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어걸린 보물
탈모약으로 사용하고 있는 프로페시아는 원래 탈모치료 목적으로 개발된 약이 아니다. 원래는 전립선비대증 치료 목적으로 개발되었으나 시험과정에서 약물 부작용으로 탈모증상이 개선되는 것이 확인되었고, 지금은 탈모치료 목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여기서 약물의 부작용이란 의도하지 않은 모든 증상을 뜻함). 발기부전 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비아그라' 역시 처음부터 성기능 개선을 목표로 개발된 약이 아니다. 원래는 혈압개선을 목적으로 개발하였으나 임상실험 도중 의외의 긍정적(?)인 부작용을 발견하면서 약물의 최종 사용목적이 달라지게 되었다.
인류 의학사를 훑다 보면 우연한 발견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 엄청난 의학 발전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꼭 학문의 발전이 아니더라도 뜻밖의 성장은 우리의 삶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다가 의외의 장소에서 뜻밖의 선물을 마주하곤 한다. 나 역시 어느 날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상선 없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래서 일상의 불편함을 겪고 있지만, 그로 인해 긍정적인 변화를 발견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옛날의 나는 참 덜렁대고 집중력도 부족하고 계획이랄 게 딱히 없는 성격이었다. 한 번은 가위를 손에 들고서 '내 가위가 어디 있지?'라며 2시간 동안 온 집안을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2시간 온 집안을 다 뒤지고도 도저히 못 찾겠다며 이마에 땀을 훔치는 마지막 순간, 내 손에 들려있던 가위가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또 언젠가 체력측정을 위해 운동장 오래 달리기를 하다가 그만, 운동장 달리기 횟수를 까먹는 바람에 반 전체 학생이 나 때문에 다음날 다시 오래 달리기 체력측정을 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이런 굵직한 사건들만 놓고 보아도... 과거의 나는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과는 제법 거리가 먼 느낌이다.
가끔의 대박사건(?)이 내게 시련을 주었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이었고,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 나는 자신의 성격에 대하여 딱히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다. 손에 가위를 들고 2시간을 허비하건 말건, 계획 없이 놀아제끼다가 얼렁뚱땅 숙제를 몰아서 하건 말건 내 알바 아니었다.
그러던 내가 MBTI성격 유형 극 J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갑상선암 수술이었다. 내가 갑상선암 수술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갔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교육열에 불태워지는(?) 대한민국의 중학생으로서 슬슬 입시를 준비해야 할 시기였다. 남들 체력의 반토막으로 입시준비를 시작하려니 살면서 처음으로 위기감이란 것이 들었던 것 같다. 남들은 학원 뺑뺑이 돌며 나보다 훌쩍 앞서 나가는 것을 보고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큰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수술 후 내게 주어진 것은 시간뿐이었기에, 살면서 처음으로 '스케줄 관리'라는 것을 시작했다. 최소한의 에너지와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 그것은 '계획'밖에 없었다. 사소하게는 방청소, 목욕하기 같은 일상생활 계획부터 숙제, 시험공부 계획까지 모든 것을 적고 확인하며 최소한의 시간과 동선으로 일상을 살려고 노력했다. 처음부터 성실해지고자 계획적인 삶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J의 삶을 살며 어이없는 실수나 사고를 줄일 수 있었다. (성격이 계획적이어야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실수로 놓치는 것'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갑상선암 수술은 제거술 1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앞으로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삶의 장벽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나는 내게 맞는 답을 찾고, 행하고, 그래서 마주한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불행인 줄 알았던 우연이 다시 보면 행운일 수 있다는 것을, 삶의 이른 시기에 깨달아서 이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닐까. 지금의 나는 내 모습이 좋다. 그리고 앞으로 변화하게 될 나의 모습도 좋아하려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