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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닥터오 Feb 08. 2022

아침 회진부터 "욕" 한바가지

할머니, 욕, 관심

"똑. 똑. 똑..

드르륵"


"할머니.

좀 어떠세요.

잠을 잘 주무셨어요??

아침식사는 얼마나 드셨어요??"


"그럼. 잠은 잘 잤지. 못 잤겠어!!

밥도 잘 먹었단 말이야!!

나 퇴원한다니깐!!

왜 안 보내주는 거야!!

OOO, XXX, ###!!!"


아침부터 할머니의 구수한 욕을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할머니가 하시는  거친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수술해준 담당 의사에게 어떻게 저런 말을   있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할머니의 '' 마음 편하게 하는 클래식 같이 들립니다.


제가 아침부터 욕을 듣고도 기분 좋은 이유는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도 잘하고, 기력도 좋아지신 것이 불과 며칠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수술하고 30일 넘게 기력 없고, 밥 먹다가 토하고 걷지도 못하셔서 그동안 제 마음의 애간장을 다 녺게 만들었으니 이런 욕쯤이야 잔잔한 자장가처럼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심하게 입에 담지 못할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가 두드러기도 안 나는데, 온몸이 자꾸 가렵다고 하시길래. 병원이 건조하고 수술하고 소독한 부위의 드레싱 제품 때문에 가려움증이 생길 수 있어 연고와 주사제를 처방하였습니다.


보통, 두드러기나 붓는 증상이 심하면 항히스타민과 스테로이드 주사제를 사용하게 됩니다. 먹는 약보다는 주사제가 효과가 빠르기 때문에 응급한 상황이나 빠른 증상의 완화를 위해서 처방하게 됩니다.


스테로이드 주사를 처방하는 순간 머리에 망치를 "빵"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

요놈 잡았다!!

맞다. 이거야!!"


Adrenal insufficiency, 즉. 부신 기능저하증이라는 병이 의심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몸은 수술, 외상, 출혈, 암, 다양한 질환이 발생하게 되면 이런 상태를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이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호르몬(코티졸)을 부신이라는 장기에서 분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몸에서 생성하는 호르몬의 양이 적거나 외부의 변화가 몸이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크다면 우리 몸 자체가 버티질 못하고 셧다운이 되는 것입니다.


전신쇠약, 식욕 감퇴, 극심한 피로감, 구역, 구토, 저혈압, 탈수, 전해질 이상 등등..

아주 다양한 증상이 몸에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할머니 연세에 비해서 큰 수술을 잘 받고 잘 버티셨다고 생각했었는데, 회복이 너무 더디어서 늘 걱정이었습니다. 그동안 배우고 경험했던 의학 지식들을 총동원하고 약을 바꾸고 여러 가지 변화를 주어도 입원 날짜만 길어질 뿐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못하셨습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서 환자의 기록을 보면 큰 호전이 없는 환자의 컨디션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뭐지??

뭐 때문이지??

이 정도면 벌써 퇴원해야 하는 건데??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저 또한 환자에 대한 걱정과 스트레스에 퇴근을 해도 마음이 늘 무거웠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인가요??

할머니의 가려움증이 저에게 해결을 실마리를 준 것입니다.


물론.. 피부 가려움이 부신 기능저하증의 보편적인 증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피부 가려움증은 오랜 병원 생활에 따른 피부 건조증과 수술한 부위 드레싱 제품 때문에 가려움증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것이 원인이 되었든.

중요한 것은 잡았다는 것이죠.

요놈.. 잡았다!!


며칠 전에는 회진을 위해서 병동으로 갔는데, 저 멀리서 간병인과 함께 병원 복도를 걸으며 운동하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OOO 할머니가 맞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뭔가 가슴속 울컥하는 벅차오름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할머니의 이름을 부르니 저를 쳐다보시면서 환하게, 아니 무엇보다 건강하게 웃어주시는 모습이 코끝을 찡하게 했으니까요.


그렇게 기분 좋게 걸어 다니시는 것을 본 이후부터 할머니는 몰라보게 기력을 찾으셨습니다. 다음날은 죽도 거뜬히 드시고, 소변보는 것부터 전신의 부종까지 눈에 띌 정도로 건강해지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얼굴에 웃음이 생기셨습니다. 1주일 전까지만 해도 어두운 얼굴, 기력 없이 누워만 있으려는 모습이었지만 이젠 농담도 하시고 욕도 하십니다. 제 생각하기에 할머니께서 건강하셨을 때는 구수한 말씀을 많이 하셨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할머니의 건강한 퇴원을 누구보다 바래왔던 것은 담당 의사인 '저'일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할머니의 퇴원 날짜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욱한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기분이였거든요.


이제는 앞이 좀 보입니다. 그것도 선명하게 말이죠.


최근 너무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었습니다. 책은 작년에 산 것 같은데, 우연찮은 기회에 다시 책장에서 꺼내어 읽게 되었습니다.


바로 "기록의 쓸모"라는 책입니다. 저에게는 글귀 하나하나가 너무 좋아서 형광펜으로 책을 도배할까 두려웠던 책입니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특별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의 눈과 손을 거치면 별것 아닌 것도 특별해지듯 뭉툭함을 다듬어 뾰족하게 만드는 것은 태도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사소한 것을 위대하게 바라보는 힘'이다. 영감을 얻으려면 집요한 관찰이 필요한데, 집요한 관찰이란 결국 사소한 것을 위대하게 바라보는 힘이 아닐까. 세상에 하찮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하찮다고 바라보는 태도만 있을 뿐.


집요한 관찰

사소한 것을 위대하게 바라보는 힘


이런 힘은 결국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환자의 건강도 어쩌면 이런 "집요하고 뾰족한 관심"의 결과물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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