가? 미지의 의미가 상상의 기호로 발화되어 희망의 서사를 구축하게 된다. 아마 그것이 행복을 제도화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이거나 너와 내가 지향하는 공동의 목적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진리의 진실을 눈앞에 가져와 평화와 행복을 제도화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모든 제도는 실패로 휘어져 있고, 이념은 늘 실험의 과정 중에 있기에, 너와 내가 시간의 여정 속에 이룩한 삶의 현실은 미완의 과제를 남겨놓은 채 미래로 흘러가 더 나는 삶을 기획하도록 열려있다. 마치 「Imagine」의 서사적 구성물이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해 하나―되기를 요청했던 것처럼, 현재의 삶은 미래의 삶으로 올 그 누군가를 위해 무한책임으로 열린 사랑의 영원한 확장이다. 그러므로 존 레논이 몽상한 상상의 세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낯선 미지의 장소이거나 삶이 경험할 수 없는 신세계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반드시 실천해할 숙명의 과제이자,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 되어 만들어가야만 하는 필연의 길이다.
존 레논의 시적 상상력이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유토피아적 전망을 노래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실천의 의지를 통해서 이 세계를 개선해 나아가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존 레논의 전기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반전과 평화에 대한 열망은 정신적인 동반자였던 오노 요코의 영향하에 형성된 것이라 추측되지만, 어찌 레논의 그것이 아름다운 세계 만들기의 참된 전형이 아닐 수 있겠는가?
레논의 그것은 마르크스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고, 그람시와 네그리가 외쳤던 실존적 열망이 담긴 삶의 간절한 구호이다. 우리 모두 다 상상 속에서 꿈과 희망이 가득한 아름다운 서사를 구축해 이 세계 전체가 행복을 제도화하는 광경을 그려보자. 이를테면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을 만들기 위한 상상력의 유토피아적 지평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계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상상력의 선순환, 즉 평화와 행복과 인류애를 실천하고자 하는 소망은 그 자체로 인간의 마음을 순치시켜 우리 모두가 ‘We are the World’를 외치며 사랑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갈 신기원을 형성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늘 이중적인데, 이는 환멸과 이상 사이의 거리 어디쯤에 사람의 서사가 육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몽환에 휩싸인 채 꿈을 꾸며 아름다운 세계를 몽상하거나 아니면 지구 종말을 예언하는 아마겟돈의 어디쯤에 당도해 몰락의 현실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어쩌면 인간학이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 시간을 허비하는 운명의 타자일지도 모른다. 하여 대부분의 인간학적 현실은 망상과 환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다 존재의 자리를 잃어버리거나 현실에 안주한 채 혹은 수동적인 태도만을 일관한 채 아무런 변화도 요구하지 않게 된다.
존 레논의 「Imagine」이 의미 있는 것은 비록 그것이 상상의 세계에서 일지언정, 인류가 포기한 사랑과 평화를 제도화하기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사의 첫 단어 Imagine은 노래의 제목이자, 모든 서사가 시작되는 의식의 지점, 즉 인류 전체가 지향해야만 하는 참된 가치를 상상하게 만드는 인류학적 상상력의 원천인데, 이는 이 세계를 개조시킬 참된 시작이다. 상상은 하기 나름이며 선한 상상 속에서 인간은 지상 최대의 행복을 맛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상상력의 힘은 동일하게 무한하고 방향만 다른 두 대극의 지점 위에서 펼쳐지는 역동적인 운동인데, 이는 선과 악 사이에서 빚어지는 존재론적 운동, 즉 마음의 길이 내놓은 방향성에 따라 이 세계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마음의 오묘한 이치와 정확하게 대응된다.
무엇을 상상하건 인류 최대의 목적은 행복이며 모든 문제는 행복을 파괴하는 일련의 사태, 즉 전쟁을 비롯한 폭력적 행위로부터 비롯하게 된다. 따라서 삶은 행복이라는 함수를 어떠한 방향으로 설계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양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며 결국 상상력의 선한 영향력은 모든 개혁의 출발점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저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인간학적 바람을 구체화한 상상의 가치는 어떠한 형태를 띠고, 왜 인간학은 항상 상상 속에서만 신세계를 열망하며 밝은 미래를 꿈꾸는가? 무엇인가를 상상한다는 것은 이미 있거나 관행처럼 굳어진 것을 깨부수고 해체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존재의 기운이리라. 사회적 관성이 지배하는 체제가 부정된다. 아마 새로운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기존의 관행에 저항하거나 클리셰를 거부하는 새로운 기호의 운동일 것이다. 따라서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하지 않으면 진보도 없고 발전도 없다. 역으로 진보와 발전은 사회적 관성에 저항하며 새로운 존재의 길을 모색하는 새로운 상상적 지평이 만들어 내는 신기원의 열림이다. 말하자면 존 레논이 상상 속에서 발견한 일련의 서사적 양태는 이 세계에 없거나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상상하는 능력으로 구성해 내는 것인데, 이는 마르크스와 함께 꿈꾸었던 미완의 서사이다.
다시 말해서 상상력은 벡터, 즉 운동력은 전 방위적으로 무한하고, 방향이 미정형인 상태에 놓인 물리력의 총체적 현실성을 의미하는데, 어쩌면 그것은 인간학의 모든 의미가 결정되는 존재의 참신한 태도이다. 하여 상상의 세계는 어떠한 방향성이 주어지느냐에 따라 그 양태가 천차만별로 나타나게 된다. 행복을 제도화하여 우리 모두를 유토피아로 이끌어 가느냐 아니면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여 철저하게 개인의 욕구충족에 기여하느냐에 따라 이 세계 속의 삶이 결정된다. 물론 존 레논의 그것은 인류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평화와 사랑을 제도화하기를 열망하고 있고, 이는 이제까지 인류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인륜적 가치를 실현하는 숭고의 어디쯤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따라서 상상력은 개연적으로 존재할 것 같은 불가능한 허구적 현실을 실제의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변화의 계기, 즉 이 세계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재 이 세계 속에서 삶은 저와 같다. 부자는 부의 세습을 통해서 영원히 재벌이 되고, 빈자는 대대로 가난을 대물림하여 노예처럼 산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강력한 상상력의 태풍이 불어와 이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척결하여야 한다. 그것은 필연이고, 인류사를 통틀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당위의 과제이다.
다시 되묻는다. 이 세계가 평등한가? 그리고 우리는 행복을 제도화할 수 있는가? 우리는 내가 너를 불러 ‘우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랑의 상호타자인가? 존 레논의 「Imagine」은 그것이 상상 가능할 뿐만 아니라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고, 미래의 언제가 하나―되기에 성공하여 함께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고 그것을 실천하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듯,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상상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변화는 상상하기를 멈춘 순간, 불평등으로 고착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착취를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후안무치의 세상이 될 것이 때문이다. 늘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마치 한유가 「취옹정기醉翁亭記」에서 중취독성衆醉獨醒(모든 사람들이 다 취했어도 홀로 깨어있으라)을 강변했던 것처럼, 우리는 한시도 태만하지 말아야 하며, 더 나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로서로가 협력해야 한다.
우리 다 같이 상상 속에서 아름다운 세계를, 평등과 평화가 이루지는 세상을,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인륜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꿈을 꾸자. 그리고 이것은 인류가 꿈꾸어야 할 당연한 권리이지, 진보니 보수이니 하는 논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평화와 평등을 노래하는 서사가 어찌 진보니 보수니 하는 논의의 대상이 되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인간 사회가 꿈꾸고 소망해야 할 당연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다.
2. 천국이 없는 세상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봐요. 한번 해보면 쉬울 거예요.)
칠흑 같은 어둠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반계몽 상태이거나 아직도 마나적 주술에서 휩싸인 채 이 세계 전체를 신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혹에 빠졌지만, 행복을 온몸으로 느끼는 시대이거나 아니면 야만이 횡행하는 인간 노예의 시대일 것이다. 아마 그/녀들은 절망에 도달했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방법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모든 것이 전도된 채 인간학 전체를 호도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혹세무민의 세상이 되었으리라. 이도 저도 아니면 무수한 해석의 갈등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으며 목숨을 거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리라.
서사학적 진실이 봉인된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세계가 삶을 지배한다. 더불어 모든 앎이 미완으로 귀결되거나 유예된 채 항상 삶에 속한 모든 것들을 불확실성에 기대게 만든다. 인간학의 배후에 천국이라는 상징적 장치가 선험적으로 가정이 되어 있는 한, 이 세계는 영원히 진실 앞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천국은 모든 고통을 감내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실존의 참된 의미를 희석시키거나 무의미하게 만드는 궁극적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 시공간은 의미의 절대성이자, 진실이 육화 된 진리의 장소이다. 그러나 문제는 가공할 공포의 권력으로 중무장한 천국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모든 진실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균열을 봉합할 수 있는 유일한 시적 장치, 즉 상징적 장치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길한 듯 매혹된다. 아니 유한한 생명의 형식이 자연과의 경쟁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서사적 장치이자, 삶이 만들어낸 공포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자구책이다. 열광한다. 그러나 문제는 천국이라는 상징적 구성체는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실물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천국이라는 서사적 장치는 모든 기만이 발생하는 최악의 장소이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지성사 전체가 붕괴되는 것은 물론 종국에는 인간학 전체가 파국에 당도하는 비극을 체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추구하거나 탐구하는 일체의 행위가 저 위대한 상징 앞에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학은 섭리라고 호명되는 미증유의 힘 앞에 휴지 조각처럼 조각조각 해체되거나 무의미한 기호로 남게 되는데, 어쩌면 그것은 앎의 의지 전체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가장 나쁜 서사적 장치일지도 모른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말한 것처럼, 천국이라는 막강한 무기는 이 세계를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주인의 도덕을 망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늘 한 발 물러서서 수동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노예의 도덕만을 양산하게 된다. 물론 그/녀들의 삶의 방식이 진리라고 호명되는 빛의 전언으로 인해 절대 행복의 주체처럼 간주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지만, 어찌 그것이 엄밀한 의미의 이성중심주의라고 명명될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 예정조화와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천국이라는 상징적 장치는 분열의 원인이자 이 세계를 무수한 전쟁으로 이끌게 되는데, 이는 전도된 사랑의 역설적 징후이다. 어찌 천국이라는 장치가 미움이나 증오의 상징으로 전복되어 무수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겠는가?
종말론이 대유행을 했고, 천국으로 가는 좁은 문을 열기 위해 이승의 삶을 가차 없이 버리는 집단 자살이 횡행했으며 마침내 그 모든 히스테리칼한 편집증적인 죽음이 구원의 상징으로 전도되기에 이른다. 이 세계가 미쳐 돌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데, 유한한 생명을 무한한 영원으로 고양시키기를 염원하는 반이성적인 행동을 절대 진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Heaven's Gate사건이 함의하는 알레고리적 사태는 무수한 반어적 진실을 이 세계에 흩뿌렸을 뿐만 아니라, 천국이라는 진리에의 믿음을 통해 삶의 의미와 진실을 너무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이비종교의 엽기적인 현상은 인간학적 진실 전체가 왜곡되는 가장 나쁜 사례인데, 이러한 사태는 결국 인간학이 천국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채 늘 부조리를 행할 수밖에 없는 한계상황에 노출되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을 아득하고, 간절한 삶의 기도는 영원을 넘어서지 못한 채 미혹에 갇힌다.
아니 그와 정반대로 천국의 문 사건은 유일하게 진리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지고한 인간의 헌신이자, 삶의 의미를 죽음으로 봉합하는 숭고한 노력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죽은 자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녀들은 생명을 담보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확신 하에 집단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자행하지만, 따라서 그/녀들의 욕망이 죽음까지 파고드는 영생에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학적 열망을 너무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어찌 그것이 진리의 진실을 펼쳐 보이는 방법이겠는가? 다시 살아 돌아와 천국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또다시 진리가 천국의 문 바로 앞에서 봉인된다. 우리는 모르는 사실 앞에 침묵해야 하며 나아가 진실을 왜곡하게 된다. 까닭은 천국을 위해 집단자살을 한 그/녀들의 신념이 생명의 형식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내일의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를 것이고, 우리는 언제나 오욕칠정의 세계에 빠진 채 그렇고 그런 오늘을 늘 같은 방식으로 보내게 될 것이다. 애석하게도 영원에의 의지를 간직한 채 천국의 문을 넘어선 자들은 그냥 광기 속에서 죽어간 어리석은 사이비 신도일 뿐이다.
생명의 형식은 저와 같다. 생명은 차이와 반복이 빚어낸 동일성의 운동일뿐,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현재와 마주 선 채 맹렬히 소멸하는 존재의 운동에 지나지 않다. 따라서 천국이라는 관념 자체는 모든 미망이 발생하는 미혹의 장소이자,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갈등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개념은 인류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최후의 상징, 즉 무한한 해석으로 열린 미결정성의 최후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이라는 개념에 의해 인간학적 사태들을 고밀도로 압축·굴절시켰으며, 마침내 너와 나 사이에 상호 매개할 수 없는 거대한 균열을 의식의 심연에 심어놓게 된다. 문명의 그늘 혹은 갈등과 대립의 나날. 말하자면 천국의 전유적 이해가 빚어낸 문명의 충돌 양상은 천국에 대한 이해가 만들어놓은 문화의 심연인데, 이는 치유 불가능한 인류의 치명적인 상흔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이 천국이라는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도 일고의 죄의식이 없는 신들의 대리전의 연속이었다. 아니 그것은 영혼을 걸고 하는 죽음의 전쟁이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절멸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이 되지 않는 최악의 전쟁이다.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명명되었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최악인 것은 혹은 변증법적 통일이 만들어낸 가상이 거짓인 이유는 그/녀들 양자 모두 사랑의 이름으로 치르는 성전의 양상으로 문명 간의 충돌을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증오로 변질되어 인류의 멸망을 초래하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천국 어디에도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반어적으로 증명하게 된다. 아마 천국이 없다면, 혹은 천국이라는 상징의 체계를 낱낱이 해부해 그 의미의 실재를 명명백백하게 드러내 보일 수만 있다면, 이 세계는 좀 더 평화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국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일 방법이 없고, 또 그와 정반대로 천국의 서사학 전체를 폐기처분할 묘책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학은 천국의 서사와 그것의 타자가 상호 변주하면서 무지를 앎의 과정으로 전복하는 유한한 생명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한한 생명의 형식에게 모든 인식의 과정은 실패를 증명하는 반어의 현실이고, 또 천국의 서사 앞에 죄인의 모습을 재차 증명하는 역설의 알레고리적 사태일 뿐, 우리는 한 번도 진리의 진실에 놓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가상은 유한한 삶의 형식 앞에 놓여있는 실물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만 도달할 수 있는 저 너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믿는다.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을 확신했으며 마침내 말씀의 실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하여 천국의 개념은 부조리와 모순의 실존적 현실을 지배하는 서사학의 절대원리로 군림하게 된다. 의심하지 않고, 회의하지 않으며, 그 모든 징후를 진리의 진실로 받아들이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지 않고는 천국의 원칙은 성립하지 않는다. 까닭은 인류의 역사는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운명의 서사를 진리의 진실로 추인하고 봉인하는 그 한계 너머의 서사를 아포리아로 결론짓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르는 사실에 침묵해야 하며 그 모든 사태를 천국의 의미로 압축·굴절시켜야만 한다.
따라서 모든 합리성이 탈구·해체되거나 불합리성이 초월이라는 가상의 가면을 쓰고 세계의 진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천국이 필요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데, 이는 이 세계를 철저하게 신비화시켜 우리 모두를 마나적 주술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니 수 천년 동안 인간학적 삶의 역사를 기록한 일련의 서사는 천국의 한계 범주 내에서만 작동했을 뿐, 우리는 한 번도 저 너머의 세계를 진리의 현실로 증명해 내지 못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의 전언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고, 모든 진실을 호도하는 가장 나쁜 역사적 사례이다.
그렇다면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는 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마 모순과 부조리가 그득한 반이성의 세상으로 인도해 이 세계 전체를 신비화할 것이다. 천국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서사적 기획 전체가 실현가능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반계몽의 상태에 빠트려 진실을 기만하는 혹세무민의 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불합리함은 믿을 수 없는 진실의 모든 것이자,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해체해야 할 진리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천국이라는 가상 세계는 현재에 이르는 수 천 년 동안 역사의 중심에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학의 총체적인 현상을 지배하는 실재로 작용해 왔다.
왜 그런가? 왜 그와 같이 부조리한 현상이 진리의 진실처럼 믿어지고 떠받들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는가?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천국의 서사가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대리보충하거나 상쇄시킬 뿐만 아니라, 천년왕국을 건설해 인간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을 제공· 지배하는 절대 심급으로 자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논리 너머의 세계, 즉 초논리가 지배하는 절대 상징의 세계인데, 자기 한계를 확인하는 유한한 생명이 영원을 꿈꾸는 불멸의 세계이다. 하여 천국에 관한 일련의 서사는 죽음 저 너머의 세상을 지시하는 최후의 보루, 즉 진리의 진실의 배후라고 믿어지는 초논리의 세계를 지시하는 가장 완벽한 절대의 상징으로 믿어지고 있다.
따라서 천국에 관하여 물음을 제기하거나 회의하는 것은 금기사항, 즉 신성모독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정언명령으로 가득 차있다. 그것은 ‘왜’라고 물을 수도 없고, 다만 무조건 믿을 것을 요구하는 일방동행식의 강압적 세계이다. 말하자면 천국은 신의 일방적인 창조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진 타율적인 억압의 세계이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동할 수 있는 자유의 세계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천국이라는 이상세계는 감히 어느 누구도 그것이 비존재의 허상, 즉 실재로 위장한 가상이라고 폭로할 수 없다. 계율이 던져지고 믿음이 강요되었으며 마침내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실재처럼 작용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천국은 파스칼이 『팡세』에서 언급한 내기(도박)의 비유처럼 사후의 불안을 제거할 수 있는 담보 물건이거나 무라는 근본 함정을 폐기 처분할 수 있는 유일한 시적 장치인지도 모른다.(천국이 있다고 믿으면 천국에 가고 없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내기는 실존의 사태가 만들어 내는 심각성이나 현실적인 문제를 완화하여 실존의 급박성을 우회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문제 그 자체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자기 합리화를 일삼는 병폐를 근본적으로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여전히 이 세계는 천국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특권화해 분열을 일삼는 전쟁의 세계로 이끌 뿐, 진정한 의미의 천국, 즉 젖과 꿀이 흐르는 평화의 가나안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는다.
그저 이제까지 기술된 인간학적 현실은 천국의 분열된 파편만을 전유적으로 제시할 뿐, 이 세계를 천국의 이념으로 현실화시켜 평화의 세상을 만든 적이 한 번도 없다. 천국은 혹세무민의 유혹적 기호이거나 아니면 엄혹한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편이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시적 장치는 삶의 서사 전체를 전도·전복하는 자기 기망의 체계일 뿐만 아니라, 삶의 현실 전체를 왜곡하는 더 나아가 죽음의 진실을 진리의 진실로 전복하는 부정의 형식, 즉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사악한 악마이기 때문이다. 이제 현실의 삶이 부정되고 내세만이 참된 존재의 목적으로 변질·포장된다.
그와 정반대로 면죄부를 팔던 후안무치의 시대가 떠올랐다. 그리고 또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떠올리곤 실소를 금치 못했다. 모든 것이 도구화된다. 초논리의 세계도, 천국이라는 상징의 체계도 삶의 도구이지 인간학의 배후를 지배하는 최종 심급이 더 이상 아니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말한 것처럼 천국은 선판단에 길들여진 편견의 고루한 도구적 구성물이자, 혹은 시니피에를 상실한 시니피앙처럼 겉도는 폐용 기호일 뿐, 더는 진리의 진실처럼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비극이 탄생하는 지점에서 생성된 무지몽매한 알레고리적 풍경이거나 이성이 파괴된 최악의 풍경일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현실 속에서 천국의 상징적 장치는 왜곡·전도되어 무수한 전쟁을 일으키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슬프게도 허울로만 남아 아무런 의미도 생산하지 못할 것 같은 천국은 여전히 인간학을 지배하는 상징의 체계로 남아있는데, 이는 천국이라는 기호가 아직도 상품의 기호로 생산·유통되는 소비의 기능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천국은 자본의 마지막 남은 상품이다. 물론 소멸시효가 적용되는 폐용 가치이자, 조만간 용도폐기가 선언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천국은 언제나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인간학적 현실을 지배하는 절대 심급으로 작동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된다. 아마 죽음이 저기 눈앞에 엄존하는 한, 늘 그와 같은 방식을 반복할 것이다. 생명의 형식은 저와 같고, 인간학은 늘 아포리아로 회귀해 다시 천국의 기호 앞에 영원을 소망하는 우매한 존재가 되어 온전한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지구는 동일한 궤도를 돌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아마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50억 년 이후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계의 소멸과 함께 절멸에 이르겠지만, 어찌 천국이라는 가상을 의식의 지평에서 쉽게 몰아낼 수 있겠는가? 오늘도 천국이라는 암흑에 갇힌 채 이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고, 평화의 서사가 아니라 분열의 서사만을 양산하고 있을 게다. 불행하게도 인류의 지성사는 천국이라는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자기 한계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인류는 예정된 경로를 따라갈 것이고, 인류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한편에선 자본 중심의 물신주의가 팽배해 모든 것을 물화시킬 것이고, 또 다른 한편에선 십자가, 즉 대속적 죽음 앞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 천국이라는 보증수표에 매혹되는 찬양 일색일 것이다. 이율배반이 진실인 것처럼 떠받들어질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여전히 인간학적 현실 앞에 모순이라는 낭패가 가로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성의 한계만을 확인한 채 더 나은 사회로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발전은 허상이고, 진실은 조작적 현실을 보증한다. 어쩌면 천국이라는 가정법 위에 구축된 일련의 사회체제는 자기 합리성으로 중무장한 반어의 세계였고, 이성의 신념을 믿었던 모든 시대는 그 형식 고하를 불문하고 탈신비화가 불가능한 반계몽의 허구의 시대, 즉 기만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알고리즘의 신화가 보편화되어 가는 시대 역시 터무니없이 야만적인 이유는 모든 가치의 척도가 물질적인 것으로 획일화되는 것은 물론 인간학적 진실이 0과 1 사이에서 가로막혀 더는 사랑의 역사를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부정적인 징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국이라는 상징적인 기호는 여기저기서 만능키처럼 통용이 되고 있지만, 혹은 천국이라는 상품 기호의 구매력은 죽음 저 너머에서 작동하지만, 이는 단지 삶의 실재를 기만하는 플라시보 효과일 뿐, 이 세계를 평등과 평화로 묘사가 아닌 갈등의 서사로 표현하게 된다. 이 세계는 테러와의 전쟁 중이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참혹한 풍경을 연출 중이다. 이를테면 지금도 천국의 대리전을 벌이는 자살특공대가 활동하고 있으며 그것을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죽음처럼 포장하고 있다. 천국은 너의 죽음을 성스러운 죽음으로 포장해 영원한 복락을 보장할 것이라 꼬드겨 자살 폭탄 테러를 방조하고 있다.
이러한 천국의 마나적 주술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매트릭스의 신화는 기술 만능 공학 사회를 의인화한 가장 나쁜 용례인데, 이는 이 세계의 계몽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증명한 최악의 중독사회로 급진화해가고 있다. 천국의 의미화는 알고리즘의 의미화와 동일한 중독 현상을 일으켰으며 마침내 인간학 전체를 아포리아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현재의 상황에서 천국을 증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천국을 믿지 않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인간학은 생래적으로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며 영혼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가 존재의 숙명처럼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한, 천국은 인간학의 심연에 메피스토페레스처럼 자리 잡아 영원히 유혹의 포즈를 취할 것이다.
하여 우리는 그저 그 불합리함을 통해서 천국의 실재를 믿는다. 거짓이 진실처럼 통용된다.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라 믿어지는 가상이 진실처럼 믿어진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이제 이 세계를 심판하는 천국이라는 최종 심급이지, 진실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렇게 우리는 수 천년 동안 너무도 허구적 서사에 길들여져 그것을 진실이 아니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무런 논증도 실증적인 검증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의식을 기만하는 초논리의, 관행처럼 굳어진 관습이자, 진리의 진실처럼 굳어져 철저하게 의식화된다.
오늘도 믿고 내일도 기도하며 천국을 진리의 현재처럼 받아들인다. 악의적 의도나 인위적인 고통도 없이 습관적으로 말이다. 나의 믿음은 절대적 진리의 현전이고, 너의 믿음은 거짓의 진실이다. 천국은 그렇게 파편화되어 인간학 전체를 물화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천국이 없는 세상은 사소한 시비는 있어도 분열에 이르는 궁극적인 갈등을 없으리라. 왜냐하면 인간학은 눈에 보이지 않거나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세상을 믿고 의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여기 있지 저기 있지 않다. 진실은 눈앞에 놓여있지, 죽음 저 너머의 세계에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3. 지옥이 없는 세상과 자연 상태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우리 발아래는 지옥이 없고 머리 위에는 오직 하늘뿐)
하늘의 이치에 맞게 순리대로 살아가고 싶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노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사회가 너무도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저 하늘의 참된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본래적인 자기를 잃어버린 채 도심을 여기저기 배회하며 화려한 이미지에 현혹되어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고 있다.
자연에 동화되어 자기를 내려놓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의 태도인가? 평화롭고 싶고, 평등을 실천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싶다. 더불어 싸우고 미워하며 경쟁하고 싶지 않다. 아마 천국이라는 상징적 체계보다 더 나쁜 것은 지옥이라는 대립물이 인간학 전체를 옥죄며 강박적으로 강요하여 삶의 세계 전체를 공포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한,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을 경유해 평정 상태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마 끝없는 갈등의 연속이었고, 늘 욕망하는 자아로 인해 이 세계는 전쟁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더해 천국과 지옥 사이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은 채 이 세계를 아비규환으로 만들 것인데, 이는 인간의 상상적 지평이 만든 최악의 결과물이다.
특히 단테의 『신곡』은 기독교의 논리 강화에 최적화된 서구 문명의 최대 역작인데, 이는 중세 종교 사회가 남긴 이 세계의 현상을 선악 이분법에 의거해 기술하고 있다. 지옥으로부터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일련의 여정은 신의 섭리와 구원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 등을 총체적으로 다루면서, 권선징악, 즉 해피엔딩의 대서사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선과 악이라는 기독교의 이분법적 사유를 절대자의 시선에 응고시켜 최종 심판에 이르는 성스러운 노래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무엇을 위한 서사이고, 지옥은 어떤 의미의 서사적 질료를 만족시키는가? 더 나아가 이 양자 사이에 연옥이라는 매개물을 두어 인간학적 의지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데, 이는 어떤 서사적 역량을 허구화한 것인가? 신의 뜻이 강조되고 이 세계 전체를 섭리에 의해 포괄하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천국과 지옥 사이에 매개된 일련의 서사는 신의 뜻을 확인하는 존재의 여정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의인화된 채 인간학적 현실이 죄와 벌이라는 양식으로 율법화되었으며, 인간학적 현실을 금기로 가득 채우게 된다. 지옥은 금기로 둘러쳐진 이 세계의 반어적 현실이다. 그저 죄의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지만, 시간의 서사적 진리, 즉 종교의 신적 진실은 우리 모두를 도법자연道法自然의 원리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상상적 허구를 의인화하는 최악의 선택을 서슴없이 행하기에 이른다. 천국은 좋은 것, 즉 선와 의를 대리표상하고, 지옥은 나쁘고 불길한 모든 것을 의인화하여 인간학 전체를 공포로 가득 채워 불안에 떨게 만들거나 신을 믿고 의지하게 만든다. 물론 표면적으로 볼 때 지옥은 악을 심판하는 서사적인 장치이고, 천국이라는 선의 절대 상징과 보조를 맞추어 이 세계를 심판하는 절대 심급처럼 간주된다.
그러한 종교적 지평 속에서 사람의 아들인 인간에게 야차는 무엇이고 마귀는 어떤 악령이 스며듦인가? 대저 선악 이분법의 심연에 가로놓인 저 야욕은 무엇이며 왜 인간학은 항상 이항대립이라는 함수를 통해서 현실 세계를 재단하는가? 천국이 특권화 되고, 지옥이 악마화 된 채 상징의 두 절대적 심급으로 비로소 작동하여 인간학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두 굴레가 된다. 물론 이 양자 사이의 거리 어디쯤에 행복(선)과 형벌(악)이라는 대극점이 존재하지만, 따라서 선이 권장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명제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어찌 그것이 진실의 테제라고 명명될 수 있겠는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삶이 진실이고, 인간학을 표현하는 진리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삶―자연이 망각되고 왜곡된다. 아니 수 천년동안 지배해온 선악이분법의 종교적 세계관은 푸른 하늘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이법을 도외시 한 채 금기와 계율로만 구성된 율법의 삶을 강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의 참된 가치를 부정하는 전도된 삶의 전형이라 하겠다. 오늘의 참된 의미가 부정되고, 영원, 즉 사후 복락을 누리는 천국이 추앙된다. 그렇다면 대저 이 세계를 지지하는 진실의 토대는 무엇이며, 왜 인간학은 늘 선악의 굴레에 갇힌 채 늘 동일한 것의 반복을 일삼는가? 천국보다 더 나쁜 것은 지옥이라는 허구적 구성물이 만들어낸 원한 감정이 악의적으로 우리를 극단의 분열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화가 사라지고 늘 갈등과 분열의 나날들을 살아가며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계율과 함께 죄의식이 이 세계에 들어오고 양가감정에 휘둘린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인간학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갇힌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이항대립 안에 갇히고 삶―자연이 도구화된다. 아포리아에 빠진다. 대저 아무것에도 훼손되지 않은 대자연은 어떤 의미이고 선악의 이항대립에 마주선 인간학은 어떤 위의를 간직한 허구인가? 화려한 진열대 위에 놓여있는 천국이라는 후크 상품이 지옥이라는 보조 상품과 절묘하게 합작하여 이 세계를 최악의 분열의 상태로 조장하게 되는데, 이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허구인가?
우주적 섭리, 즉 삶―자연의 원리가 사라진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상징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구성되는 테제의 근본이자, 정치경제학 전체를 지배하는 인륜적 의식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양자가 최악인 이유는 공포의 권력이라는 초논리를 가지고 두려움을 조장해 인간학 전체를 고통이라는 함수로 환원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생명에게 주어진 자연의 시간을 온전하게 살아내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생명의 시간 전체를 죄의식으로 가득 채우게 된다.
경전을 읽으며 선악을 넘어선 곳에 의식을 고정시킨다. 다시 말해서 생의 편에 서서 죽은 자의 영혼을 제도하는 『바르도 퇴돌』, 즉 『티벳사자의 서』가 여타의 생사관과 다른 이유는 죽은 자의 영혼의 문제를 살아남은 자의 기도를 통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지극 삶 중심의 자연적 세계관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죄의 정도에 따라 영혼을 구제하는 단계가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를 구제하는 지극한 영혼의 송가이다. 거기엔 절대 심급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연법이 만들어놓은 카르마에 따라 사후 환생이 결정된다. 따라서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이해관계로 분할된 자기 숙명의 합리적인 세계상이지, 절대성에 의해 함몰된 선험적 판단이나 예정 조화로 이미 결정된 세계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나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이지, 대타자가 만들어 놓은 그물에 휘말리는 죽음의 타자가 아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계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이 얼마나 탁월한 생사관인가?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티벳이 지상천국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삶의 과정 전체가 자연이 만들어 놓은 운명에 맞추어 살아가는, 삶이 자연 그 자체에 철저하게 동화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욕망을 내려놓았으며, 삶의 목적이 죽음의 목적지에 가닿는 것으로 의미 완성을 이룩하게 된다. 거기엔 한도 없고, 원망도 없으며, 죄나 벌이라는 응징의 구조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다만 시간이 완료되면 존재의 의미 또한 완료되어 더 이상 추구할 목적이 없이 사라져 소멸에 이르면 그뿐이다.
