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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영 Jan 06. 2025

사서교사라서 좋겠다






사서교사라서 좋겠다


사서교사로 학교도서관에서 일하다 보면 꼭 듣는 얘기가 있다. '혼자 이 넓은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이나 읽고 좋겠다’는 얘기다. 새로 발령을 받아 가거나 해가 바뀌어 새롭게 전보 오는 동료들은 한 번쯤 이런 얘기를 한다. 이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순간 망설여지는데 우선 드는 생각은 소심한 분노이다. 김밥천국에 가서 김밥 말아주는 직원에게 ‘김밥 마음껏 먹어 좋겠다’는 얘기는 안 하면서, 체육교사에게는 ‘체육관에 맨날 운동이나 실컷 해서 좋겠다’는 얘기는 안 하면서 왜 사서교사에게는 책 많이 읽을 수 있어서 좋겠다는 얘기가 그처럼 쉬운지 모르겠다.

‘넓은’ 공간에 ‘혼자’, 책‘이나’ 읽는다는 세 가지 포인트에서 모두 화가 난다. 도서관이 다른 교무실이나 특별실보다 넓은 것은 자료를 보관하고 학생들이 열람하기 위해서 준비된 공간이지 사서교사 혼자 책 읽으라고 만들어 놓은 공간이 아닌데 말이다. 교무실은 다른 동료교사와 공간을 나누어 써야 하는 상황을 알고 있어서 ‘넓은 부분에 혼자’ 부분은 화가 좀 덜 난다. 가끔 무례한 직원이 혼자 있을 때는 냉난방 틀지 말라는 얘기를 할 때만 빼고.

제일 화가 나는 부분은 책‘이나’ 읽는다는 것이다. 사서교사가 학교도서관을 맡아 운영하면서 하는 일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할 일이 없어 보이고 노는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책이나 읽는 거 아니냐고 들리기 때문이다. 처음 몇 번은 멋쩍게 웃으며 넘기기도 했다. 굳이 ‘저도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은 없거든요?, 선생님도 담배 피우는 시간 줄이면 책 읽으실 수 있을걸요?’ 쏴대면서 싸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 정도 한마디에 발끈하는 게 어쩐지 더 이상해서였다.

어느날, 급식실에서 배식을 받으려고 줄을 서고 있었다. 같이 줄을 서고 있던 동료가 인사 겸 한마디를 건네왔다.
“쌤, 혼자 책도 읽고 좋겠다. 나도 사서교사나 할걸.”
밥맛이 뚝 떨어지는 인사였지만 평소 내게 악의도 없고 친절한 동료였기에 그 말이 어쩌면 참 별 뜻 없이 가볍기만 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얘기 많이 듣는데요. 쌤 저도 제가 읽고 싶은 책 읽고 싶어요. 학생들 독서지도할 때 필요한 책을 일처럼 읽는 거 말구요.”
“맞네, 그렇겠네.”

책을 읽는 사람은 안다. 시간이 있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는 것을. 책은 시간을 쥐어짜야 읽을 수 있고 핸드폰 알림과 웹서핑, 앱쇼핑 욕구를 이겨내야만 읽을 수 있다. 물론 수업과 업무를 하다 보면 당연히 일과 시간에는 여유롭게 책을 시간도 없지만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장르,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짬은 없다. 수업에 필요한 책, 독서지도에 필요한 책들을 업무의 연장선에서 겨우 읽을 뿐이다.

물론 사서교사로서 넓은 도서관에 빽빽하게 책이 꽂힌 서가 사이를 둘러볼 때면 그때만큼은 걸음이 느리고 가볍다. 오배가 된 책들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읽고 싶어지는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 권씩 빼들고 서문이나 목차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서교사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고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도서관은 항상 열려 있고 누구든 들어와서 서가 사이를 거닐며 책을 고를 수 있다. 안다. 대부분 그럴 시간이 없이 바쁘고 업무에 쫓기듯 일과를 한다는 것도.

어쩜 매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이런 얘기를 들을까 싶다. 그 이면에는 ‘독서행위’에 대한 동경이 있지 않나 짐작해 본다. ‘나도 시간만 있으면, 내가 사서교사였더라면 나도 책 읽을 텐데, 독서 좋은 거 아는데 나는 시간이 없어서, 사서교사가 아니라서 책을 못 읽는 거야.’하는 씁쓸하고 비겁한 변명 속에 그럼에도 ‘독서’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온통 독서로 빽빽한 일상을 보내고 있긴 하다. 내가 하고 싶은 나의 독서는 아닐지라도 내가 하는 업무 대부분은 학생들이 더 깊고 더 많은 독서를 하기 위함이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모두가 동경하는 독서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혼자 넓은 데서 책이나 마음껏 읽을 수 있어서 좋은 건 아니지만 사람과 책을 이어주려고 고군분투하는 의미에서는 좋은 것 맞네. 괜찮네 사서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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