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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림헌 Jun 10. 2024

#10,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

기도하는 마음

우리의 기도를 신은 듣고 있을까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신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까

신은 우리에게 어떻게 응답하실까

우리는 신에게 얼마 큼의 기도를 해야 할까 

얼마큼 간절히 기도를 해야 할까

어떻게 기도를 하면 이루어 주실까.

들어주시는 것이 아닌 우리의 기도를 이루어 주실까


알 수 없고 어려운 문제다.

믿음이 신실한 분들,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가장 어려울 때, 신은 함께 계신다고 하였다.

지금 이 시간 누가 간절히 숨 넘어갈 듯 간절히 외칠까

도와주세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을 먹고사나`라는 책을 아주 먼 옛날에 고전이란 고전은 모두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 그때에 읽었었다.


그때 책을 읽은 기억으로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 TV에서 강의하시던 강사의 말이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 또한 그런 것 같았다. 


그 책에는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단편집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어느 날 저녁에 넉넉히 잘 사는 집에 하느님께서 방문하신다고 하였다

주인은 만찬을 정성껏 준비하고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은 차가운 눈보라가 치고 날은 춥고 해는 저물어 밤이 깊어만 갔다 그런데 주님께선 오시지 않고 

밤은 깊어 만 갔다. 

주인은 초조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다른 집을 방문하였나, 하고 생각하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늦은 밤이 되어 누군가가 현관을 두드렸다, 주인은 예수 님이라 생각하고 반가이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남루한 모습의 나그네가 추위에 떨며 하룻밤 머물며 추위를 피하고자 부탁하였다. 

주인은 실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주인은 주님을 영접하고 축복을 받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추위에 떨고 있는 남루한 나그네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주인은 예수님의 말씀인 배고픈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나그네를 집에 들이고 예수님께 대접하려고 정성 들여 준비한 음식을 나그네에게 대접하였다. 물론 따뜻한 난로 앞도 제공했다. 


나그네는 편히 쉬고 갔다 그러고는 나그네가 떠나면서 한 말이 어젯밤 나그네를 따뜻하게 대접한 것이 바로 나를 대접한 것이라고 하였다. 나그네는 예수님이 셨다.


오래된 기억의 내용이다 이 스토리는 이런 것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나그네를 맞이하였던 것은 배고프고 어려운 자를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든 아니든 그 순간 주인은 눈앞에 있는 나그네의 안타까움을 저 버릴 수 없었던 것이 사랑을 베푼 것이었다.


과연 요즈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이든 부처님의 자비이든 도교의 적선이든 무엇이든,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남의 것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베푸는 자가 얼마나 될까? 


그리하였다면 이웃에서 고독사도 더 이상의 생활을 할 수 없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이가 이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채널을 통하여 기부와 도움을 청하는데 왜 그럴까? 가난한 사람이 많아졌는지 아니면 기부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또 아니면 기부한 돈이 그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여서 그런지 참으로 궁금하다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이 글의 주인처럼 사랑의 베 품이 있었다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많은 기부를 하였는데 왜 아직도 그런 방송이 나올까?

왜 그분들은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주위의 분들은 왜 그런 분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까?


나는 생각을 해본다

그분들의 자존심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마음의 문을 닫았을 것이다.

알게 되었을 때 주변의 싸늘한 시선을 알았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차하게 알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그분들이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를 가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옛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과 열 지킴이가 한 명의 도둑을 잡지 못한다는 말이 정말 옳은 말인 것 같다. 요즈음은 나랏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고 하는 말이 생겼다. 


톨스토이의 단편 중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이다.

요즈음의 세상에 울림이 되는 내용이었다.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아도 새겨들어야 하는 글이다.


한 농부가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였다. 땅이 있으면 지주이니까 소작을 하지 않아도 되고 자경(自耕)이니까. 


농부는 매일 열심히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신의 응답이 왔다.

해 뜰 때 출발하여 해질 때 돌아오면 그 땅은 너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나 명심해라 

반드시 해질 때 여기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이 신이 주신 조건이었다.