‘carpe diem,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명제만이 진리 앞에 던져진다. 말하자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인위적인 조작에 의해 인간학적 삶 전체를 황폐시키게 되는데, 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왜곡하는 가장 나쁜 전형이다. 인간학은 현재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하지 못했으며 마침내 하루하루를 부끄러움과 죄의식으로 살아내는 비극의 주체로 몰락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선악을 넘어서야 한다. 아니 인간학은 천국과 지옥이 만들어낸 선악의 노예와 무관하며 있는 그대로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평화의 사도일 뿐이다. 하여 발아래는 지옥이 없고, 머리 위에는 천국도 연옥도 없다. 그저 오로지 푸른 하늘만이 찬란할 뿐이다.
그렇다면 천국이 없고, 지옥이 없는 세상을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사실 이것이 중요한데, 이는 존재의 서사를 인간학적인 방식으로 재구축하는 혹은 삶과 죽음 사이에 매개된 공포나 두려움을 제거하여 인간학을 자연의 과정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대전제가 한계 상황처럼 내걸려 있는 한, 생명의 형식이 떠안은 공식은 생노병사라는 필멸의 과정이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고, 알고리즘의 신화가 불멸의 공식을 만들어 영원을 보장한다하더라도 대체 불가능한 시간의 숙명, 적멸의 과정이다.
그냥 하루하루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으로 살아간다. 미학적 인간형 혹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 물론 지옥이라는 함정이 항상 오욕칠정이라는 저 치명적인 한계 위에 작동하여 인간학 전체를 미혹에 빠트리지만, 따라서 지옥의 현상학적 징후가 불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신 사이에 매개된 어쩔 수 없는 인식적 한계 상황을 묘파하고 있지만, 어찌 그것이 원죄라는 사슬에 묶여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노예의 도덕을 설파하는 가장 나쁜 인간학적 징후에 구속될 수 있겠는가?
천국이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가상이듯, 지옥도 역시 최악, 즉 환멸의 세계상을 상상하는 가상이다. 지옥이라는 가상이 이 세계를 악으로부터 구원에 이르게 만드는 수사학적 장치처럼 보이지만, 따라서 천국이라는 달콤한 유토피아적 권능과 그것의 이항대립적인 개념으로써의 지옥은 항상 필요악, 즉 선과 사랑과 평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구조적 장치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창조적 지평을 폐루프(closed loop) 안에 가두는 가장 편리한 도구적 장치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더 큰 문제는 필요악으로 항상 잔존해 있는 지옥의 작용이 이 세계를 부정성으로 매개시켜 언제나 묵시록적인 파괴적 파멸을 너무도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마치 구원과 파멸의 동시성이 예정조화의 역동성을 띤 운명처럼 간주되듯이 말이다.
따라서 지옥은 인간학과 세계 사이에 거대한 균열을 조장하는 부정적 매개물이자,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사랑의 주체로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심연에 불안을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이다. 대재앙이 몰아닥친다. 아마 그것은 구원을 위한 불길한 전조이거나 말세 이후에 도래할 천년왕국의 신기원으로 나아가는 필연의 과정이다. 아마 지옥의 상징적 장치는 여기저기 불행한 의식을 흩뿌려져 불안의식을 조장하는 동시에 의식의 심연에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각인시켜 구원에 대한 확신을 배가시키는 것이리라. 따라서 악의 상징적 힘에 포획된 공포의 권력, 즉 지옥의 서사적 장치는 너의 모든 삶을 악마의 제물로 봉인해 악령에 사로잡힌 마귀의 세상을 부정적 힘으로 작동시키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악마화하는 문명의 대충돌은 불길하고, 전쟁의 대재앙은 원한 감정을 내면화시키게 이른다. 아랍에게 서구는 분열의 획책, 즉 원한이 사무친 저주의 재앙이고, 서구에게 아랍은 악을 교설하는 악마 그 자체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적 뿌리는 같고, 그 믿음에의 결과는 상호 극단적인 대립을 양산하는 비극의 정점이다. 오늘도 천사와 악마의 대리전을 펼치며 그/녀들의 하루는 화염에 휩싸인 채 죽음에의 욕망을 부추긴다. 왜 그런가? 왜 이 세계는 문화의 심연에 르쌍띠망이라는 치유 불가능한 원한을 감정이입해 서로가 서로를 악마화하는가?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아니 지옥은 상호 분열을 조장하는 원한 감정의 심연에 차별의 욕망을 뿌리 깊게 색인하게 되는데, 이는 삶의 현실 전체를 지옥화하는 최악의 결과이다. 차이의 인정이 아니라, 차이를 악마의 도구로 활용해 문화와 문화 사이에 결코 봉합할 수 없는 이물질을 남겨 끝없는 차별과 반목을 조장하게 된다.
9.11사태가 그렇고, 살만 루시디의 장편서사시 『악마의 시』 사태가 그렇듯, 원한의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는다. 아니 역으로 뿌리 깊은 상처를 헤집어 덧내거나 할퀴어 고도의 정치적 기만술을 발휘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수사학적 전략이다. 하여 선의가 악의로 전환되는 데에는 그리 많은 힘이 필요치가 않다. 선악과라는 계율과 뱀의 교활한 지혜만 있으면 이 세계는 평화와 낙원에서 너무도 쉽게 추방되어 모든 악의 근원인 노동과 고통과 불안과 공포가 이 세계로 들어오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선의가 악의로 전화되는 데에는 뱀의 유혹이라는 서사적 장치만 있으면 그만이다. 사랑과 평화의 세계가 급속도로 변질되어 인간학 전체를 악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는데, 이는 계율을 어긴 이브의 호기심에서 비롯한다. 이제 막 지옥문이 열렸고, 인류에게 허여된 시간은 반목과 질시와 공포로 점철된 전쟁의 시간이다. 지옥은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눈앞 여기에 있다.
완벽한 창조물의 세계가 뱀의 혀에 의해 불완전한 악마의 소굴로 지옥화 되었으며 마침내 이 세계는 각자 자기만의 지혜를 통해 작은 차이를 무수히 양산하는 분열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소통하지 못했고, 늘 시기와 질투로 반목의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따라서 영원한 불의 재앙을 의미하는 지옥은 아주 작은 차이를 침소봉대해 차이 그 자체를 이질성으로 악마화하는 태도에서 생산된 욕망하는 의식의 추악한 부산물이지, 실제적인 불 그 자체의 응징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을 선하게 만들고, 욕망과 이기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따라서 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드는 악마는 아름다운 신적 의지를 개인의 사적 이기심으로 전유해 그 아름다운 심성의 본질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흐려 철저하게 개인의 욕망으로 사유화하는 바로 그곳에서 생성된다. 수 천년 동안의 갈등과 전쟁이 반복적으로 횡행했던 이유는 사랑과 평화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악마, 즉 악령에 휘둘리는 지옥을 제도로써 정착시켜 인간학과 세계 사이에 거대한 균열을 강박적으로 매개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도 전쟁의 포화 속에 불의 재앙은 내려졌고,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 곳곳은 불바다가 되었다. 지옥이다. 지옥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지옥은 사랑과 자비로 똘똘 뭉친 신적 개념을 은폐한 채 증오의 전쟁을 신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바로 그곳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학 전체가 악마화하는 최악의 사례이다. 악마와 지옥은 신의 이름으로 대리전을 치르는 아랍과 서구사회가 분열을 맹목화한 문명의 맨얼굴이다. 선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신을 연호하면서 정의를 부르짖지만, 기실 그러한 자들이 악을 전파하는 간교한 무리들이다.
그리고 특히 아랍과 이스라엘이 벌이는 운명을 건 필사의 전쟁은 서구와 아랍 사이에서 발생한 문명의 대충돌을 우회하는 피의 전쟁인데, 이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최적의 사례이다. 수 천년 동안 노력을 통해 이룩한 계몽의 역사는 유태인 대 아랍인이라는 대결 구도 속에 고밀도 압축·굴절된 채 마나적 주술이 횡행하는 야만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이는 현대성에 도사린 음흉한 술책이다. 한편에선 인종 절멸, 즉 홀로코스트가 자행됐고, 또 다른 한쪽에선 유태인을 앞세워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의 야만성을 악마화하고 있다.
어쩌면 지옥은 죽음 이후에 영혼을 심판하는 불의 응징이 아니라, 혹은 죄를 심판하고 형벌이 가해지는 천형의 상징적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학적인 모든 의식을 죄와 벌이라는 간악한 방식으로 옥죄는 비인간화의 전형 그 자체에 고스란히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투사된 이분법적 사유는 실존적 삶의 향유를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형식 전체를 구속하고 부정하는 비자연적인 인공의 구성물이다. 도법자연을 잃어버린 세상은 저와 같고, 파괴된 인륜의 실상은 이와 같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울며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삶의 기호이고, 오늘을 구성하는 의미의 모든 것이다. 삶은 그것이외에 별다른 것이 없고, 인간학을 규정할 특별한 서사적 장치가 없다. 발아래 밟히는 흙과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바로 진리를 지시하는 모든 것이다. 따라서 삶―자연을 회복하는 과제가 시급하며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아직까지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지금의 이 형태로 진화해왔는지를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규명해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오로지 물리력과 자연이 내어놓은 길을 따라 그것이 진리의 진실임을 믿는다. 왜냐하면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가 삶의 공간을 아름답게 하는 한, 이 세계는 아직 살만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지의 노래를 부른다. 천국도 없고, 지옥 또한 없는 평화의 세상을 몽상해본다. 대지의 풍요로움과 하늘의 몽상 속에 빠져든다.
4. 오늘의 의미와 삶의 진실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모든 사람들이 오늘만을 위해 사는 것을 상상해 봐요)
사후 세계니 영원이니 하는 허상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에 닿았지만, 닿자마자 오늘의 의미가 산산이 부서져 파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알 수 없고, 또 파국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인간학 전체가 타자의 형식으로 괴멸됨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시간이란 무엇이며 왜 생명은 무한 속에 티끌로 존재하는가? 여여하게 시간의 풍파를 견디길 바랐지만, 여지없이 시간의 흔적으로 산화해 존재의 역사 전체를 미망의 형식으로 추억하게 된다.
오늘이 사라졌다. 나는 어떤 의미의 존재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라는 특별한 형식이 지구라는 외딴 공간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생명의 여율을 표현하는 존재는 시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유한한 생명, 특히 존재와 시간의 의미를 의식하는 인간이라는 생명체에게 시간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 맞닥트려 자신의 소멸을 의식하는 비극의 주체인 점에서 그러하다. 오늘이 가면 우리는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영원 앞에 꺼져가는 등불로 존재하는 오늘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어떤 미래를 준비하는 타자의 형식인가?
애련에 젖는다.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오늘이 사라진 순간, 우리 모두는 비존재로 퇴화하여 영원한 무로 둔갑할지 모른다. 바람이 분다. 꿈을 꾸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라져 소멸하는 것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의미를 참구하며 성찰에 이르지만, 오늘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닫는 데는 너무 많은 길을 우회해야만 한다. 영원의 미분값이 오늘이라면, 오늘을 적분하면 영원에 이를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그냥 주어진 오늘을 살아갈 뿐, 차후의 길은 차후가 알아서 할 일인 것 같다.
시간 앞에 진실하게 서기를 원지만 삶의 실제적인 모습은 늘 비루하고 난감했다. 앤드류 와일스에 의해 풀리기는 했지만 수백 년 동안 난제로 남아있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처럼 삶의 공식은 언제나 미궁에 이르러 아포리아로 회귀하는 것 같다. 참 쉽지 않은 문제에 맞닥트린 채 존재의 여율을 다양한 방식으로 탄주하며 가늠해 보지만 그 역시 불협화음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오늘은 어떤 의미이며 왜 존 레논은 오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예찬하는가? 지속이었다고 환상으로 변하는 저 변화무쌍한 시간의 도정 위에 우리는 어떤 의미의 존재로 남을 수 있겠는가? Dasein, 즉 저기 존재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오늘이 사라졌다, 우리는 무엇을 위한 존재였는가?
그저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고,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허여된 최선의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시간이란 영원으로 휘어져 흘러내려갈 뿐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닿자마자 기화하여 아주 작은 흔적만을 남겨놓고 사라지는데, 과연 인간학은 시간의 의미를 포획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명명될 수 있는가? 텅 비어있고, 빈 지대에 남아 시간의 저쪽을 추억할 뿐, 우리 모두는 폐허에 당도하게 된다. 아니 인간학은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허비했으며 마침내 우리 모두를 타자의 형식으로 소멸시키기에 이른다.
허무하고 막막했으며 마침내 너와 나 사이를 흐르는 시간 전체를 망각이나 환영으로 가득 채운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마물을 잘 통과하며 올바른 삶을 살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어제라는 과거에 구속되면 오늘을 놓쳐버리고, 내일이라는 미래에 과도하게 몰입하면 오늘을 충실하지 못한다. 삶은 저와 같고, 인생의 의미는 날조된다. 오늘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지상최대의 목적이고 삶의 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정범 감독의 영화 『아저씨』는 오늘의 의미를 반성하는 두 계기를 제공하는데, 이는 삶의 진실에 이르는 존재의 어두운 두 통로이다. 오늘이 절망에 포획된다. 그것은 전당포업자 차태식 역할을 한 원빈과 마약판매상이자 장기밀매업자 만석과 종석 형제 역할을 하는 김희원과 김성오 사이에 흐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성찰이다. 항락과 절망 사이에서 오늘이 사라진다. 이들에게는 내일이 없다. 이들에게는 내일은 희망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비상구이거나 오늘의 악행을 반복하는 쾌락의 연속이다.
특히 한때 국가의 특수정보요원이었던 전당포업자 차태식은 임신 중이던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이후 분노의 오늘을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가는데, 이는 삶의 희망을 점점 잃어가는 탈근대 시민의 정체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산다는 것은 그저 오늘을 힘들게 견디어내는 것뿐이다. 따라서 존재의 목적은 마지못해 살아가는 오늘이라는 시간에 있지 희망이라는 내일 속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그/녀에게 내일 역시 고통의 시간일 것이다. 특히 주인공 차태식은 내일을 포기한 채 오늘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 중인데, 그것은 더 이상 삶의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무기력한 삶, 즉 오늘을 낭비하는 죽은 삶의 한 전형이다. 전당포업자 차태식의 권태로운 삶은 자본의 포로가 되어 나락으로 추락한 자의 형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린 비극의 초상이다.
다른 한편 향락의 화신이자 악마적 모습을 열연한 만석과 종석 형제는 장기밀매와 마약제조를 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르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는 범죄 집단의 우두머리인데, 이들도 역시 내일은 없고, 오늘을 마음껏 향유하는 소비의 극단적 전형이다. 삶의 첫 번째 목적도 향락이고, 두 번째도 역시 중단 없는 향락의 추구이다. 따라서 쾌락은 추구해야 할 지상최대의 목적이자, 오늘이 존재하는 최대 이유인데,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즉 에로티즘의 기대효과를 죽음 의식으로 충족하는 살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수단과 목적에 배반하는 모든 것들을 살육하거나 금전적 욕구충족으로 보상해할 때 쾌락은 최대만족에 이르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차태식과 만석·종석 형제 사이의 거리 어디에도 삶의 희망은 일체 부재하고, 그저 무기력하게 오늘을 헛되이 낭비하거나 강렬한 기호로 소비하며 생을 적극적으로 향유는 태도를 취한다. 하여 오늘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만이 상호 비교 가능하다. 한쪽이 생의 지옥에 갇힌 염세주의라면, 다른 한쪽은 향락을 지상 과제로 생각하는 쾌락주의인데, 이는 현대의 징후가 만들어낸 병리적 두 현상이다. 한쪽은 분노와 우울의 무기력한 오늘을 살고, 다른 한쪽은 도파민 과잉으로 광란의 오늘을 쾌락으로 흠뻑 적신다.
어쩌면 이 두 전형은 소외의 극단적인 현상을 표현하는 우리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성이란 고독과 우울을 내면화하는 가운데 생성된 향락의 징후를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는 파열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자가 표현해 낸 오늘의 표정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표정과 정확하게 대비되는데, 이는 시간 전체를 왜곡·전도시키는 불길한 삶의 징후, 즉 소외의 두 극단적 전형이다. 한쪽은 소외를 내면화하고, 다른 한쪽은 적극적으로 사회의 모순과 맞서 스스로를 과감하게 산화시킨다.
이들과 달리 전혀 다른 성질의 오늘을 살아가는 또 다른 인간형이 있는데, 그는 성자를 닮았지만, 지극히 세속적인 삶, 즉 제도권 교육과 잘 맞지 않는 청소년들을 실천적 교육을 통해 삶의 목적을 되찾아주는 사도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신학도로 훌륭한 목회자였다가 지금은 강원도 삼척에서 삼무곡이라는 대안학교를 만들어 여러 젊은이들과 몸으로 살아가는 실천적 인간형이다. 개인적으로 연배가 비슷하고 하여 친구처럼 멀리서 응원하며 그가 하는 일이 잘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는 뜻을 다르지만 삶의 목적이 비슷한 인생의 동지이다.
그의 오늘은, 현곡 김종률이라는 사람이 소비하고 탈진시키는 하루는 단지 물리적인 24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영원처럼 살아가는 곡진한 진실의 하루이다. 어찌 그와 같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오늘을 살되 영원을 산다. 현곡에게 오늘은 추구해야할 최고의 시간이자, 자기와 대면할 수 있는 마지막 하루인 동시에 죽어가는 자신을 지각하는 하루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하루를 소중히 섬기며 그것이 진리의 오늘임을 증명하는 진실의 사도이다.
따라서 현곡에게 하루는 영원이 무한 분할된 진리의 모든 것이자, 진리의 진실을 추적하는 의미의 모든 것이다. 그의 하루는 노동의 하루이다. 돌을 쌓아 석축을 만들고, 나무를 잘라 젊은이들이 거주할 통나무집을 만든다. 물론 이 모든 일을 학생들과 더불어 함께하고, 대안학교의 교육 목적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사는 실천적 측면이 대부분인데, 어찌 그것이 성스러운 성자의 삶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진정성은 몸의 언어이지 머리에 속한 기교가 아니다. 학생들과 몸으로 대화하며 섬기는 참된 교육은 진정성이 넘쳐나는 교훈의 하루요, 참된 깨달음으로 나아가 진실의 길이다. “힘을 남겨두고 잠들지 않으리라!” 온몸에 있는 에너지가 다 고갈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노동의 하루를 보냈으며 피곤해 지쳐 쥐 죽은 듯이 잠에 이른다. 하루가 완료된다. 오늘 하루는 내일을 기약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곡의 하루는 내일을 준비하고, 내일의 태양이 또 다시 떠오르기를 기원하는 희망의 하루가 아니라, 온전하게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영원의 하루, 즉 죽음을 확인하는 오늘이다. 아마 죽은 듯이 잠에 이르러 내일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가 하루를 영원처럼 사는 이유는 유한한 생명이 영원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임을 깨달아서 일 것이다. 존경스럽고, 진짜 삶의 멋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여 현곡 김종률에게 하루는 믿고 의지할 진리의 모든 것이자, 진리의 진실을 확인하는 실존의 강렬한 장소이다. 하루가 사라지면 나는 없고, 오늘을 증명하는 나만이 진리의 나이다. 그저 묵묵히 오늘 하루를 촘촘하게 채워가는 것으로 자기 자신과 대면했으며, 그것이 삶의 온전한 의미임을 깨닫는다.
사실 현곡이 살아낸 오늘이라는 하루의 시간이 존경스러운 이유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몰아닥쳐도 내일이라는 희망의 시간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루를 곡진하게 섬김으로서 하루 전체를 영광스러운 삶의 연속으로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곡에게 하루를 곡진하게 섬기는 행위는 시간 전체를 경이롭게 만드는 혁명의 시간이자, 낱낱의 시간을 자기화하는 숭고의 시간이다.
하루를 헛되이 쓰지 마라. 오늘 하루를 놓치면 영원을 놓치는 것과 같다. 사실 그와 같은 태도를 실천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공이산이라는 고사가 떠오른다. 아니 그는 연금술사처럼 자기 정련에 이르는 구도자와 적확하게 대응되며 진정으로 진리의 진실을 실천하는 이 시대의 참 스승이다. 스스로를 낮추고 학교공동체를 평등이라는 이념으로 체제화하였으며 마침내 상호 존중을 하나의 교훈으로 삼기에 이른다.
오늘을 사는 자는 저와 같다. 오늘을 위해 자신과 정면으로 대면하는 자는 바로 현곡 김종률이 아니겠는가? carpe diem 혹은 영원을 사는 현재. 오늘이라는 현재가 삶의 의미를 결정하고, 진리의 진실 앞에 다가가는 통로가 된다. 말하자면 오늘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찬하는 것은 실존의 의미를 전폭적으로 긍정하는 삶의 태도이자, 모든 혁신적 실천이 발생하는 혁명의 시간이다. 오늘은 변화가 비로소 시작되는 역동적인 시간, 다시 말해서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진리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내일의 청춘을 위해 오늘의 영혼을 팔도록 유혹하는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유형의 인간형들이 너무도 많은데, 내일이라는 희망의 태양이 오늘의 삶을 기만하는 부정적 태도, 즉 나태와 게으름을 만연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을 희생하면 내일이 없다.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 어찌 내일의 희망이 도래할 수 있겠는가? 오늘에 충실 하라. 오늘 하루를 미친 듯이 살며 결코 후회하지 마라.
어쩌면 존 레논이 예찬한 오늘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삶은 영화 『아저씨』의 주인공인 차태식이나 만석·종석 형제들을 의미하지 않을 것 같다. 가상현실이 지배하는 현실이나 알고리즘의 신화가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오늘을 향유하는 그렇고 그런 인간형들이 넘쳐나지만, 어찌 오늘의 형상이 저와 같겠는가? 스칼렛 오하라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타라 농장에 되돌아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르기를 희망하는 것이 최선의 태도이겠는가? 오늘을 놓치면 내일도 없고, 의미 있는 삶도 없다.
어쩌면 내일이라는 희망의 서사가 우리 모두를 타락의 길에 들어서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내일은 올 수 없는 날이거나 아니면 오늘의 참된 의미를 놓치게 만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조작, 즉 거짓과 위선을 조장하는 유혹의 포즈일 뿐만 아니라, 인간학 전체를 기만하는 나쁜 서사의 불길한 징후, 즉 모든 의미의 공식을 미래로 차연시키는 게으름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일을 기약하는 희망의 서사는 모든 악이 발원하는 불확실성의 원인이자, 악마의 유혹이 살아 숨 쉬는 기만의 장소이다. 따라서 오늘의 태만은 내일의 희망에게서 생성되며, 해야 할 당면한 오늘의 일들을 차일피일 미루어 미래에게 위임하게 된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내일에게 떠넘겨진 오늘 속에 음습해 있었으며 오늘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커다란 대가가 바로 내일 당장 일어날지 모르는 불행이라는 전조이다. 불안이 오늘을 엄습하게 된다. 공포의 권력이 오늘을 차압해 태만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도록 유혹할 것이다. 물론 내일이라는 희망의 태양이 다시 삶에 대한 의욕을 불러 일으켜 살아갈 목적을 제공하는 것 또한 부정하지 않지만, 오늘을 태만하게 살아내며 불확정성의 내일에 몸을 던지는 행위가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 하겠다. 불행은 오늘의 참된 의미를 놓친 바로 순간 시작된다.
하여 오늘 일을 결코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의미의 공식을 내일이나 모레쯤으로 차연시키는 행위는 결코 용납이 돼서는 안 되고, 삶의 임무를 오늘이라는 시간 내에 완료시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에게 오늘은 진리를 압박할 수 있는 모든 것이자,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를 진실하게 살아낸 자에게 내일은 그저 덤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차후는 차후가 알아서 할 일이다. 차후의 사명을 오늘에게 떠넘겨 격렬한 하루를 살아가라. 후회 없는 생이 어디 있겠냐마는, 아마 후회하지 않는 최소한 삶은 오늘과 정면으로 맞서 자기 자신이 되는 삶이라 하겠다.
5. 아나키즘 : 분열의 극복 혹은 진정한 자유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 봐요.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진정한 자유는 어디서 오는가? 참나를 만나서 자기를 실현한다. 구속을 거부한다. 아니 제도나 이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참자유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체감하기를 원한다. 아나키스트가 된다는 것은 한 때 젊은이들의 꿈과 소망이자, 낭만성을 띤 저항의 상징이다. 경계도 없고, 체제도 없는 곳에서 인류 전체가 평등하기를 원했으며, 또 그것이 삶의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세계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어떤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한 체제인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언제나 특권화 된 소수의 계층만이 권력을 독점하는 사태가 빈번했다. 독과점금지법은 겉만 번드르르한 허울을 뒤집어쓴 채 경제의 영역은 물론 정치와 문화 전반에 걸쳐 불평등을 추인하는 옹호자로 변신하여 이 세계 전체를 불평등으로 구조화하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하기에 이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가 있다면, 아마 그/녀는 저항의 정신으로 똘똘 뭉친 아나키스트일 것이다. 어느 체제에도 속하지 못한다. 까닭은 불의와 절대 타협하지 못했고, 언제나 정의의 편에서 시대의 진실을 탐문하는 고독한 영혼의 단독자이였기 때문이다. 국경이 없고, 분열도 없는 하나 된 세상을 꿈꾼다. 설령 그/녀들의 저항과 거부의 태도가 극단으로 치달아 체제 전체를 전복하는 혁명의 투사처럼 비추어지지만, 이는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찾아 떠나는 아름다운 존재의 여정이다.
그러나 자유에의 이념과 의지는 요원하고 억압과 착취가 만연해 이 세계는 늘 불평등의 구조를 보편화하기에 이른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떠들어대지만, 국민을 주인으로 섬겼던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허울은 좋은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은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았고, 인간학과 세계를 지배하는 궁극적인 주체는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특권계층이나 자본가계급뿐이다. 왕정시대나 대의제민주주의가 실현된 오늘날이나 국민은 주인이 아니라 개돼지만도 못한 세금 내는 노예기계일 뿐이다. 따라서 국민, 즉 민중이라 불리는 노동자와 농민 혹은 시민은 시대의 의식을 선도하거나 결정하는 삶의 주체가 아니다.
0.1%에 속하는 극소수의 대재벌들이 이 세상 대부분의 부를 독점하는 기현상이 벌어졌으며, 국가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어 사회적 불평등의 보편화 현상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추인하는 정경유착 현상이 만연하게 된다. 국가 전체가 독점자본의 놀이터로 전락하여 사회적 부 전체를 자본의 도구로 활용하게 된다. 관료제의 고착화와 함께 만성적인 부패가 제도화되었으며, 마침내 정치경제학을 지배하는 권력의 메커니즘 전체가 계급 세습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야만의 현실 속에서 참자유는 실현 가능한 사회적 현실인가? 어떤 면에서 아나키즘 운동이 의미 있는 것은 체제의 부정과 저항의 정신을 통해서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 전체를 전복하는 깨어있는 혁명의 전위부대를 양성해, 이 세계를 평등이 실현된 정의사회로 만들고자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없다면, 억압도 없다. 파리코뮌 혹은 볼셰비키혁명. 불평등으로 점철된 가난의 시대를 어떤 기호로 살아내야 하며 어떤 혁명의 나날들을 꿈꾸는가? 평생을 반정부 게릴라활동을 하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 최선도 체제에 맞선 투쟁이고, 차선도 목숨을 건 투쟁의 연속이다. 체 게바라가 생각난다. 더불어 그람시와 네그리가 떠올랐다. 궁핍한 시대를 살아가는 혁명적 사회운동가들은 가난한 자들과 긴밀하게 연대했고, 그들의 대변인으로 친히 활동하며 이 세계를 평등의 이념으로 체제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더 나아가 유명무실한 국가가 만들어낸 불평등을 일소하기 위해 연이어 반란과 폭동을 일으켰다. 국가는 사회의 모든 악의 근원이고 해체시켜야할 궁극적 기제이다.
무정부주의, 즉 자유를 구속하는 체제를 거부하며 저항 투쟁의 나날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체제는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온갖 비리의 온상이자 인간학을 억압하는 궁극적인 기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의 숙명은 실천이라는 명제를 이념의 카테고리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념의 장벽을 뚫고 투쟁의 깃발을 올리는 적대적 반란의 운동이다.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개혁이 요청되고, 자유는 이념의 진실을 추구하는 삶의 현실이다.
모든 병폐가 발생하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부정된다. 따라서 국가와 그것에 속한 일련의 관료행정제도는 악의 상징이자, 이 세계를 불평등으로 휘어지게 만든 억압의 형식이다. 참자유가 추구된다. 아니 기성 가치가 파괴된 폐허 위에 신세계를 구축하거나 혹은 낡은 질서로 인해 부패한 현실을 즉각적인 혁명으로 돌파해 참자유가 실현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나키스트의 꿈이다.
그러나 그 자유와 평등에의 아름다운 꿈은 하나의 이념적 실재로 남아 무수한 반복적 실패만을 확인할 뿐, 그/녀들이 직면한 실존적 현실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국가 체제와의 목숨을 건 투쟁은 사회적 모순을 끌어내어 환호를 받으며 국민의 지지를 받기는 했지만,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나키즘은 주류사상으로 확산되어 혁명의 완벽한 주체가 되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젠 주변부로 밀려나 유명무실해졌고, 아나키즘의 자리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대신 차지해 혁명의 임무를 수행 중이다.
부익부빈익빈이 세습·고착화된다. 한번 형성된 기득권층은 제도화된 체제의 경로를 따라 철저하게 특권적 계층화를 철옹성처럼 굳건하게 형성·유지하여 권력을 세습하게 되는데, 이는 사회가 생산한 달콤한 잉여를 착취 독점하는 형태로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외된 엘리트 계층의 의식을 대변하는 아나키스트에게 첫 번째 과제는 계급의 장벽을 허물어버리는 것인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저 너머에서 실현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유토피아적 전망, 즉 이 세계의 실천적 측면이다. 따라서 아나키즘 운동은 시대 현실을 대변하는 의식이자,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에 대한 일종의 청원인데,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양심을 자극하는 촉매제이자, 좌우이데올로기 너머에서 생성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 인류애의 실천적인 측면이다.
평등과 자유가 이념화된다. 아나키스트의 삶―시간―세계는 모든 것을 희생한 채 가난과 투쟁의 나날이었고, 목숨을 거는 일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일체의 행위가 낭만적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한 가치로 평가되는 이유는 사회적 정의를 위해 최대한 사적인 욕망을 멀리했고, 또 개인의 영달을 전혀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귀족이지만 자신의 모든 특권을 포기한 바쿠닌이 그러했고, 크로포트킨 역시 청렴한 삶의 자세를 유지한 채 억압당하는 민중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평생 투쟁했다.
그렇다면 그/녀들이 추구했던 참된 평등의 이념은 무엇이며 어떤 제도적 장치가 정착되기를 소망하는가? 더 나아가 무정부주의, 즉 국가와 그것에 속한 일련의 제도적 장치를 부정하는 가운데, 이 세계를 정의롭게 만들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삶의 조건법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아나키스트가 원하는 국가라는 체제를 넘어선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 너머의 제도여야 하며, 그/녀들이 추구하는 참된 제도의 가치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함의하는 투쟁의 사태인가? 사실 이것이 문제인데, 아나키즘 운동을 체계화한 바쿠닌으로부터 네차예프, 크로포트킨을 거쳐 볼린에 이르는 일련의 이행 과정은 러시아에서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 도처에서 호응을 얻어 급속도로 번져갔으나, 하나의 커다란 사상의 물줄기를 형성하여 제도화되지 못한 채 이내 지리멸렬하여 극소수만이 아나키스트 운동에 동참하여 활동 중이다.
왜 그런가? 왜 아나키즘은 지극히 평등과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중심주의적인 메타적 세계관을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낭만성을 함의한 청년들의 문화 운동으로 머문 채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자본주의의 강화, 혹은 신자유주의의 체제의 발흥과 함께 아나키즘 운동은 물론 사회주의 운동이나 공산주의는 된서리를 맞고 급격하게 퇴보해 더 이상 이 세계에 발붙일 곳이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데, 이는 어떠한 국가 이념이 생산한 시대적 현상인가? 불행하게 현재 자본의 거대한 위용에 떠밀려 참자유와 평등의 운동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거의 괴멸 직전이다.
