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보이- 시간이 날 기다려
헤어진 직후, 너무너무 힘들어서, 직장 보스한테 이야기하고 2달간 본가에서 자택근무 하기로 하고 부모님 집으로 올라왔다. 부모님과 그렇게 애착관계가 있진 않아서 부모님한테 정신적으로 기대고 싶어서 올라왔다기 보단, 그냥 원래 살던 공간에선 지낼 힘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헤어진 지 꽤 된 지금만 해도 같이 갔던 곳 들 지나기면 마음이 아려오는데 당시에는 그 공간에 계속 머문다는 건 상상도 못 했었다. 이번 편에선, 저번 편처럼 전여자 친구랑 연락하거나 하는 직접적인 것들 말고 그 외에 내가 했던 부수적인 일들을 써보려 한다. 30대에 접어들고 시간은 항상 빠르게만 갔는데, 이 기간 동안은 이에 거슬러 시간이 정말 정말 안 가고 현관 앞에서 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 타로+재회 유튜브
이 기간 동안 제일 많이 의존한 유튜브 콘텐츠는 타로와 재회 관련 강의 유튜브이다. 물리학자인 필자의 직업을 생각해 보면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타로 유튜브가 위로가 많이 되었다. 유튜브로 어떻게 타로를?이라 생각하실 수 있는데 영상을 클릭하면 카드 4장 중 하나를 고르고 (고르기 전에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ㅋㅋ) 그럼 해당 카드 설명에 해당하는 부분을 보는 형식이다. 거의 아침저녁으로 챙겨 본 것 같다.
“아 이 전애인분은 우리님을 (시청자를 지칭) 놓을 생각이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언제쯤 연락 오는지도 봐볼게요, 음 3주 혹은 3달 내에요!”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었고, 나는 전여자 친구를 떠올리며 “역시 나를 생각하는구나 그래 나를 버릴 리가 없지!! 좀만 더 버티자! “ 이런 식으로 위로를 얻었던 것 같다. 재회 강의 유튜브는 재회의 기술에 대해 다루는 영상들이다. 여러 사람들의 영상을 봤는데, 겹치는 부분들은,
1. 먼저 연락하면 안 된다 나를 잃을 수 있다는 상실감을 줘야 한다 (노컨택이론).
2. 그동안 문제점을 해결하고 고치고 있어야 한다.
3. 상대가 새로운 연인이 생기면 오히려 더 좋다 (리바운드 관계). 오히려 나랑 비교되면서 더 빠르게 돌아온다.
이 정도였던 것 같다. 전 여자 친구를 너무너무 사랑했어서 매일매일 연락하고 싶었지만 나는 저 이론들을 믿으면서 연락 안 하면서 초인적으로 버텼다. 루틴이 아침에 재회 유튜브 보면서 연락하고 싶은 마음 참고, 밤에는 타로 유튜브 보면서 연락 안온 하루를 위로받으면서 자는 것이었다. 다 지나고 나서 후회되는 건, 결과론적으로 어차피 재회 못 한 거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마음껏 붙잡아 보고 그럴걸 하는 후회도 있다. 이와 더불어서 하나 더 후회되는 건 서로 질릴 때까지 싸우고 헤어진 게 아니었어서 (거의 안 싸웠었다) 좀 많이 싸우고, 서로에 대해 비난도 해보고 화해도 해보고 또 싸우고, 관계가 닳고 닳을 때까지 가볼껄하는 후회도 있다. 결말을 못 보면 뭔가 아쉬우니깐.
재회 주파수 영상 이야기는 물리학자로써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스킵하겠습니다.
2. 오버워치 디코방
헤어진 직후 게임에 많이 의지했다. 혼자 하기 적적해서 게임하다 마음 맞는 사람들 만나면 한 두 명씩 친추하다 보니 온라인 게임 친구들이 득실득실 해졌었다. 디코방도 하나 파서 다 같이 떠들고 그런 날도 많아졌었다. 그러다 하루는 어떤 분이랑 디코하면서 게임하는데, 그분이 “저 최근에 장기연애하다 헤어졌거든요”이라 하시길래 나는 에이 뭐 만나봤자 얼마나 만났겠어하고 “뭐 얼마나 만나셨는데요?”라고 물어봤는데, 그분이 10년이라 하셨고, 나도 바로 “오 저도 10년인데 ㅠㅠ 만나서 술 한잔 하시죠” 해서 같이 만나서 술 한잔했다 (남성분이심).
