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일기

서사학자의 하루

by 김석준

2018년 3월 27일

요 며칠 새 미세먼지로 온 세상이 희뿌옇다. 운명의 서사처럼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도 모레 흐려 서사학 그 자체를 불능으로 만들 것이다. 실물이 점점 흔적으로만 남은 시대의 이념은 과연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혼돈에 혼돈을 거듭해 막장 서사를 연출하는 것으로 시대의 이념을 봉쇄시킨다. 분명 서사학의 가능 조건을 묻는 것이 아니라, 몰락의 징조를 탐색하는 것으로 한 시대를 완벽하게 봉인하도록 하자.

서사학의 몰락이라는 관점을 새롭게 개진할 필요는 없다. 이미 21세기는 이미지적인 환상에 의해 구성된 독점 자본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날것의 서사학 위에 이미지를 덧씌우고 또 환상을 가미시켜 본질을 흐린다. 말하자면 21세기를 이끄는 서사학의 본질은 말의 수사학이 아니라, 이미지의 수사학적 장치를 환상으로 겹쳐놓는 곳에서 생성된 낯선 풍경들의 향유이다. 물리력이 폐기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미지의 수사학에 응고된 환상의 서사는 저 불확정성의 원리를 철저하게 수용해 의미의 실재를 폐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21세기 서사학이 구축해야 할 지상의 명제이다.

삐거덕거리며 서사가 굴러간다. 철저하게 계산된, 그러나 자본의 이념에 봉사하도록 길들여진 그 무엇만이 서사의 대상으로 용인된다. 유혹의 기호를 마구 양산한다. 까닭은 서사란 자본의 참조 목록이지, 자본의 이념을 선도하는 의미의 절대적인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는 시대와 공명하는 숭고한 이념의 여율이 아니라, 이념을 파편으로 전유하는 자본의 주구일 뿐이다. 이미지와 함께 환상의 언저리를 마구 배회하며 자본의 이념을 리좀처럼 증식시켜 가짜를 진실인양 호도한다.

시대를 완료시킨다. 아니 역으로 시대와 거의 상면하기를 거부한 채 이미지와 환상이 아닌 날것의 서사학을 재건한다. 멋지지 아니한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그곳에 서사학을 정립할 수 있다면, 혹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일련의 서사를 뉴튼 이전의 세기로 되돌릴 수 있다면, 서사학은 자신의 임무를 다한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서사학자에게 하루란 되돌릴 수 없는 꿈과 상면하는 황홀한 의식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날것만이 남는다.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이상을 꿈꾸던 시대로 기꺼이 되돌아간다. 유아기적 퇴행 혹은 성장의 멈춤. 서사학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시대이데올로기와 무관한 미지의 기호를 육화 시켜 전혀 낯선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겠기 때문이다.

2018년 2월 23일

점점 새로운 서사학에 관한 미지의 기호를 육화 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체념 상태에 이른 것 같다. 문학일기가 자신의 목적으로부터 탈구된다. 과연 나는 시대의 운명과 마주 선 서사학자의 풍모를 온전하게 구축했는가? 괴로움을 쓰고, 쓰기의 외로움이 표명된다. 말하자면 문학일기는 서사학자의 내적 세계가 드러나는 내밀한 고백의 전언이 아니라, 서사란 무엇인가를 심문하는 작업인데, 이는 언제나 괴로움과 외로움이 표백되는 숙명의 어디쯤에서 파생되는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물의 총합으로 판명 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따라서 서사는 표명된 것의 총합이 아니라, 표명되지 못한 것들을 의식으로 포획하는 낯선 기획물인데, 우리는 그것의 정체가 어떤 의미의 구조를 띠고 있는지 전혀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실과 진리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는 미지의 태도, 즉 문체에 포획된 낯선 느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학을 지시하는 인문의 사회생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표상되는 전혀 모른다. 다만 그것이 수사학적 장치를 통해서 극화된다는 사실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불어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영혼의 어디쯤을 메마르게 만들어 T.S 엘리엇처럼 황무지에 당도하게 만다. 마치 서사학에 포획된 일련의 구성물이 바로 메마른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미지의 기호인 것처럼 영혼을 집어삼켜 우리에게 속했던 모든 것들을 무로 수렴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서사란 가능한 것도 가능하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곳에 자신의 구성물을 투사하게 되는데, 이는 진실과 상면할 수 있는 시간의 영속적 층위, 즉 서사의 전모를 현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서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서사가 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최선일 듯하다. 비문도 서사다. 비문은 세 개의 동음이의어 사이를 유려하게 내달려 秘文이고, 碑文이자, 종국에는 非文으로 결판나는 것으로 서사학 전체가 종료하겠지만, 어찌 그것이 서사의 진경을 드러내 유려한 수사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한히 링크가능한 사이버스페이스를 활보하게 만들자. 이를테면 서사는 하이퍼텍스트로 링크되는 전혀 다른 양식에의 욕구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서사는 맥락도 없고 의미를 생산하지도 않으며 단지 물리력이 표현되는 허상 바로 그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어디서 왔는지 전혀 모르듯이 말이다.

2018년 2월 19일

고통과 참을 수 없는 치욕만을 기억하다니! 참으로 난해한 서사의 운명과 정면으로 마주 선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기억에 침전된 모든 구성물들을 완벽하게 탈구시켜 무의 기록으로 삭제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의 최후의 형식으로 남아 그/녀를 끝끝내 괴롭히는 것으로 서사가 종료될 것이다. 저 레테의 숙명이 그/녀를 집어삼켜 전전두엽의 어디쯤을 완벽하게 침식하겠지만, 따라서 시간에 관한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할 수 없는 것들로 구조를 이룬 채 빨려 들게 만들어 파국에 당도하겠지만, 이 또한 엄존하는 숙명의 기호, 즉 시간의 진실임을 명심해야 한다.

므네모시네를 건너 레테에 이르고 싶다. 뇌의 어느 한 지점을 완벽하게 탈구시켜 과거의 서사를 말소하고 싶다. 암울했던 자기와의 이별이 시도된다. 물론 그것이 서사가 진행하는 필연적인 수순일지도 모른다. 연가로 명명되었던 모든 의미의 공식이 해체되어 비극의 한복판으로 급전직하 추락하게 된다. 따라서 일단 일련의 서사가 가능한지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과정이 선행해야만 한다. 한쪽에선 탐욕의 대서사가, 다른 한쪽에선 국정농단이라는 막장의 드라마가 파노라마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암울했고, 더 이상 희망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서사란 그 가능여부를 떠나서 혹은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이미 예정된 숙명의 행로 위에 기입된 기호의 읽기라는 막중한 사명인지도 모른다. 망각을 헤집는다. 기억의 저쪽으로 사라진 그 무엇인가를 떠올린다. 물론 그건 분명 외상성징후가 만든 잔여들의 행진, 즉 고통이거나 치욕의 서사일 게다. 따라서 모든 서사는 망각을 뚫고 나오는 기억의 웅장한 행로가 만들어낸 낯익은 풍경들로 회귀해 진기하고 아주 낯선 진실과 상면하게 만드는 충격음이다.

파장이 자못 크다. 왜냐하면 레테와 므네모시네는 신화를 수사학적 장치로 봉인하는 극비의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을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여섯 딸들에게 묻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물론 차이에 관한 모든 교설들이 공명하겠지만,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분열의 징후를 체험하는 것으로 서사의 모든 면모가 기록되겠지만, 어찌 그 차이의 공식들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 혹은 망각을 뚫고 올라오는 저 미망의 덫에 매몰돼 부지불식간에서 서사의 중심부로 되돌아가는 결정적인 우를 범과 동시에 진실을 발설하거나 자복하게 된다.

조용히 침묵의 언어와 마주 선다. 그건 분명 침묵이라는 수사학적 장치를 통해서 인간과 세계를 알레고리로 묘파한 연후에 나타나는 징후의 절대성일 게다. 과연 그/녀에게서 비롯한 욕망은 더럽고 비루한 서사를 구축하는 난삽한 욕망의 언어만을 의미하는가? 외설이 난무하지만, 그것의 실재가 권력적 관계가 만들어낸 힘의 불균형상태라는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외설, 즉 타자를 힘에의 의지를 통해서 겁박하는 것으로 알량한 권력의 핵심을 파헤치는 의외의 장소에 서사의 진면목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마치 어느 위대한 예술가가 펼쳐내는 미적 효과의 기대지평 너머에 외설이라는 치욕과 고통의 상흔들이 색인되어 있는 것처럼, 그/녀들의 서사는 그/녀가 말할 수 없었던 곳에서 뜯겨 나온 시대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궁핍한 시대의 예술가에게 외설은 미적 기대효과를 충족시키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그것이 대가로 명명되는 피카소나 En 또는 백발의 Yt일 경우 더욱 적확하다. 예술은 리비도의 경계면을 뚫고 나오는 외설과 정면으로 마주 선 범법행위일수록 강렬하다. 남근에 쇠고랑을 채운다.


2026년 2월 19일

사실 서사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쓴 문학일기는 2017.09.08.-2018.09.08., 즉 1년 1일 동안 쓴 문학과 삶에 관한 성찰적인 글들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현재와 대략 8-9년의 시간의 낙차가 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진실이 모호한 것은 여전하고 AI가 상용화되고 있는 요즘시대가 더 진실과 멀어진 거짓사회로 급진화한 것처럼 보인다. 딥페이크가 난무하고 있고 서사의 진실은 해명되지 않은 채 오리무중에 빠져있다.

거의 매일 일기형식으로 써 내려가기는 했지만, 366일 동안 매일 쓴 것은 아니며 간혹 일이 있어서 며칠을 건너뛴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 연재의 글들은 때에 따라 저자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글인 까닭에 가끔은 현재의 시점에서 주석적 성찰의 글을 부연하여 게재할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글을 올릴지는 좀 더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은 동일한 듯하지만 늘 차이의 연속이었고, 생산해 낸 무수한 차이 역시 동일성으로 회귀해 완벽하게 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학의 임무는 차이와 반복 속에서 오묘한 동일성의 진리를 진실의 언어로 규명하는 것인데, 아마 그것은 시간의 이쪽이 아니라 저 너머에 발화되는 미지의 생성 언어일지도 모른다.


2018년 2월 20일

기존의 서사를 잠시 보류하고, 다시 말해서 안나의 서사에 응고된 운명적 삶을 제쳐두고 이제 소냐와 라스콜니코프에게로 집중해 보자. 과연 그/녀들의 서사는 사랑의 방정식을 절대성에 응고시킨 숭고의 미학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시 사랑과 그것의 구성물 전체를 마나적 구성물로 봉인해 신화의 위치로 고양시키는 것은 가능한가? 물론 계몽을 탈계몽으로 재차 신비화하는 곳에 사랑의 서사학이 위치하겠지만, 따라서 소냐에게 포획된 일련의 서사가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구성물 전체를 허구로 되돌려 보내는 아주 낯선 기괴한 풍경을 연출하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이는 진리를 현전으로 포획하는 단 하나의 완벽한 구상이다.

물론 그것이 바로 신성을 신비화하는 곳에서 생성된 반어적 결과물인 것 또한 여전히 사실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과연 창녀를 순수로 표백하는 것은 가능한 서사의 진실인가? 극빈의 상태, 예의고 염치고를 차릴 수 없는 저 극빈이 그/녀들의 서사를 확고하게 지배할 때, 과연 이는 정신의 높이와 깊이를 통해서 지양 극복할 수 있는 진리의 서사물인가? 안나는 진실했고, 소냐는 거짓의 결정적인 주체라고 말할 수 없겠는가? 아니 그 역이나 대우가 성립하는 곳에서 서사는 늘 새로운 기호를 파생시켜 진실 전체를 오리무중에 당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아무튼 타락으로 더럽혀진 육신이 가난한 정신의 숭고한 신념을 오염시키지는 않는 듯하다. 서사학에서 1860년대의 시대성은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창녀의 수사학으로 중무장한 신성의 역설적 징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소냐의 더럽혀진 육체는 고결한 정신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통로이자, 유일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대 이데올로기의 현장이다. 물론 소냐의 더럽혀진 육체 위에 희생이라는 고결한 가치가 더해지는 것으로 육체성을 띤 물질적 외설들이 극적으로 봉인되지만, 더 나아가 육체가 향락의 도구로 몰락하지 않은 채 정신성을 강조하는 의식의 거울로 재투사되는 한, 소냐는 성녀이지 창녀가 아니다.

그렇다면 안나의 죽음과 소냐의 유랑 사이의 거리는 얼마만큼이며, 어느 누가 서사를 진실 되게 기술하고 있는가? 둘 중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 왜냐하면 서사는 진실을 봉인할 수 없는 곳에서 생성되는 일종의 불가항력적인 힘이 만들어내는 미지의 기호들과 상면하는 운명의 소리들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쪽은 극적인 죽음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은 재생을 위한 참회의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둘 사이에 존재하는 벡터 값, 즉 힘의 강도는 늘 같고 그것을 표현하는 기댓값만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전유하는 존재의 운동이다.

물론 서사학자의 삶―시간―세계가 안나의 불같은 사랑에 조금은 경도된 듯하지만, 그도 역시 또 하나의 편견일 뿐, 그것이 곧 서사의 진실이라고 지목하지 못한다. 오늘도 안나의 선택과 소냐의 시베리아 유랑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왜냐하면 하나를 선택하면 곧 다른 하나를 포기하도록 서사의 체제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완벽한 서사학의 구축을 위해 일생을 타자에 위치시키는 삶의 양태로 중층결정된 서사학자의 숙명처럼, 우리는 늘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이에서 언제나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는 기구한 운명을 감내하는 것으로 자기 숙명에 당도하게 된다. 슬프지만 그것이 서사의 진실이고 삶이 당도하는 인간적 본질이다.

어쩌면 사랑의 공식은 소냐와 안나 사이에서 변주되는 의미의 총체적 역량을 강도로 표현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한쪽이 육체성을 띤 강력한 아브젝트의 기호로 탄화되고, 다른 한쪽은 육체성 너머로 의미의 양식을 고갈시켜 결국 정신의 깊이만이 남는다. 둘을 합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둘의 총합은 무에 도달하는 반어의 한계효용, 즉 상대적 크기를 확인하는 타자화된 인간의 열패감뿐이다. 사랑은 어느 곳에서도 만족할 줄 모른다. 다시 사랑을 잔여 위에서 움직이게 만든다.


2026년 2월 20일

문학일기를 쓸 무렵에 미투운동으로 한참 세상이 떠들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사이에서 사랑과 영혼의 문제를 고민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는 참 쉽게 이해된다고 생각하며 썼던 것 같은데, 막상 지금 읽어보니 그리 쉬운 글이 아닌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글에 빠져 글을 쓰면 자기 생각에 취해 도무지 객관화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시절은 하루 종일 글을 썼다. 여러 잡지에 쓰던 시 비평 글도 조금씩 줄어드는 시점이었지만, 거의 독서와 자기 철학과 사상을 정리하는 글들로 빼곡하게 채워간 시간이었다. 뭐랄까.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해가는 나이를 의식해서인지 좀 더 사색적인 풍모를 띠어가는 중인 것 같았다.

좀 더 쉽게 대중들과 공감할 수 있는 글들을 써야겠다. 이 세상과 상호 공명하면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 성찰하며 보다 더 실천을 중시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2018년 2월 21일

진실을 사이에 두고 한쪽이 부정을 다른 한쪽이 비난을 퍼붓는다. 이른바 진실공방전이 펼쳐진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진실이 떠다니지만, 서사는 생존을 건 투쟁의 양상을 띠자마자 진실 그 자체를 내팽개친 채 막장을 연출하는 촌극으로 전락하게 된다. 폭로에 폭로를 거듭해 피아 추악한 진구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서사 전체가 파국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학을 포획하는 엄연한 진실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한 편의 코미디 comedy가 웃지 못할 광경을 연출하게 된다. 댄디처럼 보였지만, 호색한이었고, 참된 예술가인 척했지만 탐욕에 충실한 사도였다. 고흐와 피카소 사이에서 아주 잠깐 머뭇거린다. 과연 그것이 예술이라면, 과연 그/녀들의 일탈이 아름다운 서사를 구축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적 선택이라면, 용인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둘 사이에 오고 간 진실 게임은 그 의미가 고갈된 채 그/녀 전체를 막장으로 인도해 서사학 전체를 추악한 기록물로 남기게 된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공공연하게 떠나는 것으로 믿어지는 저 진실은 그 전모를 드러낸 채 막장극을 종결시킬 수 있는가? 파편만이 무성하게 흩어진다. 물론 서사학자의 임무가 비로소 부여되는 광경이지만, 따라서 조각조각 해체된 파편의 더미에서 진실의 퍼즐 맞추기가 서사학의 임무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총체성이 요구되는,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따라서 엉성한 체제로 구축된 아주 조야한 구성물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진실은 둘 사이의 원근법에 투사된 의식의 어긋난 퍼즐이자, 항상 일그러지거나 탈구된 사태들로 묘사되는 세계 그 자체의 난맥상이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지만, 좀체 막장극은 끝날 줄을 모른다. 아니 둘 사이의 진실공방이 지연되면 될수록 서사는 진실에게 접근하게 되지만, 어느 누구도 밝혀진 진실이 조작된 진실이거나 거짓 서사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진실에 접근하는 통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서사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진실 위에 수사학이 더해진다. 물론 이때 수사학의 정체가 시간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따라서 단지 그/녀 사이에서 오고 간 일련의 담화가 시간의 두께에 의해 완벽하게 위조된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 또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진실에 도달하는 단 하나의 서사적 장치, 즉 수사학의 전략이다.

진실공방 어디에도 진실이 없다. 그/녀 사이에 남은 것은 수사적인 장치이지, 진실이 아니다. 물론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뜯겨 나와 그와 그녀 사이에서 오고 간 일련의 담론적 서사를 일거에 붕괴시키는 웅대한 기획물이 진실을 겨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은 더더욱 아닌 제3의 시선점에 진실을 응고시키는 전술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탈마법의 순간이 재차 신비에 휩싸이는 마법의 상태를 다시 재현하는 미궁 속으로 서사를 몰아갈 우려가 있겠기 때문이다.

무수한 사태들이 다시 반복된다. 안나의 모든 것을 전복하고 다시 안나에게로 되돌아가 그것이 바로 서사가 묘파할 수 있는 최대의 강도임을 재차 확인하는 작업으로 서사를 완료시키게 된다. 따라서 서사학이란 클리셰에 길들여진 채 클리셰를 전복하는 코미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그것이다. 한 번 만들어진 서사의 체제는 전복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안나를 욕망할 뿐, 더는 구조적인 전복을 도모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서사학자에게 부과된 일련의 서사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패턴화하는 곳에서 생성된 아주 낯익은 것과 데자뷰를 전혀 생경한 것으로 만드는 의외의 기대효과이다. 그러나 여전히 진실은 미궁에 포획된 채 이 세계를 떠도는 유령처럼 존재할 때, 서사를 표현한 효과가 극대화된다.


