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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GOOO Oct 20. 2024

영화에서의 아우라

세상 속 아우라를 느끼는 법


“아우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써,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이것은 우리가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1)


발터 벤야민이 아우라 상실 시대를 외치고 8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예술품들에게서 아우라를 주목한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에서 나오는 특이점의 무언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인지. 새로운 경험의 순간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것에 대한 인상 깊은 일회적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그 순간은 어디서 포착되는가? 영화에서 그 아우라가 느껴지는 순간은 잘 짜인 내러티브의 클라이맥스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도, 완벽하게 구성된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미적인 프레임에서가 아니다. 피사체의 실재와 운동성에 대한 행위적 성취이다. 관객과 영화(예술품)는 지정된 장소, 즉 극장에서 마주한다. 극장의 특성상, 우리는 극 중 상황의 일부분에 위치한다. 그 몰입의 순간에서 관객이 느끼는 진실은 오직 몽타주 되지 않은 무언가이다. 개선 가능성이 큰 예술품인 영화는 역으로 개선의 가능성이 줄어들수록 더욱 진실이 된다.


영화는 세상의 많은 것들-고정된 시간 속 거리에서 지나가는 자동차, 사람들, 새, 나무, 수많은 표지판-을 그대로 복제해 낸다. 영화적 특성에 맞게, 우리는 복제된 세상 속 복제된 인물을 구축한다. 이러한 것들에서는 반복될 수 있기에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세상에서의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역할을 해낸다. 그것이 영화의 또 다른 목표이기도 하다.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특성에서는 수많은 아우라의 잠재력이 있다. 시네마-베리떼적인 기록영화의 다큐멘터리적 흐름은 인간의 눈이 아닌, 카메라 렌즈와 센서, 필름에서의 잠재력을 끌어낸다. 인간의 눈을 모방한 기술 발전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구가 되어 ‘진실’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영화는 몽타주 이외에도 이미지에서의 아우라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미지는 가장 객관적인 단 한 번뿐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고다르와 트뤼포 등 누벨바그 감독들, 자끄 리베트나 존 카사베츠 감독들의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시네마-베리떼적인 특성을 다큐멘터리에 국한되지 않고 픽션을 결합하는 듯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 속에서 변증법적인 과정이 ‘아우라’를 유지하는 경험이라는 것을 느꼈다. 급속한 기술의 발전과 파괴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현대 영화는 수많은 ‘거짓’들을 인간의 눈이 아닌 카메라라는 ‘진실’ 속에 섞어 ‘아우라’를 연출하곤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들은 피사체의 실재함과 운동성에 대한 고찰로 다가갔으면 한다.


그것이 복제된 거짓 속에서 진실을 찾는 또 하나의 눈이지 않을까.




1)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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