대화하면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지금 기억나는 건 “헤어지니깐 모쏠이 된 기분이다. 10년 동안 한 사람만 좋아하는 법만 익혀서 이제 새로운 사람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다가가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라는 말을 둘 다 했었다. 근데 미련이 넘치는 나와 달리 그분은 “저는 다시 만날 생각 없어요, A 님도( 필자) 3달 정도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 이러 길래 10년을 만났는데 어떻게 저렇게 금방 정리하셨지?? 했다. 술 좀 더 마시다 보니 그분이 사실을 말해주셨는데, 사실 그분은 연애 5년 차 때 결혼을 하셨었고, 연애 10년 차 (결혼 5년 차) 때 이혼을 하셨다고 했다. 순간 ”앗 이 사람은 나랑 장르가 다른데?? 나는 환승연애인데 이분은 돌싱글즈인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 그래서 다시 만날(수도 없으니) 생각이 없으셨구나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참 그분이나 나나 10년 만나면 거의 똑같은 인간관계를 거쳤을 텐데, 결혼하고 안 하고로 인식이 갈리는 게 이상하면서 좀 그랬다.
디코방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10명이 넘어가게 되었었는데 신기한 게 전부 내향인들만 모이게 되었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약간 인싸처럼 되었고 (본인 슈퍼 INTP), 최근에는 i 들 사이에서 인기 좋을 타입인 것 같다는 칭찬까지 받았다. 헤어지고 나서 나의 새로운 면들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직전에 전여자 친구가 자기가 하는 게임 디코방에 들어가 사람들이랑 맨날 디코하면서 놀고 이런 게 거슬렸는데 (남자들 많아서) 참 별일 아니고 재밌는 관계인데 뭐 그렇게 뭐라 했었나 하는 후회도 약간 했었다.
3. 러닝/독서토론
나름 건전한 취미도 새로 생겼는데 바로 러닝이랑 독서다. 러닝은 헤어진 직후 가슴이 너무너무 답답하고 머리도 아프고 해서 (과호흡도 한번 옴) 무작정 달렸었다. 달리고 나면 감정이 많이 가라앉아서 정말 살려고 뛰었었다. 한번 습관으로 자리 잡으니 계속하게 되어서 지금까지 계속 뛰고 있는데 좋은 습관인 것 같다! 오전-오후엔 물리 같은 창의적인 일을 하고, 저녁엔 러닝을 하고 이거 완전 무라카미 하루키 루틴이잖아? 물론 그 사이사이 유튜브도 많이 보고 게임도 많이 한다. 근데 하루키 형님 시절엔 게임이 없었어서 그렇지 게임 있었으면 하루키 형님도 게임 많이 하셨을 것이다! 여담으로 헤어져서 힘든 건 힘든 건데 왜 몸이 아플까?라고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뭐시기 저시기 메커니즘으로 몸도 아프고 그걸 완화하기 위해 타이레롤을 먹으면 좋다고 해서 타이레롤 도 먹었었다. 먹으니 그래도 잠도 오고 꽤 아픔이 가라앉았었던 것 같다.
독서토론 모임에도 들어갔다. 여기에도 소소한 에피소드가 있다. 헤어진 직후에 나는 베프 한 명이랑 선배 한 명에게 각각 상담을 받고 있었는데 (둘이 연결점 없음), 선배가 멋진 말을 해주셨고, 나는 그걸 캡처해서 베프한테 나랑 친한 선배가 해준 말씀인데 좋은 말인 듯하면서 보냈는데, 베프가 어 저분 내 독서토론 회장님 이름이랑 똑같다라고 했다. 알고 보니 둘이 같은 독서토론모임에 속해있었다. 둘은 태어난 곳도 다르고 속한 커뮤니티도 완전 다른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나 싶어 신기했고, 나도 나오라고 하길래 그 모임에 들어갔다. 첫 모임 전날에 전여자 친구랑 눈물의 두 시간 통화를 했었었는데, 12시간도 안돼서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사회구조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이질적이었다. 근데 이런 이질적인 활동하나하나가 모여서 전여자 친구가 없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줬던 것 같다. 이 모임은 신기하게 매주 새로운 재밌는 사람들이 나왔고 좀 가다 말라했는데 재밌는 사람들이 (그것도 다양한 유형으로) 많아서 현재까지 나가고 있는 내가 좋아하는 활동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