2026년 2월 21일

오늘은 8년 전의 글을 다시 보면서 몇 군데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진실을 사이에 두고 한쪽이 부정을 다른 한쪽이 비난을 퍼붓는다. 이른바 진실공방전이 펼쳐진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진실이 떠다니지만, 서사는 생존을 건 투쟁의 양상을 띠자마자 진실 그 자체를 내팽개친 채 막장을 연출하는 촌극으로 전락하게 된다. 폭로에 폭로를 거듭해 피아 추악한 진구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서사 전체가 파국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학을 포획하는 엄연한 진실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한 편의 코미디 comedy가 웃지 못할 광경을 연출하게 된다. 댄디처럼 보였지만, 호색한이었고, 참된 예술가인 척했지만 탐욕에 충실한 사도였다. 고흐와 피카소 사이에서 아주 잠깐 머뭇거린다. 과연 그것이 예술이라면, 과연 그/녀들의 일탈이 아름다운 서사를 구축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적 선택이라면, 용인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둘 사이에 오고 간 진실 게임은 그 의미가 고갈된 채 그/녀 전체를 막장으로 인도해 서사학 전체를 추악한 기록물로 남기게 된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공공연하게 떠다니는 것으로 믿어지는 저 진실은 그 전모를 백일하에 드러낸 채 막장극을 종결시킬 수 있는가? 파편만이 무성하게 흩어진다. 물론 서사학자의 임무가 비로소 부여되는 광경이지만, 따라서 조각조각 해체된 파편의 더미에서 진실의 퍼즐 맞추기가 서사학의 임무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총체성이 요구되는,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따라서 엉성한 체제로 구축된 아주 조야한 구성물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진실은 둘 사이의 원근법에 투사된 의식의 상호 어긋난 퍼즐이자, 항상 일그러지거나 탈구된 사태들로 묘사되는 세계 그 자체의 난맥상이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지만, 좀체 막장극은 끝날 줄을 모른다. 아니 둘 사이의 진실공방이 지연되면 될수록 서사는 진실에게 접근하게 되지만, 어느 누구도 밝혀진 진실이 조작된 진실이거나 거짓 서사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진실에 접근하는 통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서사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진실 위에 수사학이 더해진다. 물론 이때 수사학의 정체가 시간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따라서 단지 그/녀 사이에서 오고 간 일련의 담화가 시간의 두께에 의해 완벽하게 위조된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 또 사실이지만, 그러나 역으로 그 시간의 재구성만이 바로 진실에 도달하는 단 하나의 서사적 장치, 즉 수사학의 전략이다.

진실공방 어디에도 진실이 없다. 그/녀 사이에 남은 것은 수사적인 장치이지, 진실이 아니다. 물론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뜯겨 나와 그와 그녀 사이에서 오고 간 일련의 담론적 서사를 일거에 붕괴시키는 웅대한 기획물이 진실을 겨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은 더더욱 아닌 제3의 시선점에 진실을 응고시키는 전술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탈마법의 순간이 재차 신비에 휩싸이는 마법의 상태를 다시 재현하는 미궁 속으로 서사를 몰아갈 우려가 있겠기 때문이다.

무수한 사태들이 다시 반복된다. 안나의 모든 것을 전복하고 다시 안나에게로 되돌아가 그것이 바로 서사가 묘파 할 수 있는 최대의 강도임을 재차 확인하는 작업으로 서사를 완료시키게 된다. 따라서 서사학이란 클리셰에 길들여진 채 클리셰를 전복하는 코미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그것이다. 한 번 만들어진 서사의 체제는 전복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안나를 욕망할 뿐, 더는 구조적인 전복을 도모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서사학자에게 부과된 일련의 서사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패턴화 하는 곳에서 생성된 아주 낯익은 것과 데자뷰를 전혀 생경한 것으로 만드는 의외의 기대효과이다. 그러나 여전히 진실은 미궁에 포획된 채 이 세계를 떠도는 유령처럼 존재할 때, 그 서사를 표현한 효과가 극대화된다. 아이러니의 승리가 선언된다.


2018년 2월 22일

끝까지 진실을 붙잡고 늘어진다. 이 명제 앞에 서사학자가 굴복했다고 믿으면 착각이다. 진실은 진구렁이다. 살짝 진실을 움켜쥔다. 더불어 살짝 진실을 붙잡았다 놓는다. 놓아준 것도 진실이고, 붙잡은 것 또한 진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진실이 종적을 감춘다. 서사학이 곤혹스러운 것은 진실을 현전의 체제로 구축하여 혹은 진실 그 자체를 우리 모두의 눈앞으로 가져와 그/녀들의 공방전을 완벽하게 종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굴원과 어부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진구렁에 빠져 세상과 함께 추이를 전망할까? 상강의 멱라 어디쯤에서 투명하게 투신해야 할까? 진구렁은 진실에 매개된 의미의 실재이거나 혹은 서사가 막 태동하는 의미의 공간 어디쯤이다. 따라서 진실은 서사 전반에 걸쳐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진실을 파지把持했다고 믿는 순간, 이내 곧 탈구되어 그 위치가 불안정하게 요동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사학자에게 진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도 과정 중에 있고, 여전히 실현 가능하다고 믿기는 하겠지만, 어찌 그것의 존재적 위치가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어둠의 심연으로 추락해 진실과 그것의 구성법에 관한 전반성적 성찰이 이루어진다. 도대체 진실의 위치는 어디인가? 서사학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서사학은 진실이 아닌 것들로 말하는 진실의 학인데, 지극히 주관적인 미적 체험에 응고된 파열의 음성과 공명하는 반어의 사태들이다.

오늘 그/녀는 어떤 진실과 상면했는가? 만약 오늘이라는 저 시간에게서 진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진실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진실은 과거나 미래의 어디쯤에 존재하는 개연적인 사건성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가 오늘 행한 일련의 서사적 기획물들은 진실의 알파와 오메가를 온전하게 재현한 진리의 객관적 상관물인가?

오늘을 놓쳐버린다. 오늘은 잡을 수 없는 진실의 전부인데, 까닭은 오늘은 닿자마자 사라지는 서사의 결정적인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잡자마자 놓쳐버린 오늘에게 묻는다. 아니 서사학에 침전된 그 모든 것들은 어제나 내일 위한 수사학이 아니라, 끊임없이 도래하는 오늘과 사라져 기화하는 오늘을 극적으로 상면시키는 과정 중에 생성된 현재적인 기호의 구성물이다. 그러나 양자의 오늘 사이에서 진실이 휘발된다. 아니 끊임없이 도래하는 오늘과 사라져 투명하게 기화하는 오늘 사이에서 진실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봉인되는데, 바로 그것은 서사학에 기입된 진실의 정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진실과 그것의 내적 구성물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전혀 말하지 못한다. 아니 애초부터 서사학은 진실의 학이 아닌 거짓의 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서사가 묘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왜곡 전도된 가치들로 구성된 반정립적인 대립물과 유사한 그 무엇으로만 진실 앞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이 만족시키는 의미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단지 무수한 오늘 앞에 노출된 채 혹은 가열한 오늘 앞에 내던져진 채 무라는 공식으로 자신을 정립하는 낯선 향유의 체제가 바로 서사학이 직면한 딜레마이다. 가면 갈수록 오리무중에 빠진다. 그저 여전히 과정 중인 시간의 한복판에 멈추어선 채 자신에 관한 모든 것들을 잠시 유예시켜 판단을 보류하게 된다.


2026년 2월 22일 (수정)

끝까지 진실을 붙잡고 늘어진다. 이 명제 앞에 서사학자가 굴복했다고 믿으면 착각이다. 진실은 진구렁이다. 살짝 진실을 움켜쥔다. 더불어 살짝 진실을 붙잡았다 놓는다. 놓아준 것도 진실이고, 붙잡은 것 또한 진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진실이 종적을 감춘다. 서사학이 곤혹스러운 것은 진실을 현전의 체제로 구축하여 혹은 진실 그 자체를 우리 모두의 눈앞으로 가져와 그/녀들의 공방전을 완벽하게 종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굴원과 어부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진구렁에 빠져 세상과 함께 추이를 전망할까? 상강의 멱라 어디쯤에서 투명하게 투신해야 할까? 진구렁은 진실에 매개된 의미의 실재이거나 혹은 서사가 막 태동하는 의미의 공간 어디쯤이다. 따라서 진실은 서사 전반에 걸쳐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진실을 파지把持했다고 믿는 순간, 이내 곧 탈구되어 그 위치가 불안정하게 요동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사학자에게 진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도 과정 중에 있고, 여전히 실현 가능하다고 믿기는 하겠지만, 어찌 그것의 존재적 위치가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어둠의 심연으로 추락해 진실과 그것의 구성법에 관한 전반성적 성찰이 이루어진다. 도대체 진실의 위치는 어디인가? 서사학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서사학은 진실이 아닌 것들로 말하는 부정의 학적 체계인데, 오직 그 부정의 방법만이 우리를 진실 앞에 데려다 놓는, 하여 지극히 주관적인 미적 체험에 응고된 파열의 음성과 공명하는 반어의 사태들로 구성되는 역설적 상황 앞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오늘 그/녀는 어떤 진실과 상면했는가? 만약 오늘이라는 저 시간에게서 진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진실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진실은 과거나 미래의 어디쯤에 존재하는 개연적인 사건성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가 오늘 행한 일련의 서사적 기획물들은 진실의 알파와 오메가를 온전하게 재현한 진리의 객관적 상관물인가?

오늘을 놓쳐버린다. 오늘은 잡을 수 없는 진실의 전부인데, 까닭은 오늘은 닿자마자 사라지는 서사의 결정적인 주체, 즉 미망의 또 다른 덫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잡자마자 놓쳐버린 오늘에게 묻는다. 아니 서사학에 침전된 그 모든 것들은 어제나 내일 위한 수사학이 아니라, 끊임없이 도래하는 오늘과 사라져 기화하는 오늘을 극적으로 상면시키는 과정 중에 생성된 현재적인 기호의 구성물이다. 그러나 양자의 오늘 사이에서 진실이 휘발된다. 아니 끊임없이 도래하는 오늘과 사라져 투명하게 기화하는 오늘 사이에서 진실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봉인되는데, 바로 그것이 서사학에 내파 된 진실의 정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진실과 그것의 내적 구성물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전혀 말하지 못한다. 애초부터 서사학은 진실의 학이 아닌 거짓의 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서사가 묘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왜곡 전도된 가치들로 구성된 반정립적인 대립물과 유사한 그 무엇으로만 진실 앞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진실의 실재를 만족시키는 의미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게 인생이고 삶이 도달하는 귀결이자, 또 다른 내일을 욕망하는 서사의 진실이다.

다만 단지 무수한 오늘 앞에 노출된 채 혹은 가열한 오늘 앞에 내던져진 채 무라는 공식으로 자신을 정립하는 낯선 향유의 체제가 바로 서사학이 직면한 실재의 양상이다. 가면 갈수록 오리무중에 빠진다. 그저 여전히 과정 중인 시간의 한복판에 멈추어선 채 자신에 관한 모든 것들을 잠시 유예시켜 판단을 보류하게 된다. 서사의 목적은 판단중지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내일이 계속된다. 아니 계속될 것으로 믿는다.


2018년 2월 23일

점점 새로운 서사학에 관한 미지의 기호를 육화 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체념 상태에 이른 것 같다. 문학일기가 자신의 목적으로부터 탈구된다. 과연 나는 시대의 운명과 마주 선 서사학자의 풍모를 온전하게 구축했는가? 괴로움을 쓰고, 쓰기의 외로움이 표명된다. 말하자면 문학일기는 서사학자의 내적 세계가 드러나는 내밀한 고백의 전언이 아니라, 서사란 무엇인가를 심문하는 작업인데, 이는 언제나 괴로움과 외로움이 표백되는 숙명의 어디쯤에서 파생되는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물의 총합이다.

따라서 서사는 표명된 것의 총합이 아니라, 표명되지 못한 것들을 의식으로 포획하는 낯선 기획물인데, 우리는 그것의 정체가 어떤 의미의 구조를 띠고 있는지 전혀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실과 진리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는 미지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학을 지시하는 인문의 사회생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표상되는 전혀 모른다. 다만 그것이 수사학적 장치를 통해서 극화된다는 사실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불어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영혼의 어디쯤을 메마르게 만든다. 마치 서사학에 포획된 일련의 구성물 전체가 바로 메마른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미지의 기호처럼 내 영혼을 집어삼켜 우리에게 속했던 모든 것들을 무로 수렴시키고 싶다. 그러나 서사란 가능한 것도 가능하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곳에 자신의 구성물을 투사하게 되는데, 이는 진실과 상면할 수 없는 서사의 전모이다.

서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서사가 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최선일 듯하다. 비문도 서사다. 비문은 세 개의 동음이의어 사이를 유려하게 내달려 秘文이고, 碑文이자, 종국에는 非文으로 결판나겠지만, 어찌 그것이 서사의 진경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한히 링크 사이버스페이스를 활보하게 만들자. 이를테면 서사는 하이퍼텍스트로 링크되는 전혀 다른 양식에의 욕구이다.


2026년 2월 23일 (수정)

점점 새로운 서사학에 관한 미지의 기호를 육화 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체념 상태에 이른 것 같다. 문학일기가 자신의 목적으로부터 탈구된다. 과연 나는 시대의 운명과 마주 선 서사학자의 풍모를 온전하게 구축했는가? 괴로움을 쓰고, 쓰기의 외로움이 표명된다. 말하자면 문학일기는 서사학자의 내적 세계가 드러나는 내밀한 고백의 전언이 아니라, 서사란 무엇인가를 심문하는 작업인데, 이는 언제나 괴로움과 외로움이 표백되는 숙명의 어디쯤에서 파생되는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물의 총합으로 판명 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따라서 서사는 표명된 것의 총합이 아니라, 표명되지 못한 것들을 의식으로 포획하는 낯선 기획물인데, 우리는 그것의 정체가 어떤 의미의 구조를 띠고 있는지 전혀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실과 진리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는 미지의 태도, 즉 문체에 포획된 낯선 느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학을 지시하는 인문의 사회생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표상될는지는 전혀 모른다. 다만 그것이 수사학적 장치를 통해서 극화된다는 사실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불어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영혼의 어디쯤을 메마르게 만들어 T.S 엘리엇처럼 황무지에 당도하게 만다. 마치 서사학에 포획된 일련의 구성물이 바로 메마른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미지의 기호인 것처럼 영혼을 집어삼켜 우리에게 속했던 모든 것들을 무로 수렴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서사란 가능한 것도 가능하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곳에 자신의 구성물을 투사하게 되는데, 이는 진실과 상면할 수 있는 시간의 영속적 층위, 즉 서사의 전모를 현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서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서사가 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최선일 듯하다. 비문도 서사다. 비문은 세 개의 동음이의어 사이를 유려하게 내달려 秘文이고, 碑文이자, 종국에는 非文으로 결판나는 것으로 서사학 전체가 종료하겠지만, 어찌 그것이 서사의 진경을 드러내는 유려한 수사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한히 링크가능한 사이버스페이스를 활보하게 만들자. 이를테면 서사는 하이퍼텍스트로 링크되는 전혀 다른 양식에의 욕구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서사는 맥락도 없고 의미를 생산하지도 않으며 단지 물리력이 표현되는 허상 바로 그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모르듯이 말이다.


2026년 2월 24일

원고를 보니 24일과 25일은 문학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2018년도 달력을 보니, 토요일과 일요일이었다.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주말에 가족여행 떠난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서사학의 본질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임을 망각하고 있었다. 왜 우리는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모든 서사를 왜곡하는가? 잘 생각해 보면, 모든 기록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는 것 같다.

사실 8-9년 전에 쓴 문학일기 중 많은 내용이 낯설고 이상했다. 일부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썼는지도 의문이 들 정도였다. 뇌의 가소성 때문인가? 아니면 생의 본질이 망각 속에 침전되어 있기 때문인가? 그러나 정황상 이것 하나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모든 기록은 위장된 진실이거나 은폐된 거짓 서사를 구성하는 일종의 허구일지도 모른다.

진실을 진실 그 자체로 기록한 기록물은 존재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경전을 형식을 띤 일련의 구성물일지라도 말이다. 말러 심포니 1번을 연속 2번 듣고 있다. 첫 번째는 크리스토퍼 에센바흐 지휘로, 두 번째는 만프레드 호넥의 지휘로……. 그런데 동일한 말러 1번 심포니 <거인>이 전혀 다르게 들린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비슷한 듯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따라서 에센바흐는 정제된 듯 엄숙한 분위기로 지휘하고, 호넥은 우아한 듯 정열적으로 춤추듯 지휘한다. 그리고 연주 시간도 약간 차이가 나고, 곡 해석도 약간 다른 듯하다. 그리고 나는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5번을 들을 때는 항상 만프레드 호넥이 지휘하는 연주만을 듣는다. 호넥의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키는 내 눈에 연극적으로 비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진실은 해석이고 취향이다. 마치 삐에르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학을 규정하는 일련의 서사는 계층, 즉 자기가 서 있는 아비투스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곳에서 생성된 운명의 타자인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진리 언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지전능을 가장한 하나의 편향된 서사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해석이다. 진실은 왜곡된 채 존재한다. 진실은 왜곡된 시선 속에서 진실인 채 존재한다. 따라서 보아 알고 느껴 아는 자기만의 아비투스, 그것이 바로 서사의 본질이고, 진실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너의 취향이지, 나의 취향은 아니다. 저것은 고유한 나의 취향이다. 서사학의 본질은 자기를 찾아 떠나는 존재의 여정 그 자체 내부에 존재한다. 각자 자기를, 길을 찾아 떠나는 바로 그것 속에 말이다.


2026 2월 25일

하루를 놓쳤다. 하루를 무의미하게 허비했다. 아마 그 헛되이 소모했다고 생각한 순간, 새로운 서사가 생성되는 극적인 계기의 출현을 알리거나 아니면 의미의 유예를 통해 신기원으로 향하는 고난의 여정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놓친 하루가 의미의 전부를 잃어버린 죽은 하루라는 점이다. 절대로 내일을 기약하지 말자. 내일은 희망으로 위장한 허상이자, 하루의 온전한 의미가 탈구된 소실점이다.

도대체 어떤 하루를 살아낼 때 우리는 만족에 이를 수 있는가? 만족될 수 없는 불만의 연속이었다. 카프카처럼 욕망할 수 없는 욕망 속에 스스로를 탈구시킨 채 불연속적인 글쓰기의 나날들을 살아 내거나 항상 미완의 서사만을 남겨놓은 채 숭고에 가닿는 것으로 생애의 시간 전체를 허비하게 된다.

따라서 끝내 완성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서사의 목적이다. 만약 서사가 완성된다면, 혹은 헤겔·마르크스적인 의미의 완전사회를 향해 인간학적 진실을 응고시킨 순간, 그것이 실재의 탈을 쓴 하나의 환상이다. 왜냐하면 완전이나 이상사회는 가닿을 수 없는 존재하는 하나의 가상의 덫이거나 AGI와 함께 도래할 전혀 다른 형질의 사회구성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는 꿈이지, 실재가 아니다. 아니 역으로 서사적 전망이 내세우는 일련의 기획들은 탈구됨과 동시에 자기 목적 너머로 모든 가능성을 투사하게 되는데, 어쩌면 그것은 자본의 야망을 은폐하는 곳에서 생성된 홀로그램적 신기루, 즉 환상에 매혹된 거짓 서사의 아름다운 유혹이다.

착각한다. 우리가 시간의 의미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해 온전한 실재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또한 오만한 자기 확신, 즉 신념으로 노예로 전락하는 서사의 함정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온전하게 하루를 촘촘하게 의미로 채우며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헐거워진다. 손가락 사이로 시간이 빠져나간다. 사랑의 인사를 나누면서 슬픔의 어디쯤을 매만져진다. 뭐랄까. 시간의 생성물들은 슬픔이 가득한 하루도 행복을 만끽한 하루도 자기 영혼과 마주한 영원의 일부로 만들어 므네모시네로 추억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사학은 원전이나 원본을 대리보충하는 허구적 양식, 즉 진실에 이를 수 없는 혹은 진실처럼 보이기만 하는 하나의 빈껍데기일지도 모른다.

불가능은 없다. 모든 것이 수용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상상 가능한 것과 아울러 상상 가능하지 않은 것도 허용되는 것은 물론 인간학 전체를 금단의 영역을 몰고 가 반윤리의 극단을 실험하게 된다. 아르또의 잔혹극이 그렇고, 까뮈의 개인적 부조리가 그렇듯, 서사학은 윤리의 확장, 즉 금기 위반 속에서 내파 된 타자의 용인이다.


