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밸리(Happy Valley,跑馬地)에서의 반나절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홍콩을 좋아했다. 동방불패, 천녀유혼, 백발마녀전, 중경삼림... 내 또래 세대에도 맞지 않고,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조차 가물하지만 비디오 속에서 펼쳐지는 별세계에 나는 한껏 매료되어 있었다.
장국영, 유덕화, 양조위, 임청하, 왕조현... 내가 커서 홍콩에 가게 된다면 좋아하는 이 스타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만 쉬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리고 충분히 실현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국영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아직도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은 그날이 오기 전까지. 아직도 그 소식을 접하던 날의 공기, 냄새를 기억한다. 잊지 못하는 순간은 감정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기억에 남게 된다.
그렇게 내가 간 첫 번째 홍콩에서 장국영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추억하는 공간에 가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그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벌써 20여년 전, 지금보다 더 한정적인 정보 수집의 세계에서 그나마 장국영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촬영지 혹은 단골 식당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가 즐겨가던 딤섬집 ‘예만방’에 가기로 했다. 예만방은 맛있기도 하지만, 보통 아침부터 저녁 식사 전까지만 판매하던 다른 딤섬집과 달리 홍콩 최초로 한밤중에도 딤섬을 판매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해피밸리에 위치해 있고, 그곳은 (맛집 탐방러가 아닌) 관광객이 굳이 일부러 찾아갈 만한 동네는 아니다. 홍콩섬 완차이 남부에 위치한 해피밸리는 홍콩 초기 개발지역 중 하나라, 해피밸리 마장과 인접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장국영에게 해피밸리는 그가 유학을 떠나기 전 다닌 초등학교도 위치해있으며 누나가 사는 곳이니 자주 방문하여 친숙한 동네였으리라.
처음 들어갔을 때는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았다. 과거로 걸어들어온 기분이 들게 하던 옛스러운 내부 인테리어, 흰 유니폼을 차려입고 트레이를 밀고 다니던 노년의 종업원들. 높은 천장에선 팬이 돌아가고, 내부에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미 한참 전이지만 한국에서라면 경로 우대 운운할 연세의 어르신들이 서빙을 하고 주문을 받는 모습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은 이 분위기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당시 내게 가장 큰 과제는 메뉴 주문이었는데, 갱지에 붉은 글씨로 공포의 번체 메뉴가 세로로 나열되어 있고, 연필로 주문 메뉴를 체크해야 했다. 지금처럼 찍어서 번역기를 돌릴 수도 없던 시대라 한 글자 한 글자 분석(?!) 하며 주문했던 기억이 난다.
듣기로 장국영은 주 1회는 이 곳에 방문했다고 한다. 누나, 조카들과 둘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 딤섬을 먹었을 그를 두번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첫 방문으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예만방을 다시 방문했다. 공사 중인 외관을 제외하고 크게 달라진 곳은 없어 보였다. 예전에 한장짜리 주문서와 달리 길게 접어 나온 메뉴판의 메뉴 종류가 더 많아진 정도?
변화가 빠른 홍콩에서 10년이 지나고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공간이었다.
그런 예만방과 같은 공간이 바로 ‘모정’이다. 첫 방문 때는 다음을 기약했었는데 그다음이 바로 10년 후가 되어버릴 줄이야. 그간 똑같이 다음을 기약하며 놓쳐버린 퀸즈 카페 등을 떠올리면 아쉬움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갈 수 있는 곳은 그 곳이 존재할 때 바로 가야 한다!
모정에 들어가 카운터석에 앉아 장국영이 가장 좋아했다는 니쿠쟈가(고기감자조림)와 사케를 주문했다. 예만방에서 식사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장국영 세트를 주문하기는 좀 버거웠던 위장...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속속 들어오고, 주인과 스몰토크를 나누고, 왁자지껄 각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공간에서 장국영은 친구들과 함께했던 거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리를 뜨기 전 용기를 내서 나는 장국영의 팬이다. 그가 이곳 단골이었다고 들었는데 그를 기억하냐고 묻자 종업원이 왜 진작 말 안 했냐고 잠시 기다리라더니 스크랩북을 가지고 왔다. 그 안에는 장국영과 그 외에도 이곳을 방문한 스타들의 사진이 빼곡히 스크랩되어 있었고, 모정을 방문한 일본 팬들의 감상문이 실려 있었다.
