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예전 류시화 시집에서 이 구절을 봤을 때, 무릎을 탁 쳤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요즘 회귀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 또한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지만 난 요즘 다른 의미로 그 구절을 회상한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
아마 우린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병상 생활이 1년쯤 지난 어느 날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참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용감하게 했겠지?”
알면 겁나서 할 수 없는 일, 모르니까 닥치는 대로 해 낼 수 있는 일도 있는 것이다. 우린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일이 닥칠 때마다 최선을 다해 그 순간만 넘기자는 마음으로 2년여의 시간을 보내왔다.
고관절 수술을 마치고 집에 온 첫날, 엄마는 병원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우리도 엄마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충만한 날이었다. 사실 엄마가 병원에 있는 동안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은 늘 불안했다.
통증이 더 심해지지는 않았을까?
가져다준 밥은 좀 먹었을까?
잠은 잘 잤을까?
시골 노인네라고 서울 대학병원 사람들이 무시하고 말을 안 들어주지는 않을까?
누구보다 자존심 강하고 자부심도 강한 엄마인데, 우리 집 딸 넷을 다 합해도 엄마 하나보다 못할 거라고 우리끼리 얘기할 만큼 자랑스러운 우리 엄마인데, 다니다 보면 시골에서 농사짓다 온 노인이라고 은근히 아래로 보는 시선들을 느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퇴원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침상 요양. 말이 좋아 요양이지 침대 위에서 꼼짝 못 하고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먹고, 자고, 씻고, 심지어 싸는 것까지 모든 것이 침대 위에서 이뤄진다. 먹고 자는 건 사실 아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씻고, 싸는 건 다른 문제였다.
침대 위에서 머리를 감아야 하는 첫날. 우리 셋은 온갖 고민 끝에 침대 곳곳에 비닐을 깔고 한 사람이 엄마 상체를 안아 받친 후 머리 아래쪽에 대야를 놓고 다른 한 사람이 머리를 감겼다. 셋 다 땀을 뻘뻘 흘릴 만큼 힘이 들었다. 물론 물 없이 감는 샴푸가 있지만 병원에서 내내 그렇게 생활했던 엄마는 그걸 싫어했다. 우리 역시 엄마가 상쾌하게 생활했으면 싶어 제대로 씻겨 주고 싶었다.
첫 샤워하는 날. 인공고관절 수술한 부위는 쉽게 빠질 수 있는 데다, 골반뼈는 부러진 상태라 하체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욕실로 옮겨야 했다. 욕조를 넘어가기 힘들어 욕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엄마를 눕혀놓고 씻었다. 동생과 둘이서 한 사람 엄마를 안고 한 사람은 씻기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나중에는 둘이 같이 할 필요도 없이 혼자서도 엄마를 옮기고 씻기고 말려서 눕히는 것까지 가능할 정도로 능숙해졌다. 그런 능숙함을 얻기까지 과정이 이제는 잘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사실 배변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기저귀를 썼다. 병원에서 쓰던 대로 성인용 겉기저귀, 속기저귀, 패드까지 깔아 놓고 생활했다. 하지만 패드는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구겨지고, 기저귀는 엄마에게 물리적 답답함과 심리적 거부감을 동시에 가지게 하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는 기저귀를 쓰지 않았다. 소변은 소변기를 이용하고, 대변은 변의가 있을 때만 기저귀에 받아내 버리는 식으로 해결했다. 누워서 배변을 해결한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은 적지 않아서 그걸 없애기 위해 우린 엄마와 많은 대화를 했다. 특히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우리에게 너무 미안해하는 엄마의 심적 부담을 없애기 위해 그 과정을 재미있는 농담으로 바꿔 이야기를 했고, 그렇게 웃으며 적응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환자와의 동행은 늘 새로운 상황 발생과 숱한 의문들이 함께 하는 나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