2018년 2월 26일

답을 낼 수 없을 것을 답으로 내놓고 진실인 척 쓴다. 서사는 그와 같다. 아니 정답이 아닌 해답을 내놓고 그것이 서사의 가장 위대한 판본이라고 과장한다. 일련의 서사적 과정은 과장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아름답기도, 추할 수도 있다. 그것의 성패는 무엇을 쓸까가 아니라 어떻게 쓸까가 결정해 준다.

2018년 2월 27일

항상 무엇을 쓸까를 고민한다. 그러나 항상 느끼는 것인데, 무엇을 쓸까가 문제의 중심에 있는 모든 서사는 반드시 필패를 경험하게 된다.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라. 그러면 서사는 반드시 미학적으로도 내용적으로 성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서사는 담기는 것이지 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8년 2월 28일

미디어의 민낯은 서사학이 발원하는 진실의 장소이다. 서사학이 파괴되는 이유는 욕망의 위치가 늘 일정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 새로운 인간학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1일

예술이 돈을 초월했던 시대의 꿈을 말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고흐나 고갱의 어디쯤으로 되돌아가 원시적 생명력과 마티에르가 전부인 예술혼을 만난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서사인가? 광기에 휩싸인다. 전전두엽의 어디쯤을 완벽하게 탈구시켜 하나의 미감, 하나의 취미, 하나의 영감, 하나의 심혼, 등등 따위 따위 하나하나만을 생각하며 온전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여전히 소멸시효가 다했다고 보는가?

그렇다. 예술가에게 자본은 최후의 보루이고 자본심이다. 그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최초의 자본이기도 한데, 이는 모더니즘(혹은 모더니즘 이후)의 미적 효과가 발산되는 찬란한 출구이다. 아름답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름답기보다는 의미를 만족시키기를 희망한다. 말하자면 19세기 후반부를 달구었던 일련의 예술들은 의미화된 것이거나 의미의 과정 중에 있는 생산물이지, 의미가 확정된 완벽한 기획상품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과정으로서의 예술이 집중하는 품목은 자본의 의미를 평면이나 입체에 기입하는 개념의 완벽한 서사이다. 이를테면 19세기 후반부부터 제반 예술의 영역은 자본에 완벽하게 종속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디키가 말하는 예술계의 실상이다. 예술 텍스트를 뒤 메워주는 비평가와 큐레이터가 긴밀하게 결합 제휴하는 것은 물론 예술의 한계지평 또한 무한히 확장하는 비경을 연출하게 된다. 말하자면 19세기 후반부부터 생성된 일련의 예술들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개념적이다.

왜곡 혹은 재현. 모방 혹은 탈구. 작가가 취재하는 모든 것은 예술적이다. 역으로 개념은 예술로 나아가는 출구이고, 예술은 개념적인 한도 내에서만 예술로 승인된다. 말하자면 19세기 후반부를 달구었던 두 대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서사적 실험들은 예술을 재현의 한계 너머로 추동하는 새로운 수사학을 기획하게 되는데, 이는 <R. Mutt 1917>의 마르셀 뒤샹과 <브릴로 상자>의 앤디 워홀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적 조건이다.

따라서 예술의 창조적 서사는 후험적이지 선험적이지 않다. 재현에 더해진 개념이든, 재현을 봉쇄하는 개념이든 상관없이, 아무튼 19세기 후반부 이후를 뜨겁게 달구었던 예술의 미적 지평은 개념의 도움 없이는 결코 예술적이지 않다. 개념이 제거된 워홀은 혹은 사인이 부재한 워홀의 진품은 미적 사기의 최대판본이다. 어찌 되었거나 위대한 예술사적 운명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 조만간(혹은 천년 후에) 레이디메이드와 개념예술과 미니멀리즘이 희대의 사기사건으로 기소될지도 모른다.

서사는 그와 같다. 서사는 늘 포장의 수사학에 은폐된 미적 과대포장이 누출되는 과정에 뜯겨 나오는 파국, 즉 다성의 목소리와 결합하고 해체되는 순간에 터져 나오는 개념의 흔적들이다. 아주 잠시 주목을 끌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서명 날인만을 남겨놓는다. 작가는 죽고 수백만 달러 혹은 상상을 불허하는 고액에 팔려나간다. 어느 억만장자의 수장고에 갇힌 채 예술의 기호를 흔적조차 없이 지워버릴 것이다. 돈만 남고, 아우라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달러로 환산되는 가치만이 예술을 평가하는 완벽한 척도이다.

모더니즘 이후 예술은 돈이라는 척도 위에서만 예술적이다.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것은 결국 자본심, 즉 돈이지 결코 미적 아우라를 포획했다고 자만하는 알량한 영기가 아니다. 그게 예술계가 처한 현실이고, 미학의 현재 위치이다. 서사학자의 하루가 피곤한 것은 그것이 너무도 자본의 이념과 먼 곳에서 자기 공명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대체 모더니즘 이후에 돈이 아닌 서사학에 골몰하는 자의 말로가 어떠한지 궁금하다.

그나저나 고흐의 환상은 예술이 꿈꿀 수 있는 최후의 환상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최선의 태도인 듯하다. 고흐는 예술의 최초의 현상이자, 예술가가 꿈꿀 수 있는 마지막이다. 소용돌이와 마티에르에 이끌려 압생트에 취한 채 환멸의 세계를 아름답게 채색한다. 그리곤 투명한 별이 되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소더비경매에서 팔려나간다. 보무도 당당하게 말이다. 세상을 비웃듯이 말이다. ‘나는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다.’ 하고 말하듯이 말이다.

그날도 압생트에 취한 채 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환상은 실물의 예술로 나아가는 마지막 출구이다. 전전두엽의 망실시킨다. 예술은 이성, 즉 판단력이 사라진 광기의 언어이다. 의미해독이 가능하지 않은 기호가 그를 점령한다.


2018년 3월 2일

포만감에 빠져 아무런 욕구가 일지 않을 때가 있다. 가장 아름다운 휴식을 취한다. 깊이 잠드는 것이 아니라 나비잠 자듯 아주 잠깐 잠에 취해 정신 줄을 완벽하게 놓는다. 행복은 그와 같다. 행복한 서사는 아주 잠시 동안 향락을 허락하는 향유의 어디쯤에 존재하는 마성적인 기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아니 서사란 언제나 의도되지 않는 예외의 순간에 발생해 졸지에 나락으로 처박아 버리는 일체의 기행들과 적극적으로 제휴한 어처구니없는 그 무엇, 즉 전복의 마술이다. 아름다운 시절이 지옥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듯이 우리는 그렇게 자기 서사의 종말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자기 환멸의 강을 건너게 된다.


2026년 3월 3일

대리보충은 진실에 이를 수 없다. 밑도 끝도 없다. 차라리 그것은 행복일지도 모른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다. 그렇게 강렬했던 사건도 시간의 사라짐과 동시에 자기 망각에 이르러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무덤덤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주어진 시간을 살아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서사의 배후로 사라진다. 아마 진실의 체계 전체를 오리무중에 빠트리기 위한 서사의 기본 전략인 것 같은데, 그것은 바로 시간, 즉 망각이 만들어낸 삶의 오묘한 지혜이다.

모든 것이 묻힌다. 아마 레테를 건너간 그 모든 것들은 행복한 시대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그저 음악에 빠진다. 안톤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듣는다. 바그너튜바에 매혹된다. 뭐랄까. ‘2악장 아다지오. 매우 장중하고 매우 느리게.’를 듣노라면 뭔가 아련해진다. 삶 저 너머로 이월된 비극이 매만져지고, 또 어떤 숙명의 서사가 인간학을 이끄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시간 저 너머를 알 수 없다. 그저 생명으로 와 있는 시간 앞에 혹은 모든 것이 자기 목적이라 착각하면서, 자기 서사를 죽음의 형식으로 완주하고 있다. 설령 생의 행로 전체가 불완전하게 탄주 되는 미완의 과제처럼 느껴지지만 아무튼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서사학을 써 내려가는 것으로 자기 숙명과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서사학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앎에의 의지가 표명되는 수사학적 전망이거나 시공간에 침전된 의미를 자기화하는 곳에서 생성된 일종의 가공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역사를 관통하는 일련의 서사는 각자 자신만의 체험 속에 전유된 의식, 즉 자신만의 고유한 아 Q를 통해서 표현된 특수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은 아 Q에게서만 생성된 일종의 자기 합리화이거나 현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하는 곳에서 파생된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으며 동일성 속에서 전혀 행복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저 자기 기호를 쫓아가다 맞닥트린 향유의 구조 속에서 자기 환상을 체험하는 것으로 서사를 완성하게 된다.

특별한 것도 위대한 것도 없다. 다만 차이의 기호가 상품화되는 것으로 새로운 서사학을 건설하게 된다.


2018년 3월 4일

서사의 매력은 포기다. 자기 내던져 패대기를 침과 동시에 미묘한 운명에 이끌림에 이르는데, 어쩌면 그것은 자기 구원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포기는 도전의 연속이고, 체제와 함께 공명하는 반어적 포즈이기도 하다. 아니 포기는 가장 매혹적인 방식으로 자기와 타자 사이의 거리를 봉합하는 가장 현명한 태도이다.

그러나 고립된다. 고립은 포기가 자초한 운명애를 응시하게 만드는 촉매역할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카프카의 『변신』에 매개된 인류학적 성찰이다. 어쩌면 그레고리 잠자에 매개된 일련의 서사는 모든 콤플렉스가 생성되는 존재의 심연, 즉 인류학적 서사가 고밀도로 응결된 하여 삶―시간―세계 전체를 압축·전치시킨 꿈의 변용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서사의 중심축은 포기임을 명심해야 한다. 노동을 포기하고 먹기를 포기한 순간, 그리고 종국에는 생명활동을 포기한 순간에 우리 모두는 황홀경에 이르는데, 그것이 바로 포기가 발하는 가장 아름다운 진경이다.

인간의 과제가 소실된다. 카프카의 『변신』이 위대한 이유는 꿈과 희망이 거세된 디스토피아를 완벽하게 재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자본의 현실에 드리운 암울한 전조를 예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꿈을 꿀 수 없는 것을 꿈꾸며 서사의 불능상태를 환상의 구조로 간단하게 도치시켰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하지 않은 것이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으며 마침내 인간학 전체를 알레고리로 우회하는 비밀통로가 비로소 열기게 된다.

따라서 포기는 전도의 완성이자, 불가능을 실현하는 도전, 즉 서사의 역설적 징후이다. 그래서 가끔 포기를 선언하는 것으로 서사를 시작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 때가 있다. 그레고리 잠자처럼 곡기를 끊고 자기와 정면으로 대면한다. 결국 서사학의 본질은 타자에 투영된 자기 모습을 반추하는 끊임없는 성찰행위이거나 아니면 자기로부터 시작해 자기에게로 되돌아가는 길에 부딪히는 무수한 파열음이다.


2026년 3월 5일

써지지 않는다. 미완의 기록만이 눈앞에 놓인다. 아마 그/녀는 절망과 침묵 앞에 이르러 자기 타자와 적극적으로 만나기를 요청했지만, 동사 ‘쓰다’의 목적은 그 목적지에 가닿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쓰기의 반복은 불능이다.

카프카의 『심판』을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읽은 지가 오래돼 상세하게 어떠한 방향으로 서사가 진행되지는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주인공 K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 전체가 가히 충격적이었다는 사실만은 잔상처럼 남아있다. 두 사람에게 이끌려 공터에서 ‘개 같이 죽는다.’ 그리고 카프카의 시대와 2026년 3월 5일 현재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난장판 혹은 대한민국 법조계의 현실. 그것은 목격할 수 있는 최악의 외설이다. (대)법원과 검찰과 변호사집단이 추악한 돈과 권력으로 똘똘 뭉친 외설의 숭고한(?) 체계가 아니라면, 우리 사회에 아직 희망이 남아있으리라. 그러나 추잡했다. 일고의 양심도 없다. 그저 생존의 논리만이 정의와 평등의 원리를 굳건하게 떠받치며 공평한 척 위장만 일삼는다.

따라서 서사의 진실은 척이다. 안 그런 척 그냥 슬쩍 넘어가 진실을 왜곡하는 것으로 자기 목적지에 당도하게 된다. 마치 카프카가 마주한 20세기 초반의 현실이 21세기 지성이 처한 가증스러운 욕망의 현재를 대표하듯이, 서사의 목적은 가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을 눈앞의 목적으로 가져와 그 모든 행태를 법 그 바로 앞에서 왜곡하고 기만하는 태도이다.

자본과 권력과 법이 한 데 뭉쳐 온갖 추문을 양산했으며 마침내 그들만의 왕국을 진실의 현재인 양 호도하기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벽 혹은 단절된 계층의 사다리. 특히 (대)법원을 비롯한 검찰의 타락한 권력은 법의 정의와 평등의 원칙을 밥 먹듯이 위반했으며 마침내 법원이나 검찰 조직이 법 위에 군림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정의의 신 디케가 눈을 감는다. 은폐와 왜곡이 난무했으며 마침내 조작된 진실이 진리처럼 횡행하는 거짓사회가 당연 듯이 받아들여진다.

삶은 그렇고 그런 것이지 별다른 무엇이 아니다. 비리가 난무하지만 무감각해져 무기력에 빠진다. 진실을 묻지 않는다. 더불어 정의와 평등의 가치를 임의적으로 날조하기에 이른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한다. 아니 수단은 목적에 이르는 신성한 길인 동시에 이 세계 정의를 실천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그리고 법은 권력을 생산하는 수단이자 방법인데, 그것은 온갖 조작이 가능한, 수많은 해석에 열린, 따라서 자기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이다.

현대의 서사학이 추악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데, 그것은 바로 꿈과 낭만의 가능 조건 전체를 자본과 힘의 논리로 그리고 법리적으로 해체시켰기 때문이다. 더 이상 별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오로지 자본이 내어놓은 길을 따라 힘에의 의지만을 강조할 뿐, 더는 진실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차라리 진실은 없는 게 낫다. 까닭은 21세기의 자본의 현실은 진실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실은 희망을 고문하는 최악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6일

명사와 동사 사이를 오가다 아무것도 서술하지 못한 채 서사를 종료시키는 극적인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진실의 위치를 추궁하는 위대한 사명과 정면으로 마주 서지만, 그것이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곤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온 천하를 떠돈다. 그/녀들 사이에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떠다니는 진실을 움켜쥐었다거나 지금 막 눈앞에 현전의 체계로 진실을 현시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이른다.

그러나 여전히 먹먹했고 대재난이 예고된 혼돈의 상황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서사 전체를 오류로 기록하는 결정적인 우를 범하게 된다. 아직도 서사 앞에 예고된 그 모든 징후가 불확정성이 지배하는 오리무중이란 말인가? 정녕 서사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막장의 파노라마였던가? 서사란 자신에게 부가된 오늘을 아름다움으로 봉인할 수 없는 부재의 확인 과정인가?

또다시 무위의 덫에 가 닿는다. 아마 그것이 유일한 진리의 장소일 게다.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자기를 묻는 저 우매라는 황홀 앞에 다가가 스스로를 옥죄고 자복하는 비경을 온전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예측은 언제나 적확하게 시간의 과녁에 적중하겠지만, 따라서 서사란 시간이라는 내적 장치를 화려한 수식으로 외화 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어찌 그것이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수사학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오늘을 놓치면 전부를 놓친다. 오늘은 서사학이 공명하는 진리의 전부이다. 따라서 부분은 전체에 봉사하는 부분이 아니라, 전부를 표상하는 진실의 온전한 퍼즐이다. 그렇다고 부분의 총합이 진리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오늘이라는 퍼즐 조각을 유심히 바라다본다. 과연 오늘은 미적 효과가 극대화된 서사의 완벽한 판본인가? 서사와 함께 더불어 오늘은 그/녀에게 진실과 공명할 수 있는 의식의 저장고라 확언할 수 있는가?

그러나 모든 오늘은 사라져 진공상태에 이른다. 빈 지대 혹은 모든 것을 게걸스레 집어삼키는 의식의 심연.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가 물을 수 없는 나를 심문하는 결정적인 우를 범하게 된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나와 꼬리를 감춘 나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물론 그것이 나를 찾은 것도, 나를 찾지 않은 것도 아닌 지극히 애매모호한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 낯선 시간의 풍경이겠지만, 어찌 그것이 서사가 표명되는 진실의 결정적 순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오늘 앞에 혼절해 넋을 놓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서사학은 포착한 오늘을 또다시 탈구시켜 내일이라는 목적지 앞에 그 모든 의미를 일거에 유예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내일의 목적 앞에 오늘은 한낱 비루한 흔적의 구성물인가? 아니 역으로 모든 서사는 오늘 앞에 무릎 꿇는 반어의 효과라고 말할 수는 없는가? 묵연히 오늘을 기록하며 서사학자의 하루가 덧없이 사라져 점점 무에 다가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을 따름이다.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암흑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내일을 꿈꾸지 않는다. 내일은 부재다. 차라리 밝고 투명한 낮 꿈이 아닌 탐욕의 밤꿈에 취해 내일을 오늘로 봉인하는 몰락을 꿈꾼다. 희망을 고사시킨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저 웅대한 기획을 내일의 서사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가장 안쪽에 침전시켜 향락을 향유하며 차후를 원천 봉쇄시켜 버린다.

오늘과 함께 더불어 오늘 속으로 의미와 그것의 가능성을 침전시켜 의미의 조건법 전체를 침식시킨다. 잃어버린 꿈을 되찾았다. 잃어버린 나를, 시간을, 욕망을, 그리고 영원을 오늘에게서 재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이 서술되지도 표현되지도 않는 그 자리로 되돌아가 완벽한 향락을 향유하는 것으로 오늘을 적멸에 이르게 만든다. 서사가 파열하고 뜯겨나가 내일은 파란이 일 것이다. 오늘은 파란이 고밀도로 축적된 내일의 암울한 전조이다.


2018년 3월 7일

또 하나의 낭만이 혹은 꿈과 이상과 이념으로 포장된 허구가 폭삭 사그라져 역사의 뒤안길로 가뭇없이 소거되었다. 그/녀가 혁명의 전사였을 리 없다. 그/녀는 파렴치한이다. 그/녀는 권력에 빌붙은 주구였지, 참된 시대의 이념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의 절대적인 주체일 수 없다. ‘내로남불’ 또는 역지사지. 차마 진실의 실체 앞에 다가가 그 전모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내 보이는 결단에 이르지는 못한다. 야비한 처세술만이 진실이나 정의로 포장된다.

서사학의 실재란 그와 같다. 한때의 이념, 한때의 사랑, 한때의 숭고한 이데올로기. 한때가 지나면 모든 것이 탈색되거나 변질되어 그 진위 파악이 불명료해진다. 그러나 그/녀의 일탈적 행위, 즉 강력한 대상리비도 집중의 성공은 시대의 사명을 전복시켜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굴절·전복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서사의 참된 역량이다. 무한히 수정되고, 또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궤도 전체를 탈구시킨다.

탈구만이 우리 모두를 서사의 목적지로 데려다준다. 까닭은 En과 Hee 사이의 미묘한 여감(?)이 만든 모든 이데올로기의 진실이 결코 진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권을 달구는, 감히 이데올로기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이념을 위치시킨다. 그러나 역시 새로운 서사가 추동되기 위한 희생 제의로 그/녀의 비열한 서사를 차용해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역사란 서사 전체를 거울삼는 뼈저린 반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다시 그것의 정확한 목적이 무엇인지 망각하게 된다. 개구리는 결코 올챙이 적 시절을 모른다. 서사가 위대한 것은 그 올챙이 적의 낭만과 우울을 고도의 수사적 전략을 통해서 고스란히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단 하나의 완벽한 예술적 장치를 희생의 제의로 포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혹독한 대가를 치른 이후에만 비로소 서사가 구술되고 다시 회자되겠지만, 따라서 그것은 현재를 구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위대한 기획과 극적인 상면을 통해서 미래로 전진하는 비약하는 의식의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겠지만, 감히 그것을 진실이 아닌 것으로 폄훼할 수 있겠는가?