자본 중심, 즉 미국의 월가를 중심으로 한 금융 경제 체제가 굳게 자리 잡음과 동시에 사회복지와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 식의 경제적 모델을 시장 중심의 자유 경쟁의 모델이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무한경쟁과 창의력 고취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이미 고착된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을 더욱 심화시켜 극소수의 부자들에게 부를 몰아주는 최악의 상황만을 연출하게 된다. 부자가 더 큰 부를 향유하는 신기원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과 불평등을 사회가 아닌 개인의 무능 탓으로 돌리는 제도적 장치가 완성된다. 평등의 이념으로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의 길이 있는가? 없다. 불평등이 제도화된다. 그리고 국가는 적극적으로 자본의 이념에 동참해 사회적 가난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면제된 사회’를 체제화하기에 이른다.
1870년대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 혁명과 투쟁의 전위부대가 되는 몽상에 빠져든다. 반정부 시위가 온 대지를 뒤덮은 채 평등과 자유라는 이념을 고취시키기에 몰두 중이었고, 기득권층의 타도를 외치는 파리코뮌들의 뜨거운 구호가 온 대지를 달구며 공명하고 있다. 뜨거웠고 이 세계의 진실과 공명하는 아름다운 울림이었다. 대저 국가란 무엇인가? 무능한 정부와 국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정의의 총과 칼을 들었으며 마침내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으로 숭고한 이념의 진실을 실천하게 된다.
때는 1871년 3월 28일부터 5월 28일 사이. 장소는 프랑스 파리. 파리 광장에 수많은 시민과 노동자들이 모여 민중 봉기를 수행했으며 마침내 혁명적 자치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파리코뮌의 저항운동은 마르크스를 비롯한 좌익운동은 물론 크로포트킨 등을 위시한 많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어 평등과 자유를 이념화하는 커다란 모티프가 된다. 말하자면 파리코뮌은 18세기 프랑스혁명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하는 19세기의 위대한 민중의 운동인데, 이는 무능한 국가를 상대로 벌인 자발적인 시민방위군의 위대한 활약상이다. 물론 대략 2개월 만에 시민군이 전멸하는 것으로 혁명은 종료되지만, 이는 당시 위정자들이나 기득권층 모두를 공포에 몰아놓은 것은 물론, 20세기 혁명을 추동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남아 국가 이데올로기 전체를 부정하는 시민혁명으로 기록된다.
민중은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나향욱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혹은 영화 『내부자들』에서 신문사 논설주간인 이강희(백윤식 분)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고위 관료를 비롯한 이 사회의 기득권층은 철저하게 특권화된 신분적 권력을 향유하는 지배계층으로 탈바꿈하여 자본의 주구로 전락하게 된다. 모든 의미 생산적 행위들은 자본가를 중심으로 권력을 향유하도록 체제 전체가 재편된다. 법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자본은 모든 힘을 관통하는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데, 이는 국가가 제대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 레논이 원했던 것처럼, 국가가 없는 세상은 가장 행복한 세상이거나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는 참 자유가 실현되는 열린사회일 것이다.
민중은 깨어 있어야 한다. 시민은 깨어있는 혁명의 전위부대가 되어 부정부패가 만연한 정부를 감시하는 것은 물론 파리코뮌의 전위적 혁명의 운동처럼 정치세력을 등장해 노동자 중심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은 당위의 명제이지, 아무렇게 주어지는 그렇고 그런 사실이 아니다. 중취독성衆醉獨醒의 자세만이 우리를 평등과 평화가 실현된 참자유의 세계로 데려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참여를 독려하는 시민의 참정권의 주장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령들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하는 당연한 권리이자,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아나키즘운동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권력은 세금을 내는 노동자, 즉 시민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자본이나 관료에게서 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국가 그 자체를 절멸시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아니 역으로 모든 국가는 악을 조장하는 악령들의 제도이자, 만악萬惡의 근원인가? 불평등이 조장되고 제도화된다. 만약 그 말이 옳다면, 모든 악이 행해지는 관료제를 비롯한 제반 정치경제학 전반을 해체시키는 것은 가능한가? 바쿠닌에 의해서 비로소 크게 주목받고 하나의 주의로 정착하게 된 아나키스트운동은 국가라는 제도에 포획된 일련의 정치경제학적 지평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적극적인 운동가였던 네차예프가 수단은 목적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면서, 폭력적 혁명의 필연성을 주창했을 때, 그것 역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필연의 결과라 믿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필연이냐 우연이냐의 의도의 문제가 아니라, 불운하게도 아나키스트가 전하는 일련의 담론적 사유가 분열을 상징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폐기처분할 수 없는 시대에 돌입했다는 점이다. 민족과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서서 분열의 세계상을 초극하기를 염원했지만, 혹은 평등과 절대 자유라는 신념을 통해서 이 세계 전체를 통일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아나키즘에 표백된 일련의 서사는 무정부상태, 즉 반국가적 혁명 투쟁의 이념을 통해서 현실세계를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아름다운 유토피아로 인도한 적이 없다. 그것은 과정 중에 있고, 늘 시도 중이지만, 한 번도 구체화된 적이 없다. 그리고 아나키즘운동에 내포된 일련의 서사는 미완의 기획으로 남은 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운동으로 이월돼 더 큰 과제를 남기게 된다.
그 반대로 국가라는 제도적 장치가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키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더불어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은 법전에 존재하는 허울뿐이지 그 실상은 한낱 유명무실한 허구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권력의 쟁취 기관으로 전락한 대의제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손을 보아야 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따라서 국가라는 제도에 포획된 일련의 이데올로기를 총체적으로 심문하는 물론, 권력이 국민으로 나온다는 헌법 전체를 다시 심의 평결에 붙여야 한다. 51 대 49에 갇힌 허울 좋은 민주주의 이념을 폐기처분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민중의 진정한 힘이 투표라는 제도 너머에서 생성되는 어떤 것임을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도화할 필요성이 있다.
선거투표방식에 함몰된 대의제민주주의는 진실을 왜곡하는 허구이자, 국가의 임무를 수수방관하게 만드는 가장 나쁜 제도이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이 주장한 윤리적 아나키즘의 운동은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제도적 장치라 하겠다. 상부상조하며 연민의 감성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저 타자지향적인 마음이야 말로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형질전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결국은 제도는 방편이고, 좋은 인성을 교육해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인간학적 태도를 양성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인 것 같다.
마치 파울로 프레이리가 『페다고지』와 『희망의 교육학』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학은 교육이라는 계몽의 장치를 통해서 현재 펼쳐지는 최악의 상태보다는 조금은 나은 상태로 진일보할 수 있고 개혁이 가능하다. 결국 참여와 교육·계몽이라는 실천적 과제만이 우리를 신세계로 인도하여 평등과 평화를 제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혁명은 그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스스로 의식하고 자기를 개방하는 가운데 힘을 보태고 나누는 깨어있는 참여의 순간에 저절로 이루어진다.
국가라는 체제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아나키스트운동은 관행처럼 굳어진 체제를 전복하는 역동적인 삶의 운동이자, 결국 개인의 역량을 전체의 힘으로 결집하는 곳에서 생성된 촛불혁명과 같은 그 무엇만이 이 세계를 발본적으로 혁신시켜 참자유와 평등을 제도로 정착시킬 수 있음을 실천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순응하기보다는 저항을 택했고,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음의 사도가 되기를 원했다. 마치 파리코뮌의 혁명 주체들이 죽음의 항거를 통해서 끝까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것처럼, 그/녀들은 국가라는 제도가 만들어놓은 여러 편리한 장치에 만족하지 않았고, 더 나은 삶―시간―세계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혁명의 투사가 되어 인륜적 삶의 주체가 된다.
따라서 존 레논이 설파한 일련의 국가 부정의 서사적 사태는 바쿠닌이나 네차예프가 열망했던 기성 가치에 대한 전복적 의지를 표명한 것이자, 평등과 평화가 실현되는 절대자유라는 이념의 층위를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 의지의 표명이다.
다시 한번 묻는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을 상상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며 쉬운 일이다.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따라서 국가란 권력자들, 즉 기득권층을 위한 편리한 통치의 도구이지, 혹은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은 허울 좋은 껍데기이지, 늘 전복의 의지를 통해서 혁신할 수 있는 혁명의 대상이다.
상상하기에 따라 혹은 상상력이 만들어놓은 자유분방한 길에 의해 우리는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혁명의 전사가 되어 완벽한 의미의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도 있고, 크로포크킨의 이념에 따라서 아름다운 인격적 주체가 되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순한 투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지, 미리 정해진 순서에 따르는 길이 아니다. 참자유가 실현되는 평등사회를 꿈꾸며 혁명의 투사가 되는 몽상에 젖어든다. 아마 그 길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 믿는다.
보론 : 눈 밝은 독자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존 레논이 말하는 국가가 없는 세상은 국민을 착취하는 의미로서의 국가를 말하기보다 국가라는 경계로 인해 전쟁을 하게 되는 세상이라는 의미 같습니다. 국가가 나누어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니까 국가 없다고 상상하면 우리는 모두가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장은 국가의 기능에 대하여 밝히고 국가의 탄생을 중심으로 기술하면서 국가가 없다면 차라리 세계가 하나가 되어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우선 눈 밝은 독자님의 날카로운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물론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인류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는 세계국가나 아니면 국가라는 개념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원시공동체 사회 등을 논하면서 근대 제국주의의 만행을 비판해도 하나의 좋은 구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고대이든 현대이든 상관없이 국가와 국가의 관계는 항상 경쟁하는 힘의 논리가 지배했지, 상생의 조화를 추구하는 평등의 세계는 아닙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초강대국의 논리는 철저하게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통해서 세계 패권국가가 되기를 열망하는데, 이는 이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는 비극의 원인입니다. 민족이든 이념이든 상관없이 국가라는 단위는 항상 다른 국가와 경쟁하며 분열의 세계상을 보여주는데, 아마 존 레논은 이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6. 아름다운 죽음 혹은 영원한 삶에의 욕망
Nothing to kill or die for (살인도 희생도 없는 세상)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가? 살인 행위도 없고, 또 미지의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눈앞에 현전시킬 수 있는가? 낙원의 어디쯤에 이르러 행복 그 자체가 제도인 세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꿈과 이상을 키우던 낭만의 세계는 도저히 불가능한 서사인가? 과연 행복한 죽음이란 어떤 상태이며 인간학은 삶의 최종 형국, 즉 죽음의 서사를 유토피아적 전망으로 포획할 수 있는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천수를 누리거나 유전자공학이나 나노로봇 등의 최첨단 과학을 통해서 불멸의 위치로 고양되는 영원에의 열망은 실현가능한 욕망인가?
가능한 것 같기도 하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하나의 허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존 레논이 꿈꾸는 살인도 희생도 없는 세상, 즉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만드는 것은 현재 불평등이 만연한 자본의 참혹한 형상 속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미래의 역사』에서 알고리즘의 신화가 만들어낸 유토피아적 전망과 자본의 욕망 사이의 거리를 역사적 전망으로 봉합하는 아주 우스운 풍경을 불멸의 서사와 연결해 미래사회가 어떠한지를 역사구성주의에 입각해서 예단하고 있다. 물론 젊은 역사학자의 상상적 지평은 흥미진진하고 그럴듯하게 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만, 알고리즘 사회가 만들어내는 부정적 이슈는 거의 도외시한 채 낙관론을 개진하고 있다.
따라서 삶과 죽음 사이에 매개된 존재의 서사, 즉 불멸의 신적 인간은 자본의 전지전능한 힘과 생명공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적 발전에 힘입어 호모 데우스로 명명되기에 이르는데, 이는 죽음 너머에서 작동하는 영원에의 의지이다. 하라리가 예측한 대로 미래 사회의 현실적 화두가 불멸, 행복, 신성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일부 극소수의 부자들은 알고리즘의 신화와 함께 미래의 언젠가 호모 데우스가 되어 불멸의 생을 누리며 행복을 전유하는 신적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극빈의 빈자 다중은?
아무튼 자본의 무궁무진한 절대적 힘이 생명공학과 의학의 발전을 부추겨 인류를 불멸의 신적 존재로 만들 것이라는 예측은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혹은 미래의 언젠가 실현될 수 있는 개연적인 현사실적 사태이다. 그렇다면 영원에의 의지는 무엇이고, 죽음이라는 몰락의 형상은 어떤 의미를 지닌 반어의 사태인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죽음이라는 절망의 형식을 넘어설 수 있는가? 아니면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한 것처럼, 비동일적인 차이를 동일성의 반복이라는 형식 내부에 위치시키면서 영원의 지점에 이르는가?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넘어설 수 없고, 죽어가는 운명, 즉 대타자에 순응하는 미망의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학은 시간이 지시하는 의미의 진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른다. 지속이었다가 환상으로 급변하는 시간의 형상을 그저 견디며 주어진 시간을 살아갈 뿐, 시간의 저 끝에 위치한 아포리아에 직면해 자기 소멸에 이르면 그뿐이다. 운명이 그/녀들을 시간의 저쪽으로 끌고 가 죽음에 이르면 그것이 끝이다. 하여 진리는 확증될 수 없고 그것이 지시하는 진실의 전모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잘 모른다.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그 다음 모레가 또 다시 다가오는 그 반복의 연속만이 생명을 정의하고 삶의 의미를 지시할 뿐이다. 어쩌면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에 매개된 무수한 존재의 사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이는 미래의 시간에 투사된 영원의 난제일지도 모른다. 그냥 산다. 그냥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삶의 의무이고 목적이자, 인간학적 진실에 이르는 유일한 존재의 길이다.
카프라의 물리학적인 견해나 동양의 불교사상에 나타난 것처럼 우주가 존재이면서 비존재로 휘어진 상대운동이라면, 생명의 현상, 즉 삶과 죽음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운동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도, 비존재도, 그리고 그것에 부가된 시간의 문제도 의식되지 않거나 아무런 문제도 불러일으키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물리학적 견해도 불구하고 삶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사실적인 사태는 존재의 시간, 즉 삶의 존재론적 의미를 가리킴과 동시에 죽음의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서게 된다. 물리―자연이 의식―자연으로 변화된 순간, 삶과 죽음 사이에 거대한 균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계의 불행, 즉 살인과 희생이 만들어지는 갈등의 세계상이다.
아포리아에 휩싸인다. 인간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의 구성체인가? 왜 생명의 형식은 저와 같이 소멸이라는 미망의 형식을 통해 영원에 도달하기를 원하는가? 오늘이 사라졌다, 우리는 어디로 향해 질주는 무의 운동인가? 난경에 이른다. 도저히 삶과 죽음 사이에 매개된 진실을 해명할 도리가 없고 또 존재의 목적이 무엇을 위해 열렸는지 전혀 알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인간학이 명명한 모든 진실이 미망에 가닿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의 운동은 저와 같이 여일하게 동일성을 유지하고, 존재의 여정은 늘 불확정성에 휩싸인 채 회의와 불안의 나날들의 연속이다.
미셸 푸코가 『지식고고학』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누구인지, 왜 이 시·공간에 존재하는지 묻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존재와 시간 사이에 매개된 치유 불가능한 인간학적 함정은 결코 봉합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 사이에 늘 파열의 음성을 만들어 이 세계를 불안의 형식으로 구조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르는 사실 앞에 중언부언 말하기보다 절대 침묵해야 한다. 따라서 시간의 형식을 견디어낸 인간학에 관한 모든 사실들은 죽음을 주체화하는 곳에서 생성된 임시방편, 즉 구차한 미봉책일 뿐, 더는 진리의 진실을 눈앞에 제시하지 못한다.
진실의 현재는 저와 같고, 오늘의 삶은 언제나 분열과 갈등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삶의 시간 속에 죽음의 위치, 특히 살인이나 희생은 어떤 의미인가? 더 나아가 레퀴엠, 즉 죽음의 광시곡이 지시하는 존재의 목적은 어떤 타자성을 표현하고, 왜 인간학은 죽음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하는가? 시간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시간의 본질을 압박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인가? 그러나 문제는 죽음이라는 형식에 포획된 일체의 불가지론이 존재의 현상학 전체를 전도된 의미의 공식, 즉 대타자의 역설적 징후로 드러내 보여줄 뿐, 살인이나 희생에 포획된 일련의 죽음의 서사를 삶을 신비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최악의 사태를 유발하게 된다.
희생제의로 포장된 폭탄테러 혹은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 영원한 화두가 인류 앞에 던져진다. 햄릿 앞에 던져진 ‘To be or Not to be’라는 인간학적 문제가 선택의 결단을 촉구하게 되는데, 이는 모든 비애가 탄생하는 비극의 현재, 즉 증오와 미움이 만들어낸 갈등하는 현실이다. 세계는 늘 전쟁 중이고, 너와 나 사이의 서사는 갈등의 연속이다. 미필적 교사에 의한 희생적 죽음이 강요되고, 살인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된다. 말하자면 삶과 죽음이 의식화된 채 상호 보조를 맞추며 이항대립이라는 형식으로 체제화 된 채 타나토스, 즉 죽음본능을 부추기는 문명의 그늘을 만들게 된다.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던 희망의 서사가 죽음을 유발하는 원한의 서사 밑으로 침몰했으며, 마침내 인간학은 무수한 전쟁과 살인행위를 통해서 죽음이라는 사태와 정면으로 마주서게 된다.
죽음이 스멀스멀 다가와 이 세계를 죽음이라는 공포의 권력으로 지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살인이라는 광기가 온 세상을 뒤덮는다. 홀로코스트 혹은 난징대학살 또는 아우슈비츠. 독가스실이거나 생체실험장 어디쯤에서 무참히 죽어가거나 아니면 총과 칼에 난자를 당해 피 흘리며 고통 속에 죽어간다. 때는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경 진도 7.2.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무자비한 학살이 비로소 자행된다.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이 일어나기 대략 20년 전 일본은 도쿄 근방의 지역에서 민간인 자경단을 중심으로 조선인 대학살을 감행한다. 무차별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이 대량학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죽음을 탈신비화하지 못한 채 늘 비딱하게 스스로를 왜곡하면서, 자신의 존재 서사를 미래의 형식으로 투사하데 실패한 곳에서 생성된 일종의 잔혹극인데, 이는 바로 삶에 도사린 어두운 그림자의 학습효과, 즉 야만성의 표현이다.
공포가 낳은 권력의 힘 혹은 희생제의.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함께 죽음의 칼날이 예리하게 벼려진다. 사냥해야할 인간 희생물이 목표물로 정해졌고 이제 망나니 칼춤을 추면 그만이다. 공포의 권력이 원한 감정으로 전복된 채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루어진다. 1923년 9월경의 조선인학살을 묘사하는 일련의 증언이나 역사적 기록들은 관동대지진으로부터 비화한 일련의 살인 행위에 아무런 목적도 정당한 이유도 없었으며 인간학 전체가 야만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어두운 역사의 불길한 그림자, 즉 광기가 표출된 잔혹극이다.
조작이 일상화된다. 은폐와 왜곡이 공공연하게 행해졌고 추호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더 이상의 발전이 없고 정체된 채 점점 몰락해가는 이유는 일체 아무런 반성도 하지도 않았고, 역사적 진실을 숨기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미봉책이 난무한다. 눈 가리고 야옹하는 식의 정책만이 횡행했고, 국민들은 그것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역사 구성주의가 간악하고 무지몽매한 이유는 역사를 통해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게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에게 역사는 스스로를 되비추는 반성의 거울이 아니라, 조작하거나 은폐하는 삶의 편리한 도구일 뿐이다.
일본이 선진국 대열에서 도태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데,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고 늘 상황논리에 내맡긴 채 자기합리화를 일삼는 국민성이 그/녀들 전체를 멸망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네그리가 『맑스를 넘어선 맑스』에서 말한 것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모순의 사태에 대하여 개혁하려는 발본적인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전도 전복이 필요했고 마침내 혁명이 시대를 혁신하는 명제임을 깨닫게 된다. 문제의 사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모순과 부패를 척결할 의지가 없는 것이며, 결국 문제 그 자체를 덮어버리거나 뭉개는 악순환만을 반복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문제처리방식은 늘 문제의 본질이나 사태의 원인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외면하는 방식, 즉 미봉책으로 일관했으며, 임시방편으로 덮는 가장 나쁜 방식을 취한다. 문제가 점점 커진다.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 원인이 되고, 상처가 덧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은 물론 멸망이라는 최후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게 일본이 직면한 현실이자 수 백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삶의 현재이다. 자기 한계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이나 부패의 현실은 치명적이고, 그들의 멸망은 필연적이다. 속고 속이며, 그 모든 눈속임을 모른 채 수수방관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한다. 오늘도 그/녀들은 최악의 위기상황만을 모면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문제를 덮거나 뭉개는 방식을 채택한다.
반면 한나 아렌트와 지그문트 바우만의 나치군국주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담론적 사유는 그야말로 발본적이다. 역사에 대한 반성은 치열했고, 도덕성에의 요구는 처절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아렌트와 바우만의 홀로코스트, 즉 유태인학살에 대한 태도는 인류문명사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인간학과 세계에 대한 도사린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반성을 요구했다. 어찌 인간이라는 허울을 쓰고 그와 같은 야만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는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학살을 상세하게 기록하면서 민족의 시인 윤동주(강하늘 분)와 그의 친구 송몽규(박정민 분)의 처절한 죽음을 서사화하고 있는데, 이는 또 다른 의미의 홀로코스트를 증언하는 잔혹극에 다름 아니다. 대저 20세기를 뒤흔든 살인과 희생의 제의는 어떤 의미를 지시하는 인류사적 과제인가?
한나 아렌트의 고발, 즉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야만성에 대한 실증적인 증언이라면, 지그문트 바우만의 홀로코스트에 관한 실증적인 논증 고찰은 진리의 진실을 심문하는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사유의 여정이다. 따라서 아렌트의 그것은 묵시록적인 세상에 대한 악마적 징후를 인간학 저변에 깔린 평범성, 즉 선과 악 어디에도 속해 있지도 않고 마음먹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 최악의 일을 벌이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유태인 학살의 주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과정은 악의 평범성을 증명하는 적확한 사례인데, 이는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반드시 괴물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최악의 사례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형언도가 내려진다. 다시 말해서 항소가 기각된 채 아돌프 아이히만은 형장에 이슬로 사라져 악의 평범성을 악의 악마성으로 증언하기에 이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한나 아렌트는 아우슈비츠에서 아이히만이 행한 유태인학살은 순전한 무사유가 만들어낸 시대의 참극, 즉 사유에 저항한 가장 나쁜 결과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반면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방대한 저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아우슈비츠가 만들어낸 일련의 사건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하면서, 그 모든 사태가 서구사회가 만들어낸 문명의 부정적 결과이며, 그것은 제노사이드, 즉 인종적 편견이 만들어낸 절멸의 사태로 인종(유태인)에 관한 뿌리 깊은 공포나 편견과 관련이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홀로코스트는 현대적 관료제와 결합한 형태로 병들고 전염의 염려가 있는 인종을 파괴·격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홀로코스트는 사회 전체의 공익적인 측면에서 권장 사항이었고, 반유태주의와 아우슈비츠학살은 긴밀하게 결속한 채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최악의 상황을 전개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 지금도 여러 가지 합당한 그들만의 이유를 들어 이라크에서 우간다에서 그리고 에티오피아나 인도 등의 지역에서 공공연하게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홀로코스트는 1940년대에만 행해진 인류의 비극이 아니며 알고리즘의 신화가 보편화된 21세기 산업문명사회에서도 암묵적으로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고 있으며 지금도 어디선가 은밀하게 무차별적인 살인 행위가 행해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존 레논이 열망하는 죽음도 희생도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자본의 현실 속에서 실현가능한 세계인가? 사실 이것이 중요한데, 우리는 그러한 세계가 불가능함을 알며 살인과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단지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분명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자, 더 나은 세상에 관한 의미의 표현법이겠지만, 어찌 그것이 가능한 세상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자본의 이념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불평등의 세상 어디에도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 즉 살인도 희생도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의 어디쯤에 당도해 사랑만을 알며 미움과 증오와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살아가고 싶다. 분명 그 길은 누구나 걸어가기를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그곳에 가닿아 진정 아름다운 세계가 실현되었다고 말한 이는 아무도 없다. 아니 그 길은 이제까지 가보지 않은 전인미답의 어려운 길이며,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해 구축해야할 참된 인륜의 세계이다. 따라서 그 길은 반드시 가야만하는 우리 모두의 길이고, 인간학적 소망이 압축·굴절된 진리 그 자체의 길인 동시에 인류 역사를 통틀어 신기원을 여는 가장 위대한 존재의 길이기도 하다.
어쩌면 살인과 희생이 없는 세상은 갈등과 미움이 없는 세상과 거의 동일한 지평으로 맹자의 불인지심不忍之心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생은 보되 죽음은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어딘가에 이 세계를 유토피아로 이끌 참된 마음이 존재한다. 특히 지하철에서 일본인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고 이수현 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것은 맹자의 불인지심을 널리 전파하여 이 세계를 사랑과 관용의 기호로 넘쳐나게 하는 인간애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죽음은 이 세계를 포월하는 아름다운 죽음이자, 이 세계를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만든 아름다운 영혼의 울림이라 하겠다. 하나의 밀알이 썩어 대지를 풍요롭게 만들 듯이,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희생물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조건법을 충족시키는 인륜의 거대한 토대를 구축하는 승화의 고귀한 양식이다.
그 외에도 아수유비츠의 독가스실로 향했던 유태인을 천여 명 넘게 구한 사건을 재현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나 인도의 빈민지역에서 평생을 가난한 자들과 벗하며 그들의 삶과 영혼을 돌본 테레사 수녀는 이 세계가 아직 살만한 공간임을 증명한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따라서 그/녀들의 봉사와 희생정신은 인간학적 진실을 죽음 저 너머로 고양시켜 이 세계 전체를 인륜이 살아 숨 쉬는 상생의 공간으로 만든다.
이제 이 세상은 살인도 없고, 헛되이 죽음에 내몰리는 생명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오늘의 꿈을 공유하는 아무런 갈등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존 레논의 노래가 이 세계의 모든 사람과 공명하며 하나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어렴풋이 마음속에서 그려본다. 마음이 가닿는 곳에 진실은 오롯이 빛나고, 마음으로 화답하는 그 지대에 바로 진리가 눈앞에 현전하게 된다. 따라서 진리의 진실은 마음으로 공명하는 이 세계의 울림, 즉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을 주며 상생의 기운으로 빛나는 사랑의 울림이다.
세상에 가장 어려운 것이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일이지만, 마음은 먹기 나름이지, 특별한 그 무엇이 이 세계를 변화시킨다고 믿지 않는다. 죽임을 당하지 않고, 죽음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광경을 몽상해본다. 유유자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거리낌이 없었고, 또 그 자체로 모든 것이 구비된 만족의 상태였다. 아마 이 세계와 친밀하게 호흡하며 평화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세계는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기 이전의 세상, 즉 노동도 없고, 갈등도 없고, 죽음도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영원의 세상 어디쯤일 것이다. 아마 그곳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 자본의 이념이 전혀 통용이 되지 않는 세상 그 어디 근방일 것이다.
7. 신의 이름으로 : 타락한 영혼의 표상 혹은 마지막 남은 양심
And no religion, too(종교조차 없는 그런 곳이 있다고)
종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각 지역마다 문화적 토대가 다르지만, 그 다양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지향하는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특히 레비스토로스가 명명한 선과 악의 이항대립적인 사유의 체계가 종교를 떠받치는 근간으로 여겨지지만, 그보다 더 심원한 것은 우주와 천지만물에 대한 근원적 물음, 즉 형이상학적 질문에 친절하게 화답하면서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인간 영혼에 관한 문제를 보다 천착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선한 영향력과 목적에 수렴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참된 본질인 것 같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 운명의 타자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어떤 징후이고, 영혼은 어떤 존재의 여정을 지시하며 어떤 합목적적 에네르기인가? 등등의 수많은 본질적인 물음들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면서, 삶의 모든 방향성을 선함으로 이끌어가는 순기능을 지닌 인륜성의 총아가 바로 종교의 참모습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종교가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하면서 이 세계 전체를 분열시키는 무수한 상징, 즉 도그마를 생산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사랑과 자비의 상징물이 도그마에 빠져 분열과 증오의 상징으로 둔갑한 채 이 세계 전체를 전쟁의 도가니로 만든다. 사랑과 자비라는 애초의 목적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대립과 갈등의 체제가 구조화된다. 다시 말해서 신성에 대한 전유적 기록물인 경전은 무수히 해석·분화되어 인간학을 파편적 의식의 구성물로 분열·착종시키는데, 이는 모든 갈등의 원인이자, 종국에는 이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는 근본원인이다.
물론 종교가 악을 옹호하거나 전쟁을 지지하는 상징의 체계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지만,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각자 믿고 의지하는 신의 이름으로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며 믿음을 실천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근본주의자니 원리주의자니 하는 종교적 신념의 소유자들이 자기와 다른 종교적 이념이나 신념을 결코 포용하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열은 극에 달했고, 증오에 가득 찬 전쟁은 신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자행된다. 사랑의 하나님과 자비의 부처님이 무한히 분화되어 자기네끼리 종파적 종교전쟁을 벌였으며,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이단으로 몰아쳐 너무도 많은 테러와 전쟁을 일으키는 잔혹극을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하게 분화한 종교 원리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은 이 세계의 악을 수수방관하는 파렴치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배타적으로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집단에 적극적으로 테러를 범한다.
수단은 목적을 정당화한다. 사랑과 자비가 변질된다. 아니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련의 사태는 악마적일 뿐만 아니라, 옴진리교처럼 사린독가스 테러행위를 진리의 이름으로 호도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 왜 그런가? 왜 종교는 진리의 이름으로 신의 대리자를 사칭하면서 모든 악을 진리의 실현처럼 믿고 의지하게 만드는가? 종교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악의 권능이 선의 권능과 동등할 뿐만 아니라, 악이라는 공포의 권력에 포획되어 제대로 된 판단능력을 마비·상실했기 때문이리라. 마르크스가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와 결코 다르지 않는데, 이는 종교가 선을 권장하기보다는 악의적으로 도용되어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데 이용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나적 주술에 빠진 사람처럼 좀비가 되어 자살폭탄테러를 지하드, 즉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기꺼이 죽음에 이른다. 9.11테러가 그렇고, 십자군전쟁이 그렇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이 그렇듯, 이 세계는 아직도 신의 이름으로 대량학살을 자행하거나 여전히 전쟁을 수행중이다. 따라서 종교는 현재 자행되는 모든 악행의 근원이고, 분열을 조장하는 악의 축까지는 아니지만, 이 세계에서 자행되는 전쟁과 비극을 이끄는 서사적 주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거의 모든 역사 속 비극적 서사는 종교적 충돌이 만든, 신과 함께 치러진 처참한 잔혹극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도 무수한 전쟁이 일어나지만, 그 주체가 바로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종교는 필요악이다. 아니 종교는 선으로 위장한 악의 사도이거나 특히 유일신을 믿고 의지하는 종교는 독단에 빠진 채 이기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일방통행 식의 사랑의 사도이다. 자기만을 믿고 따르라는 독단에 빠진 종교는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를 양산하는 롤 모델이 되는데, 그것이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종교적 도그마의 치명적인 오류이다. 생각보다 인간은 이성적이 않고, 절대 이성의 표준에 따라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와 반대로 인간학은 여전히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의 대상이고, 탈신비화를 통해서 마나적 주술에서 깨어나야 한다.
