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 주소서
우리의 기도를 신은 듣고 있을까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신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까
신은 우리에게 어떻게 응답하실까
우리는 신에게 얼마 큼의 기도를 해야 할까
얼마큼 간절히 기도를 해야 할까
어떻게 기도를 하면 이루어 주실까.
들어주시는 것이 아닌 우리의 기도를 이루어 주실까
알 수 없고 어려운 문제다.
믿음이 신실한 분들,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가장 어려울 때, 신은 함께 계신다고 하였다.
지금 이 시간 누가 간절히 숨 넘어갈 듯 간절히 외칠까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밤마다, 지친 몸으로 신께 기도를 올렸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는 남편은 종교가 없었다. 나중에 가톨릭으로 모두 세례를 받았다.
물론 어머니 돌아가시고 하였다.
그전에는 남편은 시아버님과 같은 종교였다.
열심히 , 근면성실하게 일하고 조상을 섬기며 나쁜 일을 하지도 않고 관련되지도 않아야 한다는
그런 삶의 철학을 가지신 것이 그분들의 종교였다.
나와 결혼하고 우리 친정이 기독교를 믿는 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본인에게 와닿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일에 치어 주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모른다
당시에 우리 공무원들은 주 5.5일을 근무할 때였으니 꿀 같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직장에 거의 100%로 가까이 매여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매주 자연보호 활동으로 도시공원과 거리, 가로수에 함부로 버려진 담배꽁초,
쓰레기들을 주우러 다녔다. 그러니 토요일은 없는 것이다. 주 6일 근무다.
여름에는 근무시간 오후 1시가 공식적으로 업무가 끝나면 모두 거리로 내몰린다.
길거리 바닥에, 보도블록 위에 눌어붙은 껌딱지를 떼어 내어야 한다. 끌처럼 생긴 칼이나.
카트칼을 들고 길거리에 우리는 깔린다. 껌을 긁어낸다. 사람들의 발에 밟혀 눌어붙은 껌은
도로에 보도블록에 까맣게 붙어있다. 그것을 칼로 긁어내어야 한다.
매주 얼마나 껌을 소비하였든지 얼마나 뱉었는지,
그놈의 징그러운 '껌이라면 롯데, 롯데껌' 징그러웠다.
롯데 껌을 팔아 돈을 벌일 때 우리는 토요일 업무 마치고 하는 잔업, 혹은 환경미화원이었다.
누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 하는가 그 밑에 숨은 노동력이 있었다 급여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일군, 산업역군은 공장에 만 있은 것이 아니다.
공무원이란 허울에 환경미화원은 덤이다. 환경, 미화를 하는 공무원 만능 노동역군이 있었다.
왜 여름에 껌딱지를 땔까, 그 뙤약볕아래에서,
땀인지 눈물인지 얼굴을 타고 내린다. 화장이라도 했을라치면 범벅이 되어 구정물이 흐르듯 한다
이유는 껌이 좀 쉽게 떨어진다.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정부에서 싱가포르의 리관유총리가 시행하는 도시정비작업의 강제적 공권력의 행사의
성공을 보고 우리 정부도 시행했다. 공공장소에 침 뱉을 때 벌금 얼마, 담배꽁초 버리면 얼마,
도로 무단행동하면 얼마 등등 많은 것을 시행했다. 우리는 그 생각을 했다.
이제 좀 질서라는 것, 공공질서라는 것이 잡히나 했더니 웬걸, 그냥 그대로 실패했다.
누가 우리 국민이 선진의식이라 하였는가 공공질서를 위한 작은 약속도 구속이라고 실패로
만들었다. 싱가포르, 여행을 갔다 왔다 3번이던가, 공공청사에도 가 봤다.
우리와 비교 안된다. 할 수도 없다. 여행 가셔서 깨끗하고 풍요로운 싱가포르를 보면
부러워하지 마시라 우리도 시행했으나 실패했다.