다시 역사가 쓰일 것이다. 적폐와 구태를 일소하고 역사는 새로운 물고를 만들 것이다. 누가 참된 참회록을 쓸 것인가? En도 Hee도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않는다.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비루하게 하루하루를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연명을 도모 중이다. 문학이 죽었다. 인문의 아름다움은 한낱 문자의 공염불이었다. 이제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꿈과 낭만을 꿈꾸었던 시대의 휘황찬란한 이념을 믿지 않기로 했다.

서사는 은폐의 마술, 즉 탈은폐를 향한 시간의 반어적 여정이다. 꿈을 꾸지말자. 꾸어지지 않는 꿈이 생의 전부이다. 몰락하라. 더불어 침몰을 위해 카섹시스(cathexis)에 몰두하라. 이제 새로운 서사가 막 시작될 것이다. 반전에 반전을 더해 신세계로 향하는 미지의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En과 Hee의 종말에 이른, 혹은 Duk과 Min의 추악한 마각이 드러난 순간에만 서사는 평등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구조를 새롭게 구축하게 된다. 한번 흥하고, 한번 멸한다. 서사는 늘 그와 같다. 탐욕의 끝 어디쯤에…….



2018년 3월 8일

새벽부터 봄님을 재촉하는 비가 흠뻑 온 대지를 적시고 있다. 올 한 해도 풍요로움을 기원해 본다. 대지의 신께 고하노니! 왜 이 세계는 서로 다른 이해들로 파열 해체되는 참극들로만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들을 드러내 보여주는가? 그건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조작된 서사가 만들어낸 가장 나쁜 사회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왜 그/녀는 최악의 폭력적인 사태에 내던져진 채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는가?

또다시 서사가 표류하는 의외의 사태가 발생했다. 아니 그것은 의외가 아니라 필연이라고 말해야 한다. Bonjour. Tristesse!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진정 서사는 어느 누구를 위해 전개되는 곡예의 마술인가! 하루도 쉬이 흐르지 않는다. 하루는 문제의 중심이다. 어떻게 하루를 살고 기록해야 하는가! 서사학자에게 하루란 영원의 권태와 마주 선 문제적인 시간이다. 도대체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또 표현법을 어떻게 만족시켜야 하는가? 반어인가? 역설인가? 아니면 초월인가?

문제의 하루가 가고 또 다른 하루가 다가오지만, 어느 하루도 차이를 생산하거나 만들어내지 못한다. 동일한 욕망, 동일한 목적, 동일한 권력에의 의지. 너는 하루를 완벽하게 탈구시켜 일탈을 온전하게 향유했던 적이 있는가? 순결하게 언어와 맞선다. 아니 역으로 저 순후 한 순결에 굴복해 관능에 침전된 그 모든 의미를 기호로 발화시킨다. 사드 혹은 마조흐의 기호嗜好를 극단의 미학적 기호記號로 승화시켜 향락을 급진화시키기에 이른다.

아마 그건 En의 잘못도 아니고, Min의 추악한 민낯이라고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그건 차라리 사드와 마조흐의 미학적 판본을 현실적 지평으로 재현한 역설적인 징후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계가 처한 미학의 진실, 즉 권력 담론의 배후를 헤집는 진실의 서사이지, 추악한 인간학의 참상이 결코 아니다. 여전히 문제는 서사의 골격, 즉 형식이라는 외피에 둘러싸인 욕망과 그것의 구성물을 재배열하는 순간에 터져 나오는 뜻 모를 비의이다.

물론 그 모든 서사적 제의가 종국에는 은유에 받혀진 알레고리일 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겠지만, 어찌 시간을 역류시킨 일련의 기획물들이 진실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녀에게 시간은 환상을 꿈꿀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자, 의미의 구성법을 재배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의미적 공간이다. 시간은 공간이 재배열된 인간학의 정수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 고착된 채 작동하는 미래의 공명판인데, 이는 21세기에도 서사가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는 단 하나의 기대효과, 즉 착오의 시간이다.

그러나 과연 그/녀는 대상리비도집중의 온전한 결과물을 통해서 어떤 서사적 목적지에 당도했겠는가? 파멸인가? 향락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자기로부터의 완벽한 소외인가? 아마 죽음을 만족시켰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사란 죽음까지 파고드는, 하여 그렇게 살지 안 되는 에로티즘의 한복판에서 생성되는 생에의 의지 전체를 반어적으로 서술하는 파열의 음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히 죽어 다시 신화로 재귀하는 현대의 환상의 구성물로 재탄생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녀들의 완벽한 추락은 현대의 서사가 다시 시작되는 진실의 장소이다. 하루가 영원히 다시 시작하는 한, 서사는 끝나지 않는다. 모든 하루는 모든 서사의 시작이자 완결이다. 그렇지만 En에게 밀어닥친 내일의 하루는 어떤 하루일까? Bonjour. Tristesse! Bong 혹은 En의 동일한 듯 전혀 다른 하루의 서사. 과연 그/녀들은 진실 앞에 이르러 온전하게 자기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을까? 정녕 이 세계의 서사는 참된 진실의 서사로 가득 채워 너 또는 나를 황홀경에 이르게 만들까? 서사학은 재귀, 즉 모든 시작을 다시 시작하는 지점으로 되돌아가 모든 사건을 폐기처분할 것이다.


2018년 3월 9일

서사의 실체가 미궁에 빠진다. 결국 그/녀에게 허여 된 일련의 서사가 조작이 만든 역사의 암울한 그림자였다는 말인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수단은 목적을 위한 봉헌된 신성한 도구로 간주된다.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또 저 힘에의 의지라고 표명되는 권력이 배후에 존재하는 한, 그/녀는 저격수의 표적이지 의미의 절대적인 객체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배했던 정치경제학이 비열하고 야비한 처세의 학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서사 내부에 최소한의 인륜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존이라는 저 지상최대의 명제를 목적 앞으로 앞세운다. 물론 그러한 과제들로 인해 막장극으로 전락한 서사는 흥미진진하다 못해 짜릿한 희열에 도달하게 되지만, 어찌 그것만으로 서사학의 진리를 설파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폭로에 폭로를 거듭해 가히 온 세상을 추잡한 비리의 천국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니 폭로는 진실을 우회 지연시키는 서사의 완벽한 수사적 장치로 고양되어 막장과 미적 코드 사이에서 대중의 시선을 확보하는 극적인 반전효과를 노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폭로전에 노출된 서사의 잠재적 역량, 즉 서사가 신화로 탈바꿈하는 기대지평의 충족효과이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전복된다. 육두문자가, 육체성을 띤 외설의 징후가 서사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게 된다. 신음소리와 교태의 비음과 몰카가 한데 뒤섞여 관능을 자극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 대상리비도집중에 성공하게 된다. 말하자면 조작의 서사는 역사 전체를 퇴행으로 기록하는 수구세력의 방법적 전략인데, 이는 안나의 사랑을 모독하는 시대의 한계이다. 안나는 En의 시이고, Tak의 반어적 연극인지도 모른다. 아니 문학의 참된 서사는 외설의 역사 속에 기입된 아슬아슬한 곡예술에 가까운데, 어느 누구도 감히 그것의 참된 가치가 외설의 징후라 발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강렬한 외설 내부 깊숙한 곳에서 생성된 미적 아우라 전체가 조작의 현실임을 직시하지 못한다. 에 현혹되어 경배하는 추태를 연출하게 된다.

힘에의 의지는 저와 같고 숭고한 미적 가치로 위장한 외설은 아름다움의 극단적 형식으로 추앙된다. En의 시와 Tak의 연극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데, 그것은 바로 권위에 의탁한 거짓신화가 정초가 되는 전체주의(독재자)의 한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서사의 진실이 왜곡된 채 미를 생성해 내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거짓현실이다. 모든 것이 포장되고 위장된다. 따라서 서사의 탈은폐의 수사적 전력은 자기 합리화를 향한 간절한 욕망의 기도문, 즉 미의 화신으로 둔갑한 주체의 역설적인 징후이다.

En의 시와 Tak의 연극이 주기도문으로 정전화된다. 가면은 아름답고, 내면은 추악하다. 따라서 서사학은 추악한 내면을 추악 그 자체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추악한 내면을 재차 전도시켜 아름다운 가면 위에 덮어씌우는 교묘한 수사학적 전략임을 명심해야 한다. 수사만 남는다. 수사는 만년 이후에도 남는 예술의 영기이다. 그대! 오늘은 추락의 고통 속에서 최대한 항변의 서사를 구축하겠지만, 그것이 바로 영원으로 향하는 미적 통로임을 명심하라. 단 한 번뿐인 생을 위해 혹은 단 하나만을 노래하는 서사를 위해 기꺼이 죽음의 변주곡을 탄주 하는 그대의 운명에 감사하라. 오늘 여기 이 순간에 처한 모든 것들을 축복하라.

설령 그것이 삶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없는 천형의 길일지라도, 그대 오늘의 비극을 기꺼이 감내하며 그것이 바로 서사학의 온전한 위치임을 인정하라. 오늘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일도 내일의 문학이 서술될 것이다. 물론 그 내일이 어떠한 방법으로 진화해 갈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따라서 가까운 미래에 문학혁명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학은 무수한 오늘이 직조한 반성의 제의라는 사실만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내일도 역시 추악한 내면을 아름다운 가면으로 덧씌워 황홀한 수사학의 비경에 빠져들어 보자. 내일의 서사를 내일에게 맡긴다.


2018년 3월 10일

글이 시간을 메운다. 역으로 글은 시간을 게걸스레 먹어 들어가는 영혼의 환부이다. 자기 트라우마를 들여다본다. 역시 글을 쓰는 이외에 특별한 치유방법이 없다. 천형에 갇힌다. 언어의 감옥이 아닌 문자와 수사에 몰입한 채 자신에게 허여 된 일련의 서사적 장치를 완벽하게 탈구시켜 반사회적 목적에 봉사하게 만든다.

자기를 자기라는 또 다른 목적지에 가둔 채 기꺼이 타자가 된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지대한 과업은 자기를 완벽하게 타자로 설정하는 자기 투쟁의 전초기지인데, 그것이 바로 글쓰기가 비로소 시작되는 의미의 공간이다. 나는 타자다. 나는 나를 타자화함으로써 비로소 서사적인 대상이 되는데, 이는 자기 스스로를 물신의 위치로 고양시킨 이후에 가능한 아주 낯선 불길한 징후이다.

나를 내가 생경하게 묘사한다. 낯설어진 나와 극적으로 대면한다. 물론 일련의 글쓰기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과정의 산물처럼 묘사되지만, 따라서 서사는 시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낯선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 진실을 토로하게 만든다고 괴테는 말하는 것 같지만, 어찌 자기라는 함정 내부 어딘가에 진실이 존재한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진실은 내가 아닌 곳에 존재한다. 진실은 내가 아닐 때만 진실하다.

저 크리슈나 무르티의 혁명적 교설들은 자기에게 이르는 도정이기는커녕 자기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 자기 망각에 이른, 자기의 자기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체제를 이루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낯선 시간의 풍경만을 늘어놓은 타자의 구성방식일 뿐이다. 물론 그가 완벽하게 자기를 알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그가 글로 메운 자기는 철저하게 자기가 아닌 방식, 즉 타자의 의식으로 자기를 통과했다는 사실만은 부정되지 않는다.

오늘도 쓴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우주적 혁명으로 비약하기를 묵시적으로 소망하면서, 오늘도 서사학자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시간을 타자 속에 응고시킨 채 문자라는 저 무량한 지대를 힘들게 건너고 있다. 되돌아갈 방법이 없다. 너무 늦었다. 되돌아가 전혀 다른 서사의 체제를 구축하기엔 남은 날들이 너무 적다.

슬프다, 시간이여! 나는 왜 되돌아가 전혀 다른 삶의 구성법을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외길로만 자신을 서술하게 되는가? 역시 트라우마 때문인가? 진실에 도달할 의미의 통로는 언제나 자기에게 막힌 채 글이라는 가면 뒤로 숨는다. 어쩌면 인류 역사가 기록했던 모든 문자는 진실이 아니거나 왜곡된 한도에서만 진실을 허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은 문자가 아닌 방식으로 그 체제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학을 통해서 진실에 다가갔다거나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기획물들은 진실을 날조하는 조작의 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글을 믿느니, 차라리 돌아누운 부처를 믿겠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서사학자는 동사 ‘쓰다’에 충실한 순결한 사도이다. 물론 스스로를 순결한 순교자쯤으로 여긴 채 문학의 공간 전체를 죽음의 공간으로 전복시키겠지만, 어찌 그것이 진실을 위해 봉헌된 참된 공간이라고 간주될 수만 있겠는가?

그저 쓰고 또 쓰는 반복의 노예가, 반복적인 쓰기를 감행하는 노예의 습관이 서사학의 본질을 이루는 정체인 한, 모든 숙명은 날조된 거짓의 운명이다. 자기 최면에 걸려 스스로를 동사 ‘쓰다’에 구속시킨다. 분명 ‘쓰다’는 숙명이었을 게다. 분명 시간을 빼곡히 채운 저 무수한 서사학들은 자기 최면이 만든 고도의 수사학에 기만당하는 자기 기망의 체제일 것이다.

언어 이외에는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진실의 전부는 언어이다. 마치 최초의 서사적 행위가 말에 의해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처럼, 서사학자는 언어의 감옥에 스스로를 봉인한 채 좌고우면하는 고뇌하는 나날들을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이제 막 서사가 이 세계 속으로 들어와 활보하고 있다. 기쁘지 아니한가! 행·불행의 서사는 언어에게 속해있지, 인간 세계 속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한 줄의 글에 위안을 얻는다. 쓰고 있고, 아직도 쓰고 있는 중이며, 내일도 쓸 것이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2018년 3월 11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아마 내일도 또한 다른 하루일 것이다. 나는 나의 대립물이다. 황홀하게 나를 쳐다본다. 역시 다른가? 역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가? 그러나 같다. 그러나 동일한 것을 다르게 말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겠지만, 어찌 모든 차이가 동일한 것으로 재귀하는 서사의 반복임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서사는 자신의 일체의 표현법을 전혀 다른 의미의 공식으로 표방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진실이 흔적에 기입된다. 흔적의 수사만이 오롯이 빛나 서사학 전체를 투명하게 비추는데, 그것이 바로 언어의 감옥에 갇힌 의미의 실재일 것이다. 어떻게 차이를 서사에 기입한단 말인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차이의 서사학을 추동할 수 있을까? 결국은 ‘어떻게’이지 내용이 아니다. 하여 충실한 노력의 결과물, 즉 내용은 그만큼의 대가를 서사로 환원시켜주지 못한다. 아니 무수히 많은 시간을 메웠던 글 모두는 단 하나의 상징적 수사에 걸려 넘어져 완벽하게 자신의 위치를 탈구시키는 것으로 종결된다.

따라서 탈구만이 서사를 완결 짓는다. 쓰레기가 난무한다. 말들의 무덤 혹은 주검의 말들. ‘아’의 어감이 ‘어’의 흔적을 지우고, 또 ‘오’의 감각으로 재생된다. 도대체 ‘이’와 ‘우’의 미묘한 질감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왜 서사학은 이 미묘한 수사학의 흔적만을 추적하다가 스스로를 괴멸시키는 참극을 추인하는가? 영원히 빛나기를 원했지만, 영원 앞에 빛이 바랜다. 말하자면 서사란 빛바랜 음영 속에 투사된 잔여의 수사학인데, 이는 말의 빈 껍질, 즉 패러독스와 아이러니로 만나는 자기부정의 언어들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긍정의 사탑을 세우지 못한다. 아니 서사에 속한 모든 것들을 나선형으로 선회시킨들 어찌 그것이 감히 진실에 도달한 진리의 전언이라고 확언할 수 있겠는가? 칸트와 헤겔 사이를 오가다 파탄에 이른다. 수사학은 서사학이 표현되는 전략 전술이고, 진리는 수사학으로 중무장한 파열의 목소리이다. 파편만이 서사의 중심부에 뜨겁게 달군다. 물론 이때 파편의 서사는 가장 완벽하게 기획된 시간의 구성물로 간주되지만, 그 역시 의미 내용이 고갈된 흔적의 수사임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서사학은 혹은 서사학에 표현된 모든 것은 의미 내용이 고갈된 이후에 남는 그 무엇으로만 접근 가능한 잔여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아주 미세한 그러나 시간의 저항을 견딘, 마모가 불가능한, 더 나아가 시간 그 자체에 의해서도 탈구되지 않는 미지의 그것만이 서사의 결정적인 주체이다. 그러나 서사학자는 그것을 ‘ㅁ=ㅠ’와 유사한 등식으로 언표하는 것에 멈춘 채 서사와 그것의 의미 체제를 아직 표현되지 못한 미지의 기호로 남겨놓게 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시간의 잠재적인 역량과 관련된 일련의 서사는 ‘ㅁ’은 ‘ㅠ’인 채로 탈자화해 영원히 서사학을 미결정성으로 남겨놓는 숙명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

황홀하지만 난감하고, 미궁에 빠져 어둠 속을 헤매는 듯하지만 생에의 형식을 전체를 향유로 조건 짓는 바로바로 그 지점에 서사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영원히 개방된, 결코 폐루프로 봉인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남는다고 말해야만 한다. 프루스트의 기호를 찾아 잃어버린 시간의 어디쯤을 헤맨다. 광인이 보인다. 차라리 숙명에 굴복한 채 애걸복걸 야비하게 생 전체를 구걸하는 나약한 타자에게서 시간의 진실을 읽어낸다.

물론 서사의 궁극적인 진실이 영원히 봉인된 채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원히 개방된 채 자기 한계를 넘어서기를 열망하는 체제가 서사의 강도로 표현되는 한, 반드시 시간의 안쪽에 완벽하게 스스로를 활짝 열어젖힌 자기 타자와 대면하는 비극에 노출되는 것으로 서사의 기획이 완료된다. 숙명이 그/녀를 좀먹듯이 먹어 들어간다. 서사는 그와 같다. 이를테면 그럴싸한 낭만으로 시작해서 불륜의 치정극으로 끝을 맺는 정치경제학의 추악한 참상을 온 세상에 공표하는 고백의 전언으로 회개하는 참회의 글을 죽음의 끝자락에 남겨 놓는 것으로 파국을 마무리하게 된다.

숙명이 교만한 그를 데려갔다. 어찌 죽음이 교만이 만든 필연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서사는 죽음의 덫에 포획된 황홀경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극도의 불안과 생의 열락 사이에 기입된 그 모든 것들이 서사의 강도를 흡족하게 만족시키는 것으로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봉합했기 때문이다. 하나를 얻고 반드시 결정적으로 중요한 하나의 잃어버린다. 레테를 건너 흰 손을 흔든다.