각성에의 요구는 필연적이고, 계몽의 의지는 시대사적 명제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종교가 현대사회에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따라서 종교에 포획된 일련의 신비적 서사가 신성이라는 이름의 가공할 힘으로 중무한 채 마법적 신념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어찌 그것이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최후의 계몽 대상임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종교가 신비의 탈을 벗고 완벽하게 계몽된다면, 혹은 삶과 죽음 사이에 매개된 일련의 공포를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풀어낼 수 있다면, 종교가 이 세상에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천체물리학과 생명공학 등의 여타 과학적 전망이 보다 완벽한 수준에 도달하여 인간의 앎에의 의지가 거대한 우주의 본질과 생명의 신비를 풀어낸 순간, 종교는 더 이상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도구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 여타의 기성종교들은 그 본래적인 기능, 즉 신성과 초월의 신적 의지에 입각한 양심과 도덕의 선한 의무를 망각한 채 자본의 고도의 수사적 전력과 보조를 맞추어 영혼을 담보로 한 문화산업으로 그 면모를 일신해가고 있다. 물론 그것은 면죄부를 팔던 루터의 종교개혁시대와 거의 동일한 궤도 위에서 운용되고 있지만, 따라서 교회나 사찰의 부는 세습이 가능한 사유재산으로 변질된 채 탈세의 전당이 되어가고 있지만, 어찌 종교가 가진 참된 인륜의 가치, 즉 아름다운 삶에 대한 욕구와 순결한 영혼의 서사를 무의미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종교는 아직 남아있는 인류사적 소망, 즉 영혼과 육체에 매개된 신성과 초월의 위대한 사명을 숙명적으로 걸머진 숭고한 정신의 과업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종교가 가진 본래적 가치, 즉 신성한 영혼을 다루는 문제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숭고한 가치이다.
신의 이름으로 부르는 경건한 노래가 이 우주 속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상상해본다. 아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언덕의 어디쯤으로 우리를 데려가 평안함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사랑의 신은 이내 분노의 신으로 변신해 정의의 칼날을 휘두를 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어 악의 제국을 건설하게 만든다. 마치 선악이원론(아후라마즈다와 아리만의 투쟁)에 근간을 둔 조로아스터교처럼, 종교는 불의 심판을 통해서 인간학 전체를 단죄하거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이는 종교가 권능 전체를 세속적인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시킨 것인 동시에 종교를 타락시키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종교적 이념이 펼쳐내는 선과 악을 인간 이해의 관계로 의인화하여 각자 편리한 방식으로 전유하거나 재구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분열을 야기하는 갈등의 원인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이념은 쉴라이어마허나 가다머가 말한 것처럼 다양한 해석학적 전유를 통해서 지평 융합이라는 창조적 전망도 발명해내기도 하지만, 하여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종교적 심성으로 봉합해 이 세계를 평화의 세계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모든 이해를 망각하게 만들거나 갈등의 씨앗이 되어 편견이라는 악순환을 만들어낸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까지 전개된 교리해석이나 경전에 나타난 상징의 해석학적 측면은 앎에의 의지를 진리에의 의지로 고양시키기보다는 분열이나 갈등을 야기하는 부정적 측면에 더 노출된 것 같다. 아니 종교적 상징은 무한히 분화되어 무수한 종파주의를 만들어 서로 간에 생사를 건 전쟁을 벌이는데, 그 모두가 지하드, 즉 성전의 모습을 띠거나 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한 지극한 인간의 모습을 투사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의인화의 결과물이다. 편견과 선판단에 의해 지배받는 종교는 전쟁의 도구, 즉 본래적인 자기를 찾아가는 삶의 위안이나 깨달음의 전언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념의 도구로 활용되어 무수한 전쟁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9.11테러에 의해 무역센터 건물이 무너져 내려 3천명의 사망자와 최소 6천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순간, 이미 신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죽어있을지도 모른다. 종교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지는 못했지만, 이제 막 종교가 악마의 화신으로 변신해 이 세계가 전쟁과 테러의 현장임을 증명해보이고 있다. 마치 이 세계가 신의 이름으로 재현된 처참한 죽음의 공간이나 된 것처럼, 종교에서 비롯한 원한 감정은 서로가 서로를 악마화하는 분열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 어찌 신의 이름으로 저와 같은 테러를 범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과 자비의 숭고한 이념이 타나토스(죽음본능)으로 변질되었으며 마침내 종교 사이사이에 치유 불가능한 원한감정을 매개시켜 문화를 통합 불가능한 대립물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왜 그런가? 왜 문화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상호 이해 가능한 지평으로 열리지 않는가? 아마 아랍 대 이스라엘(유럽)의 분쟁은 좀처럼 해결이 나지 않을 것이고 세계3차 대전의 일어날 빌미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게오르그 한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말한 것처럼, 문화는 지평과 지평이 서로 융합해 상생의 구조를 만들 수도 있지만, 반면 부정적인 경우에 문화지평은 편견이나 선단판이라는 장애물에 의해 파열하고 해체되어 분열의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특히 9.11테러는 문명과 문명 사이에서 빚어진 최대의 비극적 상징인데, 이는 구원과 안식을 상징하는 종교가 변질된 최악의 결과이다. 이제 종교는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는 상징체가 아니다. 이제 종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인류 구원의 교의가 아니라, 악마 그 자체이다.
교리의 전유적 이해를 통해서 편견이나 선판단을 양산했고, 마침내 종교가 이 세계의 분열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특히 종교에서 양산된 편견이나 선판단은 서구 기독교 전통 내에서 유일신과 원죄관념으로 굳어져 여타의 다른 종교와 타협하지 못하는 편협성을 드러냈으며, 이는 종교적 관용이나 배려와 무관하게 하나의 도그마로 정착해 여타 다른 종교들과 상호 소통하거나 공존할 수 있는 토대를 애초부터 거부하는 배타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교의는 절대적이고, 믿음의 뿌리는 너무도 견고해 나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타자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신이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신인가? 더 나아가 절대 심급으로 존재하는 저 유일신은 어떤 창조력을 구비한 전지전능의 실재인가?
한 유일신(하나님)이 또 다른 유일신(알라신)과 대립하여 유럽 대 아랍이라는 불구대천지 원수를 만들게 된다. 타협이 불가능하고, 상호 이해하지 가능하지 않은 곳에 서로 다른 신이 위치하게 된다. 신들의 대리전 혹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유일신. 이제 이 세계는 신들이 만들어놓은 완벽한 천국이 아니라, 인간의 추악한 욕망으로 변질되어 무수한 전쟁을 일으키며 자기 이해를 구하는 타락한 세상의 의인화된 주체로 몰락하게 된다.
그리고 완전한 신의 의도에 따라 창조된 무결점의 세계가 뱀의 유혹적인 혀에 의해 옥에 티를 만드는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게 된다. 평화가 깨지고 악이 이 세계에 들어왔으며 신의 위대한 창조물이 불완전하게 창조되었음을 시인하게 된다. 신이 정한 계율을 어긴 대가로 낙원에서 쫓겨나, 남자는 노동을 여자는 출산을 해야 했으며, 이제 이 세계는 섭리의 장소에서 무수한 갈등을 야기하는 분열의 장소로 극화된다. 까닭은 인간에게 노동을 통한 지혜가 생겼기 때문인데, 이는 이 세계를 발전시키는 동력인 동시에 분열·파괴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계율에 의해 만들어진 신의 기획이 선악과를 따는 행위와 동시에 산산이 파괴되었으며, 이제 불의 심판을 향해 내달리는 시간만이 종말론적으로 인간에게 허락된다.
기독교신학이 픽션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유일신에 매개된 일련의 서사가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망상의 산물일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의 온유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예수와 달리 구약에 표현된 기독교의 신은 잔인하고 복수심 많고 변덕스럽고 불공평한, 하여 끔찍한 성격을 지닌 존재이다. 더 나아가 도킨스는 신 가설, 즉 창조적 지성에 의해 계획·설계된 것이 기성종교의 프레임임을 증언하고 있고, 신은 또한 망상, 즉 그것도 유해한 망상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더 이상 계몽의 대상이 없이 완전한 이성이 구현되는 사회로 급진화될 수만 있다면, 혹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에서 증언했던 것처럼, 불합리하기 때문에 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저 위대한 역설에 현혹되지 않을 만큼 과학적 합리성이 보편화된 사회가 도래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알고리즘의 신화가 점점 더 보편화되어 AGI 상용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신의 이름을 빙자해 작당 모의 중이고, 수시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예루살렘 어디쯤에선 자살폭탄테러가 행해지고 있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인 3만 명 넘게 사망했다.
참극을 알리는 비보가 전달되지만, 세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할 뿐, 전쟁을 중지하거나 쉽게 중재하지 못한다. 종교적 분쟁이 만든 뿌리 깊은 원한이 정치적 분쟁으로 극화되어 화해가 불가능한 지경에 도달했다. 따라서 유태인 대 아랍의 전쟁은 서구 기독교 대 이슬람의 대결구도를 우회하는 뿌리 깊은 증오의 소산이자,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계속해서 헤집는 분열의 극단적 양상이다. 마치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벽하게 절멸시키거나 굴복시키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전쟁과 같은 양상이 바로 이스라엘 대 아랍의 전쟁이다.
따라서 종교의 대리전 양상을 띠는 이스라엘 대 아랍국가의 국지전은 세계 3차 대전을 우회하는 소모전이거나, 아니면 서구유럽 대 아랍제국과의 세계전쟁을 유발하는 불쏘시게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 세상에 편재해 있다고 믿어지는 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루시엥 골드만의 『숨은 신』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의 유일신은 은밀하게 숨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이 세계 전체를 구원에 이르도록 만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더 나아가 사랑의 신은 이 거대한 우주 속에 은밀하게 숨어 아무도 모르게 선행을 하며 이 세계 전체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 노력하고 있을 게다.
물론 자기만을 믿고 의지하기를 바라는 유일신이 그러한 일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따라서 이신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은 이 세계의 일에 거의 무관심한 채 자신의 임무를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찌 신의 통제력이 무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신은 인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양심이다. 물론 니체의 선언이후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됐고, 점점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종교는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강력한 무기이자, 영혼의 기표인 것만은 분명하다.
언제나 신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놓는 것이 좋다.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처럼 종교를 믿고 의지하며 절망의 자락에서 위안을 주는 마지막 양심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이해관계를 넘어선 곳에서 너와 나의 서사를 사랑의 여율로 탄주하는 희망의 종교가 남아있기를 바란다.
8. 평화를 제도화하기 : 공존과 경쟁 사이에서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모든 사람들이 평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상상해 봐요)
샬롬(shalom)! 그대 아직도 평화라는 이념의 구성물을 이 세계 속에 실현가능하고 생각하는가? 오늘도 빈자 다중을 떠올리며 그림시와 네그리가 살아낸 이탈리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본다. 혁명은 무엇이고, 평등은 어떤 이데올로기와 마주 선 평화의 제도인가? 유토피아를 꿈꾼다. 아니 유토피아를 제도화하기 위해 공존과 경쟁 사이에서 머뭇거리다 절망의 심연으로 추락하게 된다.
자본의 이념이 이 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의 교의에 따라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그/녀들은 언제나 전쟁 중이었다. 하루도 편히 쉬지 못했고, 늘 분주하게 이익을 추구하며 위기 속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모두가 각자 자신의 소임에 따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익을 추구하며 공존·평온한 듯했지만, 이내 갈등이 폭발해 파업을 하거나 직장폐쇄라는 극단의 조치가 내려진 후 갑자기 경제대공황이 몰아닥친다. 자본의 이념이 우리를 발전으로 이끌어 풍요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믿게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잉여의 착취가 만들어낸 착시현상임을 이내 깨닫게 된다. 평화는 요원하고, 유토피아는 부자들만 누리는 특권이다.
계급이 자본의 서열에 의해 매겨진다. 샬롬. 그대 빈자의 하루는 근심 걱정 없이 여전히 평안하신가? 매일매일 그/녀들, 즉 빈자 다중의 삶―시간―세계에 대하여 안부를 묻는다. 더불어 영혼의 안식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향유하면서 이 세계가 바로 지복이 펼쳐지는 삶이 천국인지 되묻는다. 그러나 이러한 안일한 물음과 달리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고통의 연속이거나 슬픔으로 점철된 비애의 나날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후기산업사회는 공존의 미학적 가치가 존중받는 상생의 사회가 아니라, 무수한 경쟁에 내던져진 채 욕망의 소비를 부추기는 물질 중심의 사회로 급진화되었기 때문이다.
돈은 이 세계를 이끄는 제일원리로 둔갑했다. 따라서 돈은 무능을 전지전능한 힘으로, 불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마나적 주술처럼 인간학과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 심급으로 작동하고 있다. 돈 나고 사람 났지, 사람 나고 돈 났는 세상 아닌 물질만능주의가 인간학을 지배하는 굳건한 체제로 물화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자본은 공존과 상생에 앞서 추구해야할 가치의 모든 것이자, 진리의 진실을 추구하는 절대기호, 즉 우리 모두를 매혹시키는 우주적 실재처럼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평화가 깨진다. 각자 욕망대로 움직이며 한시도 이윤추구를 위해 손을 놓는 경우가 없다. 왜냐하면 잠시 방심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눈앞의 잉여를 손쉽게 낚아채 갈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이 부추겨진다. 이 세계는 한 번도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에 의해 조화롭게 흘러간 적이 없으며 언제나 이윤추구, 즉 잉여를 탈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갈등과 위기의 연속이었다.
종국에는 경제대공황 혹은 경제 위기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자본에 속한 모든 것들이 파탄나기에 이른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의 이념은 인간에 속한 모든 것들을 잘근잘근 갈아버리는 악마의 맷돌이지, 상생과 평화로 이끄는 아름다운 미적 기호가 아니다. 아니 역으로 자본의 현실은 평화와 상생을 추구하기보다는 경쟁을 부추기며 갈등을 유발하게 만드는 것이 최대의 목적인데, 이는 항상 자본의 가치를 확대재생산하는 곳에서 생성된 잉여 탈취를 왜곡·은폐하는 착취의 제도화현상이다.
현실이 그와 같다면, 인간학은 평화의 이념을 추구하며 그것을 제도화할 수 있는가? 불평등이 제도화된다. 하루하루가 평온하고 화목하여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가능한가? 존 레논은 상상 속에서 쉽다고 노래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 속에서 그것은 가장 어려운 해결 불가능한 난제인 것 같다. 매일매일 경쟁에 내몰리는 우리네 일상은 평온이 아니라, 늘 갈등을 부추기거나 타인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왜 우리는 공존이라는 아름다운 인륜의 원칙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상생의 공간을 만들지 못한 채 평등과 평화가 아닌 불평등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가?
이 세계는 점점 평등해질 수 없는 체제로 그 구조를 공공이 해가는 것 같다. 더 많이 소유하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해 노력하는 경쟁의 체제를 학습해왔지, 상생하는 원리를 교육하는 평화의 세계를 한 번도 추구했던 적이 없다. 왜 그런가? 왜 평화에 기반 한 상생과 공존은 명분에만 치우칠 뿐, 삶을 지배하는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가? 더 나아가 왜 인생의 목적은 버리거나 비우는 적멸이 아니라, 많은 것을 채우거나 성공이라는 허상을 좇아 자기 낭비에 이르는가? 태어나서 성장·발전하다 늙어 죽어가는 일련의 인생 과정은 어떤 의미의 기호를 색인한 존재의 운동인가?
참 쉽지 않은 문제이고 반드시 해결해야만 인간학적 과제이지만, 이 세계가 평화가 아닌 물질 중심의 세계로 점점 더 강화되는 것은 명백하다. 세상에서 가장 척박한 삶의 터전이지만, 하여 현재는 중국에 합병되어 망명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형국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가장 축복받은 땅이자 운명이라 생각하는 천진하고 평화로운 티베트인의 마음처럼 생의 과정 전체를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평화 그 자체를 제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싸우지 않고, 욕망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삶 그 자체를 감사와 행복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욕망을 부추기지 않으며 항상 나눔을 통해서 아름다운 인륜의 체계를 구축하는 상생의 여율이다.
염화미소 혹은 이심전심을 통한 영혼의 교감. 상호 이해에 의해 의사소통적 합일에 이르는 대통합의 장을 마련하는 길이 평화를 구축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평화롭지 못한 것은 늘 평등의 이념을 제도로 정착시키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을 감사와 행복으로 형질전환해 경쟁이라는 욕망을 최소화하는데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자 이익 추구를 최대 목적으로 삼은 자본주의가 삶을 지배하는 경제적 원리로 존재하는 한, 평화의 세상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학의 도정이 늘 실패의 연속이었고, 또 언제나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것으로 이데올로기의 조종술을 봉인하게 된다.
이윤 추구에만 몰두하는 자본 중심의 삶은 저와 같고, 늘 평화로운 삶으로부터 배제된 채 경쟁과 갈등의 나날들의 연속이다. 이를테면 칼 폴라니가 말한 것처럼, 삶의 토대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경제, 즉 공동체적인 가치를 도외시하지 않는 경제체제의 구축만이 우리 모두를 평화의 세계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 이후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한 고전경제학은 인륜성에 토대를 둔 삶 중심의 정치경제학적인 모델이 아니라, 그야말로 물질적 생산능력, 즉 자본의 확대재생산만을 염두에 둔 착취적 모델이다. 그리고 자본의 물리적인 힘이 모든 것을 지배·통치하는 물질적 야만의 시대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자명고를 울리고 있다.
이를테면 모든 이념적 체제가 자본의 생산능력과 그것의 전유 형태로 사유화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이 세계를 욕망의 체제로 분할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회이다. 자본은 평화에 속할 수 없는 체제이다. 사랑의 이해도 없고 타자에 대한 배려도 없다. 말하자면 고도의 산업사회, 즉 물질과학문명사회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공존에 바탕을 둔 상생의 원리가 아니라 경쟁의 원리가 정치경제학 내부에 뿌리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념 속에 경쟁은 더 나은 생산력을 구비하는 촉매제이자, 밝은 미래를 보장하는 보증수표처럼 작용하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열린 희망의 서사가 아니라 부자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제도적 장치이지, 빈자 다중을 위해 열린 경쟁이 아니다.
게토로 내몰린다. 어둠 속에서 빈민가 어디쯤을 배회한다. 평등과 평화라는 허울에 속아 지난한 노동의 하루를 견디었으며 마침내 이 세계 전체가 불평등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늘도 자본의 체제에 순응하며 타인의 고통에 습관적으로 침묵하거나 뒤로 한 채 자기 욕망 충족에 길들여진다. 부끄러움을 모른다. 아니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직진했으며, 그 모든 잉여를 탈취하여 극소수의 부자들이 전유하도록 제도 자체를 완성해버린다.
물론 독과점 금지법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 부자들의 탈세나 탈법적 행위를 심판하려들지 않는다. 정치경제학은 물론 문화 전체를 자본이 쥐고 흔들고, 이 세계는 부자들이 잉여를 탈취하기에 편리한 방식으로 제도화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평화를 제도화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허상처럼 보이는 이유는 여기 있는데, 이는 부자들에게 빈자 다중은 아무런 생산력도 구매력도 겸비하지 않은 게토에 버려진 무관심의 대상이자, 잉여를 허비하는 쓸모없는 이 사회의 기식자이기 때문이다.
빈자 다중이 모여든 빈민촌, 즉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언덕 어디쯤에 있는 파벨라에 모여들어 마약조직이나 갱단의 각축장이 되거나 게토로 떠밀려 불안과 공포의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총성이 오간다. 바로 지금 한 청소년이 총에 맞아 즉사했다. 그곳은 살아있는 지옥, 즉 경찰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온갖 범법과 위법이 행해지는 무법천지의 세상이다. 평화라는 허울을 믿지 않는 것이 좋으며 그것은 단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부에 의해 계급이 결정되어 있는 한, 혹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한, 평화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미사여구일 뿐, 이 세계가 불평등하다는 사실만을 증언할 뿐이다. 평화를 노래하고 싶다면, 파벨라에 먼저 들어가 마약조직과 갱단의 노예로 전락한 빈자 다중을 우선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이 세상 부의 논리에서 소외된 그/녀들이 인정하는 평화만 참된 평화로 용인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평화는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이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진정한 토대구조이자, 게토로 내몰린 빈자 다중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만드는 데에서 생성된 상생의 역동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이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자발적으로 내려놓거나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디서부터 잘못이 시작되었는가? 자본은 자신에게 허여된 특권을 소외된 타자, 즉 빈자 다중이라 불리는 게토의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하거나 나누기를 원치 않으며 계속해서 특권을 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자본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가? 현재까지 시도했던 일련의 개혁적 실험이 다 실패했다.
그저 자본의 존재양식은 극소수만이 평화의 안쪽에 존재할 수 있는 일종의 패스포트이자, 특권으로 둘러쳐진 거대한 장벽이다. 빈자 다중이 감히 넘볼 수도 없고, 넘어설 수 없는 특권화된 위치에 자본이 존재하는 한, 평화는 거짓을 확산시키는 위장된 환상이자, 이 세계를 거짓현실로 호도하며 잉여탈취를 돕는 인민의 기생충이다. 불평등이 평화로 위장된다. 마치 인도의 카스트가 삶이자 숙명이고, 인간학 전체를 지배하는 문화의 모든 것을 함의하는 거부 불가능한 라캉적인 의미의 대타자로 존재하듯이, 자본의 경계면에 위치한 그 모든 존재론적 양태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적 삶의 완벽한 기호이다.
자본의 기획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는데, 수백 년에 걸쳐 이룩된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철저하게 노동자를 자본으로부터 소외·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제도화를 완수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통한 잉여탈취를 합법화시켰다는 점이다. 이제 막 자본의 왕국이 완벽하게 구축되었으며 마침내 이 세계는 자본가만을 세상으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노동자는 넘쳐나지만, 늘 일자리는 노동인구를 초과하지 않는 상황으로 설계되어 고용시장을 자본가 편의로 제도화하기에 이른다.
프랑스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비비안느 포레스테는 『경제적 공포』라는 끔찍한 저서에서 현대문명사회에 도사린 쓸모없는 잉여 존재의 다양한 양태를 가감 없이 서술하면서 자본의 체계 내에 만연한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내쫓긴 자들이자, 게토에 갇힌 자이기도 한 빈자 다중은 일자리를 요구하지만, 노동을 하며 최소한의 살아갈 권리조차 부정한 채 게토에 유폐되어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따라서 포레스테의 그것은 존재 그 자체를 부정당한 비참한 자들의 삶―시간―세계를 소설가적 필치로 세밀하게 그려내면서, 자본이 펼쳐내는 모순의 세계상을 경제적 공포라는 용어로 고발·비판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은 평화로운 삶을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평화에의 요구가 그 자체로 현실을 호도하는 위장된 거짓현실임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자본의 요구는 이윤, 잉여탈취와 착취이지, 평화가 아니다.
따라서 자본의 현실은 나눔과 공존의 현실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평화는 함께 나누는 것에서 생성되는 공존의 미학이지만, 그 정반대로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만들어낸 경제적 자유가 만들어낸 자본의 환상, 즉 물질적 풍요가 만들어내는 일련의 서사적 전망은 그 어디에도 무상 원조나 증여로 나누는 평등과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평화는 인륜적 가치를 고양시켜 서로가 서로에게 화답하며 상호 공명하는 곳에서 생성된 상생의 리듬이지, 단지 물질적 욕구충족이 가져오는 풍요로움을 야기하는 자본의 이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도의 산업문명 사회로 진입해가는 21세기의 현실이 그다지 평화롭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물질적 풍요로움이 최상의 상태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물질적 풍요로움에 선행하는 마음―나눔의 실천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물질의 풍요로움은 차고 넘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부양하고도 남을 정도로 풍족하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나눔을 식량―나눔으로 이행시켜 온 인류가 더불어 함께 공존하기를 희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소말리아나 이디오피아 난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아프카니스탄의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최소한의 인권 보장과 기아로부터 해방이 실현되지 않는 한, 평화는 영원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인류의 양심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세계 도처에 널려있는 21세기의 굶주림현상은 19세기나 20세기의 그것과 달리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만든 인위적인 배고픔이지 식량 부족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니다. 식량은 남아돈다. 식량은 남아돌아 창고에서 썩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격조절을 위해 대량으로 폐기처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 중무장한 다국적기업들이 식량자원을 독과점 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판매유통망을 통해서 식량공급을 조절하며 이윤추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자본의 현실은 저와 같고, 늘 더 많은 부를 쫓으며 이 세계를 착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윤추구, 즉 잉여를 탈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의 체제는 그 자체로 평화를 거부하는 반정립적인 테제이자,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형식이지, 평화를 제도화하는 숭고한 인륜의 형식이 아니다. 그저 자기 배만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마침내 타자를 경쟁의 상대로만 인식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21세기 자본의 현실이 추악하고 참담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데, 이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만들어낸 경제중심의 발전사관 전체가 자본의 이윤추구를 신비화하는 곳에서 생성된 잉여탈취 목적을 은폐·왜곡시킨 가면의 조종술이기 때문이다.
허두로 내세운 자유는 모든 진실을 은폐하는 위장의 도구이고, 진실은 불평등을 제도화하는 불온한 이념이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이 사악한 이유는 그들의 경제학적 지평 내부에 민중이나 빈자 다중이 설 자리를 애초부터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자들을 더 부유하게 만드는데 기여했지, 평화와 행복을 제도화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이념 어디에도 평화를 지향하는 민중의 목소리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늘 그들의 이념은 귀족주의로 중무장한 채 가난한 빈자 다중의 편에 선 척 그럴듯하게 거짓 쇼만 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의 본질은 불평등이고, 그것의 이념적 현실은 사적 재산권의 자유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이념과 함께 체제의 중심에 자본이 있고, 모든 구조는 자본의 이념에 봉사하도록 적극적으로 교육하며 길들여간다. 이제 평등과 평화를 이념으로 지향하는 좌파의 이데올로기가 폐기처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등과 평화는 자본의 자유를 더욱더 강화하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개인의 자유와 긴밀하게 결합한 자본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권한으로 탈바꿈한 채 자본 그 자체를 하나의 절대 자유의 표본으로 숭상하는 물신화의 극단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세계 도처에서 가난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만, 더 나아가 풍년으로 인해 가격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농업생산물을 의도적으로 폐기처분하는 다국적기업들의 무자비한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지만, 이 세계는 인류 전체를 위한 평화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화된 이윤추구를 지상 최대의 목적으로 설정하고선, 그것이 절대 침해 불가능한 권리임을 옹호하고 있다.
샬롬. 여전히 그대는 평안하신가? 아직도 그/녀들은 평화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다는 몽상 속에 살아가는가? 잘 모르겠다. 나의 하루하루가 무엇을 위해 쓰이는지, 그리고 어떤 이념에 봉사하는지, 전혀 모른 채 자기 숙명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마 평화는 마음의 언저리 어디쯤에 자발적으로 생성되는 것이지, 물질적 풍요로움이 만들어내는 환상이나 가상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따라서 완벽한 평화가 실현되는 세계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만 가능한 그야말로 꿈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학이라는 명제 안에서 평화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아 실현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이 가능하지 않고 해서 혹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고 해서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인류 전체가 평화로 향하는 길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길이기는 하지만, 영원한 꿈으로 남아서 인류 전체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희망으로 남았으면 한다. 아직 우리에게는 평화를 지향하는 평등의 세계가 남아있기에 어떠한 환멸이 몰아닥쳐도 살아남을 꿈이었다고 선언했으면 좋겠다.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평등과 평화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세계를……. 그것이 허구가 아니라 실재임을 확신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더 나은 세계는 자신만의 욕망을 충족해 자기 향락을 극단화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우리라는 의식으로 고양되어 이 세계가 인륜적 공동체의 삶의 터전임을 증명했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는다. 더불어 절망을 믿지 않는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평화로운 삶의 풍경이 삶의 진정한 실재임을 눈앞에서 확인했으면 좋겠다.
9. 무소유 : 자본 저 너머의 세상 혹은 공산주의라는 허구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소유물이 없는 삶을 상상해 봐요. 잘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생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록 밴드 캔자스가 「Dust in the wind」에서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바람 속의 먼지라고 말했을 때, 혹은 천금을 주어도 단 일분의 시간도 살 수 없다고 선언했을 때, 더 나아가 집착하지 마라. 아무 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경고했을 때, 인간학은 어떤 의미의 체계를 구축하는 서사의 운동인가? 무한한 자연과 허망한 죽음 앞에 겸허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 최선의 삶인 것 같다.
그러나 캔자스의 경고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는 그와 정반대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불법과 탈법이 난무했으며, 종국에는 서슴없이 전쟁을 일삼으며 야만의 제국을 건설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본의 이념이 야만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데, 그것은 잉여탈취를 합법화하는 가운데 비인간화현상을 노골화하였기 때문이다. 자본 앞에 모든 것이 도구화됨은 물론 너와 나 사이의 관계 전체를 물화시키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은 온전한 자기로 존재하기를 부정·거부하면서, 소유의 양식이 존재의 양식을 압도하는 물질지향의 삶을 부추겨 비인간화경향, 즉 인간학 전체를 물화시키기기에 앞장선다.
눈을 감고 상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생각에 잠긴다. 어떤 삶이 최선인가? 소유하는 삶인가? 존재하는 삶인가? 무엇을 상상하건 가능하고, 그것은 각자 선택의 문제이지만, 그러나 존재하는 삶은 우리 모두를 신기원으로 데려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마음먹기가 어렵지 마음만 다잡으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유토피아에 이르러 상호 공명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대부분 소유하는 삶을 선택해 무수한 갈등을 일으켜 분열의 대극점에 서있고, 또 전쟁의 포화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잔혹극을 연출하고 있다.
아힘사. 무소유. 불살생. 분별하지 않음. 자이나교도의 하루. 두 눈 감고 묵상하며 기도를 올린다. 선한 영향력이 온 세상에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주로 소유하는 삶을 선택하는 이 세계는 이타적이기보다 이기적이었다. 문득 화두 하나가 툭! 하고 던져진다. 할! 나는 무엇이고, 너는 어떤 의미로 내 앞에 던져진 우매한 타자인가? 집착한다. 소유욕으로 점철되고, 또 더 많은 것들을 탐하며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 생각한 채 끝없는 갈등의 연속 속에 파국을 맞이하는 비극의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소유를 향한 욕망의 저 끝에 타나토스가 손을 흔들며 인간학 전체를 죽음의 공식으로 환원시켜버리는 무無의 운동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하루는 늘 저와 같다. 우리들의 하루는 늘 동일한 것의 반복적인 잘못을 일삼으며 반성과 후회의 나날들이다. 어쩌면 그/녀들이 바라는 저 자본 너머의 세상은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아련한 미지의 세계이거나 미완의 과제로 남은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타자의 타자를 진정한 자기로 의식하지 못한 채 늘 욕망하는 자아로 남아 끝없는 소유물로 자기를 확인하는 탐욕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시간―세계는 나와 너 사이에 무수한 이해관계를 연루시켜 수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소유, 즉 자본의 이념이 만들어낸 갈등의 서사이다. 소유는 착취의 시작이고, 소외로 결말을 맺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물질 위에 욕망이 더해지고, 또 그것이 삶의 진실인양 호도하는 물화현상이 만연하게 된다. 철저하게 자본의 편의를 위해 기술된 고전경제학이나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자본, 즉 소유를 특권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이는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평등하지 않음을 교사하는 자유주의, 즉 개인주의를 확대재생산하여 사유재산권의 신성불가침을 제도화하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자본이 중시하는 생산성과 잉여탈취가 정치경제학의 근본 원리로 체제화 된 순간, 소유욕은 이윤추구의 목적을 최적화하는 경제발전의 내적 동력이자, 우리 모두 상생의 운동으로 윈윈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둔갑하게 된다. 이제 막 합리적 이성으로 신비화가 완료된 자본 중심의 정치경제학은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착취를 합법적으로 용인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야한다. 죽어가는 운명의 소유자에게 진정 소유란 어떤 의미인가? 여전히 돈은 우주의 중심이고, 진리의 진실을 포획한 절대이성이다. 왜냐하면 자본은 상속을 통한 세습이 가능하고, 또 대를 이어 축적이 가능한 불온한 계급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유라는 가공할 권력적 힘의 상징물은 나누어지고 쪼개 해체시켜할 혁명의 대상이자, 인간학을 물질로부터 해방시켜야만 하는 이 세계의 거대한 모순의 집적체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모든 병폐가 발생하는 만악萬惡의 근원이 자본과 그것의 구성물에 의해 생성되었듯이, 소유 중심의 자본주의는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사악한 주체이지, 너와 나를 유토피아로 이끄는 문화의 제도적 장치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유권의 신성불가침한 권리능력을 공공의 임무나 기능으로 전환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와 밀착하여 권력으로부터 비호를 받는 것은 물론 사법제도와 결탁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소유를 중심으로 한 모든 관계가 에고를 의미하는 자기중심주의와 긴밀하게 집중·연결된 채 특권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나누거나 분할되지 않은 그 무언가가 체제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고, 그것을 자본의 나눌 수 없는 권력이라 명명하게 된다.
