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연애의 끝[3]

한요한- 가습기

by 까마귀 소년

헤어지고 얼마 안 되었을 때는, 헤어진 직후의 시기를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너무 고통스러웠어서, 다친 지 얼마 안 된 상처를 쳐다본다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려웠다. 이제 헤어진 지 6개월을 넘어가니 한번 용기를 내서 그날들을 회고해 보려고 한다. 여담이지만 전여친이랑은 행정적인 일로 몇 달에 한 번씩 연락하는데, 어제 연락을 했었다. 근데 진짜 딱 행정적인 연락만 하고 끝나고 나서 별 생각이 안 드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제 진짜 괜찮아진 건가? 싶긴 했다.

헤어지고 나서 얼마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나는 당시 너무 힘들었어서 직장 보스한테 말하고 본가 (경기도)에 나서 2달 동안 자택근무하기로 했었다. 아래는 헤어진 직후 일화들의 나열이다.


1. 제습기

제습기- 전여친 자취방에 습기가 많았다. 그래서 제습기 좋은 거 하나 사서 자주 틀어놨는데, 2~3일이면 제습기 물통이 가득 찼었다. 이걸 누가 비우느냐에 대해서 매번 서로 장난스럽게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내가 주로 비웠고 또 비우고 나면 내가 장난으로 많이 생색내고 그랬다, ”물통 비웠으니 오늘 밥이랑 청소는 유가 하슈“,라고 하면 “그 정도 가치의일은 아니유”, “노노노 이게 얼마나 무거운데!” 뭐 대충 이런 식이였던 것 같다.

그러다 이제 헤어지고 나니 전여친이 직접 비워야 했고, 비울 때마다 내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당근에 팔아야 하나 고민했다고 한다. 이 일화를 들은 친한 형이 아니 둘이 대체 왜 헤어진 거야?라는 코멘트를 줬었던 기억이 ㅎㅎ.

2. 통화

헤어진 직후 세 번 정도 길게 통화를 했었다. 글을 쓰려고 그때 무슨 이야기했는지 떠올려 보려 하는데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 1~2시간씩 밀도 있게 통화했던 것 같은데.

첫 번째 통화는 헤어진 다음 주에 했었다. 전여친이랑 전여친 친구들이랑 다 같이 일본 여행을 계획했었는데, 헤어져 버려서 나는 빼고 가게 된 상황이었다. 전여친은 여러 가지 상황상 놀러 가도 되는지 혼란스러워했고, 나는 하나하나 문제 될 거 없다고 말해주면서 잘 놀고 오라고 해줬다. 또 비용 관련 문제도 고민 중 하나길래 비용도 좀 보내줬었다.

두 번째 통화는 다다음주였나 그랬다. 내가 먼저 장문의 편지를 보냈고 (이메일로) 그날 새벽쯤에 전여친이 답장을 해줬고, 못 자고 있던 나는 바로 읽고 전화를 걸었다.

내 편지 제목은 시작과 끝이었고, 편지엔 내가 전여친이랑 사귀기 시작했을 때 써준 시랑 글을 첨부했었다. 그리고 본문은 우리 끝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용은 (기록엔 남아있지만 다시 꺼내볼 용기가 없어서 대략적으로 더듬어보면) 전여친이 잘못한 것이 있어서 헤어졌는데, 만약 이에 대해 잘못한걸 지금이라도 바로 잡으면 다 이해해 줄 테니 돌아오라고 했고, 그렇지 못하면 미래에도 다시 안 만나겠다고 했었다.

이에 대한 답장으로 전여친은 자신의 잘못의 근본적이 원인은 내가 많이 구속한 거라고 하였고, 내가 이점을 미래에 고친다 하더라도 (실제로 연애 후반기엔 많이 고쳤었다) 이미 늦어버린 관계 같다고 했다.

편지를 후루룩 읽고 바로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

“… 혹시 편지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할거 있어?“
나: “ 아니 전부 다 이해돼서 더 할 말은 없어, 마지막 통화니깐 그동안 서로 없이 보낸 일상 이야기나 하다 끊자”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는 커플이었고 그래서 무슨 말하는지 정확히 전달이 되었고 추가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 없이 보낸 2주가량에서 있었던 일들 (서로서로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쌓아두었던 이야기들)만 2시간가량 이야기하고 끝냈던 것 같다.

마지막 3번째 통화는 헤어진 지 조금 지나서였다. 전여친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서 상담하는 전화였고, 나는 또 열심히 상담해 주고 끝냈다.


돌이켜보면, 나와 전여친의 관계에서 내가 잘했던 것 중 하나가 전여친이 힘들 때마다 적합한 위로를 잘해줬었던 것 같다. 본인은 뼛속까지 T 라 이해가 되지 않으면 공감을 잘 못하고 이에 대해 질문하는 편에 속해서 일반적으로는 위로를 잘하지 못하나, 전여친이랑은 성향이 거의 비슷하고 또 내가 연상이라 내가 겪어본 비슷한 일 기반으로 과거의 내가 들었었으면 하는 말들을 해줬는데 그게 위로가 잘되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재회 유튜브 같은 것들 보면, 상실감을 강하게 느껴야, 나의 장점들을 더 이상 못 누리는구나, 재회가 된다던데 난 글렀구나 생각했던 기억도 있다. 언제든 연락하면 따뜻하게 받아주니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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