2018년 3월 12일

영원히 열린 채 표류했다. 닿았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닿지도 못하고 열리지도 못하는 곳에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차이란 잃어버린 시간이 만든 가장 나쁜 기대효과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여전히 서사가 욕망되는 반복의 묘법이다. 반복이 없다면 욕망도 없다. 아니 역으로 모든 욕망은 반복에 닻을 내린 차이의 필연인데, 우리는 그 모든 의미의 공식을 다시 동일한 목적지로 데려가 인간학이 결코 가능의 조건이 아니라 불능의 성취라는 역설과 마주 서게 만든다. 잃어버린 것이 찾아지지 않는다. 찾아진 것은 자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 아닌 것의 총체적인 결정체도 아니다. 무한히 열린 채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간다. 까닭은 시간은 영원히 너 또는 나에게 속했던 모든 것들을 탈자화해 ‘ㅁ=ㅠ’라는 엉뚱한 공식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ㅁ’과 ‘ㅠ’ 사이의 거리는 무한히 확대되고 증폭되어 진리의 가능 조건들을 진실이 될 수 없는 것들로 기록하게 되는데,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영원 앞에 표류하는 타자가 서사의 결정적인 주체가 되는 전복적인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하루를 놓치면 의미 전체를 놓친다. 탈구된다. 영원히 열린 채 봉합되지 않는다. 미완. 완성을 전제하지 않는 서사의 최대의 역량. 닫힌 체제의 반복. 전복에의 수사. 다시 되돌아가는 죽음에의 의지. 등등 따위 따위. 개방은 진리에 도달하는 마지막 서사의 창구이다. 물론 서사학자의 하루하루가 은일한 의식의 구성물로 봉인됨과 동시에 이질성의 목적지로 데려가 탈구된 서사물들을 기록하고 있겠지만, 어찌 그 모든 기획이 동일한 진리를 위해 개방된 진실의 공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루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기댓값은 진실을 심문하는 삶의 극댓값이다. 설령 그 모든 서사가 결코 재현가능하지 않은 잃어버린 시간에 고착되어 자기를 망각하는 것으로 구조화되어 있지만, 따라서 나는 나를 전혀 다른 나, 즉 타자화하는 것으로 시간의 중심부에 당도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란 여전히 의미와 그것에 관한 일련의 구성물들을 미완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열린 체제, 즉 수사학적 장치이다. 말은 영원하고, 의미는 해체된다. 이를테면 말만이 화려하게 어느 지점에 응고된 채 원근법적인 시선 위에 다성의 목소리를 투사시키는 것으로 자기를 응시하게 된다. 우리 모두 잃어버린 시간을 향해 되돌아가 너 또는 나에 부가된 그/녀의 진실을 찾아 헤매지만, 여전히 진실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다. 아니 바로 그 문턱 앞에 멈추어 선 채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심문하는 것으로 자기 환영 앞에 당도하게 된다. 따라서 서사학 어디에도 진실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늘 왜곡된 채 자기 이야기를 주절주절 토설하는 하여 반복의 한계만을 발견하는 부정적 징후가 바로 서사가 직면한 현재이다. 서사는 욕망의 언어로 표류하는 날 선 반어의 구성물이지, 진실을 압박하는 유려한 의식의 체제가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의 안쪽에 재차 매몰된 채 모든 차이를 희석시켜 삶―시간―세계 전체를 동일성으로 공명 시키게 된다. 반복이 멈추면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서사란 반복에 취한 채 또 다른 반복을 도발하는 욕망의 반복 그 자체, 즉 시냅스의 작용에 지나지 않다. 전류가 흐른다. 고로 우리 모두는 욕망의 존재이다.


2018년 3월 13일

심혼을 기투하지만, 수사학 어디에도 영혼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아니 가볍게 휘발되어 미적 형식만이 문제의 중심으로 남는다. 그저 서서학은 의미를 지정할 수 없는 곳에서 남아있는 예술가의 심혼을 형식에 응고시키는 그렇고 그런 값싼 감정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그렇게도 문학의 기호가 개별성을 넘어 보편적인 그 무엇인가를 육화 시킬 것이라는 가정 하에 미적 징후를 고찰하는가? 여전히 칸트의 『판단력비판』은 예술 일반이 가진 모든 태도에 확증적으로 유효한 그 무엇을 육화 시킨 미학적 실재인가?

그러나 수사학이라는 값싼 잔여물을 남겨놓은 채 의미의 체제 전체를 실족시킨다. 왜냐하면 칸트에 속했던 예술 일반은 겉 거죽으로 말하는 탈색된 기호의 창백한 징후일 뿐, 더는 의미내용의 진실에 다가가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의 기획은 위대한 혁명적 과정의 서사학인 동시에 혁명이 표현되는 최적의 장소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니 형식이라는 값싼 수사적 재료만이 의미의 진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이는 형식이 곧 시대정신을 표방하는 가장 완벽한 진리 내용인 까닭에 그러하다.

형식은 시대의 진실이다. 형식은 시대와 공명하며 의식화가 가능하지 않은 내용물 전체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의미내용 전체를 표류하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역사적 담론이다. 끊임없는 이해와 해석이 요구된다. 그러나 모든 것에 열려있다. 단지 연려진 채 표류하며 미결정적인 상태에 서사의 진실을 연루시켜 사태의 진상이 정확하게 의식되지 못한다. 그러나 형식만이 남아 시대를 오롯이 비추며 진실의 언저리를 추적하게 만든다.

물론 형식에 관한 일련의 체제가 클리셰나 매너리즘으로 굳어져 사회적 관성의 수용체로만 기능하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따라서 형식은 진실과 무관하게 길들여진 사고를 관용적으로 용납하는데 익숙해지게 된다. 형식이 시대를 담아내지 못한다. 형식의 노화가 가속됨은 물론 시대정신 전체를 왜곡하는 체제의 주구로 전락하게 된다. 숙명이 형식화된 채 익숙함에 길들여진다.

한때 형식은 시대의 정신과 힘을 표상했으나 지금은 낡고 늙어 체제에 순응하는 양식으로 전락하게 된다. 서사의 운명은 저와 같다. 마치 서사학 전체가 여우와 어린 왕자 사이에 매개된 담론의 조종술로 전복되어 익숙함이나 친숙함으로 흐지부지 종결되었듯이, 예술은 생경함과 익숙함 사이에 노정된 형식 기호의 향유가 만들어내는 진기한 풍경, 즉 향유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전복에의 의지이다. 미적 형식은 영원으로 향하는 일탈에의 의지이고 그에 따라 향유는 무한히 지연·연기된 채 끊임없는 이해와 해석에 노출된다.

따라서 관성의 노예가 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향락의 향유가 불가능함을 확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서사가 위치하게 된다. 말하자면 서사적 일탈은 형식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감각의 논리를 구축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의미의 새로운 논리가 생성되는 형식의 신기원이다. 클리셰의 저항이 아니라, 애초부터 형식은 관습화가 불가능한 곳에서 생성되는 존재의 물결이다. 물론 그것 역시 이내 친숙함에 노출되어 예술의 기호 일반을 클리셰로 추락시키겠지만, 어찌 그 숙명의 형식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번 흥하고 반드시 멸하는 저 거대한 수레바퀴에 승선해 운명의 예술과 마주하는 것으로 한 시대가 종료하게 된다.

숙명의 노래가 서사화된다. 아니 역으로 서사는 숙명을 진부한 매너리즘으로 묘파 하는 반복에 노출된 익숙함의 정도를 통해서 자신의 목적지에 완벽하게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바로 문학이 처한 존재론적 위치이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수사학으로 굳어지기를 거부한다. 이 만고불변의 진리가 서사학을 추동하는 미학적 원리인 한, 혹은 생경함과 친숙함 사이에서 서사학의 원리가 요동칠 때, 반드시 기입해야 할 미적 사명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를 유려하게 흐르는 저 공통감이라는 서사의 궁극적인 질료는 어떤 의미의 공식을 만족시키는 숙명의 기호인가?

낯선 듯 친숙하고, 익숙한듯하지만 가능한 모든 일탈이 허여 된 바로 그 지대에 순수한 서사의 역량이 존재하는 한, 더 나아가 클리셰를 거부하는 아방가르드의 전사만이 서사의 강도로 표현되는 한, 서사학은 의미내용에 관한 학이 아니라 순수한 형식의 제의로만 구성된 곡예의 기술이다. 나락으로의 추락 혹은 완벽한 미의 기대효과. 여전히 길 위에 있고 아직도 길을 가야 하는 서사학자에게 예술은 미완의 과제들이 고밀도 집적된 숙명의 장소이다. 그러나 낯선 형식의 불길한 풍경 속에 스스로를 투사시키지 못한다. 아니 서사학은 미처 의식하지도 못했던 순간에 모든 것이 값싼 의미내용으로 변질되는 친숙함의 감정적 구성체인데, 이는 개별성과 특수성이 세계와 상호 타협하는 병리학적인 존재의 징후이다.

진실이 탈구된다. 형식이 클리셰로 퇴보해 의미내용에 도달하지 못한다. 진실이 참혹하게 붕괴되거나 아니면 가능한 한 최대한 은폐해 향락을 향유하는 지연효과만을 노린다. 왜냐하면 서사학에 노정된 일련의 승화가 기실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최면효과이자, 진실 전체를 호도하는 기망의 전술일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표 한 서사학의 효용론이 카타르시스로 명명되는 한, 이는 지극히 주관화된 기만의 감정적 징후이지, 온전하게 자기에게 도달하는 진실의 완벽한 통로가 아니다. 서사의 본질은 결코 도구로 휘발되지 않는다.

따라서 서사학의 판단력은 형식에 있지 내용에 있지 않다. 마치 예술의 향기가 의미내용을 완벽하게 탈색시킨 이후에 남는 그 무엇으로 구성되듯이, 서사학이란 의미를 지시하거나 지정하지 못하는 곳에서 움트는, 탈구되거나 해체된 잔여를 지목하는 낯선 수사적 전략이다. 읽기에 매혹된다. 읽기를 지연시킨 채 의미내용으로 되돌아가 사유를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내용을 망각으로 이끈 채 읽기 그 자체, 즉 문체의 향기에 매혹된다. 따라서 서사학은 의식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단지 읽혀 판매 유통되는 소모의 방식, 즉 자본의 방식에 충실한 사도이다.


2018년 3월 14일

뼛속 깊이 썩어있었다. 더불어 피눈물을 흘리는 각고의 반성적 성찰을 필요로 한다. 진실이 왜곡된 지점 어딘가로 되돌아가 사태를 깊이 추구·성찰하지만, 생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그러나 삶이라고 명명되는 저 존재에의 지난했던 욕망이 선택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서사란 비극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진실에 도달하는 반어의 제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의 목적은 표류, 즉 탈중심을 향한 굴절과 부인과 반복과 부정 사이의 절대적 흐름이다. 그리 이때 절대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시간의 역량 전체를 지시한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 길이었을까? 과연 그/녀에게 놓인 숙명의 서사는 자기를 자기 아닌 것으로 만드는 탈구의 역동적 운동, 즉 피동의 주체를 통해 표현가능한가? 물론 여전히 그/녀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추락을 지연시키기를 희망하지만, 서사는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이나 진배없다. 혹한을 견디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 참혹한 서사학의 시련 혹은 결코 바뀌지 않는 세상. 정녕 서사학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영원히 되돌아가는 비정한 욕망의 공간인가?

그러나 여전히 생을 오롯이 선택하고 죽음을 기각하는 방법이 전무하다. 서사의 본성은 그와 같다. 오고 가는 정리가 서사학의 본질인 한,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反者道之動 弱子道之用, 즉 엄정한 자연의 원리이다. 초심을 잃었고, 또 교만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모차르트 <레퀴엠>을 아름답지만 비장하게 탄주 한다. 아주 잔혹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공명정대하다. 마치 파국으로 치닫는 일련의 사태들의 총합이 진실을 상면하는 궁극의 과정이듯이, 서사는 사실관계를 진실과 대면시키는 가열한 존재의 몸짓이다.

그러나 거기에 멈춘 채 자기 이해의 한계만을 확인하는 갈등의 불씨를 남겨놓는다. 낱낱이 진실을 들추어내기를 염원하지만, 진실의 당사자가 사라져 미궁에 휩싸이게 된다. 定理만이 남는다. 물론 情理를 整理하는 正理만이 서사의 진실 앞으로 우리를 데려가게 되겠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주름을 만드는 말의 定理일 뿐, 진실의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과연 그/녀들은 안나처럼 참된 사랑의 주체였을까?

아닐 것이다. 구차한 변명만을 늘어놓는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이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기 항변을 행하는 시대정신의 역행렬이었듯이, 진실은 시대의 이편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천년이 지난 이후에 추찰 되는 참혹한 거짓의 서사일지도 모른다. 호도되고 전도되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은 진실이고 거짓은 거짓이다. 세상이 알고 땅이 알고 하늘이 안다. 그러나 여전히 모두가 다 아는 진실의 정체가 무엇인지 서사는 결코 기록하지 못한다. 서사는 기록될 수 없는 것을 기록하는 반기록의 역사, 모든 것을 파열 해체시키는 삶의 반어이다. 구차한 변명만이 진실 앞에 놓인다.


2018년 3월 15일

강렬한 이끌림에 몸과 마음을 내맡긴다. 한 번 사랑하고 또 한 번 절망한다. 진창에 빠진 듯 혼효했다. 역사가 어디로 흘러내리는지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분열적인 논쟁이, 다른 한쪽엔 갈등을 조장하는 외설의 징후, 즉 돈, 욕망, 불륜 등등이 한데 어우러져 좀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정녕 서사의 본질이 그와 같은가? 과연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어떤 서사를 진실로 기록해야 하는가? 분명 서사는 기록의 문제인데, 서사학자는 어떤 하루를 기록하며 진실과 상면해야 하는가?

곤혹스럽고 난감했다. 서사학 전체가 사람에 관한 기록물인지라 좀체 그 모든 사태들을 객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서사학자에게 있어서 객관은 하나의 거대한 함정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서사란 객관화가 불가능한 곳에서 생성되는 존재의 난맥상을 펼쳐 보이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시선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주관의 역동성을 포획하되, 철저하게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라. 그러나 사실의 기록은 왜곡의 기록이다. 아니 서사학은 사실들을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왜곡을 들추어 재차 전복하는 마나적 주술로 경도되는데, 이는 영원히 객관화가 불가능한 신비화과정으로 권력관계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En에서 An으로의 비약은 신비화가 가능한 곳에서 생성된 마나적 주술의 일종인데, 그 사태는 모든 서사를 용인하는 강렬한 욕망의 기호에 의해 이끌린 흔적의 아름다운(?) 징표이다. 지극히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권력 위에 군림했고, 더불어 파열하고 해체되어 종국에는 신화적 에피파니를 최후의 그림자로 남겨놓게 된다. 그러나 추락했다. 그러나 추악한 욕망의 흔적만을 남겨놓아 그/녀들이 이룩한 미학적 혁명의 서사를 외설의 징후로 몰락시키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서사가 사드와 함께 마조흐를 경유해 바따이유에 도달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닌 한, En과 An의 일련의 사태는 에로티즘에 봉헌된 순결한 감각의 서사가 아니라,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한 아주 조야하게 날조된 조작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다.

천박했다. 낭만을 꿈꾸며 별과 하늘의 꿈을 노래하던 사랑의 시대는 얼마나 웅장했던가? 육체의 열락을 꿈꾼다. 그러나 그/녀는 리비도의 정치경제학 안쪽에서 완벽하게 붕괴돼 살아있으되 결코 산목숨이 아닌 채로 예술의 기호 전체를 탈구시킬 숙명에 처하게 된다. 물론 만년이라는 시간의 수인에 갇힐지 혹은 일 년 만에 사면 복권될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따라서 서사란 오늘 다르고 내일 사뭇 달라 좀체 그 향배를 정확하게 가를 수 없지만, 어찌 그것이 죽음을 만족시키는 최후의 만찬임을 모르겠는가?

En과 An의 최후의 몰락은 신생의 서사가 움터오는 새 시대의 서기 어린 전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새 시대의 상서로운 전조는 폐허라는 희생제의를 통해서만 열리는 피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마치 서사학이 추동되는 내적 연관관계가 피의 희생물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듯이, En과 An은 시대정신이 요구한 성평등의 완벽한 실현시키는 페미니즘의 신성한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구현하는 반대급부이다. 그/녀들의 몰락이 헛되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


2018년 3월 16일

어제 비가 내린 후 바람이 차졌다. 봄을 시샘하나 보다. 엄마를 못 본 아들 준우는 어제도 오늘도 떼를 쓰며 울었다. 이해란 무엇인가? 왜 아이는 이해하고 이해받으며 보다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는가? 결핍이 생산적이지 않은가? 결핍은 당장은 괴롭지만 더 나은 삶의 조건법을 구성하는 미래의 자산이 아닌가? 아들러가 말한 것처럼 결핍은 모든 성장의 동력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 지름길이 아닌가?

늘 바쁜 엄마의 결핍을 준우가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 물론 딸아이 지언이는 예쁘게 잘 자라고 있지만, 다리에 진물이 흘러 밤새 고통의 나날들을 보낸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는다. 물론 하나는 세상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다음엔 하나를 잃고 또 다른 하나를 얻어야겠다. 막막했던 시간이 흘러 어느덧 춘천에서의 생활도 햇수로 7년째이다. 많이 내려놓고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한 것은 순간의 폭발이다.

불같은 성정이 많이 누그러졌지만, 아직도 그 잔여가 남아 가끔씩 폭발하여 아이들에게 비교육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다. 이마저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인내하고 감내하며 좀 더 성숙해져야만 한다. 똘레랑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들을 받아주는 단 하나의 사람이고 싶다. 부모가 된다는 것. 지언이와 준우를 키운다는 것. 아이들은 어른의 참된 스승이다.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지언아! 아빠가 늘 미안하단다. 멋진 준우야! 잘 자라주어서 고맙단다. 오늘도 서사학자의 하루는 구름에 젖어 비가 내리지만, 바람은 불어 온 대지를 청명하게 만든다. 하루 종일 신선했다. 우울한 마음과 달리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매서웠지만 한결 부드럽고 상쾌했다. 가끔은 아이들이 떼를 쓰며 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때가 있다. 세상에 스승이 아닌 게 없다. 세상은 스승들의 천국이다.

이제야 겸손이, 사양지심이 인륜의 중심에 위치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인지를 알겠다. 평정에 이른다는 것. 외물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자신과 세계 사이에 틈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서사학자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동사 ‘쓰다’를 만족시키는 단 하나의 목적은 자기를 용서하고 자기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늘 자책했고, 회오의 감정으로 나는 나를 증오했다. 왜 그 많은 날들을 그렇게 살았을까? 지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다고 말하곤 했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부끄럽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정녕 산다는 것 앞에 더 나은 목적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삶 그 자체가 생의 최대 지분이다. 더 나은 것도 없고, 더 못한 것도 없다. 그저 산다. 그저 삶을 살아내는 그 목적만이 진실에 도달하는 서사의 완벽한 판본이다.

바람이 분다. 아직도 살아야 할 목적을 위해 존재를 궁구하는가? 究竟. 허무맹랑한 헛소리이다. 서사란 결코 구경되거나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현된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서사가 감당할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은 시공간을 잠시 점유했던 상황으로 되돌아가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데, 이는 구경이 아니라 재현이고 표현이다. 물론 어느 한순간도 표현의 문제로 되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없지만, 따라서 서사학의 목적지에 남아있는 단 하나의 미적 코드가 수사학인 또한 사실이지만, 어찌 그것이 진실을 초과한 최대 잉여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진실은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는 것이다. 물론 표현의 안쪽에 위치한 잉여의 산물들이 의미를 지시하지만, 혹은 진실이 표현의 안주름에 색인된 그/녀들 각각에 의해 전유된 상흔인 것 또한 사실이지만, 어찌 그 모든 사태가 서사학에 침전된 수사적 징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잉여를 생산하고 또 고갈시킨다. 말하자면 서사학이란 표현이 만들어낸 기대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곳에서 생성된 낯선 풍경, 즉 말이 곧 존재의 심연에 투사되는 감각의 의식화인데, 이는 상흔에 표백된 언어의 황홀한 풍경이다.


2018년 3월 17일

끝까지 비겁했다. 한쪽이 토설하고, 다른 한쪽은 발뺌한다. 동일한 것이 다르게 전유되고 또 이질성이 매개된다. 진실의 위치가 진실이 아닌 것에 의해 완벽하게 봉인된다. 정치경제학이 추악한 것은 그/녀들이 가닿는 목적지에 충족가능하지 않은 욕망의 공식을 대입시켜 향락의 산물을 완벽하게 독점 향유하는 흉악한 기획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안나에게 되돌아가 일체의 사랑을 순박하게 황폐시키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아니 비겁하게 참회의 글을 쓰느니, 죽음의 선택해 구차한 목숨을 스스로 거두는 비경에 도달하는 것이 생의 진실과 만나는 최선의 방식이다. 그러나 감히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발뺌을 하거나 초지일관 모르쇠로 일관하는 뻔뻔함을 연출한다. 물론 그것으로 면죄부가 결코 내려지지 않겠지만, 한때 한 나라를 통치했던 지도자들이 연이어 파렴치한으로 몰락하는 비극은 서사학 자체를 붕괴시킬 것이다.