이제 자본의 소유는 이 세계를 지시하는 모든 의미의 중심이자, 진리의 모든 것을 표상하는 절대 주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수백 년에 걸쳐 자본을 중심으로 정치경제학을 비롯한 일련의 문화적 토대가 구축되었으며, 그것을 신성불가침의 원칙으로 고착화시키는 극단의 제도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자본과 그것의 소유물들에 공공적인 기능이 최소한으로 축소되었으며 마침내 자본은 자기중심으로 체제를 무한히 확대재생산적인 방식으로 재구축하여 모든 특권을 자본의 체제 내부에 투사하게 된다.
소유의 권력이 제한되지 않는다. 이제 자본은 삶―시간―세계 전체를 지시하는 의미의 모든 것이자, 인간 개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최종 심급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 한도 내에서만 사유하고 행동하며 그 한계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길들여진다. 우리는 자본의 노예이다. 왜냐하면 자본은 이 세계를 통제하는 마나적 주술이자, 인간학의 한계를 설정하는 좌표 역할을 하는 최종 심급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자본이 내어놓은 길을 따라 저항 없이 묵묵히 걸어가며 자기 환상을 구체화시키며 만족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아니 우리는 자본이 만들어놓은 환상에 지배를 받도록 길들여진 존재일 뿐, 더는 혁명의 주체로 존재할 수 없다.
조금 더 나은 삶이,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이 되기를 염원하며 자본의 길을 따라 소유, 즉 사적 재산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헛된 꿈의 기호일 뿐, 모든 것은 이미 자본의 기획에 의해 표류하는 해체된 시니피앙처럼 사산된 꿈을 낳는 무기력한 주체임을 깨닫게 된다. 아마 내일도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꿈을 온전하게 낳기 위해 노력하며 내일을 또 다시 기약하며 오늘 묵묵히 견디어내지만, 그러한 삶의 연속이 환멸로 향하는 마지막 비상구임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몰락에 이른다. 내일도 그/녀들은 사산된 꿈을 부여안고 자기 욕망을 거세당한 히키코모리가 될 것이다.
확대재생산이 낳은 비극 혹은 착취의 영원성. 자본가는 아들을 낳아 부자를 만들고, 노동자는 빈자를 낳아 노예로 살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본이 내놓은 소유의 길을 따라 분주히 자기를 살며 또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르기를 기약하고 있다. 어쩌면 자본은 인간학의 위치를 지정한 선험적 가정이자,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이미 결정된 사회적 신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본의 위치는 존재의 위치, 즉 문화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삶의 절대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이건희인 사람과 빈자 다중을 어버이로 둔 사람은 이미 삶의 질과 계급이 다를 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 간극을 뒤 메울 수 없다. 노력은 하늘에 결코 닿지 않는다. 아니 자본이 있고 없음이 삶의 위치를 결정하고, 미래의 삶 또한 미리 차압당하여 신분을 결정한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노력이 하늘에 닿아 신분을 상승시키지만, 그것은 보여주기 위한 쇼 케이스Show Case이지, 현재를 살아가는 일반 대중 모두는 점점 빈자 다중의 위치로 추락해가고 있는 과정 중이다. 불행하게 이미 이 세계는 자본의 한계효용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그 잉여탈취의 체제를 철옹성처럼 굳게 구축했으며, 또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 즉 불평등의 징후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마르크스―네그리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불평등과 억압과 착취가 발생하는 자본의 체계를 폭파·해체시키는 길만이 인간 해방의 유일한 통로인 것은 분명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따라서 적대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은 필연의 과정이고, 평등은 실현해야할 최고의 가치이다. 그러나 여타 사회주의 운동이나 공산주의 체계가 그 힘을 잃어가면서, 좌파이념은 하나의 금기어가 되어가고 있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는 정치경제학 내부에 국가의 공공적 임무를 강조한 케인스주의는 물론 일체의 좌파이념도 거부한 채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자본의 체계를 강화하는데, 이는 더 큰 불평등을 초래하는 소유 중심의 사회를 양산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으며, 마침내 알고리즘의 신화와 함께 자본의 특권적 기능을 강화하기에 이른다.
소유는 진실이고 절대신이다. 이 세계는 부자들의 천국이다. 네그리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을 비판적으로 읽은 『맑스를 넘어선 맑스』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사회주의를 개량주의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코뮤니즘의 필연성을 강조하며 요청했지만,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체제가 작동불능인 상태에서 스스로를 건설하는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완결판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소멸시효가 다한 이데올로기의 잔상이다. 이미 소련이나 중국 등의 국가에서 실패했고, 또 제도화가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와 정반대로 21세기 자본의 위력이 강력한 것은 극소수의 자본가들에 의해 독점되어 아무런 제재나 규제 없이 잉여 탈취를 합법화하는 알고리즘의 신화의 사회로 급진화되어 전혀 다른 자본의 체제를 구축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정부는 경제활동에 조력자 역할로 축소되거나 애초부터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작은 정부에 만족하게 된다. 사실상 자본에 의한 자유방임이 경제적 정의로 부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돈은 인간학을 평가하는 최종 결정권자가 된다. 정경유착이라는 기본공식이 만연했고, 사법부 또한 행정부와 더불어 공모관계를 도모하는 시녀로 전락하게 된다. 돈은 영원한 힘, 즉 니체 식으로 말해서 권력에의 의지가 실현되는 총체적인 그 무엇이다.
이 세계가 점점 돈 중심의 물질만능주의로 타락해간다. 삼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이미 유명무실한 공식으로 전락했고, 입법 행정 사법이 공히 돈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카르텔을 만드는 최악의 상황이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문제이다. 경제, 즉 자본의 소유라는 왕의 등극과 함께 이 세계는 물질만능주의를 당위명제로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입법 행정 사법 공히 경제의 왕을 중심으로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녀들만의 거대한 신분의 벽을 만들어 계층의 이동 사다리를 끊어버리는데, 이는 자본 중심의 소유이념과 결탁한 정치경제학의 현실이다.
아이비리그 대학처럼 특권화 되었으며 마침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진입장벽을 만들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신처럼 돈이 받들어진다. 주체도 돈이고, 떠받들어지는 객체도 물질과 그것의 소유이다. 이제 막 경제를 둘러싼 일체의 서사가 신비화되었으며 우리 모두를 자본 중심의 소유의 왕국으로 인도하게 된다. 물론 그 왕국을 들어가는 데에는 기입비나 입장료를 내야하겠지만, 따라서 부자라는 신분을 입증하는 패스포트를 반드시 지참하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하겠지만, 이는 잉여를 자본가에게 위임한 채 노동의 가치를 임금이라는 함정에 가두었기 때문에 발생한 최악의 상황임을 명심해야한다.
노동과 임금 사이에서 이윤추구가 제도적으로 합법화된 순간, 혹은 잉여를 자본가가 독점하도록 방치한 순간, 이미 자본은 노동과 그것에 속한 일련의 체계를 소외의 공식으로 표준화하여 자본의 확대재생산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소유가 자본가에게 독점된다. 말하자면 자본이 취하는 일련의 대사회적인 경로는 법적, 사회적, 제도적으로 잉여탈취의 강화에 있지, 우리 모두를 위한 유토피아적인 세계 건설에 있지 않다. 따라서 자본의 소유욕은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독점적이며 독재적이다. 물론 케인스는 노동, 임금, 자본 사이에서 완전고용이라는 이념적 모델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자본가의 잉여탈취를 통한 자본소유의 독점으로 인해 완벽하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만약 노동의 생산물이 자본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수중으로도 들어갈 수 있는 이중의 제도적 장치가 존재한다면 혹은 생산자가 향유자이자 소유자가 될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이 세계는 이미 소유라는 함정에서 벗어나 평등의 사회가 구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본으로부터의 소외는 물론이고, 노동 그 자체로부터 소외되는 자본의 교묘한 술책에 농락을 당한 채 도시 빈민으로 추락하여 게토로 내몰리게 된다. 합법적으로 위장해 잉여를 착복해 자본가의 수중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할 뿐, 나눔이라는 분배적 장치를 통해 이 세계를 상생의 공간으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경쟁을 통한 승자 독식이라는 방식만이 경제 체제를 떠받친 채 자기 향락이라는 최후의 목적지로 무한질주 중이다. 자본의 독점은 권력의 독점이자 향유의 독점이다.
따라서 자본의 욕망은 축적의 욕망이고, 이윤이 무한히 확대재생산하는 곳에서 생성된 향유의 물질적 기호이다. 더 많은 것이 욕구되고 또 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삶 전체가 투사된다. 천당 옆에 분당이 있고, 주님 옆에 건물주 있다는 농담은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 시대의 진실을 지시하는 명확한 의식의 사태이다. 소유가 중심이 된 부의 실재는 존재의 총체성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주체이다. 따라서 모든 가치의 중심에 물질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 혹은 너와 나 사이의 일련의 관계가 소유물을 통해서 확인하는 과시효과처럼 비추어지는 한, 그러한 현상은 우리 시대의 현실을 반조하는 의식의 거울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유개념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거나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소유, 즉 사적재산권을 일부 제한하는 것은 법으로 어느 정도 가능할는지 몰라도, 그것을 무소유나 사회의 공공재적 성격으로 환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가난한 자들의 동지였던 그람시나 체 게바라처럼,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난한 자들의 해방을 위해 노력할 수 있어도 이 세계를 독재나 부자로부터 해방시켜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지는 무소유의 세계를 실현시키기란 거의 가능하지 않는 것 같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주어진 삶의 현실이고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삶의 실질적 이념이다. 한쪽에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한쪽에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인다. 상호 이해의 가치가 대립하고 그 의미의 진실이 분산되지만, 그러는 가운데 어떤 합일의 원리를 깨우치는 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 같다. 무소유와 불살생의 정신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본이 만들어놓은 이해의 한계 저 너머에 평등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설령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이 철저하게 자본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또 인간학 전체를 물신화하고 있지만, 어찌 저 무소유의 정신을 환상이고 망상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꿈꿀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기호, 즉 삶 저 너머에 존재하는 영원에의 의지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개된 자본을 둘러싼 일련의 인간학적 징후는 소유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채 탐욕적인 에고의 그물에 갇혀 본래적인 자기(Self)를 잃어버린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소유와 자기의 동일시는 치명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될 뿐만 아니라, 에고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를 소외의 형식으로 양식화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소유, 즉 사적 재산권은 에고와 마찬가지로 양도가 불가능한 것은 물론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실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에고와 더불어 사적 재산권은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의미의 총체적인 현상이자, 시간의 의미를 초과하는 절대가치가 된다.
그러나 이 또한 치명적인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아니 자본의 이념과 더불어 소유의 제국이 만든 일련의 서사는 타자와 더불어 만든 인륜의 제국이 아니라, 인륜의 가치를 저버리면서 만든 착취와 위법의 제국, 즉 소외의 절대적인 형상이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본래적인 자기를 잃어버린 채 수단은 목적을 합리화하며, 탈법은 합법을 우회하는 의식의 통로가 된다. 이제 세상은 자본의 천하이다. 그것은 화무십일홍이 아니라, 영원한 제국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으며, 반역을 가차 없이 처단하는 절대 권력의 주체이다. 이제 돈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역전시키고, 무능을 유능으로 전복시키는 절대적 힘의 표상이다.
자본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차마 떨쳐버리지 못한 채 자기와 소유를 동일시하며, 자본의 이념을 진리의 진실로 받아들인다. 소유의 삶이 존재의 삶을 대체하였으며 마침내 본래적인 자기를 에고가 완벽하게 인간학의 주체로 자리 잡게 된다. 소유 중심의 현대성의 체계가 강력한 이유는 자본의 힘이 만들어내는 모든 환상이 실현가능하다고 믿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환상이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굳건한 믿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소유 욕망을 부추기는 에고적인 자본을 막아설 수 없다. 혁명을 위한 최후의 보루였고, 아직도 거부하며 저항하고 있지만, 네그리가 펼쳐냈던 일련의 서사적 기획은 한낱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다. 누가 사회주의를 비변증법적으로 넘어선 코뮤니즘을 인류 최후의 제도적 양식이라 믿고 의지하겠는가?
그람시와 체 게바라와 더불어 네그리의 진심을 십분 이해하고 존경하지만, 특히 네그리가 『맑스를 넘어선 맑스』에서 주장한 공산주의는 앨빈 토플러가 말한 현재 폐용가치일 뿐, 더 이상 신선미를 분출할 수 없는 낡은 사유의 전형이다. 물론 아직도 마르크스와 함께 꿈꾸었던 이 세계의 유령들이 의미를 분출하고 있은 것은 부정될 수 없지만, 더 나아가 마르크시즘의 변형생성문법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이 세계는 여전히 자본의 압도적인 위용에 휘둘린 채 알고리즘의 신화를 자본의 새로운 체제로 수용하여 자본의 신비화를 강력하게 구축 중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볼 때, 소유 중심의 자본의 체제는 네그리가 요구하는 방식의 공산주의를 통해서 폭파·해체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소유 중심의 자본주의가 탈법적으로 우회하는 통로 여기저기에 불평등이라는 폭탄을 산종시키고 있고, 여전히 착취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만을 분명하며, 이는 반드시 시정·조치해야할 우리 시대의 사명이다. 알고리즘의 신화 함께 그러한 경향은 더 강화될 것이며, 사람들이 의식조차 못하게 더욱더 치밀하게 잉여를 탈취해 불평등이 이 세계의 법칙임을 증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조만간 빠른 시일 내에 말이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강인공지능 AGI가 우리가 예상하는 비관적 전망과 정반대로 무소유를 실천하는 아름다운 체제를 만들어 평등사회를 제도화할지 누가 알겠는가? 자본 저 너머의 아름다운 제국을 빈자 다중과 함께 신기원의 세계를 열기를 기대해본다. 알고리즘의 신화가 보편된 AGI시대가 유토피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싸움이나 전쟁이 없는 평등과 평화의 시대가 활짝 열렸으면 더욱 좋겠다.
10. 중용 : 탐욕과 굶주림 사이 내어놓은 존재의 길
No need for greed or hunger(탐욕도 굶주림도 없는)
거대한 바람 앞에 꺼져가는 등불처럼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지만, 그것이 의미를 장전한 순간 너무 무거워 스스로를 고통의 불 속에 집어넣게 된다. 빈자 다중의 삶은 적대와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녀들은 왜 그와 같이 가난한가? 왜 그/녀들은 재벌이 되어 온 세상을 호령하는가? 그림시와 체 게바라 그리고 네그리와 함께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 마지막 비상구인가? 사회의 구조가 그와 같은 체제로 불평등을 자연스럽게 만들었으리라.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제도화가 어떠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느냐가 관건인 것 같은데, 이는 정치경제학에 포획된 이데올로기의 현실이 어떠한 사회적 기준을 적용하는가가 문제의 중심인 것 같다.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혹은 코뮤니즘) 사이의 거리 혹은 시장경제와 케인즈주의의 낙차. 역시 이 세계를 지배하는 궁극적인 논리는 이윤추구, 즉 자본의 이념이 만들어낸 생산과 소비의 변증법적 운동인 듯하다. 위기와 적대감을 뒤로 한 채 이윤의 선순환을 만들어 잉여탈취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제도화하기에 이른다. 이제 막 자본의 승리가 선언됨과 동시에 시대의 정의가 바로 자본주의라는 체제, 즉 시대의 이념을 선도하는 불변의 양식으로 간주된다. 물론 부익부빈익빈이 자행되고 불평등의 진실을 철저하게 왜곡·은폐시킨 채 21세기 자본이 현재에 이르렀지만, 알고리즘의 신화와 함께 형성된 디지털문명사회는 사회적 불평등의 크기를 심화·확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지 않는 중용의 도가 요청된다. 말하자면 자사의 저서로 알려진 『中庸』은 불균형한 소모와 축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위기의 시대에 혹은 과도한 욕망의 포로가 되어 물질의 노예로 되어버린 21세기의 비인간화의 시대에, 우리 모두를 균형 잡힌 삶으로 이끌 수 있는 위대한 인륜의 저서이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사이의 거리를 탐욕과 굶주림으로 대위시키면서 인간학적 차원을 재차 점검해본다. 그러나 양자 사이의 틈새를 메워 상생의 리듬으로 전환할 방법이 도무지 찾기가 쉽지 않다. 상호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여 갈등이 증폭된다. 그렇다고 겉만 번지르르 그럴싸하게 봉합해 상호 잘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할 수도 없다. 낭패에 빠진다. 분열은 극에 달해 폭발 일보 직전이다. 한쪽은 헐벗고 다른 한쪽은 윤택하여 여유롭다. 뭐랄까? 양자를 상호 매개시켜 중용의 길을 내고자하나 본질적으로 통합이 불가능하다. 한쪽은 적대의 감정이 다른 한쪽은 무관심과 무대응의 원칙을 초지일관 유지한 채 팽팽하게 서로 맞서고 있다.
거대한 벽이 가로막는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가로막아 그/녀들이 상호 소통할 수 없게 만드는데, 이는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이 본질적으로 다르고 영원한 평행선을 그은 채 치열하게 대결 중이기 때문이다. 네그리 식으로 말해서 한쪽은 혁명 투쟁의 전사가 되어 체제를 전복하려하고 다른 한쪽은 항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계획과 타협으로만 일관한 채 자본의 영구 지배를 공고히 하기를 염원한다.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아니 이들에게 양보는 죽음을 의미하거나 영원한 패배를 인정하는 굴욕감을 맛보는 것이기에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 팽팽하게 맞서 결사 항전의 의지로 대립한 채 상호 중무장한다.
따라서 혁명과 미봉책 사이에 영원히 화해 불가능한 이물질이 남겨지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계가 안고 있는 모순이라는 근본 문제이다. 모순은 자본적이다. 왜 우리는 양보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한 채 타자를 배척하는 이중의 태도를 취하는가? 왜 우리는 탐욕과 굶주림 사이에서 따스한 인륜의 길을 내지 못한 채 우왕좌왕 표류하는가? 중용의 길은 멀고, 참된 존재에 이르는 인륜의 길은 아득하다. 중용의 길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기는 알 것 같은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양자 상호 껄끄럽게 대립하다 갈등이 폭발해 공멸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아니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중용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차마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한 채 자멸의 길을 무모하게 선택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중용』에 이르길 중中은 치우치지 않은 천하의 바른 길이고, 용庸은 쉬이 바뀌지 않는 천하의 정해진 이치라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중용의 원리는 두루 막힘이 없이 통용될 수 있는 이 세계의 올바른 이치와 법도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현대성은 중용의 정반대, 즉 극단, 즉 자기 이해를 선택했으며, 마침내 자기와 타자 사이에 균열을 극대화시켜 분열을 향유하는 주체로 몰락시키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만약 중용의 원리가 오늘날에도 통용이 된다면, 이 세계는 평등과 평화를 온전하게 실현할 수 있는가? 사실 이 지점이 중요한데, 중용의 길은 극단으로 치닫는 우리 세계를 완급 조절할 수 있는 신독愼獨의 태도, 즉 혼자 있을 때 스스로를 삼가고 절제하는 자세를 통해 타자와 마주서기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용의 길은 과도한 것만을 요구하는 경쟁적인 21세기 극단의 시대에 스스로를 경계하며 타인을 공경하는 존재의 길로 나아가는 의식의 내밀한 통로이자, 이질성과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는 공손의 태도이다. 따라서 참된 인륜의 도는 치우치거나 막힘이 없이 유려하게 흘러 온 세상을 두루 밝게 만들어 상호 공명할 수 있는 상생의 기운이다.
이를테면 중용의 도는 부익부빈익빈이라는 극단의 현상을 상호 길항시켜 공존할 수 있는 묘약을 만들 수 있는 타협점을 제시하는 협치의 태도인데, 이는 역지사지의 태도, 즉 하버마스가 주장한 상호주관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 속에 고스란히 기입되어있다. 의사소통적 토론의 장을 마련하여 공론화가 진행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탐욕과 굶주림 사이의 거리는 넘치는 것을 덜어내고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면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이는 중용의 태도를 실천적인 원리 삼아 평형에 이를 수 있는 하나의 이념적 교량을 세우면 그만이다. 사실 평등과 평화를 제도화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문제는 수세기 동안 잉여를 합(탈 혹은 불)법적으로 탈취해온 자본가들이 쉽게 자신의 부를 내놓지 않는 방향으로 법과 질서가 구축되어 그것을 전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시작해 그람시와 체 게바라를 거쳐 네그리에 이르는 일련의 여정이 바로 탈법적일 수도, 합법적일 수도 혹은 위법적인 수도 있는 잉여탈취의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여정이었듯이, 코뮤니즘을 향한 일련의 개혁적 운동들은 자본과 그것의 구성물에 대한 총체적인 전복의 길이다. 그러나 혁명은 일시적인 성공을 맛 본 후 그것을 제도로 정착시키기에 실패했으며 마침내 일인 독재의 형태로 변질되어 최악의 결과물을 내놓고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왜 그런가? 왜 사회주의 혁명은 일당독재에서 일인 독재로 탈바꿈하여 코뮤니즘의 불가능성을 재차 확인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는가?
중용이 요청되고 중용의 원리를 제도화해야 한다. 더불어 상호 실천적 대화를 통해서 서로 납득할 수 있도록 범국민적인 대화의 창구를 마련할 수만 있었다면, 아마 혁명은 코뮤니즘을 완수하여 이 세계를 평등으로 제도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중심적인 중용의 도, 즉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중도의 길은 탐욕의 길에 가로막혀 일인독재라는 최악의 결과물을 내놓음과 동시에 코뮤니즘은 하나의 금기어로 봉인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21세기에 네그리가 『맑스를 넘어선 맑스』에서 주장한 코뮤니즘에의 길은 거의 폐색된 것이나 진배없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 세계가 자본주의 체제와 공모한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서 왜곡된 민의를 반영하는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 시대가 직면한 탐욕과 굶주림 사이의 매개된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경제학 전반에 걸쳐 이데올로기적 모순이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는데, 이는 사적 재산권에 토대를 둔 자본의 자유를 진리의 진실로 용인하는 곳에서 생성된 불평등이라는 치유 불가능한 외상성 징후를 기꺼이 제도로 용납했기 때문이다. 이제 중용의 위대한 서사적 원리는 미학적인 원리처럼 하나의 장식품처럼 도덕 교과서에서만 통용되는 가치로 오독되기에 이른다.
만약 이 세계가 중용의 원리대로만 작용한다면, 탐욕도 배고픔도 없는 그 자체로 평화로운 낙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중용의 원리가 삶을 지배하는 실천적 원리로 해석되어 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통치의 기율이 될 수 있다면, 이미 이 세계는 혁명이 요청되기 이전에 탐욕도 굶주림도 없는 평화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중용의 미덕과는 정반대로 넘치거나 부족한데, 이는 자본 중심의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잘못 설계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거의 주기적인 기후재앙, 즉 홍수나 가뭄으로 인해 아프리카는 물론 일부 아시아 그리고 중남미 지역에서 기근으로 고통을 당하며 기아에 시달리고 있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의 현실은 창고에 쌓여 남아도는 식량을 빈자 다중과 결코 나누지 않는다.
전쟁과 기아 확대로 해마다 거의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그 반면에 서구나 북중미를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비만으로 인해 매해 대략 300만 명 죽어가고 있다. 이는 21세기 고도의 산업사회가 처한 아이러니적인 현실인데, 깊이 반성해야할 부분이다. 한쪽은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굶어죽고, 다른 쪽은 너무 많이 먹어 비만의 합병증으로 죽는다. 기아사망자의 대략 3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비만으로 죽어가고 있는 현실은 결코 용인하거나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야만의 세계상이다.
이것은 블랙코미디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처한 암울한 풍경을 반조하는 모순이다. 어찌 문명인으로 자처하는 인간세계가 남아도는 식량을 나누지 않고 그토록 굶어 죽어가게 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이것은 탐욕에 길들여진 하여 중용의 도를 상실한 허울 좋은 문화 시민의 자화상을 반조하는 우리 시대의 검은 그림자이기도 하다.
나누지 않는다. 자본의 이념의 확장과 함께 탐욕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조금 덜어내어 작은 시혜조차 베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눔 그 자체를 기꺼워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해있다. 희망이 사라졌다. 아주 작은 나눔의 실천이 큰 희망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인륜적 삶의 길임 아무도 믿지 않는다. 굿 네이버스 혹은 유니세프 그리고 다양한 자선활동의 NGO단체. 희망을 조직하고 살아갈 권리를 십시일반의 마음으로 나누어 희망을 전파한다. 딸 아이 김지언의 이름으로 매달 굿 네이버스에 작은 돈을 기부해 이제 니카라과의 어느 여학생이 자립해 학교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희망은 조금씩 나누는 것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딸 김지언과 아들 김준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도 커서 돈을 벌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이 세상은 더불어 함께할 때 더 행복한 세계가 된다.’고 말이다.
결국 모든 변화는 사람, 즉 교육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 같다.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가 소중한 이유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통해서 희망의 서사를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굶주려 배고픈 자들에게 빵을 주고 교육하며 친목을 도모하는 가운데, 교육은 희망의 교육학으로 서사적 진전을 이룩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평등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억눌린 자들의 교육이 희망의 교육학으로 급전환된 순간, 나눔의 실천은 변화의 실천으로 급진화되어 사회 전체를 혁신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열린 교육의 참된 목적이다.
말하자면 프레이리의 교육 운동은 억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이 세계의 가장 낮은 자들을 참된 교육의 힘으로 대오 각성시켜 힘을 키우게 만드는 계몽의 운동인데, 이는 아직도 빈민들이 넘쳐나는 중남미나 아프리카 그리고 남부아시아 등의 지역에서는 유효한 정책이다. 설령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사적 지형이 고도의 산업문명으로 발전해 풍요로움의 극단으로 내달리는 향락의 사회로 진입하고 있지만, 따라서 알고리즘의 신화, 즉 범용인공지능AGI와 함께 미래사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전해 꿈의 세계를 구현해 줄 것이라 믿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지구의 절반 이상은 빈민 국가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탐욕과 굶주림 사이의 균형점을 잃은 채 여전히 이 세계는 중용의 도에서 탈구된 채 부익부빈익빈 사회로 점점 더 기울어가는 경향이 있다.
한쪽은 조르주 바타이유 식으로 말해서 축적과 소모의 변증법적 운동의 총아로 한가롭게 향락을 향유하는 부르주아적 삶을 한껏 누리고, 다른 한쪽은 배고픔을 견디며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한쪽은 차서 넘치고 다른 쪽은 늘 부족하다. 중용이 요청된다. 중용은 고루한 고대 유가적 태도를 고수하는 진부한 그렇고 그런 낡은 사상이 아니라, 인간학 전체를 떠받치는 근간이자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상생의 미학적 원리이다. 중용의 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는데, 이 세계가 여전히 국가와 민족으로 분열되어 상생하기보다는 경쟁하거나 전쟁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시도 바람 잘 날 없고, 또 시시때때로 무력을 행사해 남의 것을 빼앗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이 이와 같을 때, 세계를 중도, 즉 중용의 원리로 경영할 수 있는가? 좌우 이데올로기 갈등 너머로 비상해 그저 인간 그 자체만을 응시한 채 이 세계를 중용의 원리로 제도화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탐욕에 빠진 자를 절제하게 만들고 굶주린 자를 봉양하는 제도적 장치는 마련할 수 있는가? 존 레논이 말한 것처럼 눈을 감고 상상해보지만, 선 듯 쉬운 일이라고 단언하지 못할 것 같다. 사회복지와 관용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보지만, 나눔의 길은 험난하고, 중도의 길은 요원하다. 여전히 문제는 앎에의 의지, 즉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의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세계를 근본적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은 눈앞에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실천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한때 문학이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박노해는 이 시절 감옥에 있었고, 엄밀하게 말하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함께 시대의 운명에 공명하며 더불어 비판하던 시절은 그 나마 꿈과 낭만이 있던 시절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문학, 즉 문자시대는 알고리즘과 함께 도래한 시각시대에 그 효용가치가 사라졌고, 더는 읽히지 않는 문자로 전락해 점점 용도폐기 수순을 밟아가고 있다. ChatGPT가 소설을 쓰고 시를 쓰며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 보다 더 강력한 범용인공지능 AGI가 상용화가 그리 멀지 않는 시대에 인간학이 취해할 중용의 도는 과연 무엇인지 되물어야 한다.
모든 것이 이미지화되었으며 마침내 실재가 아닌 것을 믿고 의지하며 진실에 이르렀다고 확신하는 허구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는 탐욕의 시대, 즉 향락과 비만을 부추기는 과소비의 시대이다. 하여 중용의 도에 대한 요청은 삶의 실재를 재건하는 존재의 운동이자, 극단으로만 치달아 갈등을 정례화 하는 모순 사회를 정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탐욕과 굶주림 사이에서 찾은 참된 존재의 길은 어느 것에도 치우치 않는 하여 평등과 공정을 마음의 심급으로 삼는 중용의 길이라 하겠다.
그러나 과소비를 부추기며 새로운 상품을 끝도 없이 생산하는 자본의 체제는 중용이 지향하는 절제와 겸양의 미덕을 도외시한 채 환상을 소비하는 사회로 급진화하여 이 세계 전체를 도파민 과잉의 주이상스 천국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소비에 또 다른 소비를 더해 욕망할 수 없는 것까지 소비하도록 생산의 체제를 무한 확대하였으며 그것이 이 세계를 위한 최선의 방식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가 자본의 천국이 되어 점점 과잉 소비사회로 진화해가고 있다.
중용의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점점 한쪽으로 치우쳐 극단을 향유하는 욕망의 시대로 급진화되어 가는 것 같다. 정치경제학은 물론 문화 전반에 걸쳐 극단의 징후가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자본의 역량이 총체화 된 곳에 나타난 향유의 기호이다. 먹고 마시고 놀며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소모하는 조르주 바타이유 식의 에로티즘의 극단화 현상은 에고에 충실한 채 자기 망각의 길을 따르고 있다. 아량을 베푸는 일체의 관용이나 나눔도 없고, 자기만의 만족의 세계에 빠져 스스로를 고갈시키는 탐욕의 세계를 삶의 모든 것이라 착각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자본의 논리로 중무장한 채 무한 소비를 부추기는 후기산업사회는 도파민 중독에 빠져 끊임없이 쾌락이라는 황홀경에 이르도록 소비가능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인간학 전체를 탐닉의 주체로 만들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마 자본과 그것에 속한 생산의 논리는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차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감각적 쾌락의 소비사회로 급진화해 우리 모두를 향락의 주체로 소비시키기를 요구한다. 마치 자본의 노예처럼 도파민 중독에 길들여져 이 세계 전체를 탐욕의 대상으로 물화시켜 쥐도 새도 모르게 잉여 탈취에 혈안이 되어있다.
