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사랑을 잃고, 서울에서 다시 그 기억을 쓰는 사람.
이 이야기는 뉴욕의 여름,
허드슨 강변의 바람과 대마초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시작돼요.
최이선(Ethan Choi), 뉴욕의 펀드 매니저.
상하이에서 자라고, 교토를 거쳐 예일에 머물렀던 남자.
숫자와 원칙으로 살아왔지만,
마음의 한쪽에는 여전히 음악과 불빛이 남아 있었어요.
한지유(Clara Han), 서울의 젊은 역사학자.
컬럼비아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도시에서 조용히 강의하며 살아가던 여자.
사람들에게는 세련되고 단정한 교수로 보였지만,
그녀 안에는 늘 조금 늦게 오는 자유가 있었어요.
두 사람은 코로나 시절,
클럽하우스라는 음성 채팅방에서 우연히 말을 섞게 되었어요.
얼굴을 모른 채,
목소리로만 이어진 대화가 그들의 세계를 바꿨어요.
서울의 여름이 끝날 무렵,
그녀는 결혼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그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그녀의 웃음 속에서 진심을 느꼈어요.
그리고 몇 해 뒤,
그녀는 다시 뉴욕으로 향했어요.
허드슨 강을 따라 시티바이크를 타고,
센트럴 파크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김밥을 꺼내며 하늘을 바라보던 오후의 기억 —
그때의 자유가 다시 그녀를 불렀거든요.
이 이야기는
현실에서 경험한 감정과
상상 속의 자유 사이에 놓인 두 사람의 이야기예요.
최이선(Ethan Choi)과 한지유(Clara Han), 뉴욕의 시작
비행기 도착 시간은 오전 9시 20분.
이선은 두 시간 전, 새벽빛이 희미하게 비칠 때 눈을 떴다.
오늘은 허드슨을 달리지 않았다.
대신, 집을 정리했다.
탁자 위에 쌓인 서류를 가지런히 하고,
세탁실 문을 닫고,
냉장고의 미세한 윙윙거림이 신경 쓰여 잠시 플러그를 뺐다.
욕실의 수건은 새것으로 바꿨다.
조말론 라임 바질 앤 만다린.
호텔보다 조용한 향.
그녀의 향보다 강하지 않게.
부엌에는 잔 하나를 깨끗이 씻어 올려두고,
창가 선반 위엔 하이드레인지아 한 송이를 꽂았다.
색은 옅은 청색.
기억의 색과 비슷했다.
공기가 다듬어진 집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냄새가 났다.
구름이 낮게 깔린 아침,
JFK 활주로 위로 햇살이 희미하게 번졌다.
도시의 경계가 보이지 않았다.
이선은 게이트 앞에서 서성였다.
전광판이 깜빡였다.
ICN — JFK.
“10분 일찍 도착.”
그녀의 메시지가 떴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늘 시간보다 빨랐다.
입국 게이트 너머로 사람들의 얼굴이 흘러나왔다.
그 틈에서,
카키색 코트를 입은 한 여자가 걸어왔다.
한지유.
피로가 가볍게 얹힌 얼굴.
그런데 눈빛은 여전히 또렷했다.
“오랜만이에요.”
“오느라 고생했어요.”
그녀의 캐리어를 받아들었다.
그들의 그림자가 공항 바닥 위에 나란히 놓였다.
공항 앞에서 우버를 불렀다.
검은 SUV 한 대가 조용히 다가왔다.
창문이 내려가자,
차 안에서는 희미한 커리 냄새가 섞인 공기가 흘러나왔다.
“Mr. Ethan?”
“Yeah, that’s me.”
운전사는 인도에서 막 이민 온 듯한 남자였다.
짙은 피부, 낡은 네이비색 점퍼,
그리고 아직은 어색한 영어.
“Where… going?”
그의 발음은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West Village,” 이선이 말했다.
“Ah, West Village, nice area. Very clean. Small… stleet.”
그는 ‘street’을 ‘stleet’이라 발음했다.
지유가 창밖을 보며 웃었다.
그 미소가 차 안의 공기를 풀었다.
운전사는 백미러 너머로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From… Korea? Many Koreans now in New York. Good food! K-town!”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Yes, we know. We like K-town.”
“Ah, very nice! My wife like Korean drama! Crash… Landing… what name?”
지유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Crash Landing on You.”
“Ah yes yes! That one! Very good story!”
그는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몰았다.
라디오에선 인도 팝송이 흘러나왔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리듬은 도시의 진동과 비슷했다.
차가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며
도시의 공기가 달라졌다.
창밖으로 흐릿한 햇살이 유리창에 부서졌다.
“이 도시, 냄새가 그리웠어요.”
지유가 말했다.
“커피 대신 갓 내린 에스프레소의 향,
지하철 철제 난간에 밴 금속 냄새,
그리고 오래된 브라운스톤 벽돌에서 올라오는 약간의 먼지 냄새.
그게 섞여서 뉴욕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따뜻해요.”
이선은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도시를 향기로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차는 맨해튼으로 들어섰다.
도로의 결이 달라지고,
빌딩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운전사가 말했다.
“Arrive soon! West Village. Very expensive, sir!”
“Yeah, I know,” 이선이 웃었다.
“Maybe one day I drive there too!”
그의 말에 지유가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이 공기 중에 가볍게 흩어졌다.
이선은 창밖을 바라봤다.
도시가 그들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도착.
그는 차 문을 열며
운전사에게 말했다.
“Thank you, have a good day.”
“God bless you, sir! And… madam!”
그의 발음은 서툴렀지만, 인사는 진심이었다.
문이 닫히자,
공기의 냄새가 달라졌다.
허드슨의 바람,
오래된 벽돌의 냄새,
그리고 아직 식지 않은 거리의 열기.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지유가 말했다.
“이 시간의 도시는 늘 그렇죠.”
이선이 대답했다.
그녀가 코트를 벗으며
거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탁자 위의 책들,
정돈된 소파,
조말론 향이 은근히 퍼지는 욕실.
“준비 많이 했네요.”
“그냥, 오래 기다렸던 거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 향, 기억날 것 같아요.”
“당신이 떠나도 남아 있을 거예요.”
그 말은
허드슨의 물빛처럼 잔잔하게 흘러갔다.
© 브런치 연재 · New York Inter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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