분에 못 이겨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다. 물론 조금은 성급했고 안타까운 선택이라 생각되지만, 이는 자기 운명이 내어놓은 길로 되돌아가는 숙명의 수레바퀴에 승선하는 최선의 방식이다. 死卽生이고 生卽死라고 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부질없다. 한번 욕망하고 한번 좌절하다 끝내는 서사의 공식 전체를 저 무에 대입하는 것으로 결판이 나는 한, 무엇을 탓하고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그저 가뭇없이 사라져 하나의 별이 되기를 염원해 본다. 아니 인간학에 포획된 서사적 구성물 전체가 일장춘몽으로 귀결되는 한, 일련의 사태는 자기 환상에 고착된 욕망의 징후일 뿐이다. 끊어내야 했지만 쉽게 포기한다거나 정도에 들어서서 온전한 자기와 만나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서사학이란 자기 한계를 도전하는 의식의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고, 결코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서사는 불굴에의 의지가 표현되는 미지의 장소이자, 가능성과 가능성이 상호 대립하고 융합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존재의 여율인데, 이는 새로운 지평과 공명하는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선악을 넘어서 초월의 위치를 지향하지만, 항상 그 표현법은 선악의 한계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말하자면 서사의 한계가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일련의 구성법으로 추락하는 수사학인 한, 따라서 서사의 잠재적인 역량을 완벽하게 폭발시킬 수 있는 지점에 표현법이 존재하는 한, 서사학이란 알량하기 이를 데 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다.

그러나 감히 누가 저들의 야비함과 뻔뻔함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아니 서사학에 포획된 일련의 구성물이 생을 바라보는 시선점에 응고된 진실의 다양한 스펙트럼인 한, 그것은 진위파악이 불가능한 생 그 자체의 전언, 즉 시간의 향기이다. 그것이 구릴 수도 그윽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오류이라거나 잘못 살아낸 흔적이라고는 결코 확언할 수 없다. 따라서 시간의 선상 위를 질주하는 모든 서사는 주체이지, 객체가 아니다. 설령 그것이 외설과 탐욕에 의한 몰락의 징후를 표출하는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더라도, 서사학은 자신만의 진실과 공명하는 가열한 숙명의 목소리이다.


2018년 3월 18일

온통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다 보니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왔는지 몰랐다. 부지불식간에 계절은 또 그렇게 혹독했던 겨울을 몰아내고 초록 잎을 밀어 올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새 봄이 왔나. 꿈같이 시간이 흘러내린다. 독서와 글쓰기만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서사학자의 하루는 영원으로 나아가 유일한 출구전략인데, 이는 스스로를 유폐시킨 가혹한 시련의 완벽한 전형이다. 그러나 가끔 황홀경에 이르러 달콤한 환상을 맛보는 때도 있다. 그러나 진짜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 동사 ‘쓰다’를 통해서 환상의 세계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권태와 고통 속을 헤맨다. 아니 차라리 서사학자의 서사는 늘 권태와 씨름하는 황홀한 존재의 비경이다. 어찌 그와 같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생에 속한 모든 것들을 글과 맞바꾼 채 죽음이라는 공간에 도달하기를 염원하는가? 어쩌면 글쓰기의 모든 내용물들이 완벽하게 날조된 허구이거나 진실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거짓의 전언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말하기 위해 여기에 서있는가? 왜 그/녀는 자기에게서 출발해서 타자를 경유해 재차 자기를 지목하는 운명의 감옥 안에 갇히기를 자초하는가? 언제까지 써야 하나! 무엇을 써 자기만족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목적도 없고, 의미도 모른 채 그냥 동사 ‘쓰다’가 내어놓은 길을 따라 무작정 따라나선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외길 위를 내달린다. 물론 그 길은 늘 이중성 위에 작동하는 아주 친숙하지만 괴상한 숙명의 기호들로 가득 차 있어 늘 참혹한 곤경에 직면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돌이킬 수 없고, 되돌아가 새로운 서사가 쓰이기를 희망하지도 않는다. 아니 서사학이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巫病처럼 늘 가슴앓이를 하다 체념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진리와 상면하는 확고한 신념의 전언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도 없고, 새롭지 아니한 것도 없다. 말하자면 서사학은 원근법에 투사된 영매의 수사학인데, 이는 언어화가 가능하지 않은 곳에서 생성된 비개연적 사실이다.

낯선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의 작용만이 서사적이고 시적이다. 말하자면 21세기를 지배하는 서사학은 이미 일어났거나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의 서사가 아니라,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확신 속에 생성된, 그러나 왠지 낯설지만 친숙한, 더 나아가 이율배반을 충족시키는 미지의 기호들의 천국이다. 가능하지 않은 것도 없고 가능한 것도 없는 따라서 확정이 불가능한 곳에서 생성된 미지의 것들로 그 체계의 구성법을 새롭게 직조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화려한 수사학적 장치들로 인해 그 정체가 그리 명확하지 않은 채 은폐되어 있지만, 따라서 서사의 모든 역량을 탈은폐시키는 방법론적 전략 어디에도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것 또한 분명하지만 어찌 그것이 서사의 진실과 만나는 단 하나의 미학적 수단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서사학은 전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내던지면서 자기 긍정의 투사에 헌신하는 동시에 자신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이중의 역동적인 운동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동일한 것에 머물지 못하는 비동일성의 동일성으로 휘어진 죽음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왕설래 구설수에 오른다. 서사학자가 반문학을 획책했다는, 혹은 서사학 전체를 죽음으로 내몰아 문학 전체가 불가능의 체제로 기술했다는 사문난적으로 내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쓴다. 오늘도 쓰고 내일도 쓰고 모레도 쓰며, 영원을 써 제 낄 것이다. 문학의 혁명적 과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능을 기술하기 위해 영원히 쓰고 영원을 쓴다. 물론 영원이 고갈될 리 만무이지만, 따라서 수사학에 응고된 일련의 기획이 낯선 풍경을 연출하는 앎에의 의지들로 가득 차있지만, 역시 서사학은 모름의 진수에 개방된 숙명의 코드, 즉 앎에의 의지들로 중층결정된 반목의 묘법이다.

여전히 쓰실 것이 많으신가! 그렇다. 그대 아직도 써야 할 명분이 남아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늘 그날이 그날인 날들의 권태를 향유한다. 펜을 집어던진다. 펜을 꺾어 문학이 아무 쓸모가 없는 죽음의 공간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비굴해진다. 삐딱하게 곁눈질하며 징환에 빠진 채 또 하루를 골몰하며 빈 공간을 적요하게 응시한다. 어떻게 써야 할까? 반복이 너를 영원으로 데려갈 것이다. 저 반복을 견디는 고독의 심연만이 서사의 결정적인 주체인 듯하다.

오늘이 가고 내일이 와도 서사학자의 하루는 항상 이질성에 포획되기를, 차이를 생산하기를, 혁명적 수사학과 마주 서기를, 더 나아가 숙명의 미적 기호와 극적으로 조우하기를 기대해 본다.


2018년 3월 19일

피학과 가학 사이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심문한다. 동사 ‘쓰다’는 항상 이중적인데, 이는 차라리 고통을 기술하는 숭고이다. 눈이 감긴다. 피곤하다. 흐리멍덩하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무기력한 나를 발견한다. 황홀한 슬픔의 어디쯤에 혹은 반어적 태도로 초지일관하는 자기모순 속에 동사 ‘쓰다’를 고착시킨다.

봄비가 잦다. 어수선한 세상과 맞물려 아무래도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다시 읽는 것으로 서사학에 관한 모든 것을 재구성해야겠다. 거짓이 난무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중상모략을 일삼는다. 도대체 왜 저따위의 서사가 횡행하는가? 왜 서사는 언제나 탈구되어 그 목적을 흐리는 곳에서만 새로운 의미의 공식을 충족시키는가? 진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온 세상을 가짜뉴스로 도배한다.

각자 자신만의 신념의 체제에 응고된 진실만을 믿는다. 진실을 말하지만 전혀 그 실재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고착된다. 거짓의 창구. 惑世誣民. 계층 간의 갈등이 이미 노골적으로 표명되었으며 세대 간의 균열은 치명적이다. 환상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지만, 차라리 가짜들의 천국에 살기를 결정한다.

횡설수설 지껄인다. 칼리니스쿠가 말한 것처럼 모든 시대는 각자 자신의 고통만을 기록한 고난의 시대였단 말인가! 산다는 것은 희망을 기록하는 숭고한 이념의 구성물이 아닌 듯하다. 세대가 점점 더 각박해지고 갈등이 첨예화된다. 이데올로기는 이해利害의 주구로 전락해 당리당략에만 몰두하는 얄팍한 상술에 지나지 않다.


2018년 3월 20일

‘완전 끔찍해.’ 서사가 생존이라는 명제에만 매달린다. Terrible과 Horrible 사이를 맴돌다 희망의 끈을 놓은 채 최악을 선택한다. 한국의 정치경제학이 참담한 것은 그것이 생 그 자체를 위한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꿈과 희망을 차압시킨 채 앞만 보고 내달린다. 옆을 본다는 것은 더구나 뒤를 돌아다본다는 반성행위는 시대의 행렬에서 뒤처지는 자살 행위이지 미래를 위해 성찰하는 참된 자아의 구성법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왜 행복한 노동을 위한 조건법을 설계하지 않는가? 왜 한국의 정치경제학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편이 아니라, 사용자 편에서만 자본의 충족요율을 구성하는가? 자본 그 자체의 효율성을 최우선에 둔다. 물론 모두가 자본의 대열에 서서 큰 부자가 되기를 염원하지만, 부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환상의 실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21세기 서사를 지배하는 엄연한 실질적 주체인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꿈이 돈에 고착된다. 꿈은 자본화가 가능한 곳에서 생성되는 서사의 최대능력이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역전되고, 무능이 유능으로 전복된다. 말하자면 자본의 지표는 한계효용의 지수를 훨씬 초과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절대성인데, 그것은 서사 전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조작할 수 있는 완전에의 의지, 즉 꿈의 기록물이다. 차압된 꿈의 총량을 총체적인 구성법으로 재차 탈구시켜 전혀 의도치 않은 곳으로 그/녀의 삶―시간―세계를 위치시킨다.

말하자면 21세기의 서사는 자본에 의해 완벽하게 종속된 신세계를 열망하는데, 이는 자본의 욕망하는 주체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위치와 정확하게 대응되는 바로 그 지대에 서사적 기획물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욕망하고 향유한다. 가상을 즐겨라! 최대한 실재의 위치를 탈구시킨 채 의미의 조건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녀들은 노예다. 까닭은 자본의 서사는 의미의 체제 전체를 이미지의 구성법으로 전복하는 곳에서 생성된 향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첫째도 향유이고, 둘째도 물론 향유이다. 그리고 셋째 그 이상이 요구조건도 역시 향유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말하자면 21세기의 자본의 서사적 기획물들이 가혹한 것은 향락의 향유가 가능하지 않은 그 모든 것들을 서사의 구성법에서 완벽하게 배제시킨다는 점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꿈과 이상을 노래하던 시대, 즉 희망의 서사가 넘쳐나는 이상세계를 지향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의 표현법을 성취·만족시키지 않는 한 결코 추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서사학의 실물은 자본이다. 따라서 21세기의 서사학은 시간과 공간을 완벽하게 초월한 가상의 그 무엇으로 표현되거나 아니면 시간과 공간에 완벽하게 포획·종속된 완벽한 욕망의 실물 그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의 서사적 양태만이 자본화가 가능한 실물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이미지와 리비도의 경계면 사이를 맴돌며 여전히 서사는 향락의 적극적인 주체가 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문학의 죽음이 급박하게 진행 중이다. 우리는 어떤 미래의 서사를 준비해야 하는가?

하루 종일 날이 찌푸렸고, 바람이 내내 불었다. 봄은 그렇게 서서히 온 대지들을 푸르게 물들일 것이다. 노란 개나리 망울졌다.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봄내도 산수유 꽃망울 터져 세상을 노란 천국으로 만들 것이다.


2018년 3월 21일

뭔가 명치끝에 걸려 답답한 하루의 연속이다. 어떤 것을 놓쳤는가? 왜 서사학자의 하루하루는 늘 불만족으로 점철된 미완의 서사만을 길어 올리는가? 여전히 미진했고, 아직도 흡족하게 문학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내 서사 전체가 허위였던 때문인가? 아니면 서사학의 본질은 그와 같은 까닭에 그러한가? 아니 여백과 마주하는 저 무위의 나날들은 본성상 만족과 무관한 것들로 뒤 메워가는 시간의 상흔들이기 때문인가?

영원이 아닌, 무참히 쓰러져가는 권력적 주체의 위선들과 마주선다. 분명 서사란 숙명적으로 진실과 무관한 것들로 자신의 체제를 구축한 혐오의 세계일 게다. 나인 내가 나 아닌 나와 마주 세운다. 도대체 끊임없이 세우고 해체하는 저 관계의 항을 가득 채우는 반복의 내용물은 무엇인가? 원한일까? 사랑일까? 아니면 자기 부정의 한계일까? 모르겠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서사가 도달하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빈 지대가 남아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여전히 말은 진실에 도달했다거나 진리에 관한 모든 것들을 지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서사학이란 수사적인 장식이 만든 미적 효과이지, 진리를 기술할 수 있다거나 진실의 전모를 앎의 체제로 구축했다는 의미 내용을 반드시 함의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서사는 미궁에 미궁을 거듭하는 반전의 효과들이 만든 주이상스인데, 이는 서사학이 아직도 유효한 단 하나의 가치이다.

무엇을 바란다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거나 더 나아가 최고의 이념을 구축한다거나 하는 이데올로기의 조종술과는 무관한 곳에서 서사가 생성되는 한, 따라서 생활세계가 펼쳐내는 저 소멸의 공식과 친숙해지는 과정이 서사학을 구성하는 원리인 한, 주이상스는 서사를 지탱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목적물이다. 따라서 이념의 별과 꿈을 지향하던 시대의 서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21세기를 지배하는 지상의 명제가 환상의 언저리에서 생성된 향락의 향유를 자본의 기호로 펼쳐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명치끝이 아릿하다. 까닭은 카프카와 함께 안나의 서사를 병치시킬 수 없는 곳에 21세기의 서사학이 위치한 때문이다. 왜 그런가? 왜 21세기 서사학은 카프카의 요제프 K적인 동시에 안나의 외설의 지대를 거쳐 다시 그레고르 잠자의 골방으로 복귀하는 동시다발적인 다성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못하는가? 웅대한 기상과 숭고의 표현법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최대한 가볍고 말랑말랑한 내용물만이 서사의 재료로 참조된다.

이를테면 21세기의 서사학은 호킹의 예언(지구의 멸망)의 어디쯤에서 생성되는 환상의 공식이거나 AI(인공지능)이 만든 신세계를 자본의 기호로 포장하는 곳에서 생성된 단순한 오락물일 것이다. 물론 지구의 환경 재앙이 가속화되어 결국 인류가 멸망하는 참극이 가까운 미래에 연출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서사학은 진실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채 침몰의 주이상스를 탐닉하며 자신의 몰락을 부추기고 있을 뿐이다.

암울했고, 참담했으며, 더 나은 삶을 의욕 한다거나 새 시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답답하다. 명치끝이 먹먹하다. 하루하루를 어렵게 견딘다. 서사학자의 하루는 늘 인고의 세월을 견딘 영원한 감옥의 하루이다. 내일도 그와 같을 것이다. 모레도 역시…….


2018년 3월 22일

말의 파편들을 추적하다 동사 ‘쓰다’에 인생 전체가 먹혀버렸다. 답답했다. ‘쓰다’를 만족시킬 방법이 없다. 쓰디쓴 패배를 맛본다. 산수유는 날씨가 따스해질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만개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쓰다’가 여전히 게걸스럽게 나를 먹어 들어가 내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 좀체 깊은 잠에 이르지 못한다. 잠은 얕은 곳에 머물다 이내 의식을 깨워 영혼을 질곡의 상태에 머물게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동사 ‘쓰다’가 요구하는 인생의 목표, 즉 삶 전체를 탈구시키는 서사의 역량인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닷새 잠자고 싶다. 아니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깊은 잠에 머물러 생에 관한 모든 것들을 해체시켜 인간학 전체를 엇박자로 탄주하고 싶다. 도대체 동사 ‘쓰다’가 목적하는 인생의 최대가치는 무엇인가? 하루를 편안하게 쉬어본 적도 없다. 하루를 의식 속에서 지워 온전하게 향락을 향유했던 시간도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거개의 서사학자들이 동사 ‘쓰다’의 강박신경증환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니 때론 정신분열에 이르러 전전두엽의 어디쯤에 위치한 전자 운동 전체를 탈구시키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지만, 어찌 그것을 숙명 탓이라 한할 수 있겠는가?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단 한 번만이라도 동사 ‘쓰다’를 흡족하게 만족시켜 뮤즈와 만나고 싶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의 혼몽적인 사랑을 꿈꾸며 동사 ‘쓰다’의 감옥에 기꺼이 갇힌다. 시간이 사라졌고, 서사학자는 동사 ‘쓰다’에 완벽하게 잡아먹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말의 흔적만을 파편으로 남겨놓을 뿐이다. 저주받은 운명이 나를 서사학자로 만들어 동사 ‘쓰다’의 완벽한 노예로 만들었다. 저항하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하게 동사 ‘쓰다’의 먹이로 전락한 채 전혀 읽히지 않는 글들을 여백에 가득 채운다. 누가 나를 읽어줄 것인가? 물론 읽히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과연 누구를 위해 썼고, 어떠한 목적을 위해 쓰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모른다. 그저 단지 동사 ‘쓰다’의 임무를 충실하게 할 뿐, 혹은 완벽하게 ‘쓰다’에 매혹된 것처럼 포장해 생에의 시간 전부를 낭비하고 있을 뿐, 그것이 어디에 당도할지 전혀 모른다. 아니 동사 ‘쓰다’에 충실한 삶은 자기만족적 충족요율이 극대화된 역설적인 불만의 어디쯤에서 생성된 반어적 행위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동사 ‘쓰다’에 하루를 잡아먹혔다. 완벽하게 잡아먹혀 더 이상 쓸 수 없는 그날까지 朝聞道夕死可矣를 외우며 동사 ‘쓰다’를 고갈시킬 것이다. 더 이상 쓸 수 없고, 더는 쓸 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 싶다. 물론 시간은 여전히 동사 ‘쓰다’ 편을 들어 세상에 존재하는 서사학자 전부를 완벽하게 기롱하겠지만, 혹은 서사학에 표현된 일련의 신념들이 한낱 허구로 추락해 쓸모없는 잡설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어찌 그것을 간하고 탓하며 동사 ‘쓰다’를 원망하겠는가?

글과 함께 더불어 동사 ‘쓰다’와 놀았던 시간 역시 생을 향유하는 환락이었다고 고백했으면 좋겠다. 설령 그것이 고통이었고, 강박신경증에 시달려 제대로 된 잠 한번 자본적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찌 동사 ‘쓰다’에 응고된 삶―시간―세계를 저주의 구성물로 가득 채울 수 있겠는가? 나는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서술했고, 나와 함께 더불어 동사 ‘쓰다’에 스스로 운명을 가둔 카프카의 후예이다. 그는 일찍 죽고 나는 장수해 영원히 쓴다. 그와 나 사이에 매개된 서사학의 본질적인 차이는 단지 그것뿐이다.

