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 당신은 대관절 무엇이길래 나를 괴롭게 합니까.
나는 이번에도 거절 당신을 마주하지 못하고 힘에 겨워 허덕입니다.
아아, 야속한 그대여.
왜 당신을 기꺼이,
힘껏,
온 마음 다해
해내지 못 하게 하나이까.
꺼이, 꺼이, 꺼이.
- 2022 여름, WLS 作
[이 소리는 경기도 남부 지방에서 거절을 괴로워하는 자가 할 일을 어깨에 둘러메고 힘에 겨울 때 울부짖는 소리입니다.]
저는 오늘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지인의 추천으로 맡게 된 연구원 직책으로 인해 당장 이번 주에 분석할 데이터와 작성해야 할 보고서 수십 페이지가 하얗게 질린 네모 얼굴로 제 머릿속을 짓누르기 때문이지요. 커서는 점멸등처럼 깜빡이며 저에게 얼른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주의까지 주네요. 저 하얀 얼굴에 까만 글자와 숫자를 빼곡히 채워 넣어야 하는데 저는 당장 노트북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고요? 몸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제 친언니가 건강상의 사정이 생겼습니다. 언니가 아픈 것도 걱정이지만 그녀의 딸, 즉 저의 6살 난 조카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걱정입니다. 형부가 볼 수도 있지만 조카의 유치원과 형부의 출퇴근 시간이 맞지 않았고, 게다가 언니가 입원한 기간은 유치원 방학 기간이라 육아의 공백이 생기게 된 것이죠. 언니의 시누이도 봐주실 수 있다고 했지만 이미 그 집엔 아들 두 명이 있는 상황이라 육아 과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의 유일한 조카, 웃기만 해도 마음을 살살 녹이고, 말솜씨와 마음씨까지 다 보석 같은 우리 조카의 육아에 공백이 생겼다니. 너로 인해 우리가 웃는데 너 밥 먹여주고 씻길 사람이 없다니!
행동력 넘치는 저희 어머니는 당장에 본가로 조카를 데려가 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나이는 곧 70세. 건강도 온전치 않으시고 체력도 딸리시고, 아버지는 양육이라곤 재주도 경험도 크게 있진 않으신 분이시죠. 언니도 넌지시 저의 여름 휴가 이야기를 하고, 어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며 피로로 지친 얼굴을 캡쳐해 단체 채팅 방에 올리는 술수에 결국 제가 조카 양육을 2주간 맡았습니다. 앞의 1주간 저와 어머니가 본가에서 조카를 돌보면 뒤의 1주는 언니도 회복 후에 본가로 내려와서 아이를 직접 돌보는 일정이었습니다. 저의 여름 휴가를 온통 본가에서 조카를 돌보면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도 들었지만, 언니가 아프고 조카를 그냥 둘 수도 없고, 어머니 혼자 힘들게 아이를 보시게 하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소중한 여름 휴가를 이렇게 보내는 게 아쉬워도 어쩔 수 없죠. 거절할 이유도 못 찾았고, 방법도 잘 모르니까요.
조카 돌보기 2주 차에 내려온 언니는 컨디션도 괜찮아 보였고, 저의 부모님도 계셨기 때문에 사실 제가 조카 양육을 도맡지는 않아도 되었습니다. 거절하고 저의 자취방으로 올라가도 됐을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본가에 휴가의 끝까지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암묵적 부탁이 머릿속에 남았기 때문이지요.
‘제일 젊은 네가 저 어린 생명체와 몸으로 놀아줘야 한다.’
그들은 입 밖으로 내뱉은 적 없는 말이지만 저 스스로가 그렇게 느껴버렸습니다. 심지어 이를 격렬히 수행하고자 조카와 놀다가 본가에 내려온 지 이틀 만에 허리를 크게 삐끗하여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순방하고, 누웠다가 일어나는 것조차 끔찍하게 아픈 생고생을 겪었습니다. 어머니의 육아 인원이 1명에서 2명으로 는 것 같아 맘도 편치 않았습니다. 다행히 다음날에는 컨디션이 좀 나아져 조카와 본가 근처 놀이터 세 곳을 살살 걷고, 마지막에는 분수대에서 조카 물놀이까지 관리해주었죠. 이 외에도 애벌레 인형에 빙의해서 조카의 온갖 설정에 맞춘 인형극 하기, 공놀이, 색종이 접기, 종이 접기 못 한다고 구박 받기, 그네 밀기, 모래놀이 같이 하기, 미끄럼틀 내려오는 부분에 물이나 쓰레기 있나 확인하기, 부채 부쳐주기, 잡기 놀이, 집에서 호떡 만들기, 빵 사주기, 아이스크림 같이 사러 가기, TV 시청 지도하기, 먹이기, 씻기기, 옷 입히기, 조카 자는 9시에 맞춰 온 가족이 자는 척 하기, 사진 찍어주기 등 허리를 더이상 다치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해낸 조카 돌봄 목록입니다.
