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도화살

by 까마귀 소년

필자는 물리학자여서 이런 말 하는 게 좀 부끄럽지만 사주를 은근히 믿는 편이다. 내가 사주를 (은근히!) 믿게 된 계기가 있는데 그게 사주가 아니면 잘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 있어서 그렇다. 그건 바로 내 사주에 도화살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대학생 때부터 연애를 꾸준히 했는데 (내가 좋아했던 사람도 있고, 나를 좋아해 준 사람도 있고, 나를 좋아해 줬는데 내가 마음이 없어서 안 사귀었던 분들도 있고 등등) 이는 극악의 성비를 자랑하는 산속 공대의 환경을 생각하고 (전부 다 공대 CC였다), 필자가 가진 볼품없는 외모와 전혀 꾸미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주의 힘을 제외하면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이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도 이해 안 간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웅성웅성 토론하더니 내린 결론이, “너는 일반적으론 인기 없는 타입이지만 모종의 (잘 안 보이는) 매력이 있고, 그 마니아학 취향의 여성들이 너한테 다가오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자기들 멋대로 내기도 하고 그랬다. 친구들이 해석이 맞거나 아님 사주가 강력한 힘을 발휘해 내 찐따력을 이기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냐면, 신기하게도 헤어지자마자 얼마 안 가서 몇몇 여성분들과 바로 얽히게 되었었다. 필자가 주변친구들도 거의 없고, 물리학계를 제외하면 속했던 단체도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것 역시 신기한 현상이긴 하다.



몇몇 여성분을 만나고, 또 그중 몇몇 분들은 나한테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사실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은 경우들이지만 익명성을 위해 몇몇이라 쓰겠습니다), 이분들을 만나면서 내 감정들을 관찰해 본 결과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1. 내가 생각보다 사람을 만날 때 여러 가지 면에서 재는 사람이 되었구나, 2. 이제는 설렘이나 가슴 떨림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였다. 1 이 원인이고 2가 결과인지 아님 2가 원인이고 1이 결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만나는 분마다, 아 이분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좀 엥스럽군, 아 이분은 다른 이유로 좀 별로군 하는 생각들이 나왔고, 또 만나서 밥 먹고 카페 가고 하긴 하는데 별다른 자극들이 하나도 없었다. 만남을 끝내고 집 와서 카톡 하거나 하는 것도 매우 귀찮게 느껴져서 답장도 늦게 하고 그랬다.



그래서 요즘 했던 고민이 A. 나는 무슨 기준으로 사람을 좋아할 것인가? B. 30대부턴 20대 연애와 다르게 에너지도 적고 호르몬도 적게 분비되니 이제 막 가슴 떨림을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되는 건가? 였다. A는 내가 만날 때마다 각기 다른 이유들로 사람들을 밀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게 내 코어가 되는 기준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코어가 되는 이유가 있으면, 나머지 사소한 점들은 나와 달라도, 엥스러운 면이 발견되어도, “그래도 코어의 이유가 있으니깐!” 하고 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B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내 옛 연애들을 되돌아보면 다 2~3번째 만남 안에 가슴떨림이 느껴지고, 좋아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가 되었으며, 사귀기로 한날은 너무너무 행복해서 현실감이 없었다. 이게 단순히 호르몬, 에너지의 문제인지 혹은 이제는 연애 많이 해봤으니 사귀면 하는 것들을 알게 되어서 그다지 기대를 안 하게 되어서 나오는 문제인지, 아님 여전히 어떤 사람은 나한테 가슴 떨림을 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님 에고가 강하지 않았던 20대와 다르게 30대에는 나도 그렇고 상대방도 그렇고 에고가 많이 쌓여서, 나와 다른 점들이 많이 누적되어서 엥스러운 점들이 떨림을 방해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A를 잘 정돈하면 떨림이나 설렘을 느끼는 게 가능해지는 걸까? 근데 직관적으로는, 가슴떨림과 설렘은 언어나 기준을 넘어있는 무언가라 바로 느껴질 것 같긴 한데 말이다.





그러다 최근에 A에 대한 막연한 답을 찾긴 했다. 내가 전 연애를 기반으로 다음 상대에게 기대했던 바를 정리해 봤더니 1) 생각이 잘 맞고 나의 추상적인 사고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2) 개그코드 잘 맞아서 같이 드립 치면서 놀면 재밌는 사람, 3) 게임취향도 일치해서 같이 게임할 사람, 4) 같이 여행도 가고 여가시간도 같이 보내는 사람, 5) 외형적으로는 마르고 귀여운 사람이다. 근데 다 써놓고 보니깐 나는 이런 다양한 나의 욕구를 한 사람에게만 얻으려 했던 것 이 잘못 이였던 것 같다. 물론 저런 초인적인 존재가 있으면 좋겠지만 (전 연애가 그렇긴 했음), 초인적인 존재가 있어도 건강하고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저런 다양한 욕구들을 현재 새롭게 구축되어 있는 내 관계들을 계속 소중하게 여기면서 이 관계들로부터 해소할 예정이다. 추상적인 생각에 대한 이야기나 드립치고 노는 건 연구실 사람들이랑 하거나 (요새 많이 친해짐) 독서토론에서 하거나 (이분들이랑도 조금씩 친해지고, 이제 토론에서 나도 말 좀 하는 중) 하고, 게임은 새로 사귄 많은 게임 친구들 (원피스의 루피 마냥 게임하다 잘 맞으면 동료로 한두 명씩 영입하다 보니 어느새 게임 단체방에 13명 돌파했고 서로 많이 친해짐) 이랑 하고 등등.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깐 연인한테 기대하는 바가 많이 없어진다. 서로 배려해 주고, 좋아하는 마음으로부터 인간적인 따뜻함 느끼고, 세상에 혼자 있다는 느낌 안 들게 해 주고 (물론 혼자 있다는 우울감을 이 사람으로부터 전부 해소하면 안 되고) 휴가 맞춰서 같이 여행 가고 이 정도만 바라게 된다. 그리고 이게 건강한 관계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사람이 와도 내 삶이 크게 변하지 않으면서 서로 적당히 영향을 주고받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깐 누구든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ㅎㅎ.



이제 진짜 많이 회복했다 다음 여자친구여 천천히 빨리 와주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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