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경각심을 가지고~"
"집안에 환자가 있다는 건 말이야
잠깐씩 찾아오는 평안한 순간에도
‘이 평화가 얼마나 갈까?’하는 불안 속에 사는 거야.
그런 순간을 반복하다 보면 한 순간 이런 생각이 들지.
‘그럴 필요 뭐 있나? 불안해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이 순간의 평화를 즐기지 못할 건 뭐야?’
근데 함정이 뭔지 알아?
그 평화를 편안히 받아들이다 보면
방심의 순간이 온다는 거야.
그리고 방심하는 순간 사고가 발생해.
집안에 환자가 있다는 건 말이야....
그런 순간들의 연속이야."
엄마는 코로나를 앓고 난 이후인 10월에 무릎인공관절 삽입 수술을 했다. 어깨, 고관절에 이어 세 번째 인공관절 수술이었다. 고관절 수술 후 딱 6개월 만이자 코로나로 기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진행한 수술이라 수술 후 예후는 좋지 않았다. 고관절 수술 이후 침상 요양, 그리고 무릎 통증으로 걷기 운동을 거의 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구부리고 펴는 등의 기능적 재활은 잘 됐지만, 엄마의 소원인 걷기는 쉽지 않았다.
꾸준한 운동으로, 장기간에 걸쳐 근육을 회복해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겨울 동안 서울에 머물며 엄마는 운동을 계속했다. 다행히 지상에 차들이 다니지 않고 길과 공원이 잘 정비된 환경이라, 휠체어를 타고 나가 공원에서 걷기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동생과 내가 긴 여유가 생기면 2~3주씩 시골에 가서 지내다 오기도 했다.
이제 운동만 열심히 하면 회복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려던 나날이었다.
희망이 지나쳐 방심이 되었을까?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서 엄마는 앓는 날이 많아졌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것저것 엄마가 좋아하는 걸 챙겨줘도 먹고 나면 속이 답답하다며 힘들어하기 일쑤였다.
병원에서는 식도염이라고 했다. 뭐든 엄마 편한 대로 해 준다는 것이 먹고 바로 눕는 것을 제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끼리 자책도 했다.
원래 소화기가 약했던 엄마는 당시 어떤 음식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고, 우리는 엄마가 좋아하는 전복, 낙지를 비롯해 소고기, 채소 등 다양한 식재료들을 갈아 미음도 쑤고 죽도 쑤고 소화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 조금이라도 먹게 했다. 그래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 정형외과 약을 모두 중단했다. 매일 맞던 골다공증 주사까지 중단하고 식이요법을 꾸준히 하고 나자 조금씩 호전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상태가 나아지자 내과에 가서 위내시경 검사와 영양제 주사를 맞았다. 내시경 상 큰 문제는 없다는 진단이었다. 그런데 병원에 다녀온 다음날부터 엄마의 상태는 갑자기 나빠졌다.
호흡곤란이 수시로 찾아왔고, 소화기능도 다시 떨어졌다.
상태가 좋아져 죽에서 밥으로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미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엄마 상태는 좋아지지 않아 다니던 대학병원 내과에 다시 예약을 하고 기다리는 중 간호사로 오래 일한 큰언니 친구의 조언을 듣게 됐다.
“노인들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기력이 많이 떨어져. 그런 경우 대학병원에 가면 온갖 검사하느라 지치서 오히려 더 힘들어질 수 있으니까, 우선 동네병원에서 영양제 주사를 맞고 집에서 잘 돌봐드려.”
조언에 따라 집 근처 병원에서 영양제 주사를 맞았다.
아미노산과 멀티비타민을 섞은 주사라고 했다. 그 이후 엄마는 조금씩 기력을 회복했다.
식사도 미음이나 죽이 아닌 밥으로 바뀌면서 기력이 더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엄마는 2023년 봄에서 여름에 걸쳐 건강이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며 보냈다.
그 몇 달간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는 가장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다.
걷는 것은 기대도 하지 못하고, 그저 엄마가 고통스럽지 않기만을 바라던 시간이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엄마가 숨을 쉬는지 가만히 지켜본 날도 있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엄마는 집안에서는 보행보조기를 이용해 혼자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혹시 넘어질까 봐 화장실을 가거나 걷기 운동을 할 때면 우리는 늘 엄마 뒤에서 따라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또 마음을 놓았었나 보다.
그날도 화장실에 다녀오는 엄마를 뒤에서 따라오던 참이었다.
“나 혼자 소파까지 갈 수 있으니까 너는 니 할 일 해.”
“알았어. 천천히 움직여야 해.”
당부를 하고 주방 쪽으로 막 한 걸음 내딛던 참이었다. 별안간 엄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순간의 장면이 당시도,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보행기의 위쪽을 잡으려고 손을 놓는 순간 옆으로 넘어졌다고 했다. 불행히도 엄마가 넘어진 쪽에는 서랍장이 있었고, 엄마는 모서리에 옆구리를 심하게 부딪치며 넘어졌다. 갈비뼈 골절이었다. 또 몇 달의 시간을 뼈가 붙기를 기다려야 했다.
엄마를 돌보는 우리의 방식도 바뀌어야 했다.
우선 절대로 혼자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1원칙이 됐다.
엄마를 부축하는 방법도 바꾸어야 했다. 이전에는 늘 뒤에서 허리를 잡거나 안아서 엄마를 일으키고 앉혔는데, 이제는 겨드랑이 쪽을 잡아야 했다.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때도 천천히, 조금의 충격도 가지 않게 해야 했고, 걷기 운동도 줄여야 했다. 그때 동생과 나는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모습을 보이면, "경각심을 가지고!"라는 말로 서로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돌이켜 보면 모든 순간이 그랬던 것 같다.
낯설고 힘들다 싶었던 것이 익숙해지면 여지없이 조금 더 편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런 틈을 비집고 방심이 찾아오고, 그건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365일, 24시간 긴장할 수도 없는 일.
그래서 우리는 농담처럼 당시 유행어였던 “경각심을 가지고~~”를 외치며 서로를 격려했고, 그냥 하루하루 일희일비하며 살기로 했다. 엄마가 한 걸음 더 걸으면 손뼉 치며 좋아하고, 밥 한 숟가락 덜 먹으면 둘이서 잔소리 폭격을 하고, 엄마가 푹 잘 자고 난 아침이면 우리도 잘 잤다고 마주 보며 웃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슬픈(悲)’ 날보다 ‘기쁜(憙)’ 날이 점점 늘어나고, 이제 엄마와 텃밭을 가꾸는 나름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