황금 같은 여름 휴가에 연구원 일로 가장 바쁠 일도, 조카 양육하다 허리 다칠 일도 만들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거절만 하면요. 그런데 거절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여름휴가는 이렇게 일과 조카 돌보기로 다 지나가 버리고, 저는 이제 다시 업무에 복귀합니다.
이쯤 되면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르시겠죠. '본인이 하겠다고 해놓고 왜 투정이냐', 또는 '왜 거절을 못 했냐' 이런 질문이시죠? 저도 저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기 때문에 잘 압니다. 알고 말고요. 첫 번째 질문부터 실마리를 풀어보자면, 사실 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게 저도 고민인 지점이거든요. 맞습니다. 제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호기심이 조금만 적었더라도 이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 천성이 호기심이 많고,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은 인간이고, 오늘 당장 죽지 않는 이유가 내일의 경험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기 때문인 그런 유형의 인간이거든요. 누군가가 ‘너 이것 좀 해볼래?’라고 하면 9할 이상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고야 마는 것이죠. 그것이 조금 힘든 일이 될 수 있더라도, 불편한 자리가 될 수 있더라도, 체력에 좀 부칠 수 있더라도 말이에요. 거절을 하지 못한 이유로 힘듦은 제 몫이고, 투정은 부산물입니다. 아, 물론 겁이 많아서 신체에 위협이 가해지거나 무서운 일에는 잘 참여하지 않습니다. 번지점프, 귀신의 집 이런 것들 말이죠.
두 번째 질문의 실마리를 푸는 것 또한 참 어렵습니다. 저도 스스로 느끼는 모순적인 감정 때문인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하고 싶죠. 그래서 제가 언급한 이번 여름의 두 사례도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열심히 하려고 했던 일입니다. 다만 제가 그저 착하지만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요. 막상 수락했더니 두 가지 큰일이 시기가 겹치고 게다가 제가 허리를 다치기까지 하면서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에너지를 쏟지 못하게 된 것이죠. 그래도 내가 착한 사람이었다면 ‘호사다마’라고 스스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그래도 그냥 하면 되지’라며 스스로 격려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내가 왜 거절을 못 해서’라며 자책만 하고 있습니다. 자책을 하면서도 잘 해내려는 욕심은 또 있어서 조카를 보는 중간에 잠시 카페에서 작업을 하고 오고, 카페에서도 잠시 쉬는 시간에는 주변 키즈 카페를 찾아보며 집에 오자마자 조카와 놀이터에 가거나 근처 어린이 시설에 데려다주고 옵니다. 두 가지 일의 하루치를 끝내고 나면 멍하니 휴대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며 ‘이렇게 내 여름 휴가가 다 지나가는구나’하며 아쉬워하고요.
하지만 정말 희한한 것은 무엇인지 아시나요? 보고서 맡은 부분을 마무리하고 메일로 담당자에게 보내면서, 본가에서 조카와 언니를 제 차에 태우고 언니네 집에 데려다주면서 제 마음이 보람차고, 아쉬웠다는 거예요. 내가 이 보고서를 완수할 수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조카와 깔깔 웃으며 인형놀이를 할 수 있어서 즐겁고 뿌듯한 일면 더 잘 해내지 못한 부분들이 떠올라 미안했어요. 물론 언니에게 내 휴가가 다 지나갔다며 생색도 잔뜩 내고요.
이 정도면 저 다음에도 또 거절 못 하겠지요? 그래놓고 또 찡찡대겠지요. 언젠가 죽으면 유골함에도 찡찡대면서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