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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닥터오 Nov 27. 2021

저도 화가 납니다.

항문주위농양, angry, 반전매력

며칠 전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진료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밖에서 언성 높은 대화가 오가는 것이 들렸습니다. 외래 진료를 하다 보면 환자들이 담담 주치의, 외래 간호사 또는 병원 직원들과 작은 오해가 생기거나 행정적인 문제 때문에 목소리가 높아지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제환자가 아니였기에 속으로 "무슨 일 있나?? 뭐 때문에 그런거지?? 잘 해결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배가 아파 진료실을 찾은 환자의 진료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담당 간호사가 뭔가 걱정 섞인 표정으로 외래 진료실 문을 열면서

"새로 신환(저한테 처음 진료 보러 오는 환자)이 왔는데요.

OO외과에서 진료받고 오신 것 같아요.

그런데, 화가 많이 나셨어요."


아니. 왜 화를 내시는 건가??

그리고 우리 병원은 처음 오신 건데, 뭐가 문제가 있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컴퓨터 전산상으로 올라와 있는 '진료의뢰서'를 확인해보았습니다. 다른 외과 병원에서 진료를 한 후 치료는 없이 검사만 하고 저희 병원으로 보내는 내용이었습니다.


외래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서 들어오시는 환자의 발걸음과 얼굴을 보니 얼마나 화가 잔뜩 나셨는지 멀리서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더욱더 놀라웠던 것은 바로 환자의 '풍채(風采)'였습니다.


180이 넘는 키에 120kg이 넘는 몸무게

여기에 삭막한 분위기와 손에 든 손가방까지.

마치 영화에 나오는 힘 좀 쓰는 무서운 형님들의 포스가 느껴지는 듯한 첫인상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어요??"


"내가 이 병원 오기 전에 다른 병원을 3군데나 돌아다니다가 왔어요.

요 앞에 OO외과, OO의원, OO비뇨기과까지 3군데나 말입니다.

무슨 검사같지도 않은 검사만 하고 정작 치료는 안 해주고.

뭐 한 것도 없는데.

100만원 넘게 줬어요.

그 돈 주고 제대로 치료받기를 했나??

그렇다고 친절하기라도 해??

검사 몇 가지 해놓고 100만원 넘게 받는 게 말이나 됩니까??"


"내가 이 지역 사람이 아니라서 어느 병원이 잘하는지 몰라 가까운 병원으로 갔던건데.

치료를 못할 거 같으면 좀 더 큰 병원을 안내해주던가."


환자가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충분히 화가 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병원에서 실제로 어떤 검사를 했고 검사의 가격이 어떤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환자가 아프다고 하는 항문 주변을 확인해보니 '항문주위농양' 확인할 수 있었고 병변을 자세히 확인해 보니 왜 검사와 치료가 제대로 안되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항문주위농양은 항문과 가까운 피부뿐만 아니라 항문에서 직장(Rectum)으로 올라가는 방향에서도 생길 수 있습니다. 항문과 가까운 부위의 피부 아래에서 생기는 경우 간단한 배농술로 비교적 쉽게 치료될 수 있지만 항문 상방으로 깊게 위치해 있는 농양(abscess)의 경우에는 치료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이환자의 항문주위농양은 항문 앞쪽의 중요한 구조물과도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수술하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였습니다.


환자가 저희 병원을 오시기 전에 다른 병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불편한 점이 있었는지는 정확한 내막은 알 수없지만..


'제대로 된 설명도 없었다는 것'

'의사, 간호사 모두 불친절했다는 것'


이런 것들은 환자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환자의 병변을 확인하고 골반 CT(pelvic CT)를 검사하면서 그 결과를 확인하니 저 또한 이 환자 수술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환자의 체격이 크다 보니깐 지방층(fat)이 두꺼워서 병변이 잘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 항문과 가까운 피부가 아닌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 농양이 있는 위치 주변에 중요한 구조물들이 있다는 것.

이런 이유들 때문에 누구나 수술을 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병변이라고 한다면 왜 바로 좀 더 큰 병원으로 보내지 않았는지??

왜 환자가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불필요한 지출을 하게 만들었는지??

왜 정확한 설명은 없었는지??

굳이 불친절할 필요가 있었을까??


3군데 병원에서 100만원.

1개의 병원당 평균 33만원, 이보다 적은 비용을 지불했던 병원도 있을 것이고, 더 비싸게 비용을 지불했던 병원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화가 났던것은..

해결하기 어려운 케이스라고 한다면..

환자에게 어떤 병이 의심되어 이런 검사를 했는지??

그 결과 어떤 병이라고 생각되는데, 저희 병원에서는 치료하기가 힘드니..

좀 더 큰 병원이나 대장항문외과 전문병원으로 가시라고 정확한 안내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모든 환자를 다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능력이 있지 않겠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능력 밖의 환자가 있을 때는 환자의 안전을 위해서 그 능력이 되는 의사에게 환자를 의뢰하거나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상급병원으로 치료받을 수 있게 안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판단능력 또한 의사의 자질이고 실력입니다..


[Behind story] 머리끝까지 화가 나있던 환자의 반전 매력

180cm가 넘는 키에 120kg이 넘는 몸무게

첫인상과 다르게 입원 치료를 하면서 느낀 '반전'이 있었습니다.

화가 어느 정도 누그러진 환자의 표정과 목소리는 너무나 상냥하고 부드럽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진 갈 때마다 어찌나 방긋하게 웃어주시는지 오히려 푸근함마저 느껴졌으니까요.

배농술을 하기에 아직 충분히 고름집(abscess)이 형성되지 않아 항생제 치료를 하고 있지만 조만간 잘 회복될 것입니다.

곧..

푸근함이 묻어있는 그 기분 좋은 미소를 또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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