그는 서사학 그 자체이고, 나는 그 서사의 서사를 뒤돌아보는 서사학, 즉 서사학자이다. 운명은 같고, 동사 ‘쓰다’를 만족시키는 부피와 질량만 다르다. 한쪽은 비극을 택했고, 다른 한쪽은 그 비극을 관찰하고 조망해 서사학의 가능조건을 탐색한다. 물론 둘 사이의 거리는 무한대이자, 고밀도로 압축 굴절돼 제로상태이다. 마치 서사학 전체가 반어와 역설과 타자의 운명에 침전된 그 무엇을 동사 ‘쓰다’에 응고시킨 알레고리적 현실이듯이, 서사학자에게 하루는 쓸 수 있는 것의 최대 용량이자, 쓰기가 허락된 전부, 즉 진리의 전체이다.

하루를 영원처럼 살고, 영원의 하루를 쓴다. 물론 동사 ‘쓰다’에 기투된 하루가 대부분 무의미하게 낭비되었을 개연성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어찌 그 낭비를 두려워하겠는가? 아니다. 서사학자에게 동사 ‘쓰다’에 투자된 일련의 정치경제학적인 소모는 가히 천문학적인 비용인데, 이는 invaluable과 in-valuable(worthless) 사이의 거리만큼 크다. 하루는 전자였다 다음날은 후자로 급전직하 추락을 밥 먹듯이 했다. 히스테리환자처럼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동사 ‘쓰다’에 잡아먹히기를 자초하면서 서사학자는 자신만의 말의 축조법을 수사적 장치로 구축하고 있다. 여전히 어떻게 써야할지를 골몰하며 내일로 자연스레 미끄러진다.

미래의 어느 날 동사 ‘쓰다’에 굴복한 채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선언하는 그날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쓸 것이다. 가서 뮤즈에게 서사학자의 하루는 늘 동사 ‘쓰다’와 더불어 울고 웃고 부대끼며 여기에 이르렀노라고 말할 것이다. 그땐 완벽하게 쓰기에서 놓여날 것이다. 그날이 오지 않고 영원히 동사 ‘쓰다’의 노예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어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일 수 있겠는가? 달도 차면 기울 듯, 언제나 나도 한 마디의 묘비명을 남길 것이다.


2018년 3월 23일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아니 시간이 부족하거나 능력의 한계 바깥에 쓰기의 목적지가 존재할지 모른다고 잠시 회의에 이른다. 참 아는 게 없다. 많은 시간 공부했고, 아직도 공부하고 있으며, 여전히 수많은 책들 앞에서 머뭇거리지만, 앎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무기력한지 내 이제야 알 것만도 같다.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리라. 더불어 무엇을 써야 할지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다. 당면한 하루와 맞선다. 그냥 쓴다. 그냥저냥 동사 ‘쓰다’의 노예로 전락한 채 무의 공간을 배회하는 무량한 감성의 주체로 몰락하기를 자초하자. 눈 뜬 봉사가 된다. 미지의 목소리에 붙들린다. 받아 적는다. 탈혼망아의 상태에 이른 샤먼처럼 귀전을 맴도는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함께 생에 속한 모든 것들을 공평하게 서술한다.

서사학자에게 문학의 공간이란 무량하기 이를 데 없는 허무의 공간인지도 모른다. 과연 허무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가? 메우면 메울수록 더욱더 큰 공허가 밀어닥쳐 절대고독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문학의 사명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말을 할수록 허기지고 의미의 구동하면 할수록 의미의 진공 상태에 이르는 저 공간의 작용은 과연 어떤 의미를 충족시키는가?

오늘도 그/녀에게 다가가 서사학에 관한 가능적 근거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과연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과연 말의 양력과 부력 사이를 어떤 의미의 체제로 건널 때, 참된 서사학을 구축한 것인가? 물론 서사에 관한 일련의 담론을 구축하는 방법이나 의미의 체계를 찾아 오늘의 전부를 투자하는 무모한 행위를 초지일관 밀어붙인다. 말하자면 동사 ‘쓰다’는 진리의 가능적 조건들을 탐색하는 작업이 아니라, 너 또는 나에게서 생성된 일상들을 의미의 공식으로 추동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서사학에 노정된 시간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서사학의 본질이 완벽하게 드러났다고는 확언할 수 없다. 아니 서사학이 드러내는 그 모든 전모가 설령 시간의 구동법에 의해 그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 그것만이 진실의 구성법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동사 ‘쓰다’에 포획된 채 너 또는 나에게 포획된 일련의 서사를 진실과 맞세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실의 온전한 정체가 완벽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서사학자의 하루하루는 그 모든 서사적 표현의 양태를 통해서 진실의 문턱을 넘어서기를 염원하고 있다.

물론 문턱을 넘어설 수도 없고, 설령 넘어섰다한들 매양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수렴하는 저 숙명의 기호이겠지만, 따라서 서사란 반복으로 재귀하는 욕망의 공식을 영원에 맞닿게 만드는 시간의 역설적인 운동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찌 그것이 깨달음의 결정적인 단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서사학자에게 하루는 의미의 공식을 온전하게 충족시키는 알레고리의 총합이다. 파열하여 뜯겨 나가 만신창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일각 같은 단 한 하루를 통해서 진리와 그것에 포획된 의미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 보일 수도 있는 광활한 서사의 완벽한 무대이기도 하다.

이제 단 하루도 낭비하거나 허비해 잃기 싫다. 이제 단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불안해 못 견디겠다. 제이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단 하루를 고밀도 압축 굴절시켜 방대한 서사를 구축했던 것처럼, 서사학자의 하루는 동사 ‘쓰다’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서사의 공간이다.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율리시즈』는 영원히 읽히지 않는다. 하루는 영원이다.


2018년 3월 24일

하루에도 종잡을 수 없이 시시각각 변화에 노출된다.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이 흔들린다. 나는 나를 알 수 없고, 나는 ‘나’라는 함정에 갇힌다. 자기가 만든 문학이라는 구덩이에 빠져 평생을 허비했다. 문학일기를 쓰는 오늘도 역시 나를 완벽하게 놓쳤는지도 모른다. 나를 온전하게 잃고 너를 완벽하게 얻어 이 세계의 진실을 규명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너를 잃고 나 또한 놓쳤다. 문학은 그와 같다. 문학에 노정된 서사란 늘 그와 같은 방식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동사 ‘쓰다’를 충족시키는 요율, 즉 실패를 자인하는 존재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잃지 않기 위해 쓰지만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으며, 글을 쓰는 현재도 여전히 너무 많은 것 가운데 하나만이 선택되고 대부분의 서사를 완벽하게 망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란 하나를 얻고 모든 것을 잃은 자란 말인가! 그렇다. 하나를 얻기 위해 생의 대부분을 어처구니없이 잃다니! 무모하지 않은가? 하나에 시선점을 고정시킨다. 특별하지만 그리 별나거나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엔가 빠져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다본다.

영매처럼 탈혼망아脫魂忘我의 상태에 이른다. 나를 잃고 대신에 타자를 얻는 영매가 된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말을 하는 타자의 진실에 매혹된다. 왜냐하면 서사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과의 관계가 만들어가는 다양한 차이들의 구성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나를 말할 수 없는 곳에 위치시킨 채 나를 변명해야만 하는 낯선 장소로 떠밀려가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서사학이 표현되는 수사적 장치이다. 물론 여전히 표면상 나는 인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타자의 얼굴을 통해 나를 찾아 떠난다. 내 안에 없는 나를 타자의 안쪽에서 발견한다. 왜 그런가? 왜 서사는 늘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진화해 타자가 곧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임을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가? 어쩌면 자기란 타자성에 포획된 존재의 민낯, 즉 자기를 우회하는 영원한 존재의 통로인지도 모른다. 타자의 접근법이 허락되는 무수히 많은 서사를 쓰고 또 지우는 반복을 통해서 나는 나를 알 수 있고, 또 영원한 진리 앞에 다가가게 된다. 시간의 저 끝에 다다른다. 타자와 더불어 죽음의 언저리에 닿는다. 물론 그것 역시 자기에게 도달하는, 하여 온전하게 자기를 만날 수 있는 우회로이지만, 그 또한 동사 ‘쓰다’가 내어놓은 서사의 잠재적인 역량, 즉 진실과 공명하는 총체적인 존재의 창구이다.

오늘도 ‘나’라는 진실을 찾아 타자를 찾아 나선다. 타자의 타자가 결국 나의 온전한 정체, 즉 자기란 말인가? 서사학자에게 문체가 자기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진실에 다가는 척도인 반면, 타자는 자기 인격을 구성하는 존재의 민낯이다. 도대체 어떻게 쓰고 어떠한 말의 구성법을 통해서 진실한 나와 마주설 수 있는가? 오늘도 무연히 빈 공간을 바라다본다. 나는 나를 폐허로 인도한다. 감히 저 무에 가까운 문학의 공간을 타자와 무던히도 상면하며 충만하게 자기를 채울 수 있을까? 빈 지대에 도달한다.

황홀한 듯 황량해진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해 어쩌면 신기원에 당도해 서사학 전체를 괴멸시키거나 새로운 구성법을 통해서 완벽하게 신세계에 당도해 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감히 묻지 않았어야 했고, 자기를 찾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의 산책자로 남아 황량하게 시간의 안쪽에서 소거되는 숙명만을 응시했어야 했다. 단 하나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알 수 없고, 말할 수도 없었으며, 무량하게 시간의 벽 앞에 선 채 이대로 무념무상무취로 사라져 갈 뿐이다. 시간의 저쪽 끝에 물리력만 외따로이 남는다.


2018년 3월 25일

‘다시’를 선택했다. 다시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올라 타라 농장의 어디쯤에 레트도 애슐리도 아닌 또 다른 사랑의 서사를 공명 시킬지도 모른다. 한 때 아름다웠던, 그러나 강렬한 이끌림에 의해 사랑의 공식 전체를 탈구시켰던 시간으로 되돌아가 자기 연민에 결코 빠져서는 안 되리라. 다시 내일의 태양이 떠올라 시간의 서사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스칼렛 오하라의 매혹적인 듯 강렬한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며 반복의 욕구를 ‘다시’에 응고시킨 채, 단언컨대 의미의 질량이 전혀 다른 욕망의 서사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 한들 뭔가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말만 아름다울 뿐, 저 수사학이라고 명명된 화려한 수식에 현혹되어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워질 뿐, 정작 서사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미망에 가닿게 된다. 왜 우리는 시간이 다 지난 뒤에야 비로소 참회의 글을 쓰며 스스로를 자책해야 할까? 따라서 서사학이란 에피그램화된 공리, 즉 단 한 문장에 표명된 수사학적 장치이지, 결코 웅장하게 펼쳐지는 거대담론의 전시 기획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아주 작은 것에 시선이 고정된다. 차라리 서사란 거대담론에 포획된 이념의 운동이 아님을 선언해야 할 듯하다. 까닭은 더 이상 자본의 가치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를 서사의 중심에 위치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의식의 눈을 섬세하게 벼려 서사화가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수사학적 장치로 포월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미래의 서사학이 존재할지 모른다. 물론 이 역시 하나의 가정일 뿐, 서사의 미래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저기 한 마리의 까마귀가 있다. 어떤 이는 그를 일러 선지자라고 호명하고, 또 다른 이는 파락호라 이른다. 갈등이 시작된다. 물론 그 갈등으로 인해 파국에 당도해 진실의 언저리 어디쯤에 당도하겠지만, 그 까마귀가 과연 선지자인지 파락호인지 또는 시대의 괴물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사란 죽음에 이른 까마귀를 부활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학이 미래의 학이 아니라 늘 과거의 주변을 헤매다 진실을 탐색했다고 착각하는 것으로 자기 미래를 암시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그리 생산적인 방식이 아니지만 동사 ‘쓰다’를 만족시킬 방법이 그것 이외는 없다.

하여 조작이 난무하는 저 허위의 행태를 그만둘 방법이 없다. 수수방관한다. 아니 서사학자에게 숙명은 서사의 그것처럼 자기기만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인가가 그를 옥죄고 있겠기 때문이다. 아Q처럼 착각하고 진실을 호도한다. 설령 그것이 원한에 사무친 저주받은 삶의 형식일지라도 기꺼이 그 천형을 감내하며 기꺼이 스스로를 사지로 몰고 가기를 자초한다. 따라서 서사는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궁지로 몰아가는 시대의 운동이다. 아마 그/녀는 서사학, 운명의 서사에 이끌려 평생 후회의 시간을 살아낼 것이다. 길은 외길일수록, 앞길이 막막할수록 좋다.

시간 너머로 내달린다. 그러나 길이 없다. 아니 서사학이란 감히 일개 범인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의 질량이 총체적으로 녹아내린 이 세계의 표정이다. 길을 잃고 배회하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앞으로 갈 수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다. 그저 수고로운 고행을 감내한 채 고도처럼 무작정 기다린다. 시간이 사라지고 죽음에 이른다.

감히 그와 같은 곡진한 태도로 여백과 마주 선 채 평생의 시간을 허비할 수 있을까? 고석규의 『여백의 존재성』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문학의 공간 어디쯤에 투사시켜 완벽한 죽음에 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참된 아름다움의 서사적 전형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그가 지향했던 꿈과 생을 서로 맞바꾸었던 그 진지한 태도만은 고평의 대상임을 인정해야 할 듯하다.

한 사람이 죽고 또 다른 한 사람이 들어온다. 그게 서사이고 문학의 공간이다. 이제 막 새로운 서사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의미의 질량과 마주 선 문체의 수사학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고 구조를 만들어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내일의 태양은 내일의 문제이지 결코 지난한 하루, 즉 오늘의 문제일 수는 없다. 내일의 논점을 선취해 오늘과 상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서사의 역량이다.


2018년 3월 26일

참으로 외물에 자주 흔들린다. 산만하고 집중하지 못했으며, 늘 신경이 곤두서 날카롭게 반응하곤 했다. 무덤덤하게 넘어가지 못했다. 시간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려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 때론 시간이라는 더께와 공모해 참혹한 풍경을 숭고미로 위장하게 될 경우가 있겠지만, 어찌 그것의 시간의 본질일 수 있겠는가? 불연속이 서사를 지배하고 또 생의 모든 의미를 연속적으로 기술하는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기만의 서사에 농락당한 타자의 운명이다. 그러나 역시 흔들림의 와중으로 들어가 소용돌이치는 아슬아슬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

강렬함에 이끌린다. 일탈을 만족시킨다. 물론 이를 통해 서사학의 전모가 아름다운 비전과 무관한 욕망의 사실을 밀접하게 공모해 있음을 직감하겠지만, 어찌 그것을 비난하거나 탓할 수만 있겠는가? 전복을 노래하는 낯선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 환상의 충족요율을 만족시킨다. 이를테면 모든 서사는 환상에 반응하는 자기만족의 구성능력인데, 이미 선악을 넘어선 지대에서 생성된 미지의 기호에 반응하는 순간의 감응이다. 좋은 것은 나쁜 것으로 나쁜 것은 유쾌한 것으로 늘 코드가 변환되어 전복이라는 강렬한 수사학적 전략을 완성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칸트적인 의미의 쾌·불쾌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서사학은 자기에게서 뜯겨 나와 자기에게로 되돌아가는 과정의 산물들을 강렬한 낯섦으로 기술하는 수사학인데, 그렇지만 문제는 그 수사학적 장치가 전혀 상호주관적이지 않은 데서 오는 파열음이 분란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서사란 자기만족의 구성법이 타자에게 전가되는 순간에 발생하는 파열의 음성이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어찌 그대가 내 운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서사학이란 여전히 갈등의 설계능력, 즉 ‘풀었다 옥죄었다’를 적절하게 반복하는 수사학적 장치와 맞물려 너 또는 나를 환상의 어디쯤으로 데려가겠지만, 어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 강렬한 욕망의 기호들이 탐욕으로 변질된 순간, 모든 선순환이 악순환으로 형질전환되어 급전직하 추락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물론 실물의 정치경제학과 서사학 사이에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따라서 삶의 영역에 속한 모든 것들을 미학적 수사학으로 고양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어찌 양자 모두가 강렬함에 이끌린 일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쪽은 진실을 문제 삼고 다른 쪽은 진실과 무관한 삶 그 자체의 온전한 의미에 집중한다. 말하자면 서사학은 세계와 공명하며 끊임없이 삶의 문제로 되돌아가지만, 늘 진실의 함정에 빠져 삶을 놓치는 비극적 결말에 도달하는 일종의 해프닝이다. 진실은 너에게도 없고, 나에게도 없다. 진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이다. 진실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 즉 생에의 형식이 빠진 함정의 어디쯤에서 생성된 미적 기대효과이다. 만약 그 효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서사학 자체가 존립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수사학적인 존재의 감각에 몰입한다. 이를테면 공통감이라고 호명되는 어떤 상태를 진실의 장소로 지목한 순간, 너 또는 나를 동일한 미학의 지대로 이끌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진실이고, 진실이 공명하는 서사의 절대 장소이다. 그러나 그것의 실재는 어디에도 없다. 아니 서사학의 가능적 근거를 현실적으로 제공하는 공통감은 환상처럼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지극히 개인화된 취미판단에 부응하는 사적인 취향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할 듯하다.


2018년 3월 27일

요 며칠 새 미세먼지로 온 세상이 희뿌옇다. 운명의 서사처럼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도 모레 흐려 서사학 그 자체를 불능으로 만들 것이다. 실물이 점점 흔적으로만 남은 시대의 이념은 과연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혼돈에 혼돈을 거듭해 막장 서사를 연출하는 것으로 시대의 이념을 봉쇄시킨다. 분명 서사학의 가능 조건을 묻는 것이 아니라, 몰락의 징조를 탐색하는 것으로 한 시대를 완벽하게 봉인하도록 하자.

서사학의 몰락이라는 관점을 새롭게 개진할 필요는 없다. 이미 21세기는 이미지적인 환상에 의해 구성된 독점 자본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날것의 서사학 위에 이미지를 덧씌우고 또 환상을 가미시켜 본질을 흐린다. 말하자면 21세기를 이끄는 서사학의 본질은 말의 수사학이 아니라, 이미지의 수사학적 장치를 환상으로 겹쳐놓는 곳에서 생성된 낯선 풍경들의 향유이다. 물리력이 폐기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미지의 수사학에 응고된 환상의 서사는 저 불확정성의 원리를 철저하게 수용해 의미의 실재를 폐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21세기 서사학이 구축해야할 지상의 명제이다.

삐거덕거리며 서사가 굴러간다. 철저하게 계산된, 그러나 자본의 이념에 봉사하도록 길들여진 그 무엇만이 서사의 대상으로 용인된다. 유혹의 기호를 마구 양산한다. 까닭은 서사란 자본의 참조 목록이지, 자본의 이념을 선도하는 의미의 절대적인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는 시대와 공명하는 숭고한 이념의 여율이 아니라, 이념을 파편으로 전유하는 자본의 주구일 뿐이다. 이미지와 함께 환상의 언저리를 마구 배회하며 자본의 이념을 리좀처럼 증식시켜 가짜를 진실인양 호도한다.

시대를 완료시킨다. 아니 역으로 시대와 거의 상면하기를 거부한 채 이미지와 환상이 아닌 날것의 서사학을 재건한다. 멋지지 아니한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그곳에 서사학을 정립할 수 있다면, 혹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일련의 서사를 뉴튼 이전의 세기로 되돌릴 수 있다면, 서사학은 자신의 임무를 다한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서사학자에게 하루란 되돌릴 수 없는 꿈과 상면하는 황홀한 의식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날것만이 남는다.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이상을 꿈꾸던 시대로 기꺼이 되돌아간다. 유아기적 퇴행 혹은 성장의 멈춤. 서사학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시대이데올로기와 무관한 미지의 기호를 육화시켜 전혀 낯선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겠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28일

날이 쉬이 쾌청해지지 않고 글쓰기는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고 있다. 쓰면 쓸수록 난숙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글이 글을 게걸스럽게 먹어 들어가 점점 모순의 지대에 당도하는 듯하다. 여기서 멈출까 더 나아가볼까? 낭패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진다. 분명 서사학자에게 글이란 단순하게 서사의 문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를 운용하는 다양한 필법에 응고된 미적 효과인 듯하다. 나 왜 아름다운 말의 구성법의 완전한 운용의 묘를 못 살리는가?

