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영화는 단순 오락을 넘어 인간의 감정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한 편의 작품 안에는 웃음과 눈물,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관객의 마음속 깊이 스며든다. 때로는 그 이야기 속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며 위로를 얻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오래된 상처가 다시금 떠오르기도 한다.
무뎌진 일상 속에서 쉽게 느끼기 어려운 감정들을 다시 일깨워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콘텐츠의 힘이다. 특히 슬픔을 다룬 작품들은 우리가 애써 덮어 두었던 감정을 마주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는 세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지난 3월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바닷가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세대와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과 인생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품은 한 소녀와 소년의 풋풋한 첫사랑에서 시작해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두 인물의 굴곡을 그린다.
청년 시절 오애순(아이유)은 제주에서 태어난 문학소녀다. 거친 현실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인물로, 육지로 떠나 더 넓은 세상을 향한 꿈을 품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애순(문소리)은 좌판에서 오징어를 파는 생활인이 돼 있다. 한때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녀는 세월 속에 꿈을 묻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잊지 못한 시절의 잔상이 남아 있다.
그 곁에는 언제나 관식(박보검·박해준)이 있다. 청년 시절의 관식은 무쇠처럼 묵묵하고 헌신적인 남자다.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서툴지만, 그 마음만큼은 순수하고 뜨겁다. 중년이 된 관식 역시 가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인물로 세상과 맞서며 살아간다. 그는 그저 가족이 평안하기를 바랄 뿐, 자신을 위해 어떤 욕심도 내지 않는다.
이야기의 또 다른 주축인 금명은 애순과 관식의 장녀로, 시대의 무게를 짊어진 세대의 상징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을 이어가고, IMF 이후 홀로 회사를 세워 어머니에게 잃었던 집을 되돌려주는 인물이다. 그의 인생 여정은 부모 세대의 헌신과 청춘 세대의 도전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고리를 보여준다.
‘폭싹 속았수다’는 계절의 흐름으로 인생을 표현한다. 봄의 설렘, 여름의 열기, 가을의 고요, 겨울의 쓸쓸함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생의 굴곡을 그린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가족의 사랑, 부부의 인연, 부모와 자식의 정이 잔잔히 스며들며 관객은 어느새 그들의 삶을 함께 살아내는 듯한 감정을 느낀다.
2018년 방영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시대의 상처와 개인의 사랑이 교차하는 대서사극이다. 구한말 조선의 격동기 속에서 각자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병헌이 연기한 유진 초이는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 해병대 장교가 된 인물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조선을 떠나야 했던 그는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며 자신의 정체성과 상처를 마주한다. 차가운 외면 속에 숨은 복잡한 감정은 시대의 잔혹함을 상징한다.
김태리가 연기한 고애신은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이자 의병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총을 들고, 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다. 유진 초이와의 사랑은 서로 다른 신분과 운명 속에서 부서지고 또 이어지며, 그들의 관계는 조국의 운명처럼 쓸쓸하게 흘러간다.
변요한의 김희성은 부유한 가문의 청년이지만, 부패한 현실을 부정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고애신을 향한 마음을 끝내 이루지 못하지만, 그의 사랑은 순수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유연석의 구동매는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천대를 견디며 살아온 인물이다. 칼을 손에 쥐었지만, 그 마음속에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다.
작품은 일본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격동의 조선을 생생하게 비춘다. 각기 다른 신분과 운명을 지닌 인물들은 혼란의 시대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운다. 누군가는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누군가는 버림받은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목표와 상황을 가진 이들이지만, 그 끝에는 ‘희생’이라는 공통된 결이 있다. 누군가는 사랑을 위해, 누군가는 조국을 위해 자신을 태워 버린다. 드라마는 그들의 희생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총칼보다 뜨거운 신념과 마음의 불꽃이 시대를 비추며 시청자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2007년 개봉한 영화 ‘열한번째 엄마’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매번 새로운 새엄마를 맞이하는 소년 재수의 시선을 통해, 진정한 관계란 무엇인지 묻는다.
재수는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스스로 생계를 이어간다. 아버지의 연인들은 늘 잠시 머물다 떠났고, 열한 번째 여자가 찾아오자 그는 또다시 마음을 닫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와 조금씩 가까워지고, 서로의 외로움과 서툰 온기를 나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을 통해 가족이 돼 간다.
영화는 대단한 사건이나 자극적인 반전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표정과 침묵, 짧은 대사로 마음의 온도를 보여준다. 재수와 새엄마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세상에서 밀려난 두 사람이 조금이나마 안식을 찾는 순간의 슬픔이 담겨 있다. 마지막 이별 장면은 많은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열한번째 엄마’는 피로 이어지지 않은 관계에서도 진심이 있다면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상처를 지닌 두 인물이 서로를 통해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는 과정은, 슬픔 속에서도 인간에게 남은 따스함을 일깨운다.
세 작품은 모두 슬픔을 다루지만 방향은 다르다. ‘폭싹 속았수다’는 세대 간의 사랑과 헌신을, ‘미스터 션샤인’은 나라를 잃은 시대의 상처와 희생을, ‘열한번째 엄마’는 관계 속의 회복과 용서를 이야기한다. 공통점은 슬픔이 단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을 성장하게 만드는 힘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수많은 이별과 후회가 있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여전히 마음속에 남은 따뜻함 덕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