안타깝게도 달팽이처럼 자기만의 성에 안주한 채 철저하게 개인주의를 신념의 절대성으로 신봉하면서 이 세계의 목적을 쾌락의 원칙으로 수렴시키고 있다. 따라서 타자와 더불어 상생하는 인륜의 아름다움을 지향하지 않으며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초지일관 무관심의 자세를 취하기만 할 뿐이다. 매해 굶주림으로 죽어가 100만 명의 아사자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향락에만 몰두 중이다. 너와 나 사이에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신분이라는 거대한 벽이 무관심의 벽으로 형질전환되어 결코 상호 소통하지 않지 않음을 당연시하는 고립이나 소외현상이 만연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문화를 비롯한 여타 정치경제학 전체를 넘치지도 모라자지도 않은 맞춤 한 상태로 운용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역으로 어느 한 곳에 치우지 않고 정도로 이 세계 전체를 운행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세칭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도 하고 또 군자의 도라고 하는 중용의 도는 낡고 고루한 옛것이 아니라, 탐·진·치(탐욕과 분노와 우매)에 익숙한 욕망의 문화적 풍토 속에 깊게 뿌리내려 싹 틔울 소중한 문화의 자산이다. 더불어 중용의 태도는 평등과 인애와 관용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이 세계를 아름다운 여율로 상호 공명하게 만들 수 있는 매개체이다.
11. 인류애 : 유리천장지수 혹은 차이와 차별의 벽을 넘어서
A brotherhood of man(오직 인류애만이 존재한다)
우선 아가페라는 숭고한 감정이 펼쳐지는 세계가 떠오른다.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절대적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리곤, 황홀해하다가 고린도전서에 나온 일련의 사랑의 담론 앞에 절대복종하며 무릎을 꿇게 된다. 아마 그것은 인류애를 의미하는 신적 사랑의 경지를 인간화된 사랑으로 의인화하여 삶의 계율로 삼은 사랑의 아름다운 법칙일 것이다. 만약 아가페적인 의미의 사랑이 이 세계에서 실천될 수 있다면, 따라서 인간학이 사랑의 담론을 실재처럼 믿고 의지하며 진리의 진실처럼 받들 수 있다면, 아마 이 세계는 이미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평화와 평등의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문제의 중심에 사랑의 알파와 오메가가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이 세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키가 바로 사랑임을 재차 확신하게 됐고, 실천이라는 과제가 문두에 화두처럼 던져진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저 마법의 힘을 통해서 평등과 평화를 제도로 정착시킬 수 있고 그것이 진리의 진실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하여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공식을 통해서만 상호 이해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저 사랑은 어떤 의미의 본질을 지시하고 그와 정반대에 위치한 증오나 미움을 의미하는 차별은 어떤 인간학적 진실을 지시하는가? 사랑과 차별 사이에 어떤 인간학적 진실이 매개되어 있기에 이 세계는 반목과 갈등을 일삼다 끝내는 죽음을 서슴지 않고 무수한 전쟁을 일으키는가? 인류애를 의미하던 아가페적인 사랑의 의미가 변질된다. 사랑은 각각의 지역마다 문화의 탈을 쓰고 전유되었으며 마침내 분열의 징후를 암시하는 기호로 그 기능이 축소되는 것은 물론 각자 자신만의 사랑의 이름으로 이 세계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모두가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 즉 인류애가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싶다. 그러나 삶의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불평등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제도화된다. 차이를 차별로 전복하는 세상을 사랑과 인애가 넘쳐나는 사랑의 거리로 만들어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며 이 세계 전체가 서로 화합·공명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나 엄존하는 빈부의 격차가 사회적 분리, 즉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불평등을 조장했으며, 그것이 이 세상의 진실처럼 믿고 따르게 만들어 사랑의 진실 전체를 왜곡시키기에 이른다.
부처나 예수가 실천했던 사랑, 즉 인류애란 종교에서만 통용되는 불가능한 서사이고, 차이를 차별하는 불공정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삶의 실증적 현실이다. 사랑의 저쪽 혹은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빈민촌. 사회적 격리가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빈부격차를 삶의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문제는 관행처럼 이루어지는 차별이 아니라 차이라는 근본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처리·대응하는가가 관건인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차별은 차이의 문제를 내면화하거나 정면으로 맞서는 곳에서 비롯하는 치명적인 갈등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하여 차이, 즉 너와 내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전에 서로 간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체제를 구성하는 능력만이 이 세상에서 횡행하는 차별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편견을 억제하고, 상호 간에 대화를 통해서 소통·이해하는 그 방법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차이의 이해만이 차별을 억제·방비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란 편견들의 구성물이다. 문화적 이해에 왜라고 물을 수 없다. 수 천 년 동안 관습으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여 현실은 그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항상 차이의 문제적 상황을 주목하고 차별을 제도화하는 진풍경을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인식·연출하게 된다. 왜 그런가? 왜 차별이 이 세계를 주도하며 끼리끼리라는 소외의 형식을 암암리에 구성하는가? 아마 문화적 징후가 항상 동일성의 지반 위에서 지속성, 즉 사회적 관성을 유지하도록 늘 억압하기 때문이리라.
프로이트가 『문명과 그의 불만』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문명제도들은 늘 승화라는 형식을 통해서 동일한 관습이나 양식을 강요하고, 차이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차이를 차별하는 관습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도록 길들이기에 이른다. 따라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차이는 억압의 대상이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아니 역으로 차이를 이해의 대상으로 만들어 이 세계의 제도나 관습으로 의식화시키는 데에는 짧게는 한 세대 길게는 수 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문명은 차이를 나눌 수 없는 억압의 기제이다. 하여 문명의 그늘이 깊고 짙은 만큼 차이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한 까닭에 사랑과 자비와 어짊을 노래한 일련의 서사는 이 세계 전체와 공명하는 인류애의 양식이 아니라, 늘 파열하고 해체되어 분노를 유발하는 갈등의 매개체로 변질되는데, 이는 문명의 그늘에 드리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인류문화사의 불길한 징후이다. 현대문명의 균열은 그와 인류사가 만들어낸 부정적인 사회의 문화현상이다.
아랍 대 서유럽의 영원한 대립 혹은 사랑이라는 이름에 드리운 뿌리 깊은 증오.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상호 이해를 통해서 봉합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의 변주곡이 인류애로 고양되지 않고 분열의 씨앗으로 작동하듯이, 문명 내부에 흐르는 사랑의 형식은 늘 갈등의 영식으로 분화해 차이와 차별의 강력한 벽을 만들어 편견이라는 이름의 탑을 쌓게 된다. 인류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문화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 즉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는 실존의 양태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사회적 관성, 즉 문화의 정체성 유지라는 명목을 통해 확대재생산하여 제도로 정착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이 만든 편견의 굴레, 즉 우리 사회가 처한 현재의 자화상이다. 분열이 극화되고 전쟁이 발발한다. 그저 사회적 관성에 굴복한 채 변화를 요구하지 않게 길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삶을 늘 동일한 방식으로 지속시키는 타성에 젖기에 이른다.
문명의 이름으로 차별적 차이가 만들어졌으며, 마침내 문화적 관습이라는 미명하에 변화, 즉 차이를 수용하는 태도가 전반적으로 부정된다. 더불어 하나의 체제로 굳어진 문화는 일체의 차이를 용납할 수 없는 무관용의 사회로 경화된다. 예수의 사랑과 부처의 자비가 아름답고 숭고함을 넘어서 범인류적이라는 사실은 이의를 달 수 없다. 하지만 인류에 대한 사랑은 알라신 등의 사랑으로 지역화되거나 다양한 양식으로 해석되어 사랑학 전체를 분열·해체시키는 원인이 된다.
각자 자기가 속한 문화가 고유한 진리의 현재임을 주장하는 사회로 급진화해 점점 문화의 양상들이 파편화되기에 이른다. 소통하지 못하고 참된 이해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각자 자기네 문화가 인류애가 펼쳐지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고 주장만 했지 정작 사랑의 테제는 전쟁을 일으켜 인류멸망의 불소시개가 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에 이른다. 왜 그런가? 왜 모든 문화는 자기 한계 저 너머로 비약해 인류 전체를 위한 서사로 작동하지 못하는가? 각 문화의 단위가 지역적 특성이나 환경의 한계에 갇혀있기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 이는 인간학의 본질이 지향하는 사랑과 평화라는 근본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는 같다.
그러나 그러한 인류문화사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각 문화마다 인류애에 대한 전유적 이해를 통해 사랑학 전체를 도그마로 특권화하거나 변질시켜, 사랑 내용 전체를 이질성, 즉 차이의 공식으로 가득 채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사회에 나타난 세계 갈등 상황의 궁극적인 원인이자, 이 세계가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의 이해가 인류 전체를 위한 이념으로 작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늘 전쟁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아 사랑의 형식을 죽음의 양식으로 대위시키게 된다.
사랑의 이해가 지역이나 작은 문화 단위로 축소된다. 공자, 예수, 석가, 마호메트가 역설했던 사랑의 참된 교의는 형이상학적인 초월적 인류애의 위치에서 그 지위를 내려놓고 지극히 작은 이해의 사랑의 단위, 즉 기복적 성격으로 변질·토착화되는데, 이는 범인류적 사랑의 교의가 문화적 대상으로 축소되어 편견으로 굳어진 사랑의 전유적 이해이다. 따라서 문화는 분열의 상징이지 이해와 포용의 상징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세계는 크게 흑인 백인 황인종으로 나뉘어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문화 풍토를 형성한 채 인륜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갈등을 일으키는 분열의 씨앗이 되어 인종혐오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존 레논이 추구하는 인류애는 상상의 허구일지도 모른다. 차이가 차별을 낳아 편견으로 고착화된 사랑만이 인류의 사명이라 착각하게 된다. 문화는 저와 같고 삶은 늘 갈등과 전쟁의 와중에 있다. 마치 모든 인간학적 편견이 바로 차이를 차별화하는 곳에서 생성된 오해에서 비롯했듯이, 이 세계는 무수한 억측을 낳아 상호 간의 이해를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당연한 인륜의 습속으로 받아들여 차이의 억압을 법과 질서로 용인하게 된다. 차별이 관행처럼 굳어져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제도로 정착하게 된다.
말하자면 차이는 차별을 낳는 억압의 형식으로 급진화되어 이 세계가 불평등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이는 상호 인정이라는 권력관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하여 차이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곳에 차별이 없지만, 인류 역사시대를 통틀어 그러한 사회를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투쟁과 갈등의 나날이었고 현재도 그와 같은 날들의 무한반복이다. 삶의 현실이 그와 같다면, 대저 사랑과 그것을 제도화한 시대는 도래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고 미래에도 거의 실현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특히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에서 말한 것처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인 관계는 상호 인정 투쟁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이는 삶의 서사를 지배하는 이 세계의 생존방식, 즉 갈등 역사를 힘의 원리로 극화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인간학을 형성하는 자기의식은 차이와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개인의 정신의 과정을 노동을 통한 힘의 배양과 지혜의 형성으로 고양시키고 있는데, 이는 이성이 지배하는 국가를 만드는 데 있어서 필연적인 과정이다. 이를테면 헤겔의 자기의식에 관한 일련의 서사적 구성물은 한 개인의 노력을 통한 차별의 극복을 역사 전체의 과정으로 투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 세계가 사랑의 역사가 아니라, 노동을 통한 힘 기르기와 지혜의 형성 과정을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로 은유화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는 차이에 의해서 생긴 차별을 개인의 힘을 통해 자력 구제하는 것이지, 모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차이와 차별 사이에 매개된 일련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가? 형제애를 넘어선 인류애가 넘쳐나는 세상을 만들 때 그것이 가능한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역으로 인류애에 대한 사랑의 교의는 ‘리만 가설’처럼 인류에게 주어진 난제이자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숙명의 과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편견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설 때, 비로소 인류애가 실현되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가능한데, 이는 인륜 전체를 계몽하는 의식의 대혁명, 즉 마이클 잭슨과 그의 친구들이 노래한 ‘We are the World’를 다함께 부르며 상호 공명하는 순간에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허울 좋은 말뿐인 인류애가 아니라, 실천적 참여가 병행이 되는 사랑의 공식이야말로 인류 전체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따라서 존 레논이 노래한 인류애에 대한 문제는 낭만이 아니라 실존에 관한 문제이고, 더불어 함께하며 공존을 모색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언이다. 우선 인류라는 관점에서 양성평등의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류애의 시발점이자, 참된 평등이 실현되는 최후의 보루이다. 왜냐하면 남녀 간의 성차는 근본적이며, 이는 해결이 불가능한 선험적 가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별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유리천장지수가 OECD국가 중 거의 10년째 29위, 즉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유교적인 전통이 깊은 국가라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이슬람국가와 유교사회가 남아를 선호하고 남성중심사회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특히 대한민국은 여성의 교육열이나 대학진학률 그리고 학업성취도 등 다양한 능력에 비추어 볼 때, 가히 세계 최정상권인데 비해 여성의 임금이나 대기업의 임원 그리고 고위공직자 등의 숫자로 볼 때 거의 후진국 수준으로 열악하다. 정부의 요직은 물론 국회의원 숫자로 볼 때도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지지부진하고, 여성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왜 그런가? 왜 한국 사회는 유리천장을 깨부수지 못하고, 남성 중심의 사회로 굳어졌는가? 물론 초중고 임용고시나 공무원 시험에서 압도적으로 여성의 숫자가 많지만, 그러나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가 고위직이 되는 경우는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능력상의 한계인가? 아니면 남성 중심의 구조가 만든 최악의 결과인가? 생각해보면 유교적 전통이 아직 잔존해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는 MZ세대가 떨쳐내야할 구습, 즉 양성평등의 이념을 실현시켜야할 인류애의 또 다른 전형이다. 남자와 여자가 신체적으로 다른 것은 맞지만, 그 다름이 능력의 다름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하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유리천장은 개혁해야할 악습이자, 적폐이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할 아주 중요한 시대적 사안이다.
양성평등사회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LGBT에 대한 편견도 사라져야 한다. 특히 성적 자기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취향의 문제이지, 사회가 금지하고 규제해야할 금기의 영역이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개인이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라는 차원에서 볼 때, LGBT 역시 존중받아야지 차별이나 멸시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형식의 고하를 불문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름은 이해의 대상이지, 차별의 대상이 아니다. 이를테면 인간학은 차이를 차이로 표현하는 곳에서 생성된 다양성의 창조적 역량이지, 차이를 차별로 관성화하는 곳에서 생성된 반복의 동일성, 즉 편견이나 관습의 노예가 아니다.
아마 인류애가 실현된 순간, 이 세계는 이미 낙원으로 변해 미움과 전쟁이 사라졌을 게다. 차이를 인정하며 모든 것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행복과 평화는 반쯤을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목적은 더 나은 삶의 방식, 즉 행복을 제도화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평안, 즉 유토피아적 전망의 현실화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길은 쉽게 주어지지도 그렇다고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다보면 어느새 그 꿈에 가까이 다가가 어느 순간 이루어져있을지도 모른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이 필요하다. 아니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삶을 살기보다 선한 영향력에 기대어 긍정의 힘을 믿고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최우선이다. 따라서 인류애는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신의와 우애를 돈독하게 가운데 만들어지는 지난한 노력의 산물이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그렇고 그런 과실이 아니다. 아마 그것은 피와 땀을 공유하는 노동의 현장에서 생성된 인간애이자, 삶의 의미를 나누는 가운데 생성되는 동지애의 일종이다. 모든 의미의 생산을 더불어 함께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상호 협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아름다운 인륜의 세계는 그렇게 쉽게 주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늘 도전과 시련의 여정에 들어서게 된다. 브라질 리오의 파벨라 혹은 페루 리마의 수치의 벽. 한쪽은 마약의 천국이고, 다른 한쪽은 극빈자들의 천국이다. 나누지 않고, 협력하지 않으며 차이를 차별로 극대화해 이 세계를 불평등으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미 주어진 선험적 차이를 극복해 상호 이해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는가? 더 나아가 이미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차이를 상쇄하며 평등을 제도화할 방법은 존재하는가? 현재까진 거의 불가능하고 불평등을 제도화한 비인간화 경향이 주조를 이루는 것 같다.
수치의 벽(El muro de la vergüenza)을 넘지 못하도록 철조망이 올려진 3미터의 높이의 거대한 장벽이 10킬로미터에 걸쳐 세워진다. 사회적 격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수치의 벽 저쪽이 부자들의 천국이라면서, 이쪽, 즉 비야 마리아 델 트리운포의 산언덕은 페루 각지의 빈민들이 모여들어 무허가 주택의 슬럼가가 형성된다. 아마 리오의 파벨라처럼 범죄의 소굴이거나 마약의 천국일지 모른다. 그/녀들은 허드렛일을 하거나 도시 빈민의 노예처럼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절망 속에서 보내게 된다.
어쩌면 이들을 향해 인류애를 논하는 것은 한낱 허구의 수사이거나 이 세계의 부도덕성을 은폐하는 날조된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치의 벽을 세운 부자들과 관료 정치인들에게 그것은 치안유지와 안전을 위한 방패막이 아니라, 이 사회에 드리운 암울한 그림자를 반조하는 의식의 거울이라 하겠다.
아프리카 난민 소년을 안고 수심에 잠긴 오드리 헵번와 배우 김혜자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더불어 인도의 빈민가에서 영혼의 구원자로 활동했던 마더 테레사의 숭고한 삶을 반추해본다. 아마 그/녀들의 삶―시간―세계는 사랑을 실천하는 이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성자의 모습과 정확하게 대응된다. 따라서 인류애는 맹자의 불인지심, 즉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확장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보편의 공감능력임에 틀림없다. 나는 너와 함께 ‘우리’라는 공감의 세계를 만들어 더불어 공생할 수 있는 세계로 나아간다. 인류애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아주 작은 실천이 인류애가 실현된 평등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12. 공유사회 혹은 평등의 제도화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모든 사람들이 온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해 봐요)
소유라는 개념이 사라진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모두가 세상의 주인이고 더불어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는 평등사회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그리고 케인스가 꿈꾸었던 완전고용이 이루어진 사회는 실현가능한 사태인가? 계급투쟁과 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했고, 이 세계의 거의 대부분의 부를 극소수의 부자들이 독과점하는 최악의 사태가 공공연하게 자행된다. 어쩌면 공유사회는 하나의 이념의 허구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까지 행해진 일련의 자본주의적 경제적인 모델에 비추어볼 때. 소유에 연루된 일련의 서사를 발본적으로 개혁하거나 폐기처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여 소유의 욕망을 발본적으로 억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상상 속에서 꿈을 꾸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희망의 씨앗을 뿌린다. 설령 오늘의 노동이 착취로 점철된 고단한 삶의 하루인 것만 분명하지만, 따라서 이 세상의 빈자 다중으로 산다는 것은 착취와 억압을 견디는 고난의 여정인 것만은 엄존의 사실이지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하루이기를 기원하며 그/녀들은 혁명의 전사가 되었으리라. 노동의 새벽은 혁명의 새벽이고, 새로운 삶을 기약하는 전사의 새벽이다. 희망은 저기 있지, 여기 눈앞에 현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공유사회와 평등의 제도화는 지금 당장 실현시켜야만 하는 중차대한 당면의 과제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의 현실은 공유사회나 평등의 제도화를 부정하면서 인류사적 과제를 전면 부인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아니 역으로 그와 같은 현실과는 정반대로 평등에의 요청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함께 영원히 지속시켜야할 숙명의 과제이자, 인간학이 전취해야할 인류사의 최대의 명제이다. 따라서 평등의 제도화와 공유사회의 실현은 인류가 이 땅 위에 존속하는 한, 만들고 가꾸어가야할 위대한 인륜의 지평이자, 이 세계를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제도적 장치이다.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시작해 마르크스와 그람시를 거쳐 네그리에 이르는 혁명에의 도정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끝없는 모색의 과정이자, 또 반드시 이루어 내야할 필연적인 존재의 과제이다.
우선 쉽지 않겠지만 사적 소유의 다양한 구성 능력을 제한할 필요성이 이 세계에 던져진다. 그리고 사적 소유에 ‘더불어’라는 공동체의식을 매개시켜 유무형의 부에 공공재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모든 불행의 씨앗이자, 갈등의 원인인 사적 소유의 적극적인 구성 능력을 자발적으로 박탈하는 것으로부터 개혁은 시작된다. 물론 기득권층들의 저항이 거세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너무도 자명하지만, 이것이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선행하지 않고선 개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하여 유사 이래 점점 더 비대해져만 가는 현대의 소유공화국을 홀쭉하게 만들어 빈자 다중과 더불어 함께하는 나눔을 실천하는 공유사회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장면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더불어 꿈꾸었던 그 이상적 이념의 세계는 평화로움이 그득한 안온한 몽상의 세계, 즉 인류가 그렇게도 바라는 낙원의 어디쯤으로 우리 모두를 데려가 평화를 만끽하게 해줄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러한 행동, 즉 평등을 제도화하고 공유세계를 꿈꾸는 실천적 의지를 옳다고 인정하지만, 그러나 감히 어느 누구도 쉽게 가지 못하는 그 길 위에 그람시가 있고, 네그리가 있었음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난한 자의 친구였고, 자본주의와 부자들을 공공의 적으로 명명했던 체 게바라의 실천적 삶도 떠오른다. 이들은 생 전체를 혁명을 위해 헌신했고, 그 모든 가치를 평등의 이념으로 수렴시켰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을 위한 일체의 명예와 부를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람시와 체 게바라와 네그리에게 허여된 일련의 삶―시간―세계가 숭고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그/녀들의 존재감 자체가 Commonwealth, 즉 공공선을 위한 공공재적인 성격을 지닌 인류 전체의 문화적 유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고 숭고했고 가난한 자들의 영웅이었다. 그/녀들은 사리사욕이 전혀 없었고, 이 세상의 가난한 빈자들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이름으로 투쟁의 전사가 된다. 모진 고문이 가해진다. 특히 그림시는 만신창이가 된 병든 몸으로 『옥중수고』라는 원고를 남겨놓는데, 이는 이 세계의 기득권층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 위대한 영혼의 역작이다. 병약했지만, 육신의 고통에 굴복하지 않았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정의의 이름으로 써내려간다. 이 세계의 모순과 정면으로 마주선다. 두렵지 않다. 혁명의 전사가 되어 죽을힘을 다해 이 세계의 모순, 즉 자본의 착취와 억압과 맞서 싸웠으며 항상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의 친구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녀들의 진심이 하늘에 닿아 진정한 나눔이 이루어지는 공유사회, 즉 평등의 제도화가 이룩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현재의 정치경제학적인 상황으로 볼 때, 공유세계를 현실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따라서 알고리즘의 신화가 지배하는 작금의 현실이 점점 더 자본 중심의 체제를 공고이하여 불평등을 심화 확대하는 방향으로 그 기본틀을 잡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 마르크스와 그의 유령들이 꿈꾸는 공유사회의 꿈과 평등의 제도화를 중단·폐기하겠는가?
하여 이 세상을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하고 황홀하다. 거기엔 가난과 궁핍이 없고, 서로 나눔을 실천하는 관용만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네 것 내 것 없이 이 세계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공유사회에 대한 발상은 마르크스에 의해 이론이 정립된 이래로 대략 150년 동안 소련, 중국, 쿠바, 동유럽 등에서 다양한 제도적 실험이 실패로 완료된 이후 불운하게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명이 내려진 상태이다. 그와 동시에 대공황이라는 위기의 상황이 닥친 와중에도 사유재산의 체계가 강화된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세계 도처에서 좌파, 즉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금기어가 되어가고 있다. 프로이트가 『토템과 타부』에서 말한 타부규칙처럼, 좌파 이데올로기는 가급적 언급하지 말아야할 금기목록에 등재되었으며 그것이 항상 독재에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키게 된다. 불행하게 현재 세계 도처에서 평등과 공유사회를 꿈꾸는 좌파이론가들은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평등의 제도화를 목적으로 한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일인 독재로 변질되어 미개한 폭정을 일삼았으며 종국에는 좌파이념 전체의 죽음을 초래하는 비극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이제 시민사회 전체가 억압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불가능한 서사로 사형 언도가 내려진다. 마르크스의 숭고한 기획이 결국 불능 상태에 이르러 착취가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자본의 천국이 되었다. 자본의 사적 자치, 즉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잉여 탈취를 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유재산, 즉 자본의 구성 능력의 대성공과 더불어 슬프게도 좌파의 아름다운 이념이 종말을 고하게 된다. 소비에트연방, 북한, 쿠바, 중국, 루마니아 등등의 공산주의 국가는 일인독재가 아직 횡행하고 있거나, 독재자의 죽음과 함께 몰락에 이르렀다. 문제는 공유사회를 지향하는 평등의 공산주의 이념의 타락에 있지 않다. 공산주의 이념은 타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불평등을 일깨우는 전위부대이자, 시대의 사명을 온전하게 전유하는 역사의 투사이다. 따라서 문제는 제도화라는 실천의 측면에 있지, 이념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평등을 꿈꾸던 시대의 이념은 아름다웠으며, 끝내는 인륜의 실재로 평가받아 모두가 힘써 이 세계 전체를 공유사회로 만들기에 이른다. 아마 그것은 체 게바라가 꿈꾸었던 참된 혁명의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문제는 공산주의 이념을 제도화하는 가운데 생성된 부조리한 측면으로 인해 발생하는데, 이는 아직까지 이념의 완성된 판본을 제도로 정착시키지 못한 결과이지, 그 이념 자체의 불완전성 때문은 결코 아니다. 항상 이념의 제도화에는 시행착오가 뒤따르기 마련이고, 그것을 시정·보완하게 되면 이 세계는 더 나은 세계로 진화할 것이다.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 혹은 시대의 미성숙. 전인미답의 길을 떠나는 이념의 정착을 위해서는 항상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 올바른 제도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위기에 위기를 더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통일은 더 나은 사회로 우리를 진일보하게 만들지만, 이념의 아름다움이 제도로 정착해 공유사회와 평등을 제도화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의 이념적 층위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그 이념의 모순적이고 불가능한 징후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의식화하고 제도로 정착시키는 방법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물론 이념을 실천하는 배후에 자본의 음흉한 교란작전, 즉 은밀하게 잉여를 탈취하는 교묘한 술책이 매개되어 늘 이념의 실패를 유도하고 있지만, 따라서 자본의 이념과 공산주의, 즉 공유사회와 평등의 제도화 사이에 항상 반정립적인 대결이라는 잔유물을 남겨놓아 파국의 국면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이는 지양 극복해야할 시대사적 명제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이념은 우리 모두가 행복한 길을 찾는, 착취와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여는 꿈과 희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세계가 항상 변화되지 않은 채 고정된 상태로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는 거대한 틀 내에서 시시각각 변화를 추구한다. 이 세계는 그것이 설령 아름다운 이념의 제도적 실천일지라도 항상 시대적 상황이 변화를 유도하여 체제나 제도의 발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시대는 변하고, 이미 의식화로 경화된 제도가 변한 시대상황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문화지체현상이라는 위기를 촉발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혁은 이념의 인과필연적인 법칙이고, 늘 시대의 명제를 실현하는 진리의 진실이다. 말하자면 개혁은 실천의 과정에 나타난 다양한 양태나 현상들을 현실에 맞게 구조 조정하는 방안인데, 이는 공유사회나 평등의 제도화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영원한 과제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공유사회와 평등의 제도화는 이 세계가 요구하는 실현가능한 테제, 즉 당위명제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실재를 증명하는 인류사 전체의 영원한 화두이지만, 그것은 이 세계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개혁에 노출된 체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류의 염원은 거시적인 통찰력과 미시적인 조정을 거쳐 상호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시의 적절하게 발명해낸다면, 그 제도적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끊임없는 변화만이 진리의 진실 앞에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물론 이 세상 모두가 각자 불만 없이 상호 만족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리만 가설’처럼 난제로 남아있지만, 하여 공유사회와 평등의 제도화는 앞으로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패의 과정을 통해 보다 완벽한 형태로 진화해가겠지만, 이는 상호이해와 협치, 즉 진정한 의사소통적 합일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 전체가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형식과 유사한 그 무엇이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험난한 제도의 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네그리 차원에서 볼 때, 일련의 실패의 과정은 혁명으로 나아가는 도정이었고, 아직도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서의 길이다. 하여 마르크스에게서 비롯하여 네그리로 향하는 위대한 혁명의 길은 가야만하는 존재의 길이고, 가지 않으면 후회와 미련이 남은 숙명의 길이다. 죽음으로 난 길을 따라 묵묵히 자기 길을 간다. 순간의 시행착오에 의한 실패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 자체에는 어떠한 오류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유 사회와 평등의 제도화는 인간학 전체를 아름다운 인륜성으로 포월하는 가장 숭고한 기획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마르크스―네그리의 기획이 미완의 과제로 남아 우리네 삶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따라서 현재에도 좌우이데올로기라는 함정에 걸려 늘 갈등을 일으키는 원흉처럼 작용하고 있지만, 어찌 공유사회와 평등의 이념에 대한 제도화를 부정하고 간과하겠는가? 그것은 평생을 걸어야만 하는 숙명의 과제이자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임무를 수행하는 절대명제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비극은 네그리와 그의 친구들이 행한 일련의 서사적 모험들이 거의 좌초직전이거나 불능상태에 돌입해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일생을 참여와 저항으로 일관했던 안토니오 네그리의 죽음과 함께 Communism공산주의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혀 괴멸 직전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네그리가 『맑스를 넘어선 맑스』에서 표명한 일련의 신념, 즉 마르크스의 모든 것을 재전유하여 일체의 자본주의적 관념을 일소하는 것은 물론 개량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와 한통속이라고 비판하면서, 이 세계의 행복을 제도화하는 유일한 서사적 장치가 공산주의라고 재차 천명하지만, 현재 네그리의 이 선언적 정의는 거의 불가능한 기획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네그리의 확증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이념적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아니 극우주의와 우익편향의 보수주의가 자본이라는 막강한 힘을 십분 활용해 노동과 그것에 속한 일련의 체계를 조작·은폐시켜 좌파이념 전체를 실현 불가능한 서사로 만들어 버린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는 극악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자본가와 정치·행정 관료 등의 기득권층에 대항하여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저 간헐적인 폭동은 있지만 혁명의 기조는 크게 수그러들어 발을 들여놓을 틈이 거의 없다. 환상의 이미지와 알고리즘의 사회로 급진화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마르크스―네그리의 이념적 층위가 너무 낡고 고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둘 다 맞는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하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복제의 복제가 넘쳐나는 소비지향적인 향유 시대에 보편 복지를 지향하는 공유사회와 평등의 제도화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길을 잃고 헤매는 낯선 풍경일지도 모른다.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환상을 생산해내는 알고리즘의 신화와 함께 새로운 이념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다. 분명 알고리즘의 신화는 좌우이데올로기 너머로 비상해 전혀 다른 형질의 사유와 체제를 요구하며 자본의 이념 전체를 전혀 다른 체제로 재구성 중인 것 같은데, 다만 그것이 자본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알고리즘의 기획이 인간 친화적으로 발전해 평등을 제도화한 풍경도 상상해본다. 다시 말해서 알고리즘의 신화가 완벽하게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구조 조정하여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실현시켰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산이 전 자동화되어 인류 전체가 소비하고도 남을 풍요로움의 극치에 도달한 사회를 상상해본다. 이를테면 알고리즘의 신화가 이루어낸 일련의 혁명은 우리 모두를 젖과 꿀이 흘러넘치는 가나안의 어디쯤으로 데려가 행복을 제도화하는 것인데, 이는 불가능한 미래의 서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알고리즘의 신화는 가까운 미래에 문화 전반, 즉 주거환경, 생활양식, 상품생산 등 일상의 분야에 걸쳐 혁신적으로 바꾸어놓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인터넷을 비롯한 일련의 디지털공학사회는 혁신에 혁신을 거듭해 최소한의 노동만을 필요로 하는 사회로 급진화될 것 같은데, 이는 또 다른 지옥문이 열리는 디스토피아이거나 완벽하게 풍요로움을 향하는 유토피아 둘 중 하나가 될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 쓸모가 무한 가능성으로 열린 하여 미완의 가능태로 존재하는 알고리즘의 신화는 이 세계를 유토피아로 만들 적임자인 것 같은데, 이는 디지털공학사회 전체가 지향하는 이념적 층위가 사회 전체를 위한 공공재의 역할을 하는 서비스사회, 즉 평등의 제도화에 앞장 서주기를 기원해본다. 그러나 현재의 진행상황으로 볼 때, 알고리즘의 신화는 극소수 부자들만을 위한 맞춤형 천국을 만들어갈 공산이 크다. 불행하게도 아마 그 시점이 되면 혁명이 폭발할지도 모른다.