어제는 모순과 불일치의 하루였다. 아름답지 않았던 어제를 탈구시켜 완벽하게 삭제시키고 싶다. 그러나 그냥 놔둔다. 아니 어제는 어제가 만들어낸 그제의 한계상황의 연속이었는데, 아마 그것이 서사학의 본질인 듯하다. 그냥 내버려 둔 채, 그것이 모순과 불협화음으로 공명하는 방식으로 서사와 마주 서게 만든다.

그러나 글쓰기가 괴로운 것은 그것이 쉽게 문제를 간파한다거나 진실과 공명했지만, 쉽게 표현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역시 서사학의 진수는 표현이라는 저 수사학적 장치에 현혹되어 진실의 행간을 마구 착종시키는데서 오는 낯선 진기함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마법 같은 표현의 선경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도 어제나 그제처럼 말의 길을 잃고 헤맨다.

찾아지지 않는 나를 찾아서, 혹은 전무후무한 존재의 길을 열기 위해, 더 나아가 말이 곧 진실을 지시하는 황홀경에 이르기 위해 서사의 파편들을 주워 모은다. 물론 서사학이 펼쳐내는 일련의 행위가 조각난 퍼즐들을 정갈하게 꿰맞추는 지난한 행위의 연속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따라서 퍼즐은 탈구된 채 영원히 맞춰지지 않는 숙명의 어느 지점을 지시하는 것으로 종결되지만, 어찌 그 모든 일련의 제의가 서사학을 재건하기 위한 영원의 운동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오늘이 가고 나면 나는 영원의 자리로 성큼 다가가게 될 것이다. 찾아지지 않는 나를 나 아닌 나로 만들기 위해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해 본다. 늘 똑같은 자리에 서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탈구시키기란 이미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서사는 쳇바퀴를 굴리는 그 순간에 떠오르는 일탈에의 욕구이자, 그것을 숭고한 형식으로 고양시킨 숙명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에 자신도 모르게 할 [喝]이라고 외친다. 동일성이 비동일성으로 되돌아가 동일한 자기를 위치시킨다. 어제와 그제의 내가 오늘은 전혀 다른 나로 전복된다. 물론 내일이나 모레 다시 어제의 나로 되돌아가 부대끼고 울고 웃는 반복의 애매한 위치로 되돌아가겠지만, 어찌 그 모든 행위의 공식이 차이와 반복에 얽매인 동일성이 아니라고 단언하겠는가? 오늘도 서사학자의 하루는 콩 볶는 하루였다.

마음의 빗장을 단단하게 옥좨도 문제가 터져 나오고, 느슨하게 개방해도 역시 문제가 발생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서사학자의 하루는 쉼 없는 매진의 연속이다.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하루하루를 뒤 메워가다가 불현듯 모든 하루 속에서 뭔가 진리의 공식을 깨달아갈지 감히 누가 알겠는가? 서사학은 속단의 학이 아니다. 서사학은 하루를 진중하게 섬기는 예의 학이자, 스스로를 愼獨하는 身讀의 숭고한 전언이다.

만약 서사학에 속한 모든 것이 그와 같지 않다면, 이는 거짓이고 기만이다. 문득 할이라고 외치며 존재의 비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게 일상이 달라지지 않겠지만, 따라서 서사학이라고 명명되는 그 모든 기호가 동일한 것으로 되돌아가는 과정 속에 부침을 경험하는 깨달음의 산물인 것 또한 사실이지만, 저 거대한 서사가 웅비하는 모든 전조가 바로 하루를 기록하는 치열한 순간으로 닫혀 있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감히 누가 서사학을 하루의 학이 아니라 속단할 수 있겠는가? 하루를 섬겨 만리성을 쌓는다. Slow but steady wins the race. 우공이산. 진리는 너무 먼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으로 하루를 기록하자. 오늘도 서사학자의 하루는 맑았다 흐렸다를 반복했다. 좀체 어디에다 포커스를 맞추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냥 喝 [할]하고 외쳐본다.

2018년 3월 29일

세속의 성자가 된 사제의 하루를 잠시 생각해 본다. 김치찌개 3000원, 라면사리 1000원이라 적힌 ‘문간’의 메뉴판 어디쯤에 시선이 고정된다. 물론 이는 서울 성북구 정릉시장 안에 있는 작은 식당에 대한 인터넷 기사이다. 흐린 세계의 시계와 달리 삶의 공간 어디쯤은 아직도 사랑과 공명하며 작은 실천들이 행해진다는 사실에 가슴이 훈훈해진다. 아주 잠깐 황홀해졌다. 아주 잠시나마 그로 인해 이 세계가 아름다운 여율이 펼쳐지는 상생의 공간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진다.

중세시대의 이기심은 탐욕이고, 근대시장경제의 이기심은 행복과 번영, 즉 부를 구성하는 유일한 원천인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 모든 악화는 진실이 아닌 거짓의 서사를 구축하는 최첨단의 양화이다. 따라서 체제는 양화를 빙자한 악화의 역설적인 최악의 징후이다. 마치 자본의 서사가 이기심이라는 경제행위를 정당화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반어적인 사실이듯이, 비능률과 불합리를 개선하는 합리적인 경제행위로 둔갑시키는 이기적 목적은 이성의 반어적 사실이다. 탐욕에 가까운 욕망하는 의식이 행복과 번영을 구성하는 시장경제의 자유의 원리로 고착되는 한, 이 세계의 모든 자본은 착취가 만연해있는 탐욕의 완벽한 장소라고 지목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은 듯하다.

그러나 감히 대결하지도 정의의 칼날을 벼리지도 못한다. 그저 무기력하게 골방에 갇힌 채 굶주려 죽어가거나 혁신적인 서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확인만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현실에 갇혀 징환을 향유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찌 21세기에 혁명을 구조화하고, 파격적인 혁신을 도모하겠는가? 그저 서사란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내버려 둘 때 파생되는 변이형, 즉 탈구된 DNA효과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상수인데, 그것이 바로 불변하는 서사의 원리이다. 한쪽에선 아와 비아의 투쟁이, 다른 한쪽에선 상호 소통의 이타적 행위가 모순의 체제를 구성한다.

말하자면 서사란 상호 모순을 구조화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문체의 마법인데, 이는 단순하게 표현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서사학자에게 문체란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에서 생성되는 그 무엇이자, 언어의 한계지평을 초과하는 심혼의 울림이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를 온전하게 지목하거나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문체의 향기란 의미가 탈색되거나 표백된 이후에도 남아있는 미적 체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사는 단순하게 의미내용을 지시하는 것으로 완료되지 않는다.

마치 정릉의 식당 ‘문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체향이 인륜적 사랑과 평화라는 소명의식을 노예의 도덕이 아닌 주인의 도덕으로 육화 시켰던 것처럼, 문체란 서사를 절대적 주체로 고양시키는 개인화된 능력이자, 그 능력의 임계점에서 발화되는 미지의 향기이다.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도대체 그 향기의 정체가 무엇이지? 왜 그/녀의 서사는 영원히 읽기를 반복하지?

제아무리 위대해도 읽히지 않는 서사는 문체의 향기가 완전히 고갈된 따라서 그 의미내용과 무관하게 폐기 처분되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문체는 단순하게 의미 내용을 전달하는 수사학적 장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내용 전체에 투사된 의미의 가능조건이라고 명명해야 할 듯하다. 어쩌면 헤겔이 틀리고 칸트가 정확하게 미학의 사명을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예술사 전반에 투사된 미적 향기는 동일한 의미 내용을 어떻게 표현해내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서사의 체향을 풍기기 때문이다.

거대기업의 체향의 추악함은 결코 아주 작은 식당 문간의 아름다운 체향을 넘어설 수 없다. 마치 서사의 구동법 전체가 작가 특유의 문체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과연 어떤 인간학적 체취를 이 세계에 흩뿌리며 한 세계를 건너갈까. 서사학자의 서사는 진실을 압박해 자신만의 고유한 체향을 언어 속에 각인시킬 수 있을까.


2018년 3월 30일

콩 심은 데 팥 나지 않고 콩 나듯, 그렇게 동일한 반복을 살아가다가 아주 우연한 계기가 마련해 준 돌연변이가 사태를 폭발시켜 서사의 꿈을 화려하게 꽃 피우게 된다. 생은 그와 같다. 그러나 그 역시 아주 잠깐 황홀하게 한 시대를 강렬하게 달구다 이내 식어버린다. 그래. 강렬하게 한때를 살아낸 것만으로도 그/녀의 서사는 삶의 충족요율의 구비했고 또 수지타산이 맞았다고 평가했어야 했다.

결코 애련에 들지 않을 것이다. 결코 자기와 맞섰던 저 무수한 시간들을 후회와 번민이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때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내린다. 분노가 폭포수를 이루어 온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흘러 한때의 아름다운 서사로 승화시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흔적도 남김없이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진다.

물론 한때의 결정적인 실수를 떠올리며 반성을 해야 할 순간도 있다. 왜냐하면 서사란 늘 상호 이중성 위에 작동하는 모순의 상대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릴케도, 블랑쇼도, 카프카도 그렇게 모순을 건너 윤동주 아니면 이육사처럼 구도, 즉 삶의 진실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모든 상대성은 절대적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상대성이라는 말은 의식 주관에 상대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이지, 운동의 벡터가 상대적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운명을 거슬리거나 새로운 서사를 추동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존재의 가열한 몸짓인지도 모른다.

잠시 머뭇거리며 행동의 순간을 유예하며 데리다를 문득 떠올린다. 서사학은 이미 결정된 운동방향을 따라 입자이면서 파동인 채로 존재하는 미시의 강력한 체제인데, 이는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인간학의 행동능력과 정확하게 대응된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확정적인 담론의 위치를 탈구시켰을 뿐만 아니라, 삶―시간―세계 전체를 불확정적인 것으로 다시 재구성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서사학이란 재구성이 만든 문체 효과를 극대화하는 곳에서 파생되는 담론의 조종술이다.

그러나 반드시 존재의 위치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탈구시키거나 아니면 모든 반복을 미묘한 차이의 생산방식으로 구조화하는 바로 그 지대에 서사학의 묘미가 자리하고 있음을 늘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사란 끊임없이 솟아나는 욕망하는 자아의 위치, 즉 삶―시간―세계가 표현되는 다양한 관계들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관계 내부에 위치해 있다. 설령 그것이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의 소외된 형상일 경우에도 이는 관계의 한 표현법이자, 삶이 표현되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특별하다. 그러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유일성만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결국 형식만 남고 모든 것이 휘발되어 사라진다. 그렇다면 표백시킬 수 없는 나를 표백하는 것은 가능한가? 마음을 몸으로부터 분리시켜 정신의 왕국을 실물의 정치경제학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역으로 인간학 전체를 신경전달물질, 즉 시냅스작용으로 환원시키는 유물론적 관점을 수용한 것은 가능한가? 실재와 환상 사이의 거리를 봉합해 올바른 인간학을 정립하는 것은 가능한가? 다 (불)가능하고 또 어느 정도 진실의 접근법을 허락하는 서사의 잠재적인 역량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서사란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한정으로부터 벗어나 불완전하게 자기를 펼쳐 보이는 역량들의 집합, 즉 다양체의 역동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관계에 휘말려 다양체를 다양체로 존재하게 만들거나 그것의 전모를 온전하게 드러내 보이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아니 서사는 이미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혼돈의 와중으로 빨려 들어가 불완전을 향유하게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학적 진실과 만나는 서사학의 최종 판본이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난경에 이르러 서사의 진실 전체가 아포리아라고 선언한다. 그것이 왜 그와 같은 방식으로 흘러내리는 전혀 말할 수 없다. 운명의 흐름에 내맡긴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닥쳐 희뿌연 앞날을 투명하게 만들기를 기원해 본다.


2018년 3월 31일

망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논해할 듯하다. 이때 망각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라, 잊고 싶은 부분만 레테로 흘려보내는 선택적 의지를 재차 논해야 한다. 과연 그/녀는 7년 전의 서사를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냈는가? 대저 Bong은 스스로를 기만한 채 망각을 적극으로 수용한 반어적 위선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찌 자기 삶의 모든 것을 기억의 아카이브에 저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러곤 7년 전의 어디쯤을 서성거리며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 과연 생은 낯선 풍경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자기의 본모습과 대면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멈춘다. 더불어 아련한 추억의 어디쯤으로 되돌아가 파격적인 일탈이 자행되었던 포기상태를 추출해 내 원망의 나날들을 점검해 본다. 무엇이 그/녀를 파란의 서사로 이끌었는가? 진실이다. 진실에의 의지가 만든 파괴적인 삶이 그/녀를 감옥으로 보냈고, 또 동시에 나르시시즘적 자기애가 충만한 공간으로 데려가 사랑학 전체를 괴멸시키게 된다.

추행 혹은 조작. 그것이 조작이면 어떻게 또 외설의 한복판에서 빚어진 추행이면 어떤가? 문제는 진실이 진실로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거짓으로 조작되어 옥살이를 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파격적인 일탈은 그/녀의 잘못에서 비롯하는 서사학의 진수가 아니라, 조작이 만든 담론의 조종술에 굴복한 체제 이데올로기의 우연한 희생물에 지나지 않다. 따라서 Bong의 몰락은 En이나 Taek의 그것의 달리 권력의 희생제의가 만든 슬픈 시대의 자화상이지, 외설을 만족시키는 카섹시스의 성공적 실현일 수만은 없다.

슬프다. 진실이여! 왜 그/녀는 우회된 진실의 언저리에 위치한 채 자신의 운명 전체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는가? 서사학자의 하루는 오늘도 진실의 저 황당무계한 태도 혹은 그 운용법으로 인해 참담함을 맛보게 된다. 왜냐하면 진실이 표명되는 정확한 위치는 물론 그것의 진위도 전혀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난감하다. 너무 늦은 진실은 거짓이거나 아니면 파멸의 징조이다. 왜 하필 그때, 절체절명의 순간에 진실 그 자체가 만천하에 발고되지 않았는가? 운명은 Bong의 편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녕 그와 같은 것이 서사의 운용법이고, 진실의 정체란 말인가?

차라리 침묵으로 일관했어야 했다. 망각을 일깨우기보다는 차라리 기억을 잠재워 환희와 고통이 상호 변주된 나날들을 무의 텃밭에 되돌려 보내 겸허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침묵의 시간으로 고이 간직했어야 했다. 그러나 침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무죄를 항변하며, 온 세상을 향해 진실만을 이야기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패착은 진실이 아닌 망각이 만들어낸 조작된 기억 어디쯤에 침전된 흔적인데, 이는 다시 재현된 진실 그 자체와 조응하는 현재적 삶의 강렬한 기호이다.

그/녀는 역사의 희생물이고, 서사학자는 그 희생물의 배후를 재차 캐묻는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진실의 꼬리는 좀체 종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진실이 Bong에 속했었던 진정성 모두를 완벽하게 괴멸시켜 그/녀를 영원히 담론의 장에서 이탈시켜 버릴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무정타. 진실이여! 왜 진실은 7년 전 그때 그 시절이 아닌 오늘을 선택해 그 전모를 완벽하게 드러내 보이는가? 속절없이 진실 앞에 농락당한다. 그게 서사의 진수이고, 운명의 서사이다. 아프고 쓰라리다. 누군가는 승승장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몰락에 몰락을 거듭해 완벽하게 추락을 향유하게 된다.

반성하고 겸허하게 살아야겠다. 지언이와 준우를 위해 내 남은 생의 시간을……. 그리고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잔여의 시간이 조금이라 남아 허락되기를 염원해 본다. 서사학자에게 시는 초심이고 원형이자, 뒤틀린 운명의 서곡이다. 다시 시를 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다.


2018년 4월 1일

가장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말들하곤 한다. 과연 서사는 늘 그/녀의 몰락을 가장 빠른 때로 추인하는가? 만약 가장 늦은 순간, 혹은 생의 잔여지분이 거의 소진된 순간이 도래했을 때, 서사학은 어떤 하루를 기록해야 하는가? 무량한 마음으로 시간의 저쪽에 위한 한 청년의 삶을 되돌아본다. 너무 가혹했다. 아니 차라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빈곤의 한복판에 서서 무기력과 절망의 나날들을 보냈던 지옥에서의 한철을 떠올려야 할 듯하다.

랭보와 서사학자 사이에 무엇이 가로놓였는가? 하루가 너무 짧다. 하루를 가득 채운 동사 ‘쓰다’의 공간이 텅 비어있다. 적요했다. 아무것도 써진 것이 없는 듯하다. 적요하다 못해 차라리 비애에 젖어 서사학이 펼쳐내는 저 비의를 재차 굴절시켜 동사 ‘쓰다’ 전체를 완벽하게 탈구된 목적지로 되돌려 보내, 무의 공간을 다시 창조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그러나 되돌아갈 방법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장 빠른 때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 같지 않다. 되돌아갈 수 없다. 모든 의미의 공식을 하루와 맞바꾼다. 하루는 영원이고 영원은 하루의 기댓값에 못 미치는 탈구된 불구의 장소이다. 영원처럼 빠르게 하루가 지나간다. 산다는 것은 그냥 지나간다는 것. 그냥 지나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목적지에 당도해, 한때의 황홀한 심경을 수사학으로 표명하는 것. 단지 그뿐이다. 미학만이 삶의 의미를 온전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것은 후회이다. 물론 하루하루를 대책 없이 허비했다거나 아무런 노력 없이 무책임하게 방기 했기 때문에 후회가 밀려오는 것은 아니다. 서사란 자신에게 속했던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투사하는 곳에서 생성되는 가장 숭고한 시간의 구성물이지만, 늘 선택에서 비껴간, 혹은 선택되지 않은 삶에 대한 회오의 감정이 진하게 배어있는 성취되지 못한 기호들의 축제이다.

아름다웠지만 미흡했고, 초라하게 꿈이 사그라졌지만 영원히 잊히지 않는, 아직 말하지 못한 그 무엇인가를 잔여로 남겨놓는다. 잔여의 말을 받아 적는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 모든 서사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 자기에게로 되돌아가는 과정에 느낀 최후의 진술처럼 비칠 수도 있다. 따라서 서사는 늘 투자승수에 반비례하지, 투자의 기대효과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거나 기대 이상의 미적 효과를 산출했다고 소명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잔여가 남는다. 미완의 말만이 남아, 남은 말들과 치열하게 대결 모색 중이다. 그러나 말은 의도를 전혀 다르게 표현하고, 의미를 정확하게 표백하지 못한다. 서사란 늘 그와 같다. 서사의 한계는 자기 언어, 즉 수사학의 한계이다. 아니 서사학자에게 언어는 가장 완벽한 존재의 감옥이기도 한데, 이는 항상 표현의 한계 저 너머로 의미의 공식 전체를 재배치하는 반복의 여정에 노출된 채 기꺼이 자기 운명의 수인으로 감금되기 때문이다.

영원히 탈출이 불가능하다. 까닭은 뮤즈에 매혹되어 더 이상 또 다른 선택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뮤즈의 파놉티콘에 감금되어 기꺼이 처벌을 감수한다. 오늘은 비록 제대로 된 글 한 줄 쓰지 못하였지만, 내일은 영혼과 맞바꾼 심혼의 에피그램을 육화 시키기를 기대해 본다. 물론 역시 내일도 불만족에 휩싸인 채 번민의 나날들을 보내겠지만, 어찌 그것을 운명의 서사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사 ‘쓰다’를 만족시키는 단 하나의 방식은 쓰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할 [喝]하고 외쳐본다. 언젠가 위대한 문장 하나로 정전이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Imagine으로 세상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