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의 무게

자식이 아프면 부모님의 걱정은 두 배가 된다

by 까만댕댕이

이 글을 쓰는 본인은 평범한 30대 직장인이다. 월요일 출근길에 '언제 금요일 오냐'며, 직장 가는 길에 이미 퇴근하고 싶어 하는 현대사회의 흔한 노동자.

나는 매일 아침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목에는 긴 수술자국을 달고, 뒤통수에는 나사 3개를 박은 채 그지 같은 출근길을 걷는다.

나는 올해 갑상선 암 수술 16년 차, 뇌종양 수술 12년 차인 베테랑(?) 환자이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내가 처음 갑상선 암 진단을 받았던 중학교 3학년 시절로 시간을 거슬러 가야 한다.

때는 2007년 여름,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한 양 같았던 내가 어느 순간 사탄의 자식처럼 돌변하여 사춘기 폭풍에 휘말렸던 즈음이었다.

부모님은 거실에 대자로 누워있는 내가 목 한쪽이 유독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 화들짝 놀라셨다.

나는 오래전부터 혹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톡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나 목이 조금씩은 비대칭인가 보다-'하고 지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오히려 내 목을 보고 놀라는 부모님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만약 내가 가진 혹이 '전반적인 건강상태에 이상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상태의 작은 크기'였다면 혈액검사, 초음파, CT 정도를 해보고 "정기적으로 추적관찰만 합시다"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혹은 사이즈가 커서(3.5x2x7x2cm) 이것이 양성인지 악성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양성인지 악성인지는 반드시 조직검사를 해야 확인할 수 있으므로 나는 세침흡인검사(얇은 바늘로 직접 병변의 세포를 뽑는 방법)를 3~4번 정도 받았었고 마지막 검사에서 그 혹덩어리가 '악성 종양 세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목에 주사기를 꽃아 검사하는 방법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지만 죽을 만큼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갑상선 암'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나는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라고 생각했다.

현실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반응.


보통의 10대는 인간발달적 특성상 자신이 '불사신'인 줄 안다.

그러니까...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기에 온갖 역경이 본인을 괴롭힐지라도, 자신은 끝내 반드시 빛을 보고야 말 것이라 믿는다.

지극히 평범한 사춘기 소녀였던 나 역시 '갑상선 암 진단이란 나에게 주어진 순간의 역경일 뿐이며 당연히 완치하고 끝에는 룰루랄라 잘 먹고 잘 살 것이다'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내 이야기가 드라마였다면 배우가 '갑상선암입니다.'라고 선고받는 순간 마시고 있던 주스를 쥬르륵 뱉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나는 개념이 없었기에 의연(?)했다.


수술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진단 당시 나는 한창 쑥쑥 자라는(세포 분열이 활발한) 청소년이었고, 종양이 주변 림프절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크기가 너무 컸기 때문에(※진행 기수: T3N0M0) 전절제술을 하기로 했다.

진단 당시에도 아무런 충격이 없었던 나는 '갑상선 전절제술', 그러니까 내 목의 갑상선을 통째로 없애버리겠다는 선고를 받고도 당연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앞으로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더더욱 없었다.(그래서 사춘기가 답 없는 것이다. 겁이 없어서)

대신 내 몫의 근심과 걱정은 모두 부모님에게 돌아갔다.


수술한 날로부터 몇 년이 지났던 어느 날, 엄마는 거실에서 사과를 깎으며 이렇게 회상하셨다.


"네가 진단 처음 받았던 그때?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어. 처음 이야기 듣고는 한 3일을 끙끙 앓았지 뭐"


나는 엄마의 말에 많이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시의 나는 부모님에게서 걱정과 불안한 기색을 단 한순간도 느끼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일순간의 동여 없이 척척 해결책을 찾아내는 모습.

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강철멘탈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나도 부모님 닮아 강철멘탈로 이 세상 독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말이다.

진단을 받은 '질풍노도 청소년 갑상선 암 환자'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부모님은 그런 자식 몫의 충격까지 본인이 도맡아 내리 며칠을 앓으셨다.






30대가 된 오늘의 나는 학교 보건실에서 일하고 있다.

일을 하다 보면 부모의 불안이 아이에게 전이되어 어려움을 겪는 사례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학생의 보건실 방문 횟수가 늘어 나(학기 초 적응기간이 아닌데도) 이유를 확인해 보면, 그 학생의 보호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볼 때면, 내게 힘든 내색 하나 비치지 않으셨던 부모님의 노력에 감사하게 된다.

내가 가졌어야 할 근심과 걱정을 부모님이 다 가져갔기에 나는 두려움 없이 수술대에 올랐고, 방사선 치료*를 해냈다.

누군가의 보호자로 산 다는 것은 이런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방사성 요오드 치료 : 그 당시 나는 1박 2일로 독방에서 진행하는 치료법을 받았다. 독방에서 방사성 알약을 먹어 잔존하는 갑상선 조직을 모두 없애는 치료 방법이다. 방사선은 대소변으로 배출되는데, 평소 물을 자주 마시는 편이 아니었던 나는 배출을 위해 홀로 물고문 수준의 생수를 들이마셔야 했다.(이건 정말 힘들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