나는 그 감상문을 통해 이곳에서의 장국영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모정에는 다른 스타들도 많이 방문하는데 콧대 높은 사람도 있었지만 장국영은 싹싹했다던가, 방문할 때마다 주인장에게 괜찮아요? 피곤해요?라고 일본어로 매번 물었는데, 괜찮아요?(大丈夫?) 피곤해요?(疲れてる?) 안녕(さようなら)는 모정 사람들은 50회 이상 들은 소위 '장국영 3종 세트'였다고 한다.
또 성월동화 찍고 와서는 "여배우 타카코 토키와라는 사람 유명해?" 물었던 적도 있다.
장국영은 방문할 때 늘 예약을 하고 와서, 저녁에 3시간 정도 머물렀다.
그의 지정 좌석은 가게 중앙 테이블의 벽 쪽. 좌측에는 늘 당학덕이 앉았고, 그 외의 멤버는 항상 바뀌었는데 3명에서 5,6명이 방문했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편하게 나타나 미소 지으며 본인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 주로 동행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고 한다.
장국영의 예약이 들어오면 주인장은 그에게 맞춘 요리를 생각한 모양이다. 장국영은 보통의 튀김이 싫어서 특이하고 신기한 것이 먹고 싶다고 리퀘스트한 적도 있고, 담백한 계열을 좋아하는 장국영에 맞춰 특제 무 샐러드, 샐러드 말이, 그리고 장국영이 가장 좋아한 니쿠자가 등을 준비했다고 한다.
가게 안에서 담배 피워도 괜찮다고 권해도 일본요리를 먹을 때는 담배는 안 피우는 게 좋다고 이야기하던 장국영. 처음 건배는 맥주로 하지만 그다음에는 좋아하는 야마다니시키(山田錦)를 차갑게 늘 한 병 열어두었고, ‘좋은 술을 적당히’가 그의 모토지만 기분 좋게 취해 2차를 가기도 했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편하게 지정 좌석에 앉아 미소 지으며 동행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모습, 서툰 외국어로 인삿말을 나눴을 모습, 기분 좋게 취해 2차를 가기 위해 나서는 모습...항상 소년 같던 그 얼굴이 절로 상상이 갔다.
한 사람이 떠나고 강산이 바뀐 후에나 그 사람이 가던 곳을 방문했는데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함께 추억한다는 건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모정을 나오면 같은 라인에 장국영이 2차로 종종 방문했다는 알라바가 있다.
알라바는 영화감동 이동승이 주주 중 한명으로 만든 술집으로 술 뿐만 아니라 당구나 가라오케 등의 설비를 갖춘 곳이다. 장국영을 비롯하여 주성치, 곡덕소, 장달명도 방문했다고 한다.
알라바에서는 가라오케에서 장국영이 라이브로 노래 부르는데 설마 장국영이 왔을 거라 생각도 못 한 손님이 확인하고 깜짝 놀랐던 일, 메뉴에는 아이스크림이 없는데 늘 장국영이 주문하기 때문에 모정과 알라바의 사이에 있는 세븐일레븐에서 사 온 하겐다즈의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내놓았던 에피소드 등이 있다.
그리고 그가 당학덕과의 유명한 파파라치가 찍힌 곳도 이 알라바와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위치한 길가이다. 세븐일레븐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해피밸리에는 그를 추억할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더 있다. 시간이 늦어 방문하지 못했지만 장국영이 다니던 초등학교. 그리고 그의 위패를 모신 동연각원 송은당이 있다. 매니저 진숙분이 팬들을 위해 위패를 모신 샤틴 만복산과 달리 동연각원은 그의 누나가 가족들만을 위해 위패를 모신 곳이다. 알아보니 방문이 가능하여 다녀왔다.
누나가 모신 곳이다 보니 위패에 남동생(弟)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평일 애매한 시간이다 보니 방문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왜 눈물이 핑 도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리숙하던 영채신의 모습으로 처음 알게되었는데 이제 더이상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까? 그렇다면 그는 좀 덜 외로울까.
2016년, 장국영의 서거 13주기 그리고 공교롭게도 탄생 60주년이 되는 해에 바이두에서는 팬들이 그에게 듣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최첨단 정서음성 합성 기술을 이용해 그의 목소리로 공개한 적이 있다. 실제 꺼거가 보낸 메시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해 4월 1일이 되면 이 편지를 꺼내 읽어본다.
13年了,久等了,辛苦你们。
13년이 지났네요, 오래 기다렸죠, 여러분 고생 많았어요.