13. 몽상가 혹은 연금술사 : 아직 남아있는 꿈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당신들은 내가 몽상가라고 말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서들을 읽다보면 그가 과학철학자라는 생각보다 일종의 몽상가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물과 공기와 대지와 불을 통해서 혹은 초의 불꽃을 응시하면서 안온한 꿈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삶이 없으리라. 몽상은 창조적이고, 생은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새로운 세계를 향해 비약하게 된다. 게오르그 루카치처럼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꿈과 낭만의 시대를 노래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환멸을 은폐하는 환상으로 삶의 진실을 왜곡하는데, 그것이 바로 21세기 현실이 처한 모순의 국면이다. 분명 외관상 풍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삶의 실질은 늘 팍팍하다 못해 빈곤의 임계점을 응시하게 되는데, 이는 희망의 서사를 압축·전치된 꿈사상으로 치환시켜 삶 전체를 왜곡·전도시켰기 때문이다. 하여 모든 시대는 고난의 여정으로 휘어진 알레고리적 현실이자, 전도된 꿈으로 구조화된 환멸, 즉 모든 것을 왜곡시키는 절망의 역사이다.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 더는 희망의 서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매혹적인 환상과 알고리즘의 신화로 가득 찬 자본 중심의 21세기는 인간학 전체를 가상의 노예로 만들었으며, 더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실재의 세계를 믿을 수 없다고 강변하기에 이른다. 향락에 빠진다. 향락을 향유하는 달콤한 인생이 최고의 목적이다. 삶의 현실이 근본적으로 변한 알고리즘의 세기에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고, 어디를 향해 떠나는 마지막 비상구인가? 꿈이 사라진 세계를 자본의 욕망으로 가득 채운다. 아니 환상에 경도된 채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며 질투와 갈등의 나날들을 헛되이 살아내도록 길들여진다.
꿈이 사라졌다. 환상의 세기가 도래함과 동시에 꿈은 꾸어서는 안 될 미망의 덫이거나 자본의 음흉한 모략이 만들어낸 허구로 전락하게 된다.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에서 말한 미래의 희망을 암시하는 낮꿈을 꾸지 않는 것은 물론 환상에 몰입한 채 늘 어둠 속을 헤맨다. 히키코모리처럼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밀폐된 자기만의 공간에 은거한 채 환상을 탐닉하거나 환멸을 자신에게 역투사하는 포기를 선택한다.
삼포, 오포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희망과 꿈을 포기하는 세대가 무차별적으로 양산된다. 그와 동시에 절망이 탐닉으로 전도된다. 참담했고, 늘 악몽에 시달린다. 아니 자본과 그것이 만들어낸 일련의 체제는 꿈의 포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억압과 착취를 상시 이용하는데, 이는 잉여를 탈취하는 교묘한 술책이다. 깨어 이 세계의 정의를 부르짖던 ‘노동자의 햇새벽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저항은 불가능한 서사라고 호도한다. 말하자면 21세기 알고리즘의 신화의 출현과 함께 자본에 경도된 인간학은 왜곡된 꿈사상만을 생산한 채 향락의 서사만을 양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실재가 사라진 시대의 환상의 위치이다.
첫째도 향유이고 둘째의 목적도 향유이다. 인륜적 가치 전체가 환상과 그것의 구성물로 포장되어 이미지화된다. 그러나 환상은 소모·소비되는 향락의 기호이지 상승·고양되는 인륜의 가치가 아니다. 소비를 부추긴다. 이미지에 또 다른 이미지를 덧대고 겹쳐 이 세계를 이미지 천국으로 만들어버린다. 실재가 사라진 시대에 첫 번째 가치도 환상이고, 두 번째도 환상적인 이미지를 향유하는 삶이다. 물론 그 모든 기획의 배후에 자본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그렇다면 꿈과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혹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환상이 활짝 미소 짓는 시대에 인간학이 지향해야만 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욕망의 충족요율을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는 것인가? 아니면 절제와 겸양의 미덕을 키우는 것인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알고리즘의 신화와 함께 성장한 스마트한 사회는 도파민 중독의 향유사회이지, 미적으로 고양된 승화의 양식, 즉 인륜적 사회를 요청하지 않는다.
그저 화려한 자본의 기호 앞에 눈이 멀어 존재의 길을 잃고 헤매다 포기와 절망을 학습하게 된다. 이미 자본의 기호에 길들여져 이미지의 노예가 된다. 향유의 길은 저와 같다. 자본의 체제가 내어놓은 길이 참혹하고 반인륜적인 이유가 여기 있는데, 무한한 소비를 부추기어 향락을 향유하는 삶이 최고의 삶으로 특권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돈 많은 부자가 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었으며, 더는 자신만의 고유한 이상이나 꿈을 좇거나 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치부된다. 돈이 목적이 되어버린 시대에 더 나은 세계를 열망하는 꿈과 이상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폐용 가치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자본의 이념으로 중무장한 21세 알고리즘 시대에 몽상가Dreamer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체제의 저항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존재의 열망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망상에 휩싸인 이 세상의 무위도식자인가? 물론 통념적으로 볼 때, 수구적인 보수 자본가에게 몽상가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헛된 생각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처럼 비추어지지만, 따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된 생각에 매달리는 사회의 암적인 존재처럼 인식되기도 하지만, 어찌 그/녀들로 인해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렇고, 레닌이 그러했듯이, 몽상가적 기질만이 혁명의 주체가 되어 이 세계를 발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 아마 그/녀들, 즉 루카치, 블로흐, 프레이리, 체 게바라 등등의 혁명적 실천가들은 통념이 지배하는 기성가치에 대한 저항하며 평등의 이념을 몸으로 실천했고 또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하는 열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이들이 결코 헛꿈만 꾼 망상의 소유자가 아닌 이유는 여기 있는데, 그/녀들이 지향하는 이념이 우리 모두를 행복의 세계로 이끌 수 있는 아름다운 미적 세계, 즉 진정한 인륜성이 실현될 수 있는 참된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몽상가란 단지 가상에 휘둘린 채 헛꿈만 꾸는 나약한 자로 비추어지겠지만, 따라서 그/녀들이 지향했던 삶―시간―세계가 실천 가능하지 않는 망상에 빠져 가장 중요한 실질을 놓치는 것처럼 간주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있지만, 이 세계를 발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혁명의 구호는 몽상을 구체화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평등의 실천적 국면이다.
평등과 평화의 요청과 더불어 불평등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망상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아니 역으로 창조적 작가의 몽상이 없다면,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없고,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사회로 굳어져 불평등을 방치하는 최악의 사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문학의 상상적 지평이 소중한 이유는 몽상의 마력을 이상의 마력으로 신비화해 우리 모두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의 연금술은 사라지고 없어진지 너무 오래일 뿐만 아니라, 너나없이 모두가 자본의 욕망하는 자아로 변질되어 급기야는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가고 있다.
점점 더 견고하게 쌓아가는 자본의 체제와 더불어 인간학은 안정, 즉 보수적 경향을 노골화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창조적 작가의 몽상을 불가능한 것으로 폄훼하거나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시켜 이 세계 전체를 물화시키기에 이른다. 물화는 노예의 시작이다. 문화는 산업 자본의 생산력을 위한 도구이자, 자본의 가치로 환원 가능한 한에서만 문화적이다. 따라서 새로운 세계를 열고 또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 예언자적 행위는 자본을 소유한 기득권층에게 망상이지, 아름다운 창조적 몽상이 아니다. 사회적 관성에 저항하는 모든 행동이나 이념은 망상이다.
말하자면 자본의 편에서 볼 때, 구조와 질서 전체를 전복하고자 하는 몽상가들의 의지는 헛된 망상이지 모두가 평화를 누리는 신세계의 열림이 단연코 아니다. 자본의 체계가 역설하는 일련의 구조는 자본의 증식이라는 외길, 즉 자유무역을 통한 잉여의 확대재생산뿐이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각자 자신의 이익에 몰두하여 이익이 남은 행동을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이 세계의 부를 선순환적으로 증대하여 유토피아를 만들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지만, 그러나 잉여는 자본가의 손에서만 증대될 뿐, 잉여를 탈취당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하여 빈민으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저와 같다. 부자는 아들을 낳아 재벌을 만들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딸을 낳아 빈자 다중으로 몰락하게 된다. 부가 고착된 채 변화가 정지된다. 변화는 체제의 안정을 위해 중지되거나 아주 작은 미세조정만 허락된다. 이를테면 창조적 작가의 혁명적 몽상, 즉 박노해가 설파했던 일련의 서사적 모험은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거나 그림시처럼 감옥에서 폐결핵과 척추질환으로 고통을 받다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이념은 체제의 안정을 해쳐 사회의 위기를 만들어내는 이 세계의 반동분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가설이 자본의 체제를 옹호하는 보수기득권층의 논리에 의해서 왜곡된 것이지만, 따라서 이 세계의 대다수가 사회적 관성에 따라 보수기득권층과 보조를 맞추며 살아가는 경향이 있지만, 어찌 그/녀들이 시대의 진실을 대변하는 정의의 이름이겠는가? 정의란 다수가 아닌 우리 모두의 동의를 요구하는 모든 시대의 진실이다. 따라서 몽상가들의 서사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이 시대의 진실과 공명하는, 정의의 이름으로 노래하는 인륜의 기호이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시작하여 그림시와 체 체바라를 경유해 네그리와 하트에 이르는 좌파 이데올로기는 실현 불가능한 헛된 망상이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이룩해 가야할 아름다운 인륜의 몽상이다.
물론 현재의 안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보수기득권층에게 개혁이나 혁신을 옹호하는 혁명가들은 치기어린 몽상가로 비추어지겠지만, 따라서 그/녀들이 추구하는 일련의 사태가 실현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호도·왜곡하여 진실의 의미를 흐리겠지만, 어찌 좌파의 이념적 층위가 거짓된 서사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류 역사이래 공명시켜야만 하는 최대의 화두이다. 어쩌면 이 시대의 자본가계급은 중세 시대 탐욕의 화신인 연금술사와 많이 닮아있다. 다시 말해서 구리와 주석 혹은 납 등의 비금속을 가지고 금이나 은 등의 귀금속을 만들거나 불로불사의 영약을 만들기 위해 온갖 비기를 사용하는 연금술사처럼, 우리 시대의 자본가는 잉여 탈취를 위해 탈법과 위법으로 중무장한 채 자본 증식에 혈안이 되어 있는 탐욕의 연금술사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자본가가 탐욕의 화신이라면, 반면에 중세의 연금술사는 깨달음의 영역에 이르러 자기 스스로를 정련하는 자로 탈바꿈하게 된다. 말하자면 연금술사는 한 번도 비금속으로 귀금속을 만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노불사의 영약도 만들지 못했다. 수은Hg와 납Pb, 즉 금을 만들기 위해 수은이나 납을 잘못 사용하거나 과도하게 사용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종국에는 실패를 인정하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깨달음에 이르러 조화의 묘법을 몸소 실천하기에 이른다. 반면 자본가계급은 매번 잉여 탈취에 성공해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엄혹한 현실을 반복적으로 재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삶―시간―세계를 지배하는 엄존의 현실임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속의 자본주의는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언명한 것처럼 인간의 공동체를 갈아버리는 악마의 맷돌, 즉 시장경제의 이익의 원리에 따라 인간성을 파괴하는 사악한 제도이다. 말하자면 폴라니가 말한 것처럼 경제는 시장의 논리에 따라가는 단순한 돈의 논리, 즉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뿌리와 밀접하게 관련된 존재의 본질인 운동인 한에서 경제적이어야 한다.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관에 입각하여 공동체적인 삶을 도외시하지 않고 더불어 함께하는 경제체제를 모색하고 있다.
인간의 삶을 해체시키는 자본주의라는 악마의 맷돌을 멈추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고, 또 그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폴라니의 공동체 운동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폴라니가 지향하는 공통체적인 삶은 인륜성을 복원하는 숭고한 행위이자, 이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작은 단위의 공동체야말로 파괴되고 해체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적인 대안일지도 모른다. 점점 비대해져만 가는 거대도시 속에서 소외된 영혼의 타자로 존재하기보다 내가 너를 불러 ‘우리’로 함께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다.
금과 은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었던 탐욕의 연금술사와 같은 자본가를 깨달음에 이른 연금술사로 만드는 일은 잉여탈취를 제도적으로 실패하게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완전고용 상태, 즉 이윤과 이자를 제로상태로 만들어 모든 화폐 관계가 사라지는 이상사회를 갈망했던 것처럼, 어쩌면 케인스가 요구했던 국가개입이라는 장치를 넘어선 초국가적인 범세계적인 중립기구이면서 법적으로 강제권을 가진 통치 기구를 창조하여 완전고용이 이루어진 사회를 소망해본다.
아마 그 세계는 평화가 제도화된 이상세계일 것이고, 일체의 갈등이 사라진 조화의 세계일 것이다. 케임브리지학파의 이상주의적 몽상가였던 케인스의 꿈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몽상해본다. 물론 케인스의 이론이 실현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케인스가 자본주의적 개량주의를 통해서 이 세계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실험하고 모색했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되지 않는다. 아니 역으로 그는 탐욕스러운 시장주의자의 논리가 대공황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 위기에 빠진 순간 구원자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뉴딜정책에 매개된 사회주의 정신이다.
어쩌면 자유시장경제의 원리, 즉 시장의 자율적인 자기조정 능력은 민중을 기만하는 도구적인 장치이자, 착취와 억압을 은폐하는 사악한 악마의 맷돌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자들은 금과 은을 만드는 데 실패한 연금술사이거나 이상사회를 꿈꾸는 몽상가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언제나 불의에 저항하거나 정의와 함께 공명하기를 희망하는 변화의 사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의 이념에 경도된 이 세계는 인륜성을 도외시한 채 자본의 체제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여념이 없다. 지금도 악마의 맷돌을 쉼 없이 돌려가며 착취가 일상인 사회를 정의롭다고 둘러대면서, 생산과 소비에 몰두 중이다. 아직도 자본가계급은 세이의 법칙, 즉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고 영원한 번영을 자유시장경제가 지속시킬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자본의 영구집권을 꿈꾸고 있다. 자본가계급은 등 따습고 배부르게 향락을 향유하는 삶을 살아가고, 노동자계급은 빈자 다중으로 몰락한 채 경제적 공포를 몸소 체험하게 된다. 몽상가들이 꿈꾸는 혁명만이 이 세계를 발본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다.
14. 세상을 바꾸는 힘 : 참여 혹은 타자와의 연대 그리고 방관자
I hope someday you'll join us(당신도 언젠가 우리와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이라는 말이 우선 떠오른다.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사이의 거리는 얼마 만큼이고, 또 예술가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 세계와 연루되는가? 창조적 예술가의 몽상 혹은 의미의 생산자. 참여다. 더불어 함께하는 참여의 정신이 우선적이지 않을 경우 변화는 전혀 없다. 이를테면 세상을 바꾸는 힘은 하나의 이념이나 구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공공선을 향해 나아갈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앙가주망하면 항상 연루라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항상 무엇엔가 연루되어 있지,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따로이 존재할 때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없다. 연루되지 않은 것은 의미를 생산하지도 창조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늘 타자와 관계 속에 연루된 채 함께 존재한다. 서로 부대끼고 울기도 하며 때론 상호 공명하는 존재가 타자존재의 의미인 한, 우리는 상호 연루되지 않은 채 외따로이 존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외관상 타자는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할 때, 여간 거추장스럽고 그리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타자, 즉 차이를 생산하는 이질적인 존재인 타자는 이 세계의 공포를 유발하는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계가 각자 자신의 임무를 다하며 선순환적으로 잘 돌아가는 사회라면, 타자의 존재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만약 아담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의 힘에 의해 우리 모두가 상호 이득을 취하며 이 세계를 상호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완벽한 이익사회라면, 자본의 정치경제학, 즉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수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늘 그와 같은 경제적 행위나 정치적 이슈를 통해서 항상 상호 연루되어 타자와 접촉을 하는 까닭에 타자를 의미의 공식에서 배제할 수 없는 무수한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서구적인 의미의 개인주의가 개인의 행복추구, 즉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라는 차원에서 아름답고 권장할 만한 사안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타인과 상호 연루되어 갈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될 때, 문제는 자못 심각하게 된다.
이해를 넘어서지 못하는 편견이라는 벽이 생긴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견고한 벽이 생겨 서로를 차별하거나 불평등을 제도화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참여와 소통이 배제된 개인주의 사회는 불평등이라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켜, 그것을 제도로 정착시키는 나쁜 관행을 용인하기에 이른다.
무관심이 조장될 뿐만 아니라, 참여의 길이 극적으로 폐쇄된다. 아니 전혀 소통하지 못하는 이익사회로 급진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의 계급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자본의 천국을 만들어버린다. 부익부빈익빈이 심화된다. 적개심과 증오심이 자연스럽게 유발되었고, 폭동을 일으켰으며 사회 전체를 소통불가능한 분열의 기호로 체제화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상호 밀접하게 연루된 개인이 부를 중심으로 서로서로 참여하기를 거부하며 개인성을 주장할 때, 불평등은 비로소 사회문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부자인 너와 가난한 나는 상호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가난과 부가 빚어내는 일련의 불평등은 항상 서로 연루된 관계 속에서 파생된 최악의 사태이다. 그것은 미필적 고의로 중무장한 엄존하는 사회적 현실, 즉 공공연하게 탈취되는 잉여의 합법적인 모습이다. 이를테면 착취, 즉 알게 모르게 이루어지는 잉여 탈취 행위는 우리 모두의 권리가 침해되는 추악한 삶의 현장인데, 이는 참여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항상 연루되어 함께 활동하는 참여적 연대를 통해서 사회적 불행, 즉 보이지 않는 벽으로 작동하는 이 세계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주의가 그 체제를 확대재생산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되면서 점점 더 많은 방관자를 양산하도록 우리 모두의 정신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부를 전유 독점하여 행복의 주체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불행의 나락으로 추락하여 빈자 다중으로 몰락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미 만들어진 자본주의를 민주주의와 절묘하게 절합하여 시장경제의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용인하도록 길들이는 것을 물론 그에 따른 불평등의 제도화를 불요악으로 강제하고 있다.
비판의 칼날이 점점 무디어지고 저항은 유명무실해져 이 세계 전체가 자본가계급 중심의 세상으로 형질전환되 채 무소불위의 자본의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돈 많은 자, 즉 대재벌 기업의 총수가 권력(법과 정치 등등)과 결탁해 빈자 다중의 소외를 너무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체제로 경화될 것이다. 부와 가난은 타고난 것이지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결과를 뒤바꿀 수 없다. 상호 관계의 연루가 끊어지고 비로소 거대한 장벽이 생겨나게 된다. 아마 그 장벽은 보이지 않는 장벽이거나 감히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작용해 계층화를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방관자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알게 모르게 모든 개인은 연루되어 있다. 크건 작건 상관없이 개인은 개인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사회라는 틀 안에 구속되어 연루되어 있다. 말하자면 나라는 한 개인은 유일자로서 존중받고 존중하는 지극히 소중한 대상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따라서 이 세계는 타자의 개인성을 존중하는 한에서만 세계로 존재하지만, 그것은 타자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사태이다. 타자가 없는 나는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타자가 없는 특권은 특권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나의 개인성은 타자의 참여에 의존하지, 타자 없는 나는 비존재이다. 타자는 의미의 존재방식, 즉 나의 위치를 결정하는 존재의 바로메타이다. 따라서 타자를 배제한 개인성은 아무런 존재의 의미를 지닐 수 없고 발휘할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푸코나 라캉이 말한 것처럼 타자의 위치는 나의 위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서사적 장치, 인간학의 참된 위치이다.
하여 나의 존재는 타자의 참여이다. 우리 모두는 이 세계에 참여하고 있고, 각자 의미를 발산하는 세계의 주체이다. 인간학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참여를 실천하는 것이고, 나의 행복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너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를 의식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타자가 나와 더불어 나를 함께 의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지, 나의 특별한 개인성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서로를 함축하고 상생하며 갈등을 유발하는 존재인 한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가진 의미의 존재이다. 아담 옆에 이브가 있고, 그 옆에 선악과를 따게 한 뱀이 있었기에 이 우주가 하나의 서사를 새롭게 개시하여 노동과 고난의 서사를 써내려갔듯이, 우리는 상호 연루되고 의미를 공유하는 한에서만 특별한 의미의 주체로 우뚝 설 수 있다.
어쩌면 라캉의 주체의 존재방식은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에 내파된 연루의 의미를 교묘하게 오마주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의 의미는 너의 참여, 즉 너의 연루를 통해서 참된 의미의 주체로 거듭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개인이 이미 너라는 주체에 의해 연루되어 있는 한, 우리는 상호 연대의 지반 위에서 세계와 마주서있다. 따라서 나는 이미 타자와의 연대에 열려있다. 아니 인간학은 상호 타자성을 인정하는 참여에 의해 항상 스스로를 개방하고 있다.
나의 타자를 너의 타자로 만들어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타자와의 연대는 참여의 공식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문구인데, 이는 의사소통적 합일만 이루어진다면 쉽게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그리 큰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니 서로 화합하고 소통하며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곧 이 세계를 바꾸는 거대한 힘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함께 더불어 나누며 의식을 공유하는 연대라는 저 위대한 개념은 혁명을 시작하는 위대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와 반대로 너무도 쉽게 배반이라는 단어 앞에 노출되어 가볍게 무너져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연대. 우리 모두가 함께 더불어 참여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이 세계는 너무도 쉽게 독재자나 자본자의 수중에 넘어가 모든 특권을 침탈당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너와 더불어 함께 연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연대했다 하더라도 늘 배반을 하거나 자기 이익을 도모하다 끝내는 공멸에 이르게 된다. 왜 그런가? 왜 인간학은 항상 저와 같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며 여기 이 불평등의 참혹한 공간에 이르렀는가? 안타깝지만, 인간은 이성의 타자, 즉 반이성이라는 저 치명적인 감성에 의해 항상 자기 욕망에 굴복하는 노예로 전락하거나 자기감정에 충실한 채 배반을 일삼는 치명적인 오류는 빈번하게 저지르곤 하는 이중의 존재이다.
신뢰. 타자는 계륵이자 존재의 필연이다. 배반. 타자는 나의 숙명을 결정하는 주체이자, 모반의 원흉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적 지평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호 연대하면서 의미의 방식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왜냐하면 더 아름다운 사회적 관성을 제도화하여 평등과 평화가 삶의 자연으로 의식·수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참여의 진정한 가치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불어 함께하며 이 세계 전체를 상호 공명할 수 있는 미적 체계로 진화시키는 것은 참여적 연대할 수 있는 지상최대의 과제이다.
아름답다. 그저 눈앞에 보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참여는 완성된다. 연대의 아름다움은 미적이고, 인륜적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파울로 프레이리가 『페다고지』에서 말한 상호 이해의 증진을 통한 연대에 의한 친목 도모는 이 세계 전체를 인륜적 공간으로 만드는 상생의 원리이자,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풍요로움의 시작이다. 이제 친교를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해와 소통이라는 교량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지만, 따라서 상호 공감의 영역으로 이끌어 타자를 백안시하지 않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는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성에 주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대를 필요충분조건으로 의식화하는 곳에서 생성된 긍정적 이해의 공유에서 비롯한다.
친교가 요청된다. 차별하지 않는다. 차이를 인정한다. 우리는 차별하지 않고 상호 이해하며 서로 연루된 운명의 공동체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LGBT도 문제가 되지 않고, 남녀흑백의 차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참여의 정신은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상호 이해하는 곳에서 생성된 인간애의 실현이다. 따라서 문제는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문화적 풍토를 만들어 그것을 제도화하는 방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결국 인간학의 문제는 단순하게 이념이 불러일으키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합리적이게 실천하는가하는 문제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실천이 문제의 중심이지, 이념이 아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제시된 방법의 문제가 참여를 가로막는 가장 어려운 문제로 대두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 문제의 연속선상에 개인 그 자체를 어떻게 교육하고 의식화하여 참된 이해에 이르게 만드는가라는 문제가 커다랗게 가로놓여있는 것 같다. 가장 치밀하고 미시적인 접근법을 통해 우리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방법만 남은 것 같다. 우리 모두가 편견 없이 참여하여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면 이 세계는 갈등이 없는 평화의 세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간단한 문제는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본질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역으로 페르마의 마지막정리처럼 수 백 년 동안의 난제로 남아 어느 누구도 쉽게 출구전략을 세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말은 쉽고 행동으로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다. 아니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이해·소통을 통해 서로 참여하고 연대하여 개혁을 이룩하자는 교의는 수 천 년 동안 내려온 이 세계의 평화의 테제이지만, 그것을 한 번도 제도로 정착시켜 성공시킨 적이 없다.
따라서 설득과 이해가 한데 어우러진 소통적 참여야말로 이 세계를 더 나은 방식으로 제도화할 수 있는 유일한 지름길인데, 이는 알게 모르게 상호 연루된 우리 모두가 의사소통적 합일을 통해서 상호 공존의 미학을 창조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동하게 된다. 말하자면 인간학은 상호 참여하는 주체의 관계를 대상화하는 곳에서 생성된 낯선 풍경을 의식화하는 행위이자, 그것을 문화의 단위로 고양시켜 너와 내가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의구심이 일어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따라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문명과 문명의 접촉이 대화적 소통을 형성하기보다 전쟁을 야기하는 갈등을 유발하겠지만, 어찌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서로간의 화합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사소통적 대화와 연대의 구성이야말로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혁명의 시작이다. 이 세계를 하루아침에 바꾸기 위해서는 생산적 대화에 참여해 상호 이해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시작하게 된다. 만남의 열린 장이 이루어지고 대화가 오고간다. 야합과 정경유착이 이루어져 이권을 몰래 넘기는 어두운 사회가 아니라, 투명하게 열린사회를 만드는 것이 참여의 제일조건이다.
팀 버튼 감독의 『화성 침공』은 만남과 소통에 관한 담론적 사유를 화성에서 온 외계인을 통해서 우회하고 있는데, 이는 참된 참여적 소통과 이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이 세계의 전망을 알레고리적으로 역투사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지구인을 몰살시켜 멸망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 화성인과 화성인에게 우호적이며 대화와 소통을 통해 평화로운 우주시대를 원하는 지구인 사이의 전쟁을 약간은 우스꽝스럽고 과장되게 그러내고 있다. 한쪽에서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며 전쟁만을 일삼고, 다른 한쪽은 평화를 열망하지만 너무도 쉽게 거짓에 속아 넘어가 상호 공멸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화성 침공』은 우리 사회의 단면도를 우회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상호 소통하지 않으며 전쟁만을 일삼는 분열의 세계상이다. 화성인과 지구인 사이의 거리 어디쯤에 아랍과 서구 유럽 문명이 위치해있을 것이고, 또 중국과 미국이 위치해있다. 분명 이 세계는 늘 갈등을 일삼으며 평화를 파괴하는데, 이는 참된 참여를 가로막는 이 세계의 분열된 모습이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아마 최악의 경우 우리 모두 함께 공멸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핵무기를 우크라이나 어디쯤에 투하해 죽음의 대열에 참여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세계를 바꾸는 힘은 『화성 침공』의 명배우 잭 니콜슨이 연기한 미국 대통령 제임스 데일 식의 일방통행식의 이해와 소통이 아니라, 쌍방이 서로 이해를 일치시켜 합의에 동참하는 실천적 의지를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참여란 함께 동참하여 평화를 제도화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인류화합의 메신저이다. 따라서 팀 버튼의 SF영화 오마주는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려내는 알레고리이자, 평화의 불가능성을 시사하는 역설의 징후이다.
슬프게도 이 세계는 아름다운 미래를 예고하는 알고리즘의 신화와 무관하게 점점 더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고, 인류멸망을 예고하는 전쟁의 상황으로 점점 내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이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무관심의 태도를 일관하며 수수방관한 채 멸망을 눈앞에서 보든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평화의 대열에 참여하거나 상호 연대하여 행복을 제도화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놓여있다.
한 개인의 변화가 세계를 바꾸는데 근본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만, 한 개인만의 힘으로 세계를 발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개인의 힘은 모래알이지 그 개개인들의 힘들을 하나로 뭉쳐 상호 연대할 수 있다면, 개인은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를 발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의 전사로 변신하게 된다. 참여란 저와 같고,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개인은 혁명의 전사이자 무기이다.
15. 마이클 잭슨과 위대한 친구들 : We are the World
And the world will be as one(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이 세계는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세상이 하나 될 수 있는 토대를 굳건하게 만들 수 있는가? 사회로부터 구제가 되지 않는다면 빈자 다중은 어디에서 삶을 도모해야 하는가? 사회는 포기하지 말아야할 삶의 최대단위이고, 인륜적 가치를 보장하는 최소단위이다. 더불어 함께하며 삶을 나누는 사회를 몽상해본다. 아마 그 세계는 이미 하나로 통합되어 있을 것이고 행복을 제도화하는 사회일 것이다. 미래의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지만, 그러나 하나로 통일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돌아가는 국제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이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지리라고 믿지 않는다.
1980년 12월 8일 뉴욕의 맨하튼 한 복판에서 총성이 울린다. 팬에게 사인을 해주다 불의의 총격으로 존 레논은 다음날 사망하게 된다. 팝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곡 중 하나인 「Imagine」은 1971년에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전운동의 평화주의자인 존 레논이 총격의 사망했다는 뉴스는 호외로 전 세계에 타전됐다. 아직도 총기사고가 빈발하고 있고, 미국의 공화당은 총기판매업자로부터 정치헌금의 형태로 금품을 수수하며 총기판매금지법에 반대서명에 앞장서고 있어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이 세계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늘 그렇듯이 상호 간의 이해관계가 전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력구제를 위한 정당방위와 무차별 총기난사 살인사건 사이의 거리에 무엇이 매개되어 있는가? 금전적 이득과 인간애라는 상호 이질적인 가치가 충돌하고 있을 것이다. 총기소지가 합법적인 미국은 여전히 불특정다수를 향해 거의 해마다 총기난사 사건이 빈발하고 있는데, 총지 소지 규제 법안은 전혀 통과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공화당과 밀착한 총기업자들의 끈질긴 로비활동으로 인해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법안 통과는 요원해 보인다.
원한과 증오의 극악한 살인의 현장과 달리 기근으로 인해 죽어가는 아프리카 난민의 모습은 미필적 고의로 유기되는 또 다른 살해의 현장이다. 특히 1984년 에티오피아와 수단 등의 지역에 혹독할 정도의 가뭄으로 인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외신이 타전된다. 물론 요즘은 이상 기후 현상으로 인해 해를 바꿔가며 홍수와 가뭄이 빈발하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이 외신은 마이클 잭슨과 그의 친구들에게 영감을 주어 「We are the World」라는 명곡이 탄생하게 된다. 더 나아가 마이클 잭슨과 그의 친구들에 의해서 결성된 슈퍼 그룹 USA For Africa는 냉혹한 자본의 세기를 돌파할 수 있는 하나―되기의 아름다운 전형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싱글 앨범 제작과 지휘는 명제작자이자 가수인 퀸시 존스가 맡았고, 작사와 작곡은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가 맡았다. 그리고 40여 명이 넘는 팝스타들이 대거 참석해 크고 작게 힘을 보탰다. 「We are the World」는 대중문화예술가가 행할 수 있는 위대한 사건이다. 아니 그것은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정치경제 부문의 전문가를 희롱하는 반어적 사태이다. 이 사건은 브릴로 상자나 실크스크린을 가지고 뉴욕의 화단을 경악하게 만든 앤디 워홀의 팝 아트의 혁명성을 초라하게 만드는 사건인데, 이는 20세기를 영롱하게 빛을 밝힌 하나―되기의 아름다운 표본이다. 미국 팝 음악계의 위대한 아티스트, 즉 레이 찰스, 밥 딜런, 다이아나 로스, 스티비 원더, 폴 사이먼, 케니 로저스, 디온 워윅, 신디 로퍼, 빌리 조엘, 케니 로긴스, 부르스 스프링스틴, 킴 칸스 등등이 참여했고, 이외에도 많은 가수를 비롯한 음악 관계 종사자들이 음으로 양으로 이 자선음반 발매에 힘을 보탰다.