농부는 해가 뜰 때 길을 떠났다. 그리고 열심히 걸었다. 가다 보니 해가 머리 위에 와 있었다. 이쯤에서 돌아갔으면 되었을 것을 농부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직 해가 밝아, 그러니 좀 더 가도 될 거야 그럼 내 땅이 더 많아지고 나는 부자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며 길을 더욱 재촉하였다. 


러다 어느 순간 해가 지고 있었다. 정신이 든 농부는 빨리 출발지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부는 열심히 되돌아갔다, 빠른 속도로 출발지로 돌아갔으나 반도 가지 못하고 해는 지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농부는 신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며 조금만의 땅이라도 달라고 청하였지만, 신은 단호하였고 결국 농부는 한 평의 땅도 얻지 못하였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고 먼 길은 하루 종일 걷기만 하였으니, 탈진하고 허탈하고 지치고 얼마나 후회가 되었을까. 그러나 농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해가 머리 위에 있을 때 되돌아갔으면 여유롭게 도착하였을 것이고 내 땅도 생겼을 것인데 하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농부는 흔히 할 수 있는 원망의 생각,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열심히 걸었건만 단 한 평의 자비도 허용치 않았다고 신을 조금은 원망할 수 있겠지만 하지 못한다. 신은 기도에 응답해 주었는데 내가 잘못하여 나의 소원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고 자신을 끓임 없이 책망하며 살아남은 날 동안 기도하기 전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지나친 탐욕이, 멈출 수 없는 탐욕이 부른 결과이다 그때는 농경사회이니 농지인 땅이 중요하였다.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고 다양한 직업들이 있으니 개발된다는 투자의 개념으로 땅을 가지려고 하고 내가 살집이 아닌 투자의 개념으로 생각하여 사람이 살아야 할 집으로 재테크를 한다. 농사를 짓기 위하여 내가 살기 위한 집을 짓기 위하여 땅을 매입하기보단 재테크의 개념이다 모두 그러하니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작조차 해 보지 못하니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쩜 그조차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없었기에… 그렇지만 이 글의 교훈처럼 복에 없는 지나친 과욕은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린다.


달리 생각해 보면 신은 애초에 줄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기도에 응답만 했을 뿐, 진정 가난한 농부의 마음을 가엾이 여겼다면 신이니 농부의 그 마음을 알았을 것이니 이루지 못할 조건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농부는 그저 소작농이 아닌 자경 농어 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부자가 아닌 내가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원했다.


과연 신은 농부의 기도를 들어준 것일까? 그냥 하도 보채니 조건을 걸고 기도를 들어준 것처럼 모양새를 갖춘 것일까? 그도 아님 농부의 기도가 잘못된 것일까?


그냥 농사지을 땅을 구체적으로 몇 평을 주세요 하고 기도했으면 들어주었을까?


도둑은 누가 만들었으며 잘못은 누가 짓게 하었을까? 부자는 누가 되며 빈부는 누가 만들었는까? 

인간이 하였든 신이 이미 만들어 두었든 그렇게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체계 속에서 발버둥 치고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원래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 그랬다.

그러니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라라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태초는 모르겠기에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시대와 세대를 걸쳐 많이 소유하려고 하였고 땅을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였으며 노동력을 위하여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인류 역사이다


톨스토이는 많은 고전 명작을 남겼다.  예전에 읽었어도 세월이 지나고 인생의 경험이 직. 간접으로 쌓이면서 또 다른 느낌과 교훈이 있으니 고전을 읽는 것은 즐거움이다. 가볍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고 현란한 말장난이 아닌 진중하고 깊이 있는 내용이고 불멸의 교훈들이 있다. 

나는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꿇어앉아 얼마나 기도를 하였을까, 사무실에서, 화장실에 가서도 잠자기 전은 당연하고 별실에서 아이의 침대 곁에 앉아서 수혈튜브로 혈액을 따뜻이 데우면서도 매 순간이 기도였다.

무지막지한 병원비 때문에 공포에 질려 기도하고 아이의 골수검사를 하기 위해 대롱만 한 주삿바늘을 아이척추에  꼽을 때 아이의 소리를 들으며 복도에서 숨죽이며 기도했다.

어떤 신이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모르나 아이는 살았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한다.

#기도 #신의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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