很久不见,你们还好吗?这么多年过去,谢谢你们始终记得我,昨天已经过去很久,我现在很好,哪里都没去,始终在光阴里,所以你们不要哭,不要再为我哭了。我知道,过去这么久,你们都长大了,经历了那么多相逢和别离,停留和出发,拥有和失去,一定懂我在说什么,我知道你们懂。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잘 지내시죠?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늘 저를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 세월이 정말 오래되었네요. 저는 아주 잘 지내요.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늘 이 세월 속에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 울지 마세요, 다시는 절 위해 울지 마세요. 저는 알아요. 이렇게 오래 시간이 지났고, 여러분 모두 성장했다는걸요.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겪었고, 잠시 멈췄다 출발하고, 가진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고. 여러분은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아실 거예요. 이해했을 거라 믿어요.
时间一定过得比你们想象中还要快吧,世界是不是也和自己想象中不太一样,长大很乏味,很没意思,也很疼吧,会偶尔失眠,偶尔喝醉,偶尔孤单,偶尔沉默,越是长大,失去的就越来越多,但也没什么别的办法对不对。这些我都懂,因为这就是长大的无数个瞬间。昨天还不能面对的别离,今天就必须要去面对了。昨天还不能原谅的爱人,今天就必须要原谅了。昨天没说出口的我爱你,今天发现再也没机会了。
시간은 여러분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가죠. 세상도 상상했던 것과 다르고요. 성장해간다는 건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고 또 많이 아프기도 하죠. 때로는 잠 못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독하기도, 때로는 침묵하기도 해요. 커갈수록 잃는 것도 점점 많아지고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그렇죠? 전 다 이해해요. 왜냐하면 이런 건 성장해가는 수없는 순간들이거든요. 어제는 대면하지 못했던 이별을 오늘은 맞이해야만 하고요, 어제는 용서하지 못했던 사랑하는 이를 오늘은 용서해야만 하고요, 어제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그런 기회가 다시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人生已经太匆匆,不要再苦苦的追寻昨夜下过的雨,过去就过去了,接受它,拿起它,放下它,才能真的放自己一马。希望你们不孤单,勇敢地为自己喜欢的生活而活,永远站在光明的角落,我只希望你们开心快乐地生活。
인생은 너무 빠르게 지나가네요. 다시는 어제 내린 비를 찾으려 애쓰지 마세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에요. 과거를 받아들이고, 들어서 내려놓으세요. 진정으로 자신을 놓아주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외롭지 않고, 용감하게 좋아하는 생활을 위해 살면서, 영원히 빛의 모퉁이에 서있길 바라요. 전 단지 여러분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렇게 다녀온 지도 10년이 되어간다. 코로나의 여파로 예만방이 폐업했다고 들었다. 더이상 갈 수 없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추억할 공간이 또 하나 사라졌다 싶어 속상하다. 내가 다시 홍콩에 가게 된다면, 이 추억의 공간들은 과연 얼마나 남아있을까.
'어제 내린 비를 찾으려 애쓰지 마세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에요.' 그래요, 알아요. 알지만 아쉽고 속상한걸요.
번외) 언덕이 많은 해피밸리에서 소화시킬 겸 걷다 보면 성 마가렛 성당이 보인다. 1925년에 지어진 성당이니 이 성당도 곧 100년이 된다
영화 <천장지구>에서 아화(유덕화)와 죠죠(오천련)이 이 성당에서 둘은 사랑의 서약을 올린다.
늦은 밤 방문하니 영화 속 그 분위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해피밸리Happy Valley 跑馬地>
- 동연각원 東蓮覺苑 Tung Lin Kok Yuen
15 Shan Kwong road (山光道 15)
- 로즈리힐 스쿨 Rosaryhill school
41B Stubbs Rd (41B 司徒拔道)
- 예만방 譽滿坊
Dim SumThe Art Of Chinese Tit Bits 譽滿坊
G/F 63 Sing Woo Road, Happy Valley (跑馬地成和道63號地下 )
- 모정 Bojyo Japanese Restaurant 慕情日本料理
G/F, 18 King Kwong Street, Happy Valley (跑馬地景光街18號地下)
- 알라바 Alabar
G/F, 38 King Kwong Rd (跑馬地景光街38號地下)
- 그외) 성 마가렛 성당 St. Margaret's Church 聖瑪加利大堂
2A Broadwood Rd, Leighton H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