일요일은 당직을 써야 한다. 정규여직원이 없었다. 매주 일요일 당직을 했다면 주 7일이니
어떤 법에 저촉될 것이니 격주 당직을 했다. 참고로 나는 노정계장도 했었다.
고용직, 일용직, 후일 기능직으로 면접만 보고 정규직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공채 정규직이 아니니 당연히 모든 업무에 책임이 없다.
당연히 당직을 서지 않는다, 당연히 감사 등과 관련이 없다.
후일 정규직 변환 후 당직은 같이 했다. 당시에 그렇게 변해갔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 갔다. 나아진 것이다.
산불이 나면 자다가도 일어나 바로 튀어 나간다. 산은 남자직원들이 오르고 여직원은 상황실 근무와
부족한 물품과 간식을 준비해 준다. 당연히 우리는 필수요원이다.
태풍, 장마 재해가 닥치면 내 집은 버려두고 현장에 투입된다.
그러니 거의 98% 업무와 업무 외적일로 직장에 매여 있었다.
당연히 종교생활은 할 수없으니 남편은 교회가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아프고 생활이 붕괴되고 나는 2중 생활에 피접이 상골 하듯 말라갔다.
키 1m 60에 몸무게 42, 허리사이즈 22.5였다.
여름 CPX(전시대비훈련) 중에는 예비군복을 입는다. 몸에 맞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이중생활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으나,
병원에 가서 아이를 보면 용기를 내고 힘든 것을 잊어버린다.
사무실에는 일체의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런 중에도 링거를 이마에 꽂고 웃고 있는 둘째를 보면 안쓰럽지만 나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내 삶의 의미 같은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면 살려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 많든 눈물은 어디로 갔을까?
울보인 나는 눈물을 잊은 듯하였다. 눈물이 말랐다.
병원화장실에서 출근준비를 하면서도 그런 저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감정사치를 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 출근하면 나는 또 다른 사람으로 공무에 임해야 하니까. 징그러운 일복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업무가 많고 새로운 계획과 지시하달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의료보호업무는 병원비 사정작업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간절한 사치는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다.
모든 장소와 매 순간이 짧고 간절한 기도의 장소고 기도의 순간들이었다
무작정 기도 하였다. 내가 어디에 있던 어느 장소에 있던 기도 하였다.
그때는 어머니가 함께 하였기에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기도 하였다.
어떻게 기도 하는 줄도 몰랐으니 어머니 시키는 대로 기도하였다.
간절히 하라고 하였다.
나는 늘 의문을 가졌다. 신은 기도를 듣고 있을까.
세상에 이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말하며 기도하는데 다 들을 수나 있을까
나는 매우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몸이 너무 약하여 허구 한날 약을 한약을 먹었다.
책을 읽다 울고 영화보다 울고 음악 듣다 눈물 뚝뚝하였다.
학교에서 단체벌을 받으면 선생님은 때리지 못하고 볼을 꼬집었다.
그러나 고집과 자존심이 무척 셌다.
그 고집이, 자존심이 나를 담금질하여 아이와 함께하고 업무에도 뒤쳐짐 없이 열심히 살았다
나의 고집스러운 성격이 나에게 감정의 사치는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를 단속하였다.
나는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꿇어앉아 얼마나 기도를 하였을까, 사무실에서, 화장실에 가서도 잠자기 전은 당연하고 병실에서 아이의 침대 곁에 앉아서 수혈튜브로 혈액을 따뜻이 데우면서도 매 순간이 기도였다.
무지막지한 병원비 때문에 공포에 질려 기도하고 아이의 골수검사를 하기 위해 대롱만 한 주삿바늘을 아이척추에 꼽을 때, 아이의 소리를 들으며 복도에서 숨죽이며 기도했다.
나는 울음 대신 기도하였다.
어떤 신이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모르나 아이는 살았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한다.
#기도 #신의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