가히 폭발적인 참여였다. 단 일회의 한시적으로 결성된 슈퍼 그룹 USA For Africa는 1985년 3월 7일 발매와 함께 600만 장이 팔려나갔고, 전 세계적으로 대략 2000만 장 이상 발매된 것으로 추산된다. 어마어마한 판매량이었고, 수익금 전부를 에티오피아와 수단의 난민들에게 기부했다고 한다. 가난과 궁핍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에게 귀 기울이며 작은 힘을 보태라고 요청하는 「We are the World」는 결국 우리가 하나임을 선언하는 것은 물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너와 내가 힘을 합치자고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최소한 힘은 내가 너를 불러 우리로 함께하는 바로 그 순간에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바꾸는 힘은 너와 내가 손에 손을 잡고 노래 부르며 우리는 하나, 즉 We are the World라고 선언하는 순간 발생하는 시너지효과이다.
변화는 노래 가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Just you and me로부터 시작한다. 변화의 힘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아니 변화는 너무도 바쁜 공연 일정으로 짜인 와중에도 서로가 조금씩 짬을 내어 너와 내가 더불어 함께하는 십시일반의 정신에서 비롯한다. 대중예술가들이 전달하는 일련의 사랑과 구호의 메시지, 즉 자선을 베풀라는 구호의 긴박한 소호는 사랑의 울림으로 공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이 외면한 소외의 현실이다.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 사회복지나 국민건강보험을 외면했으며 마침내 이 세계를 자유시장경제의 논리에 내맡긴 채 긴축재정을 제일원리로 삼기에 이른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을 사회가 결코 구제하지 않는다. 1980-90년대가 참혹한 시대인 이유는 마이클 잭슨과 그의 친구들이 절박하게 호소했던 구호가 전혀 정치경제학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시기라는 점이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기인 1980-9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 경향이 노골화되었고,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경제를 표방했던 시기였다.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이 주창했던 국가개입을 최소한도 축소시키고, 이제 모든 것을 자유시장의 논리에 따라 국가는 방임주의 정책을 펴고 일련의 사회 복지 정책도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복지비용을 대폭 삭감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 경향을 띤 국가 행정부와 법적 정치적으로 상호 결탁한 채 자본의 구미에 맞게 그 체제를 개편하게 되는데, 이는 경영합리성이라는 명목으로 국가 행정부 내의 공공사업부문을 자본주의 체제로 형질전환시키기에 이른다. 무한 경쟁이 대세로 자리 잡았으며 마침내 최소한의 인권, 즉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조차 경쟁이라는 명목하에 박탈당하기에 이른다. 사회는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경쟁의 장이지, 결코 상생을 유도하는 인륜의 장이 아니다. 특히 모두가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공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는 의료, 수도, 전기, 철도 등의 공공부문을 기업의 생산논리에 내맡겨 철저하게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으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사회공공복지후생 부문이 민영화되었다는 말은 국가의 책임을 사기업에 떠넘기는 행위인데, 이는 빈자 다중의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근본원인이다. 수익은 점점 줄어들고 공공요금이 올라 기본적 삶조차 영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자본의 논리, 즉 수익성이라는 이윤 추구에 과몰입한 신자유주의 행정부는 자본의 체제와 보조를 맞추어 비인간화경향을 노골화하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돈이 되지 않는 부문은 과감하게 통폐합하거나 민간기업에 매각해 영리법인으로 전환해 수익모델 창출에 혈안이다.
신자유주의 이론적 원리를 제공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논리에 따라 이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미국 월가의 금융자본의 논리로 중무장한 채 노동운동을 전적으로 부정했고, 또 LGBT, 즉 성소수자 문제나 페미니즘운동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백안시하며 부정적인 태도로만 일관하였다. 말하자면 신보수주의 성향을 띤 대처와 레이건 정부시대인 1980-90년대는 자유주의라는 미명하에 철저하게 사유재산의 권리를 옹호하는 자본의 논리에 영합하면서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평화와 평등의 시대를 열망하기보다는 극소수 자본가계급의 권리를 비호하는 세력으로 퇴화되었다.
따라서 자본가와 행정부의 관계는 암묵적으로 정경유착과 유사한 형태로 밀착하여 행정부는 자본가로부터 정치자금이나 선거자금을 융통하고, 자본가는 행정부로부터 수많은 이권을 은밀하게 탈취해간다. 불법이나 탈법이 난무하지만 그들을 막아낼 구체적인 방법이 없다. 대처 수상이 말한 것처럼, 자본의 욕망을 억누를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 만능의 시대는 특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채 욕망(소유욕)을 탐닉하는 죽음에 이른 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무한 욕망이라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 자기 욕망만을 충족시키는 환상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하여 진정한 자유는 정의와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녀들이 추구하는 자유가 항상 정의와 평등과 반정립적인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유 재산에 바탕을 둔 자유는 욕망의 자유, 즉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비인간화의 가장 악의적인 판본이지, 진정한 의미의 자유에 속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자본의 한계 내에서 작동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일 수 없고, 억압과 착취가 만연한 사회로 진입하는 기만적인 우회의 통로이다. 문두에 위대한 자유라고 걸어놓고, 그 자유라는 용어를 착취와 억압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와중에 마이클 잭슨과 그의 친구들은 정치경제학이 도외시키는 구원의 문제를 지극히 사적인 재능을 통해서 이 세계 전체와 공명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이 「We are the World」에 내파된 의미의 본질이다. 그것은 혁명의 전조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을 파괴할 강력한 무기이자, 진실의 이름으로 부르는 영혼의 노래이다. 미국의 팝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한 슈퍼 그룹 USA For Africa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응시하는 하나의 경고음이기도 한데, 이는 대처 정부와 레이건 정부를 향해 부르짖은 인권에 관한 대서사시이다.
호소인 듯 절규인 애절하게 부르는 잉그램의 모습이 떠오른다. 퀸시 존스의 지휘와 제작 아래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를 비롯한 40여명의 팝 아티스트들은 혼신의 힘을 대하여 ‘사랑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이다Love is all we need’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정책과 보수주의 정책을 노골화하는 레이건과 대처 정부를 향해 비수를 꽂는 저항의 메시지이다. 신자유주의는 사랑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자기 계발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 하에 모든 가치기준을 돈이라는 마나적 주술에 의지하는 탐욕의 체계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가장 소중한 것은 돈이고, 사랑과 평화에 관한 울림은 한낱 허구뿐인 개나 물고 갈 헛소리이다. 신자유주의 정치이념으로 중무장한 월가 중심의 금융자본의 체제는 다국적기업과 함께 세계경제를 쥐고 흔드는데, 이는 자본 그 자체의 생산력을 확대재생산하는 가운데 생성된 괴물이자, 절대 포기를 모르는 욕망의 화신이다.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본의 함수로 포괄했으며 마침내 비인간화, 즉 불평등과 부의 독점 등등을 조장해 사회적 문제를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키기에 이른다. 특히 데이비드 하비는 자신의 저서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The Anti-Capitalism Chronicles』에서 맹렬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부당성을 드러내 보이면서 비판을 노골화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자 시대의 명제인지도 모른다. 이 세계의 비극은 자본가가 더 많은 부를 착취하는 방향으로 구조화한 채 가난과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반인륜의 길을 걷고 있다. 국가도 책임지지 않고, 자본가는 늘 오리발을 내놓기 일쑤이다.
아무도 책임지려하지 않고 홀연히 개인에게 가난과 불평등의 책임이 강제로 떠넘겨진다. 따라서 국가와 정부는 개인의 비극적 현실에 아무런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개인의 무능 탓으로 돌려버리는 극단의 태도를 취한다. 국가에 대한 다양한 의무만 있고, 국가에 청구할 수 있는 대부분의 권리는 폐지되거나 삭감되었고 개인의 책임과 자기 계발과 같은 개인 위주의 능력만을 강조한 채 노동의 현장으로 떠밀릴 따름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책은 각 개인이 창의력을 통해 이 세계의 부를 만들 수 있는 주체이자 기업가가 될 수 있다고 기만적으로 현혹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계발을 위해 투자하는 자가 거대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다고 거짓 선언을 주입하기에 이른다.
진실이 호도된다. 꿈과 희망을 주어 그럴싸하게 개인의 자유와 창의력으로 포장했지만, 개인은 이 사회가 만들어낸 부의 한계 지평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얼핏 보기에 그럴듯하고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거짓이고 기만이다. 왜냐하면 능률과 합리성과 효율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애초부터 불평등의 지반 위에서 성장한 반인륜의 체제를 옹호하는 날조된 허구이기 때문이다.
노력과 근면과 성실은 하늘은 감동시킬 수 있지만, 유리천장과 같은 보이지 않는 편견의 벽, 즉 불평등한 계급의 벽은 절대로 뚫을 수 없다. 늘 가난한 자를 더 가난에 허덕이게 만들며 궁핍을 생활화하도록 이끌 뿐만 아니라, 이 세계 전체를 경제적 공포로 내몬다. 책임이 개인에게 무한책임으로 전가되고 사회 전체가 자립이라는 미명하에 착취와 억압을 고도의 수사적인 정책으로 수용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시장주의의 원리에 따라 사회적 정의는 고사하고 분배적 정의마저 왜곡된 채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 극단적인 불평등 사회로 급진화되어 가고 있다. 이 세계는 하나 될 수 없고, 어찌 존 레논이 주장한 세계 통일한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종이 울린다. 국가와 행정부와 대기업 재벌들에게 조종을 울려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며 자유와 정의와 진리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비판의 칼날을 벼린다. 신자유주의 경제이념과 발을 맞춘 신보수주의 정권은 평화와 행복을 제도화해 이 세계를 살만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포기한 것은 물론, 소수 자본가계급과 결탁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지극히 편협한 사적이익집단으로 몰락해가고 있다. 아마 국민은 개돼지만도 못한 짐승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일련의 왜곡된 프로그램은 결국 사악한 착취의 도구이자, 부를 자본가계급에 몰아주는 극약의 처방전이다.
모차르트 레퀴엠이 온 세상과 공명하고 있다. 아마 들불처럼 촛불혁명이 일어나 민중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이다. 인권의 사각지대를 응시하며 노동 착취 현장을 떠올린다. 더불어 사회적 약자들과 하나 되는 세상을 떠올려본다. 아마 그것은 이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일종의 아름다운 서곡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세계가 점점 안정적인 경향을 띠며 보수화되어가는 경향이 있지만, 따라서 자본의 이념의 성장과 함께 진보적 좌파이념의 몰락을 부추기는 경향이 점점 더 노골화되어 가지만, 어찌 We are the World에 담긴 평등과 사랑의 이념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 세계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전반에 걸친 돈 중심의 세상으로 재편되어 보수화의 길을 걷고 또 이 세계를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가고 있지만, Love is all we need라는 저 위대한 테제는 이 세계를 든든하게 떠받치는 인륜의 교의라 하겠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고 마이클 잭슨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물론 We are the World를 함께 부른 마이클 잭슨의 친구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사랑은 이 세계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인륜의 토대이다.
16. 운명공동체 혹은 세계통일 : 그리고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되어 살아갈 거예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물리적으로 태양계의 잔여 수명이 대략적으로 50억년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아무래도 태양계 속의 인간계는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남은 50억년동안 욕망하는 자아로 남아 전쟁만을 일삼는 반이성적인 괴물로 남을지도 모른다. 인정하기 싫지만, 얼마 전 쯤 하마스의 이스라엘 폭격에서 영감을 얻은 IS, 즉 이슬람급진주의자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테러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일어나 최소 180여명이 부상당했고 139명이 사망했다는 외신이 타전됐다. 거의 날마다 테러와 전쟁을 일삼는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녀들은 하나―되기를 실천하지 않는가? 어찌 보면 마음 먹이에 따라 쉬어도 보이지만,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는 하나―되기는 참 쉽지 않은 문제이고 또 수많은 차이를 봉합해 세계통일에 이를 수 있는 길이 멀고도 험한 것 같다.
따라서 마이클 잭슨과 그의 친구들이 실천했던 것처럼 하나―되기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하는 「We are the World」는 노래를 통해 평화와 사랑을 온 세상에 공명시킬 수 있는 숭고의 양식이다. 그러나 문제는 재능을 나누어 구원에 이르는 그 간절한 노래와 달리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세계는 늘 갈등과 전쟁을 일삼으며 삶―시간―세계 전체를 타나토스(죽음본능)의 구성물로 대위시키게 된다. 하여 하나 되는 세상을 실현한다는 것은 요원한 난제처럼 보인다. 아니 우리는 오늘도 무한경쟁의 세계에 내던져진 채 그것이 바로 삶의 진정한 의미일지도 모른다고 자족 섞인 말을 내뺏을지도 모른다.
다시 삶의 자리로 되 돌아와 이 세계의 의미에 대하여 성찰해보지만, 평화를 제도화할 뾰족한 방법이 없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야하며 또 방법에 방법을 더해 늘 새로운 실험에 돌입해야할 것 같다. 왜냐하면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신기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화의 제도화는 의식의 한계를 뚫고 저 너머의 세상에서 용솟음치는 신세계일지도 모른다. 설령 그 길이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찬 죽음의 길일지라도 따라서 그람시와 체 게바라와 네그리가 걸어왔던 길 여기저기에 죽음을 유혹하는 분열의 씨앗이 산재해 있지만, 어찌 그 길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결코 아니다. 현재 노동자 중심의 세상을 원하는 일련의 좌파이념이 불능상태에 당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신세계를 열지 누가 알겠는가? 하여 우리는 늘 존재의 자리로 되돌아와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마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타라농장으로 되돌아와 스칼렛 오하라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르기를 열망했던 것처럼, 우리는 새로운 내일이 우리 전체를 일신시켜 신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본 중심의 세상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소망했던 희망의 원리를 끊임없이 좌절시켜 늘 경쟁에 내몰거나 전쟁에 몰두 중이다. 평화는 한순간만 주어지는 안온한 몽상의 세계이고, 삶은 여전히 타자와 대결하며 갈등하거나 전쟁 중이다. 어쩐지 모르게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게 목숨을 건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거나 테러를 모의 중일 것 같다. 불길하다. 한시도 평화롭지 못했고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웠던 태평성대, 즉 팍스 로마나와 팍스 아메리카나조차 단지 과대 포장된 허구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 그런가? 한쪽엔 아무 죄 없는 생명들을 살육하는 전쟁과 테러가 또 다른 한쪽에선 구원의 손길을 전달하는 이율배반적인 아이러니한 상황은 어떤 진실을 지시하는가? 칼 폴라니가 말한 것처럼 시장 중심의 자본의 체제가 비인간화를 조장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 본성이 그와 같이 야만적이기 때문인가? 둘 다인 것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자본 중심의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냉혹한 사회로 급진적으로 변해왔기 때문에 그러한 경향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되기, 즉 세계 통일의 이념은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그렇다면 하나―되기가 어떤 모습으로 제도화해야 하는가? 얼핏 생각하기에 가족애가 넘쳐나는 인륜성에 토대를 둔 사회를 지향해야할 것 같은데, 21세기 자본의 현실 속에서도 인륜적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첫째도 둘째도 행복과 평화를 제도화하는 것이 세계통일의 모습으로 드러날 터인데, 과연 그것은 어떠한 형태의 제도로 영속시킬 수 있는가? 결국 문제는 구체적인 실천이다. 결국 이 세계의 평화와 통일은 방법적 실천 속에 구체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방법을 공평하게 인류 모두에게 숙지시키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막연하지만, 길을 모색 중에 있고, 실험적이지만 확신에 차 있다. 아니 제도화의 길은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는 혁명에의 길이자, 끊임없는 전복으로 나아가는 신생에의 길이다. 물론 하나―되기를 제도로 영속시켜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형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 되어 살아가는 공존의 세상이나 세계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가는 모습을 쉽게 떠올리기가 어려운 것 같다. 막연하다. 그저 유토피아나 낙원의 어디쯤을 떠올리며 몽상의 세계에 빠지거나 아니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느낌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되기는 너와 내가 온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상호 이해의 세계에 도달하는 경우에만 가능한 완벽한 통일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문명과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점점 다양한 사회로 진화해가고 있고 또 무수한 차이를 생산하는 질적 공간으로 비약해가고 있다. 따라서 이 세계의 문제는 완벽한 세계를 만들 수 없다는 실천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하나―되기가 어려운 근본적 상황, 즉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로 이 세계가 구조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를 인정하며 하나―되기, 즉 세계 통일을 지향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 서사인가? 만약에 차이가 보장되지 않는 세계 통일은 독재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이미 이 세계가 경험적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모든 차이를 이해하고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 평화의 제도화에 앞선 급선무인데, 이는 상호타자성의 원리에 입각한 의식의 통일이 선행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서사적 현실이다.
결국 하나 되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는 문제는 대통일장이론과 같은 원리를 구성해 부분은 전체에 완벽하게 포섭되어 있고, 전체는 아주 미세한 부분도 놓치지 않는 물리적 원리를 제도로 고양시키는 것만 남은 것 같다. 설령 이 세계가 첨예한 갈등을 양산하여 조화롭게 해결할 방법을 찾기 어려운 카오스처럼 보이지만, 따라서 인간학과 세계 사이의 균열이 너무도 커 봉합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 가설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물리학의 대통일장이론을 삶의 현실 속에 구체화시키기 위해 전심전력하지 않겠는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되는 세계 통일이라는 난제는 물리학의 대통일장이론처럼 좀체 실현 가능하지 않은 과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테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물리력의 진실을 인간학의 진리로 고양시켜 진실의 현재를 만드는 것이 시간에 투사된 존재의 의무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오늘도 우리는 무수한 갈등과 전쟁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따라서 착취와 불평등을 당연한 삶의 현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간에게 허여된 오늘이라는 시간은 진리의 진실을 압박하는 진정성, 즉 참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임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에게 시간은 공간의 작용을 성찰하는 의식의 주체이자, 진리 탐구의 궁극적인 주체이다. 하여 이 세계의 참된 의미는 우주적인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존재의 원리로 고양시켜 세계 통일이라는 과제와 정면으로 마주서는 곳에 기입된 인륜적 삶의 모습 속에 고스란히 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인간학과 세계는 물리학의 최종 난제에 거의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지경이지만, 따라서 우주 생성의 원리를 포월하는 대통일장이론을 확립해 이 세계를 평화와 사랑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요원한 난제처럼 던져졌지만, 어찌 그 과제가 인간학이 궁극적인 지향해야만 하는 영원한 테제가 아니겠는가? 대통일장이론이 인간학적 현실 앞에 툭 던져진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지도 모른다. 아마 이 세계는 하나의 이념을 통해 차이의 욕망을 보편의 이념으로 고양시켜 숭고의 영역에 이르는 고난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까닭은 이 세계의 통일이라는 대전제가 우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자 유일한 의식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마치 무수한 갈등과 전쟁 속에서도 평화와 공존의 의미를 강조하며 조화로운 삶을 열망했던 지혜로운 현자들처럼, 운명 공동체 의식은 우리 모두를 단 하나의 이념으로 이끌어 절대 진리를 응시하게 만들 것이다.
현재의 시간에 비추어 50억년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그러나 시간이 물리력과 만나는 순간, 그것은 사라져 소멸하는 무의 시간이다. 언젠가, 혹은 불특정 미래로 열린 막막한 시간의 어디에선가, 더 나아가 아마 10억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평화와 사랑이 허구가 아니라 실재라는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었으면 좋겠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꿈꾸었던 일련의 상상적 지평이 상상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재임이 증명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슬프게도 삶의 현실은 늘 그와 정반대로 전쟁과 갈등의 나날들의 연속이지만 말이다.
왜 우리는 평등과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이념의 주체로 설 수 없는가? 왜 우리는 매번 실패라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후회와 번민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하는가? 매번 차이와 동일성이라는 한계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의 타자인 까닭에 그러한 것 같다. 영원이 아니라 매번 다시 학습하는 숙명의 반복을 견디는 곳에서 생성된 차이의 운명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그리고 물리력의 진실이 인간에게 허여된 삶―시간―세계를 규명하는 진리의 모든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 시간과 그것의 구성물은 진리의 현재를 표현하는 진실 그 자체이다. 마치 물리학의 대통일장이론이 진리의 진실을 규명하는 완벽한 원리인 것처럼, 하나―되기는 평등과 사랑을 제도화하여 이 세계를 통일한 초석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적 층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학과 그것의 구조는 미궁 속을 헤매며 진리의 현재를 진실 그 자체로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시간의 한계는 존재의 한계이다. 매번 영원을 압박해 모든 것을 의미의 구조로 체제화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이내 모순과 직면하곤 절망에 이르는 것이 삶의 현재이자 미래이다.
인간학에 표명된 일련의 서사적 지향점이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하나―되기를 실천하여 함께 공존하는 이데올로기를 현실화시키는 것이지만, 시간의 형식은 화해나 조화보다 점점 파열하고 해체되는 개인성을 주목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자본의 이념이 절대적인 진리처럼 의식하고 행동하는 21세기에 베버적인 절약과 근검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며 결국 개인의 욕망의 함수 속에 내파된 일련의 서사적 양식만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성을 표현하는 자본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개인적인 것만을 중시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신숭배의 풍조를 자연스러운 경향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21세기 현실이 다양한 SNS 등의 네트워크 사회로 급진화되어 외관상 협력 경제를 제도화하는 사회로 발전해갈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긍정적인 면보다 삶의 현실은 욕망을 소비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온갖 일탈이 일어나게 된다. 인터넷 온라인게임 중독이 만연해 있고, 철저하게 소통을 배제한 채 개인화된 욕망을 소비하는 사회가 된다. 말하자면 알고리즘의 신화가 보편적 가치로 통용되는 사회는 점점 더 개인을 고립시켜 대면적인 관계를 추구하기보다 익명화된 ID나 아바타를 비롯한 도상이미지의 배후로 사라져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으로 남는다. 게마인샤프트, 즉 공동사회와 같은 운명공동체에 매개된 가족애나 인간애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모든 행태를 낡고 고루한 것으로 평가할 따름이다. 인륜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이미지의 조형술으로 변하거나 철저하게 물질화된 채 하나―되기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과연 그와 같은 형국이 정당한가? 알고리즘의 신화와 함께 합리성과 도구적 가치를 중시하는 21세기에 운명공동체는 과연 불필요한 서사적 장치인가? 2016-2017년에 일어난 촛불혁명은 하나―되기의 새로운 표본이다. 불의에 맞선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너나할 것 없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에 모여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 세력들을 탄핵에 이르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참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눈앞에서 목도하게 된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말하자면 촛불혁명은 하나―되기를 실천하는 모범적 사례인데, 그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모아 사회의 악과 부패를 척결하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하나―되기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라면 NGO는 하나 되어 살아가는 나눔의 실천적 측면이다. 전자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비롯한 국정농단을 응징하는 국민의 단결력을 보여주었다면, 후자는 하나―되기가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삶의 아름다운 현장이다. 이를테면 하나 되어 살아가는 세상은 전자와 후자가 절묘하게 결합할 때라야만 가능한 것은 같은데, 이는 하나―되기가 제도로서 정착할 수 있는 두 토대인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되기의 힘을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되기를 지속시켜 이 세계 전체가 인륜적 삶의 공간임을 증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적 가치를 우선하였으며 마침내 가족애와 같은 신뢰와 우애를 바탕으로 한 인륜성이 실현된다. 맹자의 불인지심이 온 세상에 넘쳐났고, 또 이 세계를 사랑의 여율로 공명시키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하나―되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며 하나 되어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NGO, 즉 비영리민간단체가 벌이는 참된 참여행위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 너와 내가 더불어 함께하는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곳에서 구체화된다. 특히 국경없는의사회나 굿네이버스 등의 비영리자선봉사단체들은 이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하나―되기의 전형적인 사례인데, 이는 네그리와 체 게바라가 그렇게도 원했던 빈자 다중과 더불어 공존하는 세계의 모습이지만, 이는 평화가 완벽하게 제도화된 상황은 아니다.
아니 역으로 다양한 NGO의 활동은 이 세계가 여전히 불평등하고, 소외된 타자들이 넘쳐나고 있음을 증명하는 반증사례이다. 더 나아가 국경없는의사회나 굿네이버스를 비롯한 일련의 NGO활동은 제도권 내에서 작동 중인 경치경제학 전체가 자본주의와 보조를 맞추어 철저하게 이해관계 위에서 운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돈이 없는 자는 행복할 권리가 없다. 아니 돈이 행복의 기준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하나―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아마 알고리즘의 신화와 더불어 착취와 억압이 만연한 불평등사회는 더욱 가속될 뿐만 아니라, 자본, 즉 영리목적이 아닌 모든 것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하는 전형적인 이익사회의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평등과 평화가 실현되어 더불어 하나 되어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어디쯤의 낙원인가? 아니면 토마스 모어가 언급한 유토피아 어디쯤인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무릉도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상생으로 공명하는 유토피아는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지,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이 아니다. 물론 좀체 그것의 전모를 투명하게 밝히기가 어렵지만,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운명공동체와 같이 따스한 인륜성이 실천되는 세상은 하나―되기의 전형적인 사례인 것 같다. 그리고 국경없는의사회나 굿네이버스 등의 NGO단체들은 무릉도원과 같은 세계를 만들어가는 첫 걸음이자, 하나―되기의 주춧돌이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거의 매일매일 전쟁 중이고, 자본의 이념과 함께 너무도 가혹한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비인간화현상이 팽배해있다. 인간답게 살아갈 최소한 권리마저 압살해버린다. 국가 행정부는 점점 비대해져 국민 위에 군림하는 관료주의체제로 굳어져 국민을 위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정경유착의 비리는 정치경제학의 현실을 지시하는 오늘날 현실의 대명사이지, 결코 어제의 일이 아니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 이 세계의 주인처럼 살아야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깨어 이 세계를 비판하는 행위는 더불어 함께하는 세상을 만드는 출발점이다. 불의를 그냥 눈감아주어서는 안 된다. 더불어 불의와 타협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되기는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세계이자, 내가 너를 불러 ‘우리’로 만들 수 있는 공존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 길은 분명 찾기도 어렵고, 어떠한 방식으로 제도화해야 하는 막막하지만, 비영리 봉사활동 단체와 같은 그 무엇으로부터 시작이 가능한 것 같다.
오늘 하루가 그대를 절망에 이끌더라도 내일은 또 다시 다른 태양이 떠오를 것을 믿으며 하나―되기를 염원해보자. 혹시 내일 당장 하나 되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질지 모를 일이다. 긍정은 희망을 낳고 부정은 절망을 낳는다. 내일이라는 희망에 기대어 행복의 나라도 반드시 함께 우리 모두가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글을 나오며
존 레논의 「Imagine」은 하나의 이념이자 이 세계를 반조하는 의식의 알레고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의 정신을 비판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조종술, 즉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진실의 맥락이다. 왜냐하면 존 레논의 그것은 이 세계가 요청할 수 있는 의미의 날것이자, 인류가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이 도래한다할지라도 반드시 요청해야만 하는 가장 소중한 실천의 덕목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상상력이라는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따라서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망상으로 비추어질 수 있지만, 어찌 「Imagine」의 서사적 구성물이 실현 불가능한 허구로만 간주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갈 수 없는 나라가 아니라 반드시 가야만하는 희망의 서사 바로 그것이다.
꿈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가? 오늘도 상상의 나래를 펴며 꿈에 젖는다. 설령 21세기 현실이 알고리즘의 신화와 함께 점점 더 자본의 구조에 편입되어 불평등을 완전한 형식으로 추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 인간학 내부에서 아름다운 꿈을 추방할 수 있겠는가? 물론 강인공지능, 즉 AGI의 시대와 함께 디지털문명은 전혀 다른 형질의 체제로 진화해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철저하게 기계적인 사유, 즉 0과 1로 짜인 디지털코드가 상상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비인간화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혹은 그와 정반대로 인공지능과 함께 꽃을 피운 문명의 세계가 이 세계를 유토피아적 현실을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자본 중심의 이 세계가 불평등을 고착시켜 꿈과 희망을 산산조각낼 것이라는 사실만을 부정되지 않는다.
아날로그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몽상의 시학과 같은 상상이 넘쳐나는 세계가 그립다. 안온한 몽상에 잠긴다. 더불어 무릎 맞대고 살가운 정 나누는 하나―되기의 세계상을 꿈꾼다. 행복은 나누는 것이지, 독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애를 나눈다. 자본의 더하기 세상에 인간애를 나누는 세상을 몽상했던 존 레논의 「Imagine」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의 전도사이자, 이 세계를 희망의 원리로 포획한 숭고의 전언이다.
글을 쓰는 내내 상상만으로 행복했고, 또 즐거웠다. 한 소절 한 소절 음미하면서, 그것의 진의를 우리 시대와 대비시켜 보는 작업은 흥미진진했고, 유의미한 일이었다. 따라서 창조적 몽상을 유발하는 상상력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잠재적 현실이자, 미래의 언젠가 이루어질 꿈의 가능적 현실인 것만 분명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상상하지 않고서는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꿈과 상상의 세계 속에서이지, 사회적 관성이 지배하는 자본의 구조 속이 아니다. 아마 상상의 창조적 전망은 기적과 같은 그 무엇을 만들어 내거나 인류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기록될 미지의 기호를 생산해낼 것이다. 상상력의 창조적 지평과 더불어 문화의 신기원이 열리는 것은 물론 이 세계 전체를 평등과 평화로 제도화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상력이 펼쳐내는 유토피아적 지평이 결코 쉽게 현실화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통념과 구습이 지배하는 사회적 관성을 뚫고 새로운 방향으로 길을 내는 전위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전 세계의 일반적인 현상이긴 한데, 특히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평등이나 분배적 정의 자체를 ‘좌빨’이나 용공으로 몰아부쳐 좌파의 아름다운 평등을 뿌리 끝까지 제거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대화는 단절이 되었고, 언론과 경제와 권력이 한데 뭉쳐 맑스―네그리에 투사된 일련의 서사를 불가능한 것으로 전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언급도 회피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늘 실현 가능하지 않은 환상으로 치부하거나 이 세계의 평화를 교란시키는 망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디지털 사회의 출현과 함께 창조적 작가의 몽상도, 신기원에 대한 열망도 크게 사그라지는 듯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일을 기계가 대신 완벽하게 처리하는 인공지능의 시대는 모든 것이 완비된 자족과 풍요를 구가하는 유토피아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게 알고리즘의 신화가 완벽하게 체현된 그 길이 디스토피아를 여는 모든 불행의 시초일지도 모르지만, 노동으로부터 해방을 실현시킨 AGI와 로봇산업은 인간의 한계 영역 너머까지 극단적으로 문명을 발전시켜 완전 사회를 실현시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공상이든 망상이든 상관없이 상상적 지평 속에서 구체적인 사실로 급진전되고 있다. 이 세상에 가장 어려운 일은 아마 평등을 제도화하여 이 세계를 사랑과 평화가 넘쳐나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레논의 꿈은 인류 모두의 꿈이자 소망이지만, 삶의 현실은 늘 그와 정반대로 나아가 갈등과 전쟁을 일삼으며 결국 우리 모두를 나락으로 추락시킨다. 결국 욕망하는 자아를 잘 교육시키는 방법만이 바른 인성을 키워 이 세계를 행복의 나라로 이끌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비극은 자기에게서 비롯하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자기로부터의 혁명』에서 말한 것처럼, 대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소우주, 즉 온전한 자기를 찾아 온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기를 염원해본다. 그렇게 어렵지 않고 쉬운 일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그것은 식 죽은 먹기처럼 아주 쉽다.
조금씩 양보하고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마음자리를 키우면 혹시 내일이나 모레쯤 이 세계는 이미 아름다운 평화의 세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해봐. 마음의 눈으로 이해하고 세상을 사랑의 기호로 읽어봐. 그러면 이미 이 세계는 사랑의 공간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마음먹고 마음